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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자의 비유2(빌립보서 3:12-16, 디메데후서 4:-7-8)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
두 본문과 함께 히브리서 12:1에 기록된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는 말씀을 보면서 앞장에 이어 경기자의 다음 모습을 보려고 합니다.
빌립보서 3장에 기록된 본문에 의하면 역시 목표가 뚜렷해야 하고 자기가 바라는 바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말하는 목적은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는 말씀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운동 선수가 경기장에 나섰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위하여 경기를 하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즉, 내가 돈을 위해서 하느냐? 명예를 위해서 하느냐? 아니면 단순히 내 인생의 보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냐는 등등 어쨌든 그 목적이 분명해야 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모든 필요한 것들을 바로 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남녀를 구별하고 싶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만은 수학 선생님들의 말에 의하면,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에 비해 수학 성적이 못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본래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수학에 대한 목적의식이 남학생과는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보다 우수하게 잘하는 여학생들이 얼마든지 있고, 머리로는 여학생의 수학적 머리가 더 발달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학생들이 수학을 대하면서 생각하기를 내가 결혼한 다음 함수를 알아서 무엇하고 미적분을 알아서 무엇하냐며 이미 거기에서부터 목적의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굳이 이것을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공부를 해야할 만한 가치나 의미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단 말입니다. 그러자니 수학 시간만 되면 머리가 아프고 졸려서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학을 해야하는 목적의식이 분명하다면 수학을 잘하게 됩니다. 무슨 일이나 목적이 없고는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 참으로 훌륭한 분들이 있어서 자랑을 하고자 합니다.
그 자랑이란 60이 넘어서 자동차 운전을 배운 일로서 배우는 목적이 무엇이냐하면 교회에 나오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그 목적이 고상하고 아름답기에 그 나이에 운전을 배우고도 훌륭하게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만약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아니었다면 60이 넘은 나이에 과연 무서워서 운전을 배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장로님은 89세에도 운전을 하도 다니면서 이곳 저곳에서 봉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번은 그러다가 교통 순경한테 걸렸는데 순경이 면허증을 보니 우리는 일천 구백에서 시작되는데 이 분은 일천 팔백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운전기사가 자그마치 1세기 전 사람인 것입니다. 이에 순경이 자꾸 쳐다보더니 "할아버지 그만 하시지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예끼 이 사람"하고 다시 운전을 했다는 것인데, 여러분 아무나 이렇게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문제는 분명한 목적의식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은 안 해도 되는 것인데 하거나 또는 이것을 꼭 해야 되나하고 생각한다면 이미 그것은 못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경기장에 나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밝혀주신 그 목적이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부름의 상'이 목적인 것입니다. 이는 매우 높은 차원의 고상한 목적입니다.
목적은 절대로 저질적인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위에서 부르신 상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찾아 쫓아가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종말론적인 것이며, 저 높은 곳에서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향해 쫓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골로새서 3:1 말씀을 보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목적을 높은데 두고 경기에 임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말씀은 자기가 지금 어디까지 왔던지 간에 현재로서는 자만하지도 말고, 절망도 하지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만은 절대 금물입니다. 마라톤 경기를 하는 사람이 한 절반쯤 뛰어놓고는 이만하면 되었다거나 이제 우승은 내 것이라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는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자세요 생각입니다. 언제이든 골인 지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자신을 과신하거나 교만한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보면 요즈음 사람들은 농사일을 놓고도 모심기가 끝나고 조금 있으면 그냥 풍년이다 하고 떠들어대는데, 그러다가 태풍이 한번 쓸고 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 때문에 농부들은 감히 그런 말을 쉽게 하지 않습니다. 대신 "먹어야 먹는듯 하다"고 말합니다. 풍년이 되고 안 되고는 창고에 거두어들이기까지는 말할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두렵고 벌을 받을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별 생각도 없는 사람들이 모만 심어 놓고는 풍년이다 금년 수확은 얼마다 하고 미리 계산을 다하고 앉았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해인가는 아직 거두어들이기도 전에 금년은 풍년이다. 얼마가 남는다.
무얼할까? 그러면 술 해 먹자라고 해서 막걸리 먹기 운동을 벌였는데 문제는 그 뒤에 계산을 해 보니 쌀이 모자라서 몰래 수입을 해와야 했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와 같이 어리석은 일들이 있는냐 할 때 그것은 도중 평가를 가지고 자만해 하기 때문입니다. 선수는 마지막에 골인하는 순간까지는 절대로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며, 또한 놓아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부르셔서 "내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하고, 요단강을 건너 주님 앞에서는 순간까지는 절대로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잘 믿는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신앙 생활을 잘하고있다는 생각 따위는 꿈에서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교만할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절망을 해서도 안됩니다.
절망이나 교만은 모두 불 신앙의 소치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은 보장된 승리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에 보면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잡힌바 된 그것"이란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기 때문에 도저히 구원받을 수가 없었음에도 주님께서 자신을 강제로 체포하심으로 포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포로로 해서 예수를 믿게 했고 하나님의 종을 만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신을 두고 생각할 때 여기에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경륜이 있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에 대한 구원은 틀림없이 보장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문제는 내가 하나님 앞에 가서 얼마나 칭찬을 듣고 상을 받느냐하는 문제만 있을 뿐 구원받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미 잡힌바 된 것을 잡으러 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 이상이나 취미, 경험, 가능성에 맞추어 목표를 세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잡은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제시해 주신 목표! 그리스도께서 나로 하여금 하라고 하시는 명령! 그것이 목표란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목표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 목표가내 이상, 취미, 내 능력에 따른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강제고 붙들어서 나로 나되게 하신 그것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 목표는 내 뜻이나 소질에 의해서 세워진 목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자기가 세운 본래의 목표, 즉 짐작컨대 철학자 필론(Philon)과도 같이 유대 종교와 헬라 철학에 모두 능통하여 종교가이면서도 철학자인 명망 있는 인물이 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만은 그러한 자신의 목표는 다 지워버리고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세워주신 그 목표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목표는 거듭 강조하고 있지만 내가 세운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쫓아가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 원어로는 '디오코' 라고 하는데 이것은 보통으로 말하는 정도의 달려간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새번역 성경에서 "온 몸을 앞으로 기울여"라고 한 것처럼 전심 전력을 다해서 달려가는 것을 말하고있습니다. 저는 달리는 선수들이 경기를 할 때이면 특별히 얼굴을 보게 되는데, 가만히 보면 웃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대신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 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야말로 발악을 하듯이, 그리고 젖 먹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힘을 다 쏟으며 마구 뛰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자세와 상태로 달려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쫓아 가노라는 말입니다. 달리는 선수는 내일 걱정, 모레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시간에 있는 힘을 다할 뿐입니다.
제가 언젠가 한번 마라톤 선수와 이야기를 하는 중에 손기정 선수 이후마라톤 성적이 매우 부진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그 원인에 대해서 우리는 김치를 먹기 때문인가? 고기를 못 먹어서인가? 일본 사람들은 곧잘 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는가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돈이 없어서 그렇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못 먹어서 배가 고파서라는 말이냐고 하였더니 그것이 아니라 훌륭한 코치를 데려다가 훈련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제가 있다가 "마라톤이라는 것은 힘이 있으면 냅다 뛰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하고 미련한 소리를 한 마디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그런 것이 아닙니다."하고서는 마라톤이야말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운동이라며 여러 가지 설명을 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물론 몇 시간 수면을 취하고 무슨 음식을 먹으며, 훈련은 어떻게 하고 하는 것도 다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힘의 안배라고 합니다. 두 시간 남짓 뛰는 동안 자신이 가진 힘을 무리함도 없고, 남는 것도 없이 백퍼센트 활용을 하는 안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힘의 안배를 잘못하여 전반에다 쏟아 버리고 남은 절반을 헐떡거리며 힘을 쓰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뛴 것도 소용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며, 반면에 골인을 한 다음에도 힘이 남아서 뛰어다닐 정도라면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힘의 안배를 잘한 경우란 처음부터 끈까지 자기가 가진 힘을 적절히 안배하여 골인을 하는 지점에서는 마지막 전부를 쏟음으로 골인한 다음에는 쓰러져서 못 일어나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옳은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힘이 남았다면 진작 힘을 써서 좀더 좋은 기록을 낼 것이지 왜 힘을 남겼느냐는 말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우리의 신앙 생활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내게 있는 힘, 새벽부터 저녁까지 다 쏟아 버렸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기도를 할 때 오늘도 내게 주신 이 하루의 시간 전부를 깨끗하게 바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고는 합니다. 하루 중 어디에서고 구멍이 나서는 안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가끔 제가 농담 삼아 "이제는 내가 한 시간동안 쉴 권리가 있다."라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쉴 권리를 찾아가면서 쉬십시오. 가만히 보면 하루 쉬고 하루 놀고, 그리고는 안식일 지키고 하는데 이는 쉴 권리가 없는 사람들이 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때 꽉 차게 다 써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여백을 두어 봤자 별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젊은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을 가슴아파 하면서 정말 좋은 나이에 좋은 기억력에 힘있는데 까지 다 쏟아서 공부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정말공부를 많이 하는 학생들을 보았습니다. 밤 1시전에는 절대로 자는 법이 없는 미국 학생들인데 시험 때가 되건 논문을 쓸 때이면 1주일이고 열흘씩 잠 한 잠을 자지 않고 공부만 합니다. 정말 어떻게 그런지 알 수가 없는 정도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죽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주말에는 또 쉬지도 않고 차를 몰고 애인과 함께 즐기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왜 잠을 자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잠을 자는 것은 죽는 것이라며, 그것은 사는 시간에서 빼야 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잠이란 몽롱하게 지내면서 꿈이나 꾸고 있는 것이고 보면, 그 시간은 죽는 시간에 넣어야지 사는 시간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주어진 시간은 짧은 것인데 꽉 차게 살아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마치 마라톤 선수가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듯이 우리의 신앙 생활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2:1 말씀에 보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운동선수는 거추장스러운 모든 장애물을 다 제거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부끄러운 것도 생각할 것 없이 가장 가벼운 차림으로 뛰어야 합니다. 만약 옛날 우리 어른들처럼 갓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채로 자전거를 탄다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란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 생활도 거추장스러운 것이 많으면 그만큼 지장이 많습니다. 오늘 삼일 저녁 예배에도 나와야 되는 줄 알면서도 집을 지키느라고 못나온 사람이 많은 것은 다 그런 이유에서인 것입니다. 며칠가지지도 못할 것들을 가지고 저것을 누가 가지고 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으로 늘 산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운동선수는 되도록 몸을 가볍게 하여 뛰고 달리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운동선수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만 보며 뛰는 것입니다. 잠시라도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되며 뒤엣 것을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오직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며 뛰어야 합니다.
해설자들의 말과 같이 관중을 의식해서도 안되고 이중에 있을 나의 적,나의 친지를 생각해서도 안될 것이란 말입니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깨끗하게 앞에 있는 푯대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 생활이 왜 이렇게 갈지자걸음을 걸으면서 맥이 빠져 있는가 하는 것은 앞의 것을 향하여 집중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뒤에 있는 것, 즉 과거의 허물과 죄, 수치스러웠던 것들을 모두 잊어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난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려고 다메석으로 갔던 일, 아덴에서 실수하여 교회를 세우지 못한 일, 고린도 교회를 비롯하여 전도하면서 실수한 크고 작은 일 등, 이런 저런 것들을 다 생각하면 부끄럽고 점점 나약해지는 자기를 믿을 수가 없게 되어 전도를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뒤에 있는 것은 깨끗하게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오늘 이후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일을 이제 와서 되씹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오늘과 내일이지 결코 과거가 아닙니다. 이는 다른 사람에 관한 생각을 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고 그를 위한 경주자가 됨으로 이 경기에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디모데후서 4장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보면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이는 골인 장소의 직전에 있음을 말합니다. 이제 한발자국만 들여놓으면 그대로 요단강을 건너갈 시점에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남은 것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 시간에는 벌어 놓은 많은 돈도, 널리 알려진 명예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문제는 오직 하나 믿음을 지켰느냐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신학 대학을 다닐 때의 일인데, 하루는 '길'이라는 연극이 매우 뜻깊은 연극이라는 말을 듣고는 지나는 길에 들어가서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만 하더라도 요즈음 하는 말로 세련되지를 못해서 표를 반 찢어서 준 것을 잊어버린 채 아무 데나 앉아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조금 있다가 다른 사람이 들어 와서는 일어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기 가좀 있으면 또 일어나라고 또 일어나라고 하는 것인데, 아무튼 이리 저리 쫓겨다녀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형편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거기에 사람이 어떻고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표를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가 문제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이 바로 믿음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손해를 보고 약해지는 것이라면 다 주어버리고 끊어 버리십시오, 믿음에 손해 되는 이야기라면 듣지도 말고, 나 또한 믿음에 손해보는 말은 하지도 말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직 믿음만 강하고 고귀하게 간직했다가 요단강을 건너갈 때에 이 믿음의 카드를 내어놓을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이 면류관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를 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을 하더라며 그간에 자기들이 행한 놀라운 일들을 자랑스럽게 보고들을 하자, 예수님께서 조용히 하시는 말씀이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하늘 나라에 기록된 것! 이것이 우리의 최종 목표요, 최종 영광이며, 최종 보상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켜서 생명의 면류관을 다 함께 받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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