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말을 듣고 싶다 2013년 3월 3일 청파교회 2부 본문: 마가복음서 7:24~30 1. 빛나는 말에 대한 그리움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서 ‘아, 저것은 저 사람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참된 말이구나!’ 하고 느껴지는 순간이 (최근에) 있으셨는지요? 그 사람의 진심이 어린 말, 그 사람의 존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진실한 말을 들을 때, 듣는 우리의 내면에도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다. 살면서 우리는 꽤나 많은 말을 듣고 삽니다만 그 말들이 그저 건조한 말말이거나 거짓말이거나 거친 말일 때가 있습니다. 언뜻 듣기에는 세련되고 아름다운 말이지만 나에게는 전혀 와 닿지 않는 무의미한 말로 그칠 때도 있습니다. 그런 ‘빈 말’ 말고, 정말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진심으로 ‘꽉 찬 말’, 그래서 듣는 나의 마음을 환히 밝혀주는 말! 저는 이런 말을 그리워합니다. 빈 말에 뒤덮여 살고는 있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이런 말을 들어야 살아 있는 맛을 느낄 것 같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말에 집착할까?’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답을 찾았습니다. ‘나는 성서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온 세상의 창조에 관한 아름다운 노래, 창세기의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십니다. 찬송가 20장 3절 “온 천지 창조하시던 그 말씀 힘 있어, 영원히 변치 않는 줄 나 믿사옵니다.” 천지를 만드신,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만드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에는 하나님의 존재, 그분의 진심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서의 첫 머리에서 우리는 이런 선포를 듣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고, 우리를 살리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 말씀은 ‘빈 말’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으로 ‘꽉 찬 말’이기 때문입니다. 또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성서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이란, 그 하나님의 진심이 담긴 말을 듣고 그 말씀의 메아리로 살아가는 삶이다.’ 그분의 진실하신 말을 듣고 나도 진실한 말이 되어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내 생명의 가장 진실한 의미를 담은 나의 말로 누군가의 삶에 빛을 비추고, 내 생애 마지막에는 주님을 향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한 마디 말이 되어 영원하신 말씀의 품에 안기고 싶은 꿈! 이것은 비단 저 하나만의 꿈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2. 아니, 예수님이 어떻게 그런 말을? 그런데 이렇게 말을 중요시하고, 진실한 말을 나름 그리워하는 사람이기에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 말은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7c) (헐~)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가 아는 “사랑의 예수님”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자식이 귀신에 들려 가슴 아파하는 그 엄마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간절히 부탁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매몰차고 매정한 말을 날리시는 걸까? 우리가 익히 아는 예수님이라면 그 여자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시고 함께 그 여자의 집으로 가주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마가복음 5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와 부탁하셨을 때는 큰 무리를 버려두고 그 야이로의 집으로 함께 가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외국인이라서, 게다가 여자라서 차별하시는 걸까요? 심지어 “개들”이라는 표현까지 쓰셨습니다. 물론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라고 부르는 걸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그런 표현을 쓰시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지요. 그리스어 원문인 “퀴나이온”은 개를 뜻하는 말 “퀴온”의 축소형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말이 가지고 있는 경멸의 의미는 약화되지 않습니다. 이 난감한 구절을, 어떤 목사님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 떠보려고, 그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려고 일부러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변호하려는 충정은 이해가 됩니다만, 저는 이런 설명을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얼굴이 화끈 닳아 오릅니다. 과연 내가 믿는 예수님이 선한 일을 베풀기 전에 먼저 수혜자의 믿음 상태를 시험해 보시는 그런 분인가, 하고 말입니다. 어쨌든 저는 이런 저런 물음을 안고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러면 먼저 예수님이 보입니다. 두로의 어떤 집에 계시면서 아무도 그걸 모르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 다음에는 한 여인이 보입니다. 그 여인의 문제는 자기 딸이 귀신에 들려있다는 것이었습니다. 3. 나의 딸, 나의 아들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 주소서 26절을 보면 그 여인은 자기 딸에게서 “귀신”(다이모니온)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25절에서 마가는 그 “귀신”을 “더러운 영”(프뉴마 아카타르톤)이라고 딱 꼬집어 말합니다. 흔히 ‘귀신’하면 무속이나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객관적인 실체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귀신이 있고, 그 귀신이 그 딸에게 들어가 있는 상태, 이른바 “빙의”(憑依) 상태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마가가 말하고 있는 귀신, 더 정확히 말해 “더러운 영”이란, 우리 인간을 사로잡아서 참된 생명력을 빼앗아 버리는 내적인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놀랍게도 오늘의 본문 바로 앞부분에, 마가복음 전체가 “더러운 영”이라고 부르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가 쭉 나열돼 있습니다.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 (막 7:21b~23)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자기의 성적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여기고, 그런 욕망 충족의 최고 수단은 역시 돈이라고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마가복음의 의미에서) 그 사람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악한 시선으로 보면서 그를 모독하고, 심지어 그런 사람들이 없어져야 행복한 세상이 될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역시 (마가복음의 의미에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겁니다. 나를 둘러싼 생태계야 어찌 됐건 더 많이 소비하고 내버리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교만과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한다면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겁니다. 물론 마가복음의 의미에서 말입니다.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히는” 영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두로 지역입니다. 찬란한 페니키아문명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던 도시 두로(티레, Tyre)는 경제적으로도 이스라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외적인 풍요로움이 인간의 내면을 얼마나 더럽힐 수 있는지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 여자에 대해서 마가는 이렇게 귀띔해 줍니다.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 페니키아 출생”(26)이다! 그녀는 풍요를 구가하고 있는 그 지방 사람이었습니다. 아쉬울 것 하나 없는 부유하고 똑똑한 이 페니키아 여자의 삶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의 자식이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타락한 성 문화에 속절없이 노출됐습니다. 돈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내면화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상실한 교만하고 폭력적인 문명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바로 제 자식이 말입니다! 부유하고 세련된 페니키아 출신 여자가, 아니 어쩌면 오늘 우리가, 갈릴리 촌구석 출신의 가난한 예수 앞에 엎드렸습니다. 제 딸, 제 아들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 주십시오! 4. 스트레이트 vs. 어퍼컷 그런데 그 갈릴리 촌사람의 입에서 놀라운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야말로 교양도 없고 촌스럽기 짝이 없는 대답입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풍요와 문명을 자랑하는 페니키아 여인과 그 딸은 졸지에 “개” 취급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돌직구’라고나 할까요? [상대방에게 이야기 할 때, 상대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 사람들은 예수님마저도 자기의 구미에 맞게 정형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예수님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나의 생각 · 기대와 일치하는 메시지만 들으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오늘의 본문은 아주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때때로 우리의 상식과 지성과 교양마저도 ‘무식하게’ 깨뜨리며 우리 안에 파고든다는 사실 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척하지만,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이 세상의 풍요로움과 짝한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지금도 인정사정없이 직격탄을 날리실 겁니다. “너희는 내 자녀가 아니라 개다. 나는 개에게는 내 가르침을 주지 않는다!” 참 기기 막힌 말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예수님의 그 잔인한 말에 당차게 응수한 여인의 말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28) 여러분, 예수님과 그 여인 사이의 불꽃 튀는 승부가 느껴지십니까? 제가 존경하는 성서주석가 강일상 목사님은 이 대목을 권투 중계하듯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말은) “마치 스트레이트를 맞은 권투선수가 다음 순간 자세를 낮추어 상대의 턱을 향해 어퍼커트를 날리는 형국이다. 정말 링 밖의 관중인 독자로서는 벌떡 일어나 박수라도 치고 싶을 정도로 멋진 펀치다.”(『마가복음의 기적이야기』, 378) 갈릴리 예수를 향해 페니키아 여인이 온 힘을 다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다른 사본에는 “그렇습니다, 주님! (nai kyrie)” 놀랍게도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을 처음으로 “주님”이라고 부른 사람이 바로 이 여인입니다. 이 여인의 입에서 거침없는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주님, 저 개 맞습니다. 아니, 하나님 앞에서 개보다 못한 삶을 살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 저 불쌍한 아이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살지 않게 해주십시오. 제발, 당신 가르침의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그 부스러기 물고 가서 저 아이를 먹이게 해주십시오. 그래야 제대로 된 삶을 살 게 아닙니까!” 고통 받는 누군가를 향한 사랑으로 한껏 낮아진 존재의 목소리가 쟁쟁합니다. 5. 너의 말을 듣고 싶다 그리고 예수님의 대답이 떨어집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환한 미소가 느껴집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29) 그리스어 원문을 직역하면 “이것 때문에, 즉 그 로고스 때문에, 너는 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멋있지 않습니까? 마가복음 5장에서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신 예수님이 이번에는 “너의 말, 너의 로고스(logos)”가 너의 자식을 구원했다고 선언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끌어안고 자기를 완전히 낮출 수 있는 마음, 그 진심에서 우러나온 한 마디 말, 한 마디의 간구 ― 바로 그 로고스가 더러운 영을 내쫓는 힘이라고 믿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이 여인의 로고스는 예수라는 로고스를 꼭 빼닮았습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 그러나 ‘육신’이 되신 말씀, 이 세상의 온갖 고통과 죄를 당신의 고통으로 끌어안고 가장 낮고 비천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신 그 말씀 말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죽기까지 낮아지신 그 말씀이 우리를 살립니다. 또한 그 말씀을 닮은 작은 메아리가 되어, 우리가 알건 모르건, 우리를 위해 뜨겁게 간구하셨던 우리 어머니의 그 말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못난 자식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하시던 어머니는 바로 우리의 시로 페니키아 여인입니다. 또는 그 어머니의 마음으로 나를 위해 예수님 앞에 엎드린 나의 아버지, 형제, 자매, 친구, 목사님, 배우자의 간절한 로고스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후손들의 미래까지 어둡게 만들 일제 식민지라는 더러운 영을 내쫓아달라고, 목숨 걸고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독립”을 외쳤던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그 로고스 덕분에 우리는 지금 우리말을 쓰며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우리의 자녀와 손주 세대가 살아갈 세상을 ‘더러운 영’이 위협하고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를 그 무엇보다 우선시하게 만드는 영, 타인을 내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영, 경쟁과 소비를 부추기는 더러운 영이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페니키아 여인을 향해 “너의 그 말 때문에, 가라, 네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다!”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십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지만, 저의 귀에는 이런 말이 들립니다. “이제 너의 말, 너의 로고스를 듣고 싶다.” 교우 여러분, 이번 사순절 순례의 여정 속에서 예수님께 여러분의 가장 간절한 말, 여러분의 말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끌어안고 자기를 완전히 낮출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로 예수님과 만나고, ‘더러운 영’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거둠의 기도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슬픔, 우리의 절망, 우리의 고통을 당신의 아픔으로 껴안으시고 고난당하신 하늘의 말씀 앞에서 오늘 우리의 말을 되돌아봅니다. 나의 문제, 나의 이해관계에만 골몰하며 점점 ‘빈 말’이 되어가고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랑하는 이의 고통, 우리 시대 약한 이들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끌어안고 주님께 나아가 단 한 마디 말이라도 뜨겁게 터뜨릴 수 있는 마음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더러운 영이 횡행하는 이 세상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울려내는 말, 작지만 진실한 말의 메아리가 되어 이 세상을 맑게 하는 우리가 되게 인도하옵소서. 생명의 큰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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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3년 03월 03일 12시 04분 53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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