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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오순절 (사도행전 10:44~48)

by 【고동엽】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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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오순절 (사도행전 10:4448)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 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오늘의 본문에는 '이방인의 오순절'이라 일컬어지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오순절 사건이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그리고 승천하신 후에 예루살렘에 모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예루살렘교 회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원래 오순절은 히브리사람들의 한 절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 인에게는 오순절이 아주 독특한 의미를 지닙니다. 오순절 사건 그 때로부터 교회가 실질적 의미에서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의 역사 는 결국 이를 위한 준비의 역사였다고 하겠습니다. 내실적인 역사가 되겠고, 내적인 역사가 되겠고, 양적인 역사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교회론적 의미가 실질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오순절에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절과 오순절의 관계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부활절 없는 오순절은 없습니다. 오순절 없는 부활절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부활절이 없는 오순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신비주의에 속합니다. 그리고 주관적인 것입니다. 오순절이 없는 부활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역사적 사실에 불과합니다. 교회론적 실질적 의미를 거기서 창출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순절과 부활절, 부활절과 오순절은 기독교에 있어서 뗄 수 없는 두 중요한 사건입니다. 두 기둥과도 같이 기독교를 버티는 교리의 뿌리 부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순절 사건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방인을 위해서도 그와 같은 사건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고넬료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이 사건과 예루살렘교회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비교해봅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고 하나는 가이사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 나는 예루살렘 즉 유대나라 수도, 유대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의 중심부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는 가이사랴에서----가이사랴는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어디까지나 로마사람들이 점령하고 있는 이방 땅입니다. 그곳의 로마 사람 네 집입니다. 로마 군인 네 집입니다. 바로 그 집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루어졌고, 하나는 로마군인의 집에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마가의 다락방과 고넬료의 집을 비교해봅니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오순절 사건은 사도행전 21절 이하에 있고, 가이사랴에 있었던 이 사건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사도행전 10장에 나타납니다. 우선 공통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공통점은 '모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에게 일어난, 개인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누구 한 사람이 골방에서 체험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론적 의미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여기서부터 독특한 의미를 가집니다. 여느 종교처럼 혼자 서 산에 올라가 이른바 입산수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동체적 의미가 있고 교회론적 의미가 있습니다. 함께 모이고 함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함께 역사를 체험합니다. 바로 교회론적입니다.

오늘도 가만히 보면 개인적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많습니다. 혼 자 기도하고, 혼자 산에 올라가 계시 받고, 혼자 환상을 보고…… 이런 얘기들을 하고 돌아가는데, 사실 이런 얘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은 백이십 명이 함께 체험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특별할 것 없고 요한이 특별할 것 없습니다. 120명 문도가 함께입니다. 오늘도 보면 고넬료의 가정에 모였던 사람 모두가 함께 체험을 합니다. 고넬료만도 아니고 고넬료의 가족만도 아닙니다. 그 일가친척과 친구들까지 다 모여서 이 놀라운 체험을 함께 합니다. 공동체적입니다. 교회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아무튼 모였다는 것, 예루살렘에서도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고 여기서도 고넬료의 집에 모였습니다. 모인 중에 사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에 모인다는 것, 함께 기도한다는 것,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도하고 함께 음성을 듣고 함께 체험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다같이 베드로의 복음,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설교한 다음에 이루어집니다. 이 또한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증거하고, 그 다음에 베드로를 중심해서, 베드로하고 하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인물, 예수님께서 친히 명령하시고 사명을 주신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16:18, 19)" 하셨던 그 베드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루살렘의 첫 교회도 베드로가 설교하고, 베드로를 중심으로 모인 가운데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으며, 이제 고넬료의 집에서도 베드로를 청하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청했더니 베드로가 와서 설교하고, 그 설교 끝에 성령이 임합니다. 같은 사건입니다.

세 번째,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루어진 사건은 성령이 불과 같은 모양으로 혹은 불과 같은 혀로, 그리고 바람처럼 임합니다. 아주 신비롭게 임합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보니 성령이 위로부터 내려왔다 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44)"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45)"-----역시 인간들의 노력으로나 어 떤 형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임하는 초자연적 사건임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결과로 이루어진 것은 예루살렘에서나 고넬료의 집에서나 똑같은 것이 '방언'입니다. 성령을 받은 다음에 방언을 하더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된 것이나 가이사랴에서 된 것이나 똑같은 의미의 방언이라는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저러한 사건을 놓고 볼 때에 그 주체는 성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고넬료도 다 성령의 역사에, 그 강한 역사에 고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고넬료가 특별한 사람 아니요 베드로도 특별한 사람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 하나님의 크신 선교적 역사에 들리어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나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또 그렇게 모이도록 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이 집에 담대히 들어가서, 규례를 어기고 이방 사람 집에 들어가 유숙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용기를 가지게 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게 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친히 주도하시고 성령이 역사 하셔서 된 일입니다. 베드로의 뜻에서도 아니요 고넬료 의 생각에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전적으로 주도하심으로 이루어진 사건들임을 잊지 말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몇 가지의 중요한 내 용이 있습니다. 먼저는 성령이 거기 모인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로마군인도 있고 그들의 아내들도 있습니다.

그 자녀들도 있습니다. 친척들도 있습니다. 친구들도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집안식구와 친구들 이 다 고넬료와 같이 경건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다같이 도덕적으로 선행을 하고 때마다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고넬료의 청함을 받고 와서 고넬료를 중심으로 모인 그 사람들이 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방에 모인 사람들이 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 이 점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경건에 앞선 사람도 있고 뒤진 사람도 있어요. 도덕적으로 정결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고넬료가 초청했을 때에 마다 않고 이 집에 왔어요.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고 우선 왔어요. 생전 처음 보는 일이지만 아무튼 고넬료가 오라니까 왔습니다. 왔다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나니 모두에게 성령이 내려오신 것입니다. 의미 심장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여기 모여 앉았습니다. 여러 모습의 사람 이 함께요. 도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지식으로나 저마다 달라요.

얼굴이 다른 것만큼 다 다릅니다. 그러나 지금,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할 때에 다같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특별한 의미가 이에 있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풍습이 다릅니다. 그러나 다 함께 성령을 체험합니다. 우선 외모가 다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중심만을 보십니다. 그래 서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나는데,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듣는 사람들에게 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공간과 그 시간에 있다는 것으로가 아니라 있으면서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비유해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옥토와 같은 마음 밭에라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듣고자 하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3)"하는 마음 밭-----'그러니 말씀하십시오'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비록 초라한 사람이지만 베드로라고 하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턱 팔짱을 끼고 앉아서 저 목사가 무슨 말 하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앉아 있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목사님한테 책 한 권사다 드려놓고 속으로 '보셨나?'하고 앉았어요. 나중에 만나보면 자기가 준 책 목사님이 안 보셨더래요. 설교를 아무리 들어봐도 그 책에 나오는 말이 안 나오더래요. 그래 섭섭했다 해요. 저는 "당신, 그것 때문에 시험 들었소"하고 말았던 일도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떤 분은 목사님한테 선물 드린 게 있으면 줄곧 거기에 신경을 써요. 쉽게 얘기해서 넥타이를 선물하고 나서는 늘 그 넥타이 맸나 안 맸나 보자 하고 쳐다봅니다.

정히 고역입니다. 선물한 분이 섭섭해 할까봐 저는 그 넥타이를 한 번은 매고 나가봅니다.

여러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듣자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철학을 듣자는 것도 아닙니다. 강단에 서신 저 목사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 이것은 동시에 믿음입니다. 지금의 이 관계를 하나님과의 관계로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과 나와의 관계를 하나님의 관계로 여기는 것입니다. 성전이라고 하는 이 집을 하나님의 집으로 아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이 시간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시간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지금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으로 보는 것이 달라요. 육신적인 귀와 마음의 귀, 영적 귀가 열려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이런 믿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는 겸손합니다. 그는 단순합니다. 특별히 인간적 욕망에 대한 소원이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돈벌겠다던가 출세하겠다던가 병 고치겠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없어요. 아무런 요청이 없어요. 여기 고넬료네 집에 온 사람들은 지금 베드로에게 별다른 요청이 없어요. 오직 신령한 말씀, 그것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 소원 들어주세요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같은 인간적인 욕망(desire)은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비워 가지고 베드로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이래서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들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전적으로 말씀에 의탁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든지 순종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마음입니다. 이미 그렇게 결심이 돼 있어요. 이런 마음으로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 할 때에(44)"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씀 할 때입니까? 이것은 성경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에서 성경론을 한 10여 년 동안 가르쳐옵니다. 전후 30년 동안 가르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성경론 강의를 하는 가운데서 아주 핵심적인 부분으로 인용하는 말씀의 하나가 이 말씀입니다. "이 말 할 때에" 그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셨다 합니다. 성령이 어떻게 역사 하느냐, 그 점입니다. 성령은 말씀과 함께 동시적으로 역사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성경론에 있어 서 아주 결정적인 부분입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학적으로 정리하면 논리적으로 이렇게도 말합니다. 성령은 창작적인 영이 아니다, 성령은 독창적인 영이 아니다, 성령은 홀로 역사하지 않는다, 성령은 꼭 말씀과 함께 협력적으로 역사 한다-----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한번도 성경을 본 적 없고 설교말씀도 들어 본 일이 없는데 빈손으로 입산수도 하러 산에 올라갔다, 산에 올라가 조용히 명상하고 기도하는 중에 어느 때엔가 하늘로부터 문득 성령을 받았다, 그래서 예수도 알고 성경도 알게 됐다-----이런 얘기를 얻어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산에 올라갈 때에 빈손으로 올라가면 안됩니다. 특별한 일이 있어 산에 올라간다 해도 맨손으로 올라가서 그냥 엎드려 "주여"하면 되리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지를 않습니다. 꼭 성경을 가지고 올라가야 합니다. 저는 산에 가는 사람보고 꼭 부탁을 합니다. 30분 기도하고 30분 성경보고, 1시간 기도하고 1시간 성경보고, 1시간 성경보고 1시간 기도하라고.

알겠어요? 기도하는 것과 성경 보는 것이 제대로 균형을 잡아야 합 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산에 가서 기도하는 분들이 처음에는 성경을 읽는 듯하다가 조금 덜 읽고, 또 조금 덜 읽고 하다가 덮어놓고 말아요. 베개하고 누워버려요. 성경이 베개구실 밖에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직통으로 알아요" 합니다. 직통으로----이게 병입니다. 그 때부터 병드는 것입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가버립니다.

성경은 말씀과 함께 역사 합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신학적 용어를 쓰면 얘기가 잘되거든요) 말할 때에는 객관적 계시, 주관적 계시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객관적 계시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건들은 전부 객관적 계시입니다. 십자가의 사건도 객관적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도 객관적 계시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주관적 계시입니다. 한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받은 계시를 성령이 임해서 주관적으로 수용케 하는 것입니다. 믿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역사입니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성찬식을 할 때에 떡을 놓고 기도합니다. 기도함으로 해서 이 떡이 지금 거룩한 떡으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이제 이것을 받아먹어야 하겠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받아먹을 때에 효력이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서는 안되거든요. 받아먹는 역사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성찬 떡을 놓고 기도하는 역사는 객관적 역사입니다. 약으로 말하면 아무리 좋은 약이 여기에 있다 하더라도 내가 먹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먹어서 소화해야 소용이 있지요. 반대로는 내가 아무리 좋은 약을 먹으려 애를 쓰고 마음이 확 열려 있다 하더라도 약이 있어야 먹는 것이지요. 좋은 약이 있어야 먹습니다.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 계시가 없는 주관 적 계시는 신비주의에 빠져요. 그런가하면 주관적 계시가 없는 객관적 계시는 효력이 없어요. 역사적 사실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인 역사와 주관적인 역사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동시적으로 역사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그 장면이 잘 나타나 있어요.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라고 합니다. 말씀하는 바로 그 시간에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의 사건으로 말한다면 여러분이 어디 가서 골방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바로 성경말씀 듣고 있는 이 시간에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것을 다 체험했을 것입니다. 내가 찬송 부를 때에, 기도할 때에…… 다 중요했지마는 이제 하나님 말씀 듣고 있는 이 시간에 내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이상하게도 이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적중해 들어오면서 마음이 뜨거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영이 치유되고 몸이 치유되고 문제가 해결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생각할 수 없었던 큰 은혜를 생각하게 되고, 그토록 불평불만으로 차 있던 심령이 감사찬송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그토록 나약하던 사람이 새로운 용기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하는 역사, 말씀을 듣는 역사, 말씀을 믿게 하 는 역사, 말씀이 효력을 내게 하는 역사가 다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말씀 없이 말씀 듣는 역사가 이루어지겠습니까? 말씀 듣는 역사가 없다면 그 말씀은 겉돌고 말아요. 들었지만 소용없어요. 그대로 흘려지고, 이해도 느낌도 없이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고 말아요.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앗과 같아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말 할 때에"라고 하는 말씀을 중히 생각하게 됩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바로 십자가 사건을 말씀함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잘살고, 어떻게 복 받고, 세상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떻게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어떻게 부활하셨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세상철학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이는 것은 오직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 성경말씀을 듣기 위함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듣자고 여기 온 것이 아닙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어떤 분은 반대로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어요. 이것 역시 중생하지 못한 탓입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하는 사람인데, ", 우리 목사님은 밤낮 케케묵은 성경이야기만 한다. 좀 어떻게 유식한 얘기 좀 못하나?" 이렇듯 영 삐딱하게 나가는 분도 있습디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람입니다. 성령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딴 이야기는 들리지 않아요. 중요하지 않아요. 오직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 오직 성경의 이야기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곧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 십자가 사 건을 이야기할 때에 바로 여기서 성령이 임합니다. 사도행전 236절로도 봅시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찔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베드로는 구구하게 말씀하지 않았어요. 오직 예수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것을 말씀하고 들을 때에 성령이 임합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이 있어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전도자가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전도를 해야 됩니다. 객관적 계시가 있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전해주는 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전하든지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꼭 들어야 되고요. 로마서 1014절에도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하고 말씀합니다.

저는 기도할 때마다 늘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것이 저 북녘 땅입니다. 북녘 땅에서는 말씀을 들을 수가 없어요. 40년 동안 단 한번도 들을 수가 없었어요. 이 지구상에는 지금 많은 전파가 있어요. 더구나 거기서 여기 남한의 방송이 다 들려요. 멀지도 않으니까 깨끗이 다 들리는데 저들은 라디오가 없어요. 아무도 못 가집니다. 가지게 돼 있지 않아요. 오직 밤마다 조그마한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만 들어요. 내 마음대로 끄지도 못하고 켜지도 못하는 스피커입니다. 그저 나오면 들어야 하고 끄면 자야 됩니다. 그것만 40년을 들어온 것입니다. 신문도 없어요. 신문도 특수층의 것이고, 고급 가구도 몇 사람만이 쓰는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은 엄두도 못 냅니다. 얼마나 딱한 노릇입니까? 요새 같은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하다니…… 들을 수 없으니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전하는 자가 없으니 듣지 못하는 것이지요. 얼마나 답답합니까?

잊지 말 것입니다. 네 전도자를 통해서, 즉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을 고용해서 말씀을 듣게 했다, 동시에 베드로로 하여금 충만한 가운데서 말하게 하고, 듣는 자로 하여금 성령의 감화를 주어서 듣게 했다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방언을 했다고 합니다. 방언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듣는 방언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베드로는 지금 통역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말로 설교하고 있어요.

아람말로 했을 것으로 압니다. 듣는 사람들은 로마사람들입니다. 로마 말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는 지금 히브리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은 로마말로 들어요. 다 알아들어요.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감사합니다, 할렐루야'하는 것을 보니 이것은 또 자기네말로 하거든요. 베드로가 그것을 알아들어요. 방언으로 말하더라 한 것은 이런 현상을 가리킵니다. 복음 전하는 데 소통케 하는 신비로운 역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베드로는 자기 말을 했 습니다. 듣는 사람은 자기나랏말로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감동해서 간증하는 이야기를 베드로는 또 베드로대로 히브리말로 듣는 것입니다. 분명히 로마사람과 히브리사람이 모였는데 언어가 복음 안 에서 거침없이 통하고 말았어요. 바로 이런 순간을 가리켜 "방언을 말하며"하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들려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같이 자기네 말로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외국어를 자기나랏말로 듣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베드로가 말씀하는 것도 선교적 의미의 방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도록 역사 하는 것, 이것이 방언입니다. , 이렇게 해서 고넬료의 집에 '오순절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방인의 오순절입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가 깊이 신학적으로 생각할 것은 은혜의 방편입니다. 은혜의 방편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입니다.

둘은 전도자입니다. 셋은 성례입니다. 성령의 은혜는 반드시 말씀을 고용합니다. 말씀과 함께 역사하고, 전도자와 함께, 전도자를 통해서 역사 합니다. 그리고 성례와 함께 역사 합니다. 성령 받는 것을 보고 성령 받았는데 금할 것이 뭐 있느냐 하고 세례를 베풉니다. 말하자면 총회결의도 없이 세례부터 베푸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47, 48)"-----왜 세례 주었습니까? 성령 받았으면 왜 세례를 주는 것입니까? 세례가 은혜를 확증하는 방편이기에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도 논산훈련소에서 몇 달에 한 번씩 2천 명, 3천 명씩 세례를 줍니다. 훈련받으러 온 사람에게 전도한 나머지 세례 받을 사람들을 일시에 마당에 모아놓고 세례를 줍니다. 저도 몇 번 가보았습니다 마는 세례 줄 때에 보면 많은 목사님들이 동원되어서 베풉니다. 그렇게 한꺼번에 세례를 주는데, 어떤 때에 보면 '저렇게 주어가지고 되겠나, 저 가운데는 잘 믿는 사람도 있고 못 믿는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싶어요. 제가 10년째 금요일 아침마다 퇴역장성들 모이는 모임에 나가서 성경을 가르치는데, 그분들은 모두가 대위, 소령, 대령, 장성들인데 나이 많아 예편된 분들입니다. 가끔 저에게 이렇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어요. "목사님, 군인들 세례 많이 주세요. 저도 그렇게 합동으로 세례 받을 때에 받았거든요. 그 때에 아주 좋은 사단장님이 오셨는데 예수 잘 믿는 분이예요. 그분이 예수 믿는 게 좋다고 해서 교회 나갔고 세례 받는 게 좋다고 해서 받았지요. 부대원들 모아놓고 세례는 받아 좋은 거라더라, 받아라 이놈들아, 하고 소리쳐서 조금 공부시킨 다음에 다 받도록 했지요"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부터는 여기 가나 저기 가나 신상카드를 쓰려고 보면 거기 으레 있는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아주 수월히 쓰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세례 받았거든요. 마침내는 어디 가나 기독교인으로 몰아붙이더랍니다. 아직은 기독교가 무엇인지 확실히도 모르는 채인데 세례를 받아놓고 보니 별수 없이 교회에 잘 나가게 되고 기독교를 더 알게 되고, 드디어 장로까지 되더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마치 결혼식과 사랑의 관계와도 같다 싶어요. 사실 결혼식 안하고 사랑을 하는 것은 헛것입니다. 가끔 보면 아기를 낳고 나서 결혼식 하는 것을 보아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기가 셋이라도 결혼식은 정식으로 올려야 됩니다. 공적으로 만인 앞에서 '이 사람은 내 아냅니다' '내 남편입니다'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공인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깊은 의미, 실천적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중요한 표적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발표합니다. '사랑합니다' 고백하고, 이제 이 사람이 제 아냅니다, 내 남편입니다, 공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람 앞에서 아노라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아노라 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너희가 나를 모른다 하면, 마음속으로만 믿고 겉으로는 아니라고 한다면, 나도 너희 하나님 앞에서 아니라고 하리라-----순교자가 누구입니까? 순교자는 공적으로 신앙을 시인하는 사람입니다. '마 음으로 믿지 뭐'하면 순교 안 합니다. 속으로만 믿는다면 순교자가 어디 있겠어요? 순교자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믿는 사람이오, 죽을 때까지 믿는 사람이오-----바로 세례 받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 때문에 순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확증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디 가나 죽을 때까지 세례 받은 사람입니다. 결국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은 다 하나가 됩니다. 이방사람도 세례 받으면 한가지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유대사람도 세례 받으면 한가지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저나 여러분이나 세례 받은 것은 똑같습니다. 남자 여자가 따로 있지 않아요.

이번에도 부활절 때에 세례 베풀면서 보니 아버지, 어머니, 아 들, 딸이 다 와서 나란히 앉아 세례 받는데 저도 아주 좋더라구요. 자매가 같이 하기도 하고, 형제가 같이하기도 하는데,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 다음에 모두가 한 형제자매가 되고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상이 무너집니다. 베이컨의 지적대로 종족의 우상이 무너집니다. 세례 받음과 함께 네 민족 내 민족 할 것이 없어졌어요. 세례 받은 사람은 다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또한 동굴의 문화 우상이 무너집니다. 관습의 동굴, 지식의 동굴, 저 잘났다고 하는 생각 같은 것이 없어집니다. 또한 시장의 우상이 무너집니다. 경제성이 높다 낮다, 부자다 가난하다 하는 사람 없어요. 세례 받았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극장의 우상이 무너집니다. 향락도 없습니다. 이제는 다 예수의 십자가 앞에 죽었습니다. 똑같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이 같은 우상들이 다 무너지고 새로운 교회의 일원이 되는 공동체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와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교회론과 성령론을 하나로 설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보세요.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성령과 교회를 하나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오순절 (사도행전 10:4448)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 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오늘의 본문에는 '이방인의 오순절'이라 일컬어지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오순절 사건이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그리고 승천하신 후에 예루살렘에 모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예루살렘교 회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원래 오순절은 히브리사람들의 한 절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 인에게는 오순절이 아주 독특한 의미를 지닙니다. 오순절 사건 그 때로부터 교회가 실질적 의미에서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의 역사 는 결국 이를 위한 준비의 역사였다고 하겠습니다. 내실적인 역사가 되겠고, 내적인 역사가 되겠고, 양적인 역사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교회론적 의미가 실질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오순절에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절과 오순절의 관계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부활절 없는 오순절은 없습니다. 오순절 없는 부활절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부활절이 없는 오순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신비주의에 속합니다. 그리고 주관적인 것입니다. 오순절이 없는 부활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역사적 사실에 불과합니다. 교회론적 실질적 의미를 거기서 창출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순절과 부활절, 부활절과 오순절은 기독교에 있어서 뗄 수 없는 두 중요한 사건입니다. 두 기둥과도 같이 기독교를 버티는 교리의 뿌리 부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순절 사건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방인을 위해서도 그와 같은 사건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고넬료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이 사건과 예루살렘교회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비교해봅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고 하나는 가이사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 나는 예루살렘 즉 유대나라 수도, 유대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의 중심부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는 가이사랴에서----가이사랴는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어디까지나 로마사람들이 점령하고 있는 이방 땅입니다. 그곳의 로마 사람 네 집입니다. 로마 군인 네 집입니다. 바로 그 집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루어졌고, 하나는 로마군인의 집에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마가의 다락방과 고넬료의 집을 비교해봅니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오순절 사건은 사도행전 21절 이하에 있고, 가이사랴에 있었던 이 사건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사도행전 10장에 나타납니다. 우선 공통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공통점은 '모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에게 일어난, 개인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누구 한 사람이 골방에서 체험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론적 의미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여기서부터 독특한 의미를 가집니다. 여느 종교처럼 혼자 서 산에 올라가 이른바 입산수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동체적 의미가 있고 교회론적 의미가 있습니다. 함께 모이고 함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함께 역사를 체험합니다. 바로 교회론적입니다.

오늘도 가만히 보면 개인적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많습니다. 혼 자 기도하고, 혼자 산에 올라가 계시 받고, 혼자 환상을 보고…… 이런 얘기들을 하고 돌아가는데, 사실 이런 얘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은 백이십 명이 함께 체험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특별할 것 없고 요한이 특별할 것 없습니다. 120명 문도가 함께입니다. 오늘도 보면 고넬료의 가정에 모였던 사람 모두가 함께 체험을 합니다. 고넬료만도 아니고 고넬료의 가족만도 아닙니다. 그 일가친척과 친구들까지 다 모여서 이 놀라운 체험을 함께 합니다. 공동체적입니다. 교회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아무튼 모였다는 것, 예루살렘에서도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고 여기서도 고넬료의 집에 모였습니다. 모인 중에 사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에 모인다는 것, 함께 기도한다는 것,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도하고 함께 음성을 듣고 함께 체험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다같이 베드로의 복음,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설교한 다음에 이루어집니다. 이 또한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증거하고, 그 다음에 베드로를 중심해서, 베드로하고 하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인물, 예수님께서 친히 명령하시고 사명을 주신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16:18, 19)" 하셨던 그 베드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루살렘의 첫 교회도 베드로가 설교하고, 베드로를 중심으로 모인 가운데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으며, 이제 고넬료의 집에서도 베드로를 청하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청했더니 베드로가 와서 설교하고, 그 설교 끝에 성령이 임합니다. 같은 사건입니다.

세 번째,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루어진 사건은 성령이 불과 같은 모양으로 혹은 불과 같은 혀로, 그리고 바람처럼 임합니다. 아주 신비롭게 임합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보니 성령이 위로부터 내려왔다 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44)"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45)"-----역시 인간들의 노력으로나 어 떤 형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임하는 초자연적 사건임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결과로 이루어진 것은 예루살렘에서나 고넬료의 집에서나 똑같은 것이 '방언'입니다. 성령을 받은 다음에 방언을 하더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된 것이나 가이사랴에서 된 것이나 똑같은 의미의 방언이라는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저러한 사건을 놓고 볼 때에 그 주체는 성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고넬료도 다 성령의 역사에, 그 강한 역사에 고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고넬료가 특별한 사람 아니요 베드로도 특별한 사람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 하나님의 크신 선교적 역사에 들리어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나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또 그렇게 모이도록 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이 집에 담대히 들어가서, 규례를 어기고 이방 사람 집에 들어가 유숙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용기를 가지게 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게 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친히 주도하시고 성령이 역사 하셔서 된 일입니다. 베드로의 뜻에서도 아니요 고넬료 의 생각에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전적으로 주도하심으로 이루어진 사건들임을 잊지 말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몇 가지의 중요한 내 용이 있습니다. 먼저는 성령이 거기 모인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로마군인도 있고 그들의 아내들도 있습니다.

그 자녀들도 있습니다. 친척들도 있습니다. 친구들도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집안식구와 친구들 이 다 고넬료와 같이 경건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다같이 도덕적으로 선행을 하고 때마다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고넬료의 청함을 받고 와서 고넬료를 중심으로 모인 그 사람들이 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방에 모인 사람들이 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 이 점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경건에 앞선 사람도 있고 뒤진 사람도 있어요. 도덕적으로 정결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고넬료가 초청했을 때에 마다 않고 이 집에 왔어요.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고 우선 왔어요. 생전 처음 보는 일이지만 아무튼 고넬료가 오라니까 왔습니다. 왔다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나니 모두에게 성령이 내려오신 것입니다. 의미 심장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여기 모여 앉았습니다. 여러 모습의 사람 이 함께요. 도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지식으로나 저마다 달라요.

얼굴이 다른 것만큼 다 다릅니다. 그러나 지금,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할 때에 다같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특별한 의미가 이에 있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풍습이 다릅니다. 그러나 다 함께 성령을 체험합니다. 우선 외모가 다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중심만을 보십니다. 그래 서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나는데,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듣는 사람들에게 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공간과 그 시간에 있다는 것으로가 아니라 있으면서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비유해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옥토와 같은 마음 밭에라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듣고자 하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3)"하는 마음 밭-----'그러니 말씀하십시오'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비록 초라한 사람이지만 베드로라고 하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턱 팔짱을 끼고 앉아서 저 목사가 무슨 말 하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앉아 있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목사님한테 책 한 권사다 드려놓고 속으로 '보셨나?'하고 앉았어요. 나중에 만나보면 자기가 준 책 목사님이 안 보셨더래요. 설교를 아무리 들어봐도 그 책에 나오는 말이 안 나오더래요. 그래 섭섭했다 해요. 저는 "당신, 그것 때문에 시험 들었소"하고 말았던 일도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떤 분은 목사님한테 선물 드린 게 있으면 줄곧 거기에 신경을 써요. 쉽게 얘기해서 넥타이를 선물하고 나서는 늘 그 넥타이 맸나 안 맸나 보자 하고 쳐다봅니다.

정히 고역입니다. 선물한 분이 섭섭해 할까봐 저는 그 넥타이를 한 번은 매고 나가봅니다.

여러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듣자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철학을 듣자는 것도 아닙니다. 강단에 서신 저 목사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 이것은 동시에 믿음입니다. 지금의 이 관계를 하나님과의 관계로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과 나와의 관계를 하나님의 관계로 여기는 것입니다. 성전이라고 하는 이 집을 하나님의 집으로 아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이 시간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시간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지금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으로 보는 것이 달라요. 육신적인 귀와 마음의 귀, 영적 귀가 열려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이런 믿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는 겸손합니다. 그는 단순합니다. 특별히 인간적 욕망에 대한 소원이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돈벌겠다던가 출세하겠다던가 병 고치겠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없어요. 아무런 요청이 없어요. 여기 고넬료네 집에 온 사람들은 지금 베드로에게 별다른 요청이 없어요. 오직 신령한 말씀, 그것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 소원 들어주세요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같은 인간적인 욕망(desire)은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비워 가지고 베드로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이래서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들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전적으로 말씀에 의탁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든지 순종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마음입니다. 이미 그렇게 결심이 돼 있어요. 이런 마음으로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 할 때에(44)"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씀 할 때입니까? 이것은 성경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에서 성경론을 한 10여 년 동안 가르쳐옵니다. 전후 30년 동안 가르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성경론 강의를 하는 가운데서 아주 핵심적인 부분으로 인용하는 말씀의 하나가 이 말씀입니다. "이 말 할 때에" 그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셨다 합니다. 성령이 어떻게 역사 하느냐, 그 점입니다. 성령은 말씀과 함께 동시적으로 역사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성경론에 있어 서 아주 결정적인 부분입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학적으로 정리하면 논리적으로 이렇게도 말합니다. 성령은 창작적인 영이 아니다, 성령은 독창적인 영이 아니다, 성령은 홀로 역사하지 않는다, 성령은 꼭 말씀과 함께 협력적으로 역사 한다-----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한번도 성경을 본 적 없고 설교말씀도 들어 본 일이 없는데 빈손으로 입산수도 하러 산에 올라갔다, 산에 올라가 조용히 명상하고 기도하는 중에 어느 때엔가 하늘로부터 문득 성령을 받았다, 그래서 예수도 알고 성경도 알게 됐다-----이런 얘기를 얻어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산에 올라갈 때에 빈손으로 올라가면 안됩니다. 특별한 일이 있어 산에 올라간다 해도 맨손으로 올라가서 그냥 엎드려 "주여"하면 되리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지를 않습니다. 꼭 성경을 가지고 올라가야 합니다. 저는 산에 가는 사람보고 꼭 부탁을 합니다. 30분 기도하고 30분 성경보고, 1시간 기도하고 1시간 성경보고, 1시간 성경보고 1시간 기도하라고.

알겠어요? 기도하는 것과 성경 보는 것이 제대로 균형을 잡아야 합 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산에 가서 기도하는 분들이 처음에는 성경을 읽는 듯하다가 조금 덜 읽고, 또 조금 덜 읽고 하다가 덮어놓고 말아요. 베개하고 누워버려요. 성경이 베개구실 밖에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직통으로 알아요" 합니다. 직통으로----이게 병입니다. 그 때부터 병드는 것입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가버립니다.

성경은 말씀과 함께 역사 합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신학적 용어를 쓰면 얘기가 잘되거든요) 말할 때에는 객관적 계시, 주관적 계시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객관적 계시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건들은 전부 객관적 계시입니다. 십자가의 사건도 객관적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도 객관적 계시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주관적 계시입니다. 한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받은 계시를 성령이 임해서 주관적으로 수용케 하는 것입니다. 믿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역사입니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성찬식을 할 때에 떡을 놓고 기도합니다. 기도함으로 해서 이 떡이 지금 거룩한 떡으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이제 이것을 받아먹어야 하겠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받아먹을 때에 효력이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서는 안되거든요. 받아먹는 역사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성찬 떡을 놓고 기도하는 역사는 객관적 역사입니다. 약으로 말하면 아무리 좋은 약이 여기에 있다 하더라도 내가 먹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먹어서 소화해야 소용이 있지요. 반대로는 내가 아무리 좋은 약을 먹으려 애를 쓰고 마음이 확 열려 있다 하더라도 약이 있어야 먹는 것이지요. 좋은 약이 있어야 먹습니다.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 계시가 없는 주관 적 계시는 신비주의에 빠져요. 그런가하면 주관적 계시가 없는 객관적 계시는 효력이 없어요. 역사적 사실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인 역사와 주관적인 역사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동시적으로 역사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그 장면이 잘 나타나 있어요.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라고 합니다. 말씀하는 바로 그 시간에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의 사건으로 말한다면 여러분이 어디 가서 골방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바로 성경말씀 듣고 있는 이 시간에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것을 다 체험했을 것입니다. 내가 찬송 부를 때에, 기도할 때에…… 다 중요했지마는 이제 하나님 말씀 듣고 있는 이 시간에 내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이상하게도 이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적중해 들어오면서 마음이 뜨거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영이 치유되고 몸이 치유되고 문제가 해결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생각할 수 없었던 큰 은혜를 생각하게 되고, 그토록 불평불만으로 차 있던 심령이 감사찬송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그토록 나약하던 사람이 새로운 용기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하는 역사, 말씀을 듣는 역사, 말씀을 믿게 하 는 역사, 말씀이 효력을 내게 하는 역사가 다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말씀 없이 말씀 듣는 역사가 이루어지겠습니까? 말씀 듣는 역사가 없다면 그 말씀은 겉돌고 말아요. 들었지만 소용없어요. 그대로 흘려지고, 이해도 느낌도 없이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고 말아요.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앗과 같아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말 할 때에"라고 하는 말씀을 중히 생각하게 됩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바로 십자가 사건을 말씀함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잘살고, 어떻게 복 받고, 세상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떻게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어떻게 부활하셨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세상철학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이는 것은 오직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 성경말씀을 듣기 위함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듣자고 여기 온 것이 아닙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어떤 분은 반대로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어요. 이것 역시 중생하지 못한 탓입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하는 사람인데, ", 우리 목사님은 밤낮 케케묵은 성경이야기만 한다. 좀 어떻게 유식한 얘기 좀 못하나?" 이렇듯 영 삐딱하게 나가는 분도 있습디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람입니다. 성령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딴 이야기는 들리지 않아요. 중요하지 않아요. 오직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 오직 성경의 이야기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곧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 십자가 사 건을 이야기할 때에 바로 여기서 성령이 임합니다. 사도행전 236절로도 봅시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찔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베드로는 구구하게 말씀하지 않았어요. 오직 예수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것을 말씀하고 들을 때에 성령이 임합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이 있어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전도자가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전도를 해야 됩니다. 객관적 계시가 있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전해주는 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전하든지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꼭 들어야 되고요. 로마서 1014절에도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하고 말씀합니다.

저는 기도할 때마다 늘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것이 저 북녘 땅입니다. 북녘 땅에서는 말씀을 들을 수가 없어요. 40년 동안 단 한번도 들을 수가 없었어요. 이 지구상에는 지금 많은 전파가 있어요. 더구나 거기서 여기 남한의 방송이 다 들려요. 멀지도 않으니까 깨끗이 다 들리는데 저들은 라디오가 없어요. 아무도 못 가집니다. 가지게 돼 있지 않아요. 오직 밤마다 조그마한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만 들어요. 내 마음대로 끄지도 못하고 켜지도 못하는 스피커입니다. 그저 나오면 들어야 하고 끄면 자야 됩니다. 그것만 40년을 들어온 것입니다. 신문도 없어요. 신문도 특수층의 것이고, 고급 가구도 몇 사람만이 쓰는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은 엄두도 못 냅니다. 얼마나 딱한 노릇입니까? 요새 같은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하다니…… 들을 수 없으니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전하는 자가 없으니 듣지 못하는 것이지요. 얼마나 답답합니까?

잊지 말 것입니다. 네 전도자를 통해서, 즉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을 고용해서 말씀을 듣게 했다, 동시에 베드로로 하여금 충만한 가운데서 말하게 하고, 듣는 자로 하여금 성령의 감화를 주어서 듣게 했다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방언을 했다고 합니다. 방언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듣는 방언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베드로는 지금 통역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말로 설교하고 있어요.

아람말로 했을 것으로 압니다. 듣는 사람들은 로마사람들입니다. 로마 말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는 지금 히브리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은 로마말로 들어요. 다 알아들어요.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감사합니다, 할렐루야'하는 것을 보니 이것은 또 자기네말로 하거든요. 베드로가 그것을 알아들어요. 방언으로 말하더라 한 것은 이런 현상을 가리킵니다. 복음 전하는 데 소통케 하는 신비로운 역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베드로는 자기 말을 했 습니다. 듣는 사람은 자기나랏말로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감동해서 간증하는 이야기를 베드로는 또 베드로대로 히브리말로 듣는 것입니다. 분명히 로마사람과 히브리사람이 모였는데 언어가 복음 안 에서 거침없이 통하고 말았어요. 바로 이런 순간을 가리켜 "방언을 말하며"하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들려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같이 자기네 말로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외국어를 자기나랏말로 듣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베드로가 말씀하는 것도 선교적 의미의 방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도록 역사 하는 것, 이것이 방언입니다. , 이렇게 해서 고넬료의 집에 '오순절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방인의 오순절입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가 깊이 신학적으로 생각할 것은 은혜의 방편입니다. 은혜의 방편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입니다.

둘은 전도자입니다. 셋은 성례입니다. 성령의 은혜는 반드시 말씀을 고용합니다. 말씀과 함께 역사하고, 전도자와 함께, 전도자를 통해서 역사 합니다. 그리고 성례와 함께 역사 합니다. 성령 받는 것을 보고 성령 받았는데 금할 것이 뭐 있느냐 하고 세례를 베풉니다. 말하자면 총회결의도 없이 세례부터 베푸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47, 48)"-----왜 세례 주었습니까? 성령 받았으면 왜 세례를 주는 것입니까? 세례가 은혜를 확증하는 방편이기에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도 논산훈련소에서 몇 달에 한 번씩 2천 명, 3천 명씩 세례를 줍니다. 훈련받으러 온 사람에게 전도한 나머지 세례 받을 사람들을 일시에 마당에 모아놓고 세례를 줍니다. 저도 몇 번 가보았습니다 마는 세례 줄 때에 보면 많은 목사님들이 동원되어서 베풉니다. 그렇게 한꺼번에 세례를 주는데, 어떤 때에 보면 '저렇게 주어가지고 되겠나, 저 가운데는 잘 믿는 사람도 있고 못 믿는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싶어요. 제가 10년째 금요일 아침마다 퇴역장성들 모이는 모임에 나가서 성경을 가르치는데, 그분들은 모두가 대위, 소령, 대령, 장성들인데 나이 많아 예편된 분들입니다. 가끔 저에게 이렇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어요. "목사님, 군인들 세례 많이 주세요. 저도 그렇게 합동으로 세례 받을 때에 받았거든요. 그 때에 아주 좋은 사단장님이 오셨는데 예수 잘 믿는 분이예요. 그분이 예수 믿는 게 좋다고 해서 교회 나갔고 세례 받는 게 좋다고 해서 받았지요. 부대원들 모아놓고 세례는 받아 좋은 거라더라, 받아라 이놈들아, 하고 소리쳐서 조금 공부시킨 다음에 다 받도록 했지요"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부터는 여기 가나 저기 가나 신상카드를 쓰려고 보면 거기 으레 있는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아주 수월히 쓰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세례 받았거든요. 마침내는 어디 가나 기독교인으로 몰아붙이더랍니다. 아직은 기독교가 무엇인지 확실히도 모르는 채인데 세례를 받아놓고 보니 별수 없이 교회에 잘 나가게 되고 기독교를 더 알게 되고, 드디어 장로까지 되더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마치 결혼식과 사랑의 관계와도 같다 싶어요. 사실 결혼식 안하고 사랑을 하는 것은 헛것입니다. 가끔 보면 아기를 낳고 나서 결혼식 하는 것을 보아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기가 셋이라도 결혼식은 정식으로 올려야 됩니다. 공적으로 만인 앞에서 '이 사람은 내 아냅니다' '내 남편입니다'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공인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깊은 의미, 실천적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중요한 표적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발표합니다. '사랑합니다' 고백하고, 이제 이 사람이 제 아냅니다, 내 남편입니다, 공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람 앞에서 아노라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아노라 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너희가 나를 모른다 하면, 마음속으로만 믿고 겉으로는 아니라고 한다면, 나도 너희 하나님 앞에서 아니라고 하리라-----순교자가 누구입니까? 순교자는 공적으로 신앙을 시인하는 사람입니다. '마 음으로 믿지 뭐'하면 순교 안 합니다. 속으로만 믿는다면 순교자가 어디 있겠어요? 순교자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믿는 사람이오, 죽을 때까지 믿는 사람이오-----바로 세례 받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 때문에 순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확증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디 가나 죽을 때까지 세례 받은 사람입니다. 결국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은 다 하나가 됩니다. 이방사람도 세례 받으면 한가지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유대사람도 세례 받으면 한가지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저나 여러분이나 세례 받은 것은 똑같습니다. 남자 여자가 따로 있지 않아요.

이번에도 부활절 때에 세례 베풀면서 보니 아버지, 어머니, 아 들, 딸이 다 와서 나란히 앉아 세례 받는데 저도 아주 좋더라구요. 자매가 같이 하기도 하고, 형제가 같이하기도 하는데,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 다음에 모두가 한 형제자매가 되고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상이 무너집니다. 베이컨의 지적대로 종족의 우상이 무너집니다. 세례 받음과 함께 네 민족 내 민족 할 것이 없어졌어요. 세례 받은 사람은 다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또한 동굴의 문화 우상이 무너집니다. 관습의 동굴, 지식의 동굴, 저 잘났다고 하는 생각 같은 것이 없어집니다. 또한 시장의 우상이 무너집니다. 경제성이 높다 낮다, 부자다 가난하다 하는 사람 없어요. 세례 받았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극장의 우상이 무너집니다. 향락도 없습니다. 이제는 다 예수의 십자가 앞에 죽었습니다. 똑같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이 같은 우상들이 다 무너지고 새로운 교회의 일원이 되는 공동체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와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교회론과 성령론을 하나로 설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보세요.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성령과 교회를 하나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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