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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과 허실(마가복음 14장 26절~31절)

by 【고동엽】 2024.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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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과 허실(마가복음 142631)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속는다는 일입니다. 이것은 불신에서 오는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거나 믿지 않았다면 별 문제가 아닙니다만, 하늘처럼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나, 적어도 이 일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이 아픔을 다른 말로 표현하던 속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는 속으면서도 아픔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더 큰 비극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믿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을 믿었는데 결국은 속은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현대 지성인의 결정적인 죄악과 자기 소멸의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 스스로에게 속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내가 믿을만한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하고 또 경험하고서도 아직도 믿고 있기에 또 속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언젠가는 속았다는 아픔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속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돈에 속고 친구에게 속으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속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자신에게 속는 일입니다. 무엇인가 아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인가 좀 가진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결산해 보니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전혀 아무 것도 없는 자기 존재를 발견할 때 얼마나 실망하고 괴로워집니까? 여러분, 불신 세대를 원망하고 비판하게 됩니까? 사실 심각한 것은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혹시나 나 아닌 다른 사람들만 믿을 수 없다고 원망하지는 않았습니까? 정말 믿지 못할 것은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음을 알면서 왜 다른 사람에게 믿을 만한 존재가 되어 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까? 물론 우리 모두가 문제입니다만 그보다도 가장 심각한 것은 자기 자신이란 말입니다. 내 마음도 내 뜻대로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 뜻대로 하겠다니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내 자신이 불신의 가장 큰 원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열두 제자 중 명실공히 수제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은 본래 시몬인데, 주님께서 베드로라는 소중한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굉장한 이름입니다. 그리고 천국 열쇠를 주겠다는 주님의 허락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조그마한 시험 앞에서 그는 형편없이 무너졌습니다. 반석은 고사하고 조약돌 만한 믿음도 없는 사람처럼 못나게 굴었습니다. 본문에서 그는 크게 장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14:31). 또한 그는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될 때에도 칼을 휘두르는 만용을 부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뜰에서 예수님이 재판받으실 때에는 한모퉁이에서 벌벌 떨며 작은 계집종에게 주의 제자임을 강하게 부인할 뿐 아니라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는 비겁한 사람임을 드러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예언대로 닭이 울자,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몹시 괴로워합니다.

, 베드로가 괴로워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세상을 탓할 것입니까, 아니면 로마 병정이나 그 계집종이 무서웠다는 것입니까? 베드로의 괴로움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속았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이렇게 비참하고 한심스러운 인간인 줄은 진작 몰랐습니다. 스스로에게 속았다는 아픔을 진하게 전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생명까지 걸었는데 왜 부인하게 되었습니까?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그에게 어떤 여건이나 환경이 문제될 리 없습니다. 생명을 내건 이 마당에 무슨 다른 이야기가 필요합니까? 그러나, 정말 형편없게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는 말과 생각뿐인 베드로의 맹세에 문제가 있습니다. 본래 큰소리하는 사람이 시원치 않습니다. 결심이란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결심 자체를 자랑했습니다.

또한 이 결심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다는 자세가 아니라 "죽을지언정"하며 크게 떠벌렸습니다. 이 큰소리가 바로 문제였던 것입니다.

어느 농부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한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는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나는 주님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다 바친다. 주를 위해서는 어떤 충성도 다할 것이다"하고 장담을 했습니다. 이 때 친구는 물었습니다.

"그럼, 자네에게 말 스무 필이 있다면 두 필은 하나님께 바치겠는가?" "아무렴. 십일조를 못 바치겠는가? 말 스무 필이 있다면 당연히 두 필은 바쳐야지. 그런데, 나는 말이 없다네."

"그럼, 소 열 마리가 있다면 한 마리는 바치겠는가?" "아니, 십일조를 안 바칠 수 있겠는가? 열 마리 모두라도 바치지. 그러나 나에게는 소가 한 마리도 없잖은가."

"그럼, 돼지 열 마리가 있다면 한 마리는 바치겠는가?" 이 때 그 농부는 버럭 역정을 내며 "내가 돼지 열 마리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하고 나오더라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재 없는 것을 앞으로 가지게 되면 바치겠다는 사람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돼지 한 마리는 바치지 못한데서야 말이 됩니까? 그러나 이런 모순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내가 누구만큼만 부자라면 나도 바치겠다고 장담하는 사람은 하나도 바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아무개 같은 입장이라면 충성을 다하겠다는 장담도 헛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부터 하는 충성과 맹세는 믿을 것이 못 됩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도 "죽을지언정"이라고 목숨까지 건 엄청난 맹세를 합니다만 결국은 말과 생각뿐이었고 실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음이 금방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베드로의 이 결심이 왜 무너졌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그의 무지(無知)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0:20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비장한 각오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이 길에 제자인 야곱과 요한이 따르면서 그들의 어머니를 통해서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부탁을 드리게 됩니다. 이 때 예수님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시겠느냐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고, 야곱과 요한은 그 의미를 몰랐지만 "마시겠습니다"하고 쉽게 대답했습니다. 질문의 뜻은 모르면서 쉽게 말하는 그들을 주님은 책망하지 않으시고 친절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그들이 모르고 대답했지만 결국은 열두 제자 중 야곱이 제일 먼저 목베임을 당하는 순교 자리에 섰습니다. 그의 말대로 제일 먼저 주님의 잔을 마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늘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야 내 제자가 된다"고 강조하셨지만 제자들은 이 십자가를 추상적으로만 이해했습니다.

"목숨을 버려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들을 상징적으로, 관념적으로만 생각해서 정신적 차원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정말 그것이 실제적인 십자가로, 역사적인 사건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추상적이거나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임을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것을 모르고 지금 "죽을지언정"하며 장담을 했습니다. '죽을지언정'이란, 감정이 그렇다거나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진짜 죽음입니다. 주님의 말씀 중,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비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썩어서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생전에 어떤 큰 소원을 이루리라고는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위하여 죽었을 때, 그 뒤에 열매가 맺힐 것을 문자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간단하게 몇푼어치도 안 되는 희생을 하고서는 열매가 없다고 야단입니다. 무엇을 기대하는 것입니까? 아직도 내 목숨이 살아 있으면서 말입니다. 썩어 없어져야 열매맺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7에 보면 베드로가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간곡하게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는 주님의 말씀 속에, 아직도 베드로 네가 진리를 추상적으로 알고 있으나 후에는 알고 따르리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듯합니다.

둘째, 자기 의지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베드로 자신보다도 베드로를 더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예수님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구체적으로 알려 주십니다. 이 정도가 되면 베드로는 주님께 매달리며 "주여, 어찌하면 좋겠습니까?"하고 사정을 하는 편이 훨씬 좋겠는데, 주님의 말씀을 단번에 부정하면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하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대답 속에는 주님은 자기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의지가 얼마나 강하며 용기 있는 사람인가를 한번 보여 주겠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자기를 믿는 자기 우상화에 빠졌습니다. 자기 의지만을 믿는 죄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약함을 알면서도 시인하지 않고, 할 수 있다라는 자기 의지를 믿으려고 한 베드로입니다.

셋째, 베드로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했습니다. 본문에서 "다 나를 버린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대해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라고 자기를 특별시 내지 별개시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는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발상입니다. 다른 사람의 의지는 과소평가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과대평가 했습니다. 남보다 특별히 잘났다고 말하는 사람은 대개 못난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나만은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사실은 베드로 혼자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강하다고 뽐내더니, 가장 비참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다 넘어지면 나도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도 안 넘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지요.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다 함께 찬송부를 때에는 같이 불러야 합니다. 유별나게 혼자서 부르지 않거나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를 별개시하거나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문제 있는 사람입니다. 민주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수 중의 나 하나이니 유별나게 자기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별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넷째, 결단은 쉬우나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결심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천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아테네의 어느 국경일에 연극이 있었습니다. 많은 지성인들이 모여서 관람을 하려는데 한 노인이 들어섰습니다. 그는 교만한 헬라 사람들이 자리를 양보해 줄 것인가 하고 기다려 보았더니 서로 양보하기를 미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스파르타 사람 한 분이 벌떡 일어나면서 자리를 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노인은 "헬라 사람들은 선한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지식은 많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타 사람들은 선한 일을 실천할 능력이 많습니다"하고 말했다 합니다. 아는 것만 가지고 됩니까? 실천이 뒤따라야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이 됩니다. 어느 청교도 교인이 아주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그에게 와서 지혜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한 젊은이가 그에게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큰 부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는 자기의 세 가지 신조를 젊은이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첫째는 술마시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만 믿고 만사에 의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자신의 생활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당신이 말한 그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내용입니다. 누가 그런 것을 모릅니까?"하고 뭐 좀 특별난 대답이 없느냐는 식으로 되물었습니다. 그 때에 부자는 정중하게 "다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것이지요"하고 말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알고 있을 뿐이지 실천하지를 않습니다. 지성인의 약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알고 있기는 많이 알고 있어 말하라면 선생이요 가르치라면 교수입니다. 그런데 실천에 가서는 제로입니다. 조그마한 것 하나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니 아는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 교회는 비교적 새벽 기도에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만 이것 하나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해 들락날락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짧은 세상에서 이 기도 시간 하나 실천할 수 없습니까? 한두 번 실천하기란 쉽습니다만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랑도 약속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고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고 더 겸손한 마음으로 실천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큰소리로 장담하고 자랑하고 과시할 것은 없습니다. 결심했습니까? 이 결심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 없는 결심은 무산으로 끝나고 맙니다. 장담을 했는데 기도가 뒤따르지 않으면 그 장담 역시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실망할 수밖에 없는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믿음 없는 용기는 거짓입니다. 세상을 원망하거나 다른 사람의 불신을 탓하지 맙시다.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 믿을 존재가 아님을 깨닫고 완전히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리하여 겸손하고 믿고 순종하고 열심히 기도해서 시험을 이기며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질 때, 주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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