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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마음(빌2장 5절~11절)

by 【고동엽】 202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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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마음(빌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앞 장에 이어서 본문에는 하나되는 원리의 가장 근본 되는 것이 나와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서로간에 양보만 하면 하나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양보한다고 하나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으로 하나되는 것도 아니고 네 마음으로 하나되는 것도 아닙니다.

요즈음에는 통일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서로 한발씩 양보하면 된다, 중간 지점에서 만나면 된다 하고 주장들을 하지만 그래가지고는 될 일이 아닙니다. 통일의 길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중심으로 할 때에라야 하나가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저 사람도 그리스도의 마음이 될 때에라야 비로소 하나가 됩니다. 만일 그 밖의 길을 통하여 하나가 되었다면 그 하나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얼마 못 가서 깨어지고 맙니다. 두 사람이 사랑하고 마음을 합치면 하나될 것 같으나 그렇지도 않습니다. 또한 악한 일을 위해서 마음을 합쳤다면 그 역시 오래가지 못합니다. 반드시 분열되고 맙니다. 진리를 중심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만 하나될 수 있습니다. 그저 두 마음만 모으면 된다, 서로 양보하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부부 사이라면 남편이 그리스도의마음으로 돌아가 그 중심으로 살고, 또 아내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서로 그리스도 중심이 될 때에 그 마음으로 하나된다는 것을 명심해야하겠습니다. 그 밖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됨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친히 말씀해 주신 진리입니다.

그 다음은 물질의 문제가 아닌 마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됨은 돈을 합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요 한집에 산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흔히 말하듯이 구조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체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이것이 다 쓸데없는 공론입니다. 마음이 하나되지 않은 상태로는 20, 30년을 함께 살고도 "저 웬수!"입니다.

그래서 동숙인(同宿人)은 있어도 가정은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한집에 살뿐이지 어떻게 그런 상태를 하나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나될 때에 거기에 진정한 연합이 있고 통일이 있고 화평히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성경의 진리입니다.

사도 파울은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라(5)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파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개하는 가운데 소위 말하는 '기독론'을 전개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12제자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께로서 직접 교훈을 듣고 배운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핍박했던 사람으로, 중간에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해하는 그리스도는 자기 체험적인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자기가 받은 계시를 중심으로 하여 예수님을 설명하는 복음의 설명 방법, 곧 그의 독특한 신학 방법론을 이끌어냈던 것입니다.

이 방법은 율법적이요 구약적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통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의 예수님을 만난 바 없는 그로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나 요한처럼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렇게는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디서 전해 들었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꼭 한번 인용합니다.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20:35)" 이것이 사도 바울이 유일하게 인용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가끔 목사 고시에 출제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 말씀을 그가 베드로나 야고보에게서 전해들은 말씀일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의 기독론이 몇 군데에 나와 있습니다. 빌립보서 2, 골로새서 2, 고린도전서 15장이 그의 기독론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다'하고 요약하여 복음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2장에 나타난 바울의 기독론은 매우 소중합니다.

복음서들의 기독론을 살펴봅시다. 마태복음은 동방박사의 경배를 인용하여 예수님을 왕이시라고 설명합니다. 누가복음은 엘리사벳, 마리아, 천사, 목자, 시므온을 등장시켜 예수님이 처녀의 몸을 빌려서 오셨다는 동정녀 탄생을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에도 유명한 기독론이 있지 않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이것이 요한복음에 나타나 있는 기독론의 골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기독론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습니까? 그의 기독론은"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로고스' "말씀이 육신이 되어 (1:14)"와 같은 말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다,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자기를 비워 사람이 되셨고, 종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신데 자신을 비워서 낮추어서 임마누엘이 되셨고, 육신을 입어 사람이 되셨다는 것 이것이 바울의 기독론이며, 여기에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땅에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을 신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역사 안에 오셨다, 우리 인간과 대화적 관계를 이루셨다, 혹은 요즘 많은 학자들이 말하듯이 인간의 문화의 옷을 입고 오셨다고 하는데, 설명 방법이 다를 뿐 실은 모두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이것과 관련된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인도에 간 선교사가 힌두교 승려를 전도하기 위해 가깝게 지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는데 선교사가 실수로 개미굴을 밟았습니다. 이것을 본 힌두교 승려는 매우 놀란 얼굴로 압사(壓死)당한 개미들을 염려하면서 선교사를 힐책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살생을 범했으니 어찌하겠소?" 선교사는 어떻게 해야 개미한테 사과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승려는"당신이 죽어서 개미가 되어 개미한테 직접 사과하시오." 했습니다. 그들은 윤회설(輪廻說)을 믿으므로 사람이 개미가 되고, 개미가 소가 되고, 소가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선교사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고 기독교를 자세히 설명했다고 합니다. 개미와 이야기하려면 인간이 개미가 되어야 하듯, 사람과 이야기하고 그를 구원하려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사람이 되었다, 종의 형체를 가졌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사람의 형체를 입지 않고는 절대로 사람과 만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옷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강의할 때, 하늘나라에 가서 예수님을 만날 때의 예수님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 학생들과 함께 상상을 해봅니다. 틀림없이 그림에서 본대로 장발족 히피일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알아보게 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장발로 나타나야 할 것이 아닌가, 하면서 한바탕 웃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시든 우리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만나실 때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오실 테니까요. 이것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6-7절 말씀에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라고 합니다. '비어' 비웠다는 말이 기독론에서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이 말 하나를 가지고 몇 시간씩 강의도하고 논쟁도 합니다. 2천 년 동안 끊임없이 논란되어 온 구절입니다. 이말 하나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해석도 해보고, 나름대로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 비웠다는 말은 영어로는 empty, 한문으로는입니다. 비운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근본은 하나님이신데 그 형체를 벗으셨다는 뜻입니다. 본래의 형체를 벗고 그 높으신 분이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입니까? 우리와 만나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제 어렸을 적에 다미안 신부의 전기를 읽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문둥병자들과 함께 살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가 문둥병자들이 사는 몰로카이 섬을 지나다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그들을 전도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많은 구호물자를 가지고 섬을 방문하여 여러 해 동안 전도했으나 그들이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사치로 돕는 것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것을 도덕적 향락주의라고 합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며 즐기는 것 말입니다. 그들이 끝까지 마음 문을 열지 않자 다미안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에게 문둥병을주십시오." -- 결국 그는 문둥병에 걸리고 맙니다. 그리고 다시 문둥병자들을 찾아가니 그제야 마음문을 열어 주더랍니다. 멀쩡한 사람이 문둥병자의 마음을 열기 위하여 똑같은 환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전에도 환자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도 있고 치료를 해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은 돕는 사람 자신도 문둥병환자가 되고야 저들의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보좌에 팔짱을 끼고 앉아 사람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분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중요한 과정을 거치셔야 했는데, 보좌를 떠나서 본체를 버리시는 일이었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가장 가난하고 천한 사람으로 나타나셔야 했습니다.

그런 후에라야 사람들이 마음문을 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웠다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말을 너무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다 보면 진리를 거슬리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한 쪽을 얻기 위해서 다른 한쪽을 버리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본체를 버리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있으면서도 없는 자처럼, 알면서도 모르는 자처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힘이 있으면서도 무능한 것처럼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다 말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다고 다 하는 것입니까? 보고 싶다고 다 볼 수 있습니까? 우리는 힘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내 마음대로 쓸 수 없습니다. 요즘회사마다 문제도 많고 데모도 많습니다만 저는 늘 사업가들에게 권합니다. 사업을 계속하고 싶거든 사는 집부터 줄이라고 말입니다. 미국, 일본이 다 거친 과정인데 우리만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사장님들이 큰집에 살면서는 절대로 그 회사를 운영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원들에게 나누어줘 봐야 겨우 몇 푼씩밖에 돌아가지 않을 테니 나 혼자 대표로 써야겠다 하는 생각은 통하지 않습니다. 내 돈 내가 쓰는데 누가 뭐라 하느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그 돈이 다 내가 땀흘려 벌어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있으면서 없는 척'이 아니라 아예 없어져버릴 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얼마전 노사분규로 대우 기업이 시끄러울 때 대우에서 처음 나온 소형 승용차를 회장이 타고 왔더니 노동자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더랍니다. 우리가 이처럼 가진 것을 다 나타내며 쓸 수는 없습니다. 힘이 있어도 무능해져야 하고, 또한그 무능함이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왜 돌로 떡을 만들어 잡수시지 않았습니까? 왜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않으셨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멋지게 뛰어내리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할 수 없고 무능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비운다는 뜻이요. 여기서 비우는 것은 스스로 비우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불교에서 출가(出家)한다는 것은 인생무상이기에 다 내어버리고 입산수도(入山修道)하는 것인데 이것은 무상하기에 버리고, 버리기 위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얻기 위해서 버립니다. 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내가 버리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기독교와 불교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 잃어버립니다. 이것이 주는 자의 복입니다. 일부러 텅 비우고, 비울 뿐만 아니라 자원하여 종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사람이신 예수님께서는 배고플 때도 있었고, 외로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능하게 십자가의 아픔을 당하며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사람이 되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도 합니다. "능력 있는 분이 십자가를 진 것은 쇼가 아닌가?" 심지어 아프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이 문제를 깊이 다룹니다. 1928절 이하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 하신 것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피가 빠져나가니까 아프고 목이 마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 얼마나 생생한 표현입니까? 이처럼 예수님의 사람되심은 무슨 연극이 아니요 엄연히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이었으니까 공부하지 않고도 신의 지시를 받아 모든 것을 다 알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지혜와 몸이 '자라갔다'고 말씀합니다(2:52). 예수님도 배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몸이 자라듯 지혜도 자라나야 했습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말씀 다음으로 더욱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말씀(8)입니다. 여기에서 복종이라는 말이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복종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순종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요, 복종은 납독이 가지 않지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굴종(屈從)은 억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종은 겟세마네의 기도가 잘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놓고 이것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뜻입니다. 사람이 된 예수님께 십자가는 분명히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우리의 복종과 순종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모임에서 보면 여기 갑시다 저기 갑시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합시다 하고 의견을 내다가도 돈을 냅시다 하면 피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도 사람의 한계입니다. 사람이 가장 복종하기 어려운 것은 명예입니다. 물질은 희생해도 명예를 희생하라 하면 못합니다. 또 교회나 어떤 단체에서 회장을 해 본 사람은 그 후에 평회원으로 있으려 하지 않고 꼭 고문이 되려고 합니다. 이것은 아직도 민주화가 되지 않은 까닭입니다. 대통령에서 물러나면 시민이 되어야지 왜 고문이 되려고 합니까? 남의 나라 이야기라서 안됐습니다만 미국에서는 전날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그 다음날은 신문을 사기 위해 줄 서 있는 모습이 신문에 납니다. 이야말로 멋진 민주주의의 모습이 아닙니까? 죽기까지 복종했다는 한계를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합니다. 돈은 내놓아도 명예를 내놓으라 하면 여기에 다 걸려 버립니다. 게다가 목숨까지 내어놓으라면 누가 내어놓겠습니까? 복종하고 당장 보상받을 생각부터 하는데 죽은 다음에 무슨 보상이 있을 것입니까? 그러므로 사람의 복종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시간과 정성을 내야지요, 마음을 바쳐야지요, 돈도 내야지요……그런데 예수님은 목숨까지 내어놓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내 뜻은 따로 있으나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신다니까 죽기까지 복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따라가지 않으면 충성이 아닙니다. 천자문에 충성진명(忠誠盡命)이라고 했습니다. 충성은 목숨을 다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바쳤는데 남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내 의견이 따로 있으나 그래도 주님이 원하신다면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내 의견을 말해 볼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나가게 해달라고 한 번은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이 아니다' 하실 때에는 그 뜻에 죽기까지 복종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는 곳에 어찌 하나됨의 역사가 없겠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십자가에 복종해서 죽었는데 이것으로 끝나 버렸습니까? 그 다음이 기독론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본문 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은 하나님이 시키신 것입니다. 내가 할 일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는 조금 지고, 희생은 조금 하고 덕만 보겠다고 합니다. 바치는 것 없이 상만 받겠다고 하고, 또 바친다 하더라도 미리 복을 주겠다는 보증서나 약속어음을 받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복종이요, 순종이요, 충성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십자가에 죽는 일입니다. 그것까지만 우리가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일로 수고한 후에 칭찬을 받을 수도 있으나 칭찬 받기 위해 수고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묵묵히 합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높여 주실 때까지는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지 맙시다. 변명도 말고 하나님이 하시는 칭찬 말고는 들을 생각도 말아야 합니다. 죽기까지 충성하고 내일을 기다립시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고 축복의 역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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