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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일한다(요 5:10~18)

by 【고동엽】 2023.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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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일한다(5:1018)

 

최선을 다해 선한 일을 했을지라도 여기에는 또 하나의 악이 함께 하고 있음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좋은 목적으로 일을 했어도 마지막에 가서 반드시 좋은 결과만 나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설사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좋은 일을 했다면, 일한 그것으로 만족해야지 모든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기를 기대한다면 실망하고 말 것입니다. 때로는 칭찬은 고사하고 아주 왜곡해서 오히려 비난하는 말로 들려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비난듣지 않는 선행은 없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들을 수 있는 선행은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야 선한 일을 한 후에도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 비난하고자 하는 사람의 입을 막을 길은 없습니다. 좋은 일은 좋은 대로, 충고는 충고대로 받아들이지를 못하므로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사람에게는 어떤 선한 일도 비방의 이유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선한 일을 한다고 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지혜도 부족하고 재주도 없으며 마음 자체도 깨끗하지 못하므로 끝까지 선하기는 어려우며 선한 결과는 더더욱 바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의로우시고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의 일에도 비난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앞에서 우리는 38년 동안 앓아온 환자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도와 줄 가족 한 사람도 없이 홀로 남은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그의 소원을 물으셨고 온전한 사람으로 걷게 하셨습니다. 사실 이 환자는 난치병으로서 구제불능자였습니다. 이런 환자를 고치셔서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굉장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 오직 영광과 찬송을 드리며 감사와 감격이 있을 뿐 그 외 다른 말이 있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런데도 비난은 있었습니다. 요즘은 기도로 병을 고쳤다고 헌금을 강요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어떤 대가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건에는 찬양과 기쁨과 감사만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좋지 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비난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환자에게 오직 한 마디로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고 그는 긴 세월 동안 누워 있던 침상을 들고 걸어간 통쾌한 사실뿐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서 우리 민족에게 위대한 메시야를 보내 주셨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만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날이 안식일이라 환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간 사실이 안식을 범한 죄로 지목이 됩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고 비난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입니다. 매일 환자로 누워 있는 사람이 오늘이 안식일이구나 하고 날짜의 흐름이나 절기에 대한 관심이 없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단지 더우면 여름이 왔고 추우면 겨울이 왔나 보다 하는 감각 외에는 더 생각할 것이 없는 환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안식일이니 병이 나아도 내일 일어나라든지 하는 요구는 상당한 무리입니다.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리라"(5:10). 당시의 전통적인 종교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용납치 않았습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안식일에 대하여 그 날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이러 이러하다는 세부 조항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면 됩니다. 문제는 사람마다 거룩의 기준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믿음의 선배들은 대단히 지혜롭게 주일을 지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드시 주일이라 해서 이것은 해도 되고 저것은 하면 안 된다고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능하면 토요일 날 모든 것을 준비하고 정리해서 아주 기본적인 일 외에는 삼가는 자세로 주일을 지켜 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안식일에 대한 것을 규례화해서 구체적으로 39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 된다고 하는 법칙을 만들었습니다. 예레미야 17:19 이하에 보면 안식일에 대한 여러 가지 조항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1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아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함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그들은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그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청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아무 일이든지 아니하면 다윗의 위에 앉은 왕들과 방백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17:21-25) 안식일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내용입니다. "짐을 지고 들어오지도 말며 짐을 내지도 말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켜서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느냐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켰느냐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 사상이 안식일이었으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도 주일날 교회나오지 않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런 형식적인 행사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하는 ''이라고 하는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 문제화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처음에는 등에 지는 것이 짐이었다가 점점 손가방도 짐이고 심지어는 지팡이까지도 짐으로 시비가 되었으며, 마지막에는 바늘 하나라도 옷에 꽂혀 있으면 짐으로 안식일을 범했다고 시비가 붙는 것입니다. 옛날 기록에 보면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의족입니다. 의족이 과연 짐이 되느냐 하는 시비입니다. 이것은 분명 나무로 만든 것으로써 몸은 아니나 다리 대신이므로 몸의 일부분이기도 하므로 의족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 시비가 붙고 토론이 길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결론도 없습니다. 이 정도로 안식일에 대한 규례가 까다로웠습니다. 그래서, 옷을 입었으면 벗지 말고 벗었으면 입지 말고, 심지에 불을 켰으면 끄지 말라는 등 점점 구체화되어 갔습니다. 목적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데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덧붙이다 보니 마지막에는 몇 그램까지 짐이고 몇 미터까지만 걸어야 한다는 기준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제든지 계율이란 인간적으로 기울어지고 인본주의화되어, 마침내는 사람을 얽어매고 내용은 없어지며 형식만 남는 결과에 빠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형식주의, 외식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가령, 교회에 나오는 것도,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믿는 사람이다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교회에 오는 사람도 있고 심하면 빚 받으러 나오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 모두를 교회에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는 중심에 있는 것으로 갔느냐 가지 않았느냐, 먹었느냐 먹지 않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환자가 시비의 대상이 된 것은,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건강해져서 침상을 들고 다녔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환자로서 짐을 들고 다녔다면 문제시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정말 복잡하고 어려운 계율이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중요한 핵심은 그의 병이 나았다는 사실입니다.

너무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로써 비록 안식일이라고 해도 좀 봐 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니 38년 동안 줄곧 누워 있다가 이제 일어나서 자기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은 은혜로 볼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시비를 걸기에 앞서 그의 감격을 돌아보고 은혜와 기쁨과 감사로 계율을 초월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때때로 은혜는 계율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바로, 진정 사랑하는 사람의 실수는 실수로 보이지 않고 인간적인 매력으로까지 보이지 않습니까? ,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주고 허다한 죄를 가리웁니다. 오늘 유대인들에게도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만 있었다면 그의 감격,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었고 안식일이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법이란 신학적 차원에서 보면, 법 자체가 있고 법에 대한 해석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다. 이 말의 원뜻은 "죽이지 말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Thou shall not kill"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이지 말라고 하지 않고 사람 인()자를 넣어 살인하지 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죽이지 말라는 법을 두고도 우리는 소나 돼지 등 동물들을 잡아먹고 있으며, 살인하지 말라 하면서 전쟁시에는 서로 상대방을 죽이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인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법이든지 해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했으면 살인의 뜻은 무엇이며, 간음하지 말라 했으면 간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마땅한 해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법보다 해석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다음, 법을 해석한 조례에 정당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것은 틀림없지만 목적이 선했다면 다소 참작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알고 지은 죄인가, 모르고 지은 죄인가에 따라 다르며 어린아이가 행한 것과 어른이 행한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똑바른 정신으로 행한 것과 몽롱한 상태에서 행한 것이 다릅니다. 같은 결과를 놓고도 불가피하게 행한 것과 고의적으로 행한 것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당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안식일에 나귀가 함정에 빠졌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단 빠져있는 상태를 감정해서 하루 정도 무사히 넘길 수 있다면 그대로 두고, 만일 죽겠다는 판정이 되면 건졌습니다. 그러므로, 나귀를 건졌는데 그 놈이 싱싱하게 살아서 도망가면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되고, 다 죽어 가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정말 까다롭고 복잡한 계율이었습니다. 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방법에 부족함이 있다 할지라도 인도적으로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형식에만 의존해서 갔느냐 왔느냐, 보았느냐 먹었느냐에 치중하지 말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석하자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안식일날 병을 고쳤음에 대해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5:16-17) 예수님은 그들의 비난에 대해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비약적인 대답을 하십니다. 유대인들이 이 말을 이해할 리가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보아도 분명히 엿새 동안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레 되는 날은 쉬셨습니다. 그러나, 창조는 어떤 의미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쉬는 부분이 있으면 쉬지 않는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지구가 돌아가는 것은 쉬지 않고 있으며 햇빛이 비치는 것이나 산소의 공급도 쉬지 않고 있습니다. 안식일이라 해서 이 모든 것이 쉰다면 생물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쉰다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쉬셨다는 의미는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즉 완성하시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쉼이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결코 정지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는 정지가 없습니다. 오히려 구원의 역사가 더 강하게 더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안식일날 교회에 나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 긍휼의 역사에는 정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음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구원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 아버지께서 보호하신다는 뜻으로 세상적으로 시들어진 심령을 안식일로 인해서 영적으로 힘을 얻는 소생을 말합니다. 쉼이란 사람에 따라 쉬는 방법이 다양하지만 쉼의 목적은 소생하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육체적인 노동자는 편히 앉아 쉬는, 즉 일을 정지하는 것이 쉼이지만, 정신노동을 하거나 하루종일 앉아서 일하는 사람은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적당하게 걷는 것이 쉼입니다. 그래야만 다음 일을 위해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세상에서 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친척과 불우한 이웃들을 찾음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며, 나아가서는 영혼을 소생케 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안식일을 지킨다는 말은 행동의 제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힘을 얻는 회복을 말하며, 이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높은 차원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 옳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옳고 정당하면 여유가 있지만 자기 이론이 부족하고 정당하지 못해 그 저의가 노출되면 괜히 분해하고 목소리를 높이게 됩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복잡하게 안식일의 규례를 만들고 인위적으로 해석한 것이 노출되자 예수님께 화를 내며 몹시 못마땅해하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 자신들도 안식일의 의미가 타락되어 감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안식일의 주인은 인자다" 하시며 그들의 핵을 찌르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안식일의 복잡한 조항들은 실제적으로 전문가가 아니면 모를 정도로 만들어 놓고 자기들만 잘 지켰다고 교만해 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그들의 분을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 속에는 너희들이 지키는 안식일은 위선적이요 형식적이지만 내가 지킨 안식일은 참 안식일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보면 안식일에 아무도 돌보지 않는 불쌍한 사람을 예수님은 찾아가셔서 돌아보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정말 안식일답게 지키신 예수님께 그들이 시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유대인들에게 가장 충격을 준 내용은 본문의 마지막 절인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리라"(5:18 하반절)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옳은 말씀입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본래는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레되는 날 쉬셨으니 그런고로 너희들도 지켜라, 즉 아버지가 쉬셨으니 너희도 쉬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해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듣는 자의 마음이 이미 비뚤어져 있으니 만사가 다 비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로서 동등해서 동등하다는 데 시비가 붙을 이유가 없습니다. 동등하게 여겼다고 해서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결국은 예수를 죽이려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한 이유는 안식일을 범한 것과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한 사실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는 사실 그대로이며 진실이었지만, 거짓되고 위선적인 자들에게는 꺼리는 내용이었고 심판적인 의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언제나 진리는 거짓을 심판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은 본문 14절에 예수님께서 환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5:14)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통과 질병을 모두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요한복음 9장에서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에게는 너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환자는 분명히 죄를 지은 이유가 있었기에 예수께서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더 심한 것이 걸리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즉 계속해서 은혜에 살라는 부탁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은혜와 율법 사이의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의 법, 은혜의 법이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해서 자유롭게 승리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법이 형식적인 법을 이기고, 내용의 법이 외형의 법을 이기고, 은혜의 법이 위선적인 법을 초월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법이 인간의 계율을 초월하여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서 법을 지키는 은혜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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