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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이 말을 전하라(사도행전 12:12~19)

by 【고동엽】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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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전하라(사도행전 12:1219)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從容)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숫군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

 

 

 

성령과 은혜가 충만한 오순절교회, 초대교회는 박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마는 이렇게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한 교회인데도 여기에 핍박이 있고 그리스도에게,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큰 고난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깊은 뜻을 상고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는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수제자 베드로마저 감옥에 갇힙니다. 베드로도 며칠 뒤에는 야고보처럼 죽이려고 저들은 작정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시간에 온 교회 온 성도는 곳곳에 모여서 열심히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궁금한 것은 그 기도의 제목입니다. 성경에는 기도 제목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라고들 기도했는지, 열심히 모여 기도했다는 말씀뿐이지 기도의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 나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4장을 읽어보면 저들은 모일 때마다 늘 이런 기도를 한 것 같습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적과 표적도 따르게 하시옵소서'-----이 두 가지를 제목으로 하여 기도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바라던 이적은 스스로의 욕망을 채우자는 이적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형통하게 되는 유의 이적이 아닌 줄 압니다. 적어도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었던 사람이 일어난 것과 같은 사건이 우리 앞에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우리도 알고 저 원수들도 알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의 이적을 저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의 상징적이자 증거적인 기적이 나타나기를 기도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 두 가지를 다 생각해보아도 환난을 피하게 해주세요, 고난이 없게 해주세요, 태평하고 무사하게 해주세요, 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는 점입니다. 그런 기도를 드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세요----- 모두가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시간에 베드로는 감옥에서 잠이 들었 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갈릴리바다에 풍랑이 일자 어부 출신의 제자들인데도 배를 어거 할 길이 없어 죽게 되었다며, 이런 경황에도 어찌 그리 무심하시냐고 볼멘소리로 주님을 깨우지만 그 때에 주님께서는 어떠하셨습니까? 고물에 누워서 고요하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런 고요함-----베드로가 지금 감옥 안에서 잠든 상태는 바로 이같은 고요함인 것입니다.

풍랑 가운데서도 마음은 그렇듯 평안하십니다. 베드로-----밤이 되었으니 자는 것입니다. 피곤하니까 자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입니까? 감옥입니다. 이부자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침대가 좋은 것도 아니고 분위기가 좋은 것도 아닙니다. 내일 아침이면 목 베임을 당할는지도 몰라요. 야고보를 죽인 저들이니 이제는 나를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평안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양손이 지금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6)"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평안히 잡니다. 이 안정과 평안함-----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와 응답을 생각해봅니다. 베드로의 이 마음, 이 상태가 곧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진 큰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베드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긴 것 같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된 다면 죽게 하시고,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이면 살게 해주시리라-----일종의 신앙적 체념입니다. 전적인 위탁입니다. 하나님께 운명과 생명을 다 맡길 뿐입니다. 어떤 모양으로 죽느냐-----그것 생각하지 않습니다. 매맞아 죽든 돌에 맞아 죽든 목 베임을 당하든, 알 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하세요-----완전히 맡기고 나니 내일 아침이면 죽는다 해도 오늘은 잠이 오는 것입니다. 평안합니다.

어떤 교인이 웨슬리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당신 이 죽는다고 합시다.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날이라고 합시다. 이럴 경우, 당신은 오늘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에 웨슬리는 담담하게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어제 하던 일, 그저께 하던 일, 오늘도 계속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유별나게 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제 몇 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니 금식해야지, 철야해야지, 이러는 것 이 아닙니다. 내일 아침에 죽는다 해도 오늘은 잠을 자야 됩니다.

이런 마음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안달복달할 것이 아닙니다. 고요 한 마음-----얼마나 부럽습니까? 군사들 틈에서 고요히 자더라----얼마나 아름다워요? 바로 이런 순간에 큰 기적이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기대했던 것도 아니요 은근히 바라던 것도 아닙니다. 이런 일 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칩니다.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합니다. 베드로는 따라나서지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환상을 보는가 했습니다.

본문말씀을 보세요. 11절에 "내가 이제야 참으로" 합니다. 그 앞에서는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라고 말씀합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어요. 감옥 문을 나와서야 정신이 든 것입니다. 감옥 문은 분명히 닫혀 있는 그대로입니다. 베드로의 손에서는 쇠사슬이 벗겨졌으나 천지를 모르고 있는 군사들의 손에는 쇠사슬이 아까 대로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여기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상기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문이 잠겨 있는 방안에 그 문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홀연히 들어서시면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렇듯 공간을 초월하십니다. 밖으로 나온 다음에야 베드로는 정신이 났고,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합니다. 그리고 12절에 "깨닫고"라 말씀합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로 감옥에서 나오게 하셨음을 알았어요. 깨달았어요. 결코 기대했던 바가 아닙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실 일이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요. 생명의 연장-----이것은 내가 평안하게 잘살고 오래 산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나를 통해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결코 기대했던 바가 아닙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실 일이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요. 생명의 연장-----이것은 내가 평안하게 잘살고 오래 산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나를 통해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내가 필요하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것은 베드로가 본래 기대했던 것도 아니고 이런 일이 있도록 기도한 것도 아닌데 사건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 가운데서 이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기도와 응답의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 이 모여 기도했다고 말씀합니다. 마가 요한의 집에 찾아가 보았더니 거기서도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합니다. 이미 125절에서 도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옥에서 나와 곧바로 찾아간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은 바로 예수님께서 생전에 성만찬 예식을 행하셨던 곳입니다. 이 건물이 초대교회의 요샛말로 하자면 총회사무실처 럼 사용된 것 같습니다. 소위 본부로 사용했던 것 같아요.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성만찬 예식을 행하신 곳, 은혜의 본거지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했던 곳도 그곳입니다. 여기를 베드로가 찾아갔더니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의미심장하지요.

저들이 기도를 하는데, 베드로의 출옥을 위하여 기도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신령한 용기를 위해서 기도했고, 하나님의 큰 뜻이 이 모든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기도한 것 같습니다.

전혀 출옥까지는 믿지 못한 것 같습니다. 과연 나올 수 있을까? 저 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와 은사의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기도의 응답이 세 가지로 온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는 '그래라'하는 응답입니다. 달라고 하면 '가져라', 병 걸린 것 고쳐주세요 하면 '나으라' 하시는 응답입니다. 그것 참 매력 있는 일이지요.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응답입니다. 두 번째로, '기다려라' 하시는 응답입니다. 지금은 안돼, 다음에, 좀더 큰 다음에, 좀더 성장한 다음에, 좀더 믿음이 자란 다음에-----이렇게 인내를 요구하시는 응답입니다. '기다려'하시는 응답입니다. 세 번째로, '네 생각이 잘못됐으니 버려라' 하시는 응답입니다. 가져서는 안될 것을 달라고 떼를 씁니다. 이런 때에 부모는 "그건 안돼"라고 응답합니다.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마는 어렸을 때의 일은 늘 생각이 잘 나요. 변변치 않은 스케이트가 하나 있었는데 한번 타러 나갔더니 다른 친구가 타는 스케이트가 더 좋은 것입니다. 내가 타고 있는 것이 멀쩡한데도 불구하고 저는 그것을 가지고 싶어서 억지를 썼는데 안 들어주십니다. 여러 시간을 두고 울고 보챘는데도 안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조금 더 억지를 쓰다가는 얻어맞기 딱 좋은 지경에까지 왔어요. 그래서 제가 눈치 빨라서 그만뒀었습니다. 여러분, 너무 억지를 많이 쓰면 그 다음에 좋은 결과가 오지 않습니다. 그 생각은 잘못됐으니 그만두라면 그만두는 것이지 기어이 가져야 되겠다고 하는 것 은 잘못입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고집을 부리겠어요? 끊어 버리라 시면 끊으세요. 치워 버리라 시면 치우세요. 미련을 가지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이렇게 이렇게 소원하오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꼭 거꾸로 기도해요. 아버지의 뜻이 여기 있는 줄 압니다마는 나 원하는 대로, 요대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릇 기도는 하나님 앞에 관망적인,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향하여 내 시선을 보내는 그런 의미의 기도라야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환상적 기도라고도 합니다. 이런 기도가 귀합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대로되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하나님께 영광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제가 좋든 나쁘든 좀 알게 해주세요, 알고 따랐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이래주세요, 저래 주세요. 합격해야겠습니다, 승진해야겠습니다----이런 기도가 보통입니다. 보아하니 시험치는 사람들 하나같이 다 합격하기를 바라더군요. 딱 하나, 이상한 사람 만나보았어요. "목사님, 우리 딸 시험 봤는데 떨어지게 기도해주세요"하는 부모가 있습디다. "고것이 공부를 잘해 가지고 기고만장하거든요. 그렇게 나가다가는 콧대가 높아 시집도 못 갈 것입니다"하면서 너무 똑똑하고 고집이 세어서, 너무 잘난 체하고 있으니 이번 시험은 꼭 떨어져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이런 이유로 떨어져야 할 사람이 많거든요. 떨어져야 유익할 사람이 많아요. 사실 몇 번쯤 떨어져보고 붙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마음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고 은사는 별도로 오는 것입니다. 응답은 다시 선물로 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보면 모여 있던 사람들은 베드로가 그렇게 희한한 능력으로 감옥을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러나 나왔습니다. 저들은 기도하고 있었어요. 그 기도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이적이 아니었습니다. 열심히 기도했으니 이루어졌고, 그렇게 되도록 구했으니 그렇게 이루어졌고, 나오기를 바랐으니 나왔고-----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고 응답은 또 다른 선물로 주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은사는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 될 수도 있고 감옥에서 죽는 것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기도 응답을 은사로 이해하는 신학적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본문에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두 군데 있어요. 베드로가 와서 문을 두르리니까 로데(로데는 그 이름 자체로 봐서는 로데야라고 하는 준말이라고 합니다. '작은 장미'라는 뜻인데 대개 어린 여종에게 이런 이름이 많이 주어졌다고 합니다)라고 하는 어린아이가 앞으로 나왔다가 음성을 듣고 베드로라는 것을 알았어요. 얼마나 기뻤겠어요? 미처 문도 열 줄 모른 채 안으로 뛰어들어가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하고 보고합니다. 지금 정신없이 들떠 있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15절에 보니 "네가 미쳤다"합니다. 아이는 "참말이라" 힘주어 말합니다. 어느 쪽이 미친 것입니까? 어느 쪽이 참말입니까? 사람들은 소녀보고 미 쳤다 하고 소녀는 참말이라고 우깁니다. 사실이야 사실대로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들이 소녀보고 미쳤다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거든요. 베드로가 어떤 감옥에 어떤 모습으로 갇혀 있다는 것을 아니까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기도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기도하면서도 정작 베드로가 와서 서있는 것은 믿지 않아요. 여기에 참 대단한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에 자세히 보니 그 다음에 해석이 나오는데, 그러면 천사인가보다 합니다. 여기서 히브리사람들의 세계관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그를 수호하는 천사가 함께 한다고 믿습니다. 마태복음 18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십니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분명히 천사를 보내신다는 것이지요. 지켜보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로데의 말을 듣고 밖에 와 섰는 사람이 베드로의 천사인가보다 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돌보는 천사를 배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것을 많이 느낍니다. 천사가 우리를 많은 위험에서 지켜주는 것을 봅니다. 천사가 지켜줍니다.

어떤 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어느 눈오는 날 차를 타고 갑니다. 눈이 많이 오기 때문에 앞이 안보일 지경입니다. 그래도 상당한 속력으로 달리는데 갑자기 눈앞에 아주 큰손이 나타나서 막습니다.

깜짝 놀라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차는 관성으로 죽 미끄러지다가 멈추었습니다. 순간 앞을 보니 큰 트럭이 있습니다. 그대로 들이받았으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그분의 생각에는 분명히 큰손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남이야 믿거나말거나 그분에게는 분명한 사실인 것입니다.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브레이크는 별 효력이 없었고, 분명히 그 손이 차를 멈추어 주었다고 그는 믿고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천사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이 오늘의 본문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까지, 우리는 아주 재미있는 장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어요.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계속 두드렸습니다. 여러분, 생각나는 게 없습니까? 감옥에서 나올 때에 능력으로 쓱 나왔으면 마가의 다락방에 들어갈 때에도 쓱 들어가지 두드리긴 왜 두드립니까? 두드릴 필요가 없지 않겠어요? 감옥 문 안 열고 나올 수 있었다면 다락방 문도 안 열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적이 인색합니다. 이것을 잊지 마세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이적이나 능력은 남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적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능력이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뿐이지 능력 없이도 될 곳에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베드로가 문을 계속 두드립니다. 못 여니까 두드리는 것입니다.

못 들어가니까 두드립니다. 천사가 함께 할 때에 그는 옥문을 나올 수 있었지만 이제 천사는 떠나고 그는 자연인으로 돌아갔습니다. 문을 열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계속 두드리더라 하는 것입니다. 항상 이적이 있고, 아무 데서나 이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대로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장소에서 주시는 것입니다. 또 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대로 그렇게 기도해 왔음에도 정작 베드로가 서 있다는 것을 안 믿어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생각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단산한 그녀는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 하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고 천막 저쪽에서 픽 웃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싶었던 것입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천사가 그걸 알고 사라가 왜 웃느뇨 하고 나무라니까 사라는 얼결에 안 웃었다고 거짓 말을 해요. 내가 천사였다면 괘씸해서도 약속 취소한다고 선언했을 것 같은데 천사는 그렇지 않았어요. 참 인자합니다. 웃었느니라, 그러나 아들은 낳으리라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제야 정신이 나서 믿습니다. 그 믿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이미 아시고 계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의심을 하다가도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어요. 오늘의 본문에도 보니까 그렇게 기다리고 바라던 일이 눈앞에 현실로 나타났는데도 사람들은 믿지 못했어요. 너무 능력이 크고, 너무 희한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베드로는 기도하는 성도들을 방문합니다. 방문해서 안심을 시킵니다. 감옥에서 나왔으면 한시바삐 멀리로 도망을 가든하지 여기는 왜 들러요? 여기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기 머물지는 않습니다. 말씀 몇 마디하고 그것을 전하라 해놓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가 버립니다. 그리고 가이사랴로 내려갑니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응답을 받았다면 기도하는 모든 사람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알려야 됩니다. 내가 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이를테면 내가 수술을 받는데 구역원들이 다 기도를 했습니다. 애썼습니다. 고맙지요. 그러므로 내가 병 나은 다음에는 그 사람들 다 모아 가지고 한번 식사라고 같이 하면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모름지기 은혜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sharing해야 합니다. 베드로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했으니 잠시라도 근심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찾아와 "나 왔소,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나오게 하셨소, 큰 능력이 나타났소"하고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기도로 얻은 은사, 기도로 받은 은사는 함께 나눠야 합니다. 다같이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하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감옥에서 나오는 희한한 능력도 있는데 무엇이 겁이 나 다른 데로 갑니까? 그런데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해요. 피신 겸해서 전도하러 가는 것입니다. 이적을 보았으리만큼 담대하게 나서서 이제는 잡을 테면 잡아보라고 배짱을 보 일 수도 있습니다. 또다시 잡혀 감옥에 가면 다시 나오면 되는 거지, 할 수도 있는 일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큰소리치지 않았어요. 조용히 다른 곳으로 피신했습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는 어떤 능력을 보았을 때면 지나치게 자랑합니다. 과장을 해요. 너무 떠들어요. 이 점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분에 위암으로 고생을 한 이가 있었어요. 수술을 받았지만 효력이 없었어요. 그 다음에 간절히 기도했어요. 나았습니다. 멀쩡하게 나은 것을 보니 참 고맙습디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사람, 좀 조용히 있었으면 좋았겠는데 사방에 다니면서 요란하게 간증을 했어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간증을 하던 끝에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 편에서 필요하시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감옥에서 나를 나오게 했으니까 앞으로도 이런 능력이 또 있을 것으로 여겨 다시 들어가도 좋다고 소리지른다면 옳지 못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가이사랴로 피신 을 합니다. 떠나면서 "이 말을 전하라" 합니다. 감옥에 있을 때에 된 이야기,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나오게 하신 일, 희한하게 나왔다는 이야기들을 말하면서 이 말을 모든 형제들에게,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겸손입니다. 합리적 신앙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써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섭리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선교적 경륜을 알게 되고, 나아가서는 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더불어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번 겸손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 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이 말을 전하라(사도행전 12:1219)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從容)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숫군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

 

 

 

성령과 은혜가 충만한 오순절교회, 초대교회는 박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마는 이렇게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한 교회인데도 여기에 핍박이 있고 그리스도에게,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큰 고난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깊은 뜻을 상고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는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수제자 베드로마저 감옥에 갇힙니다. 베드로도 며칠 뒤에는 야고보처럼 죽이려고 저들은 작정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시간에 온 교회 온 성도는 곳곳에 모여서 열심히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궁금한 것은 그 기도의 제목입니다. 성경에는 기도 제목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라고들 기도했는지, 열심히 모여 기도했다는 말씀뿐이지 기도의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 나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4장을 읽어보면 저들은 모일 때마다 늘 이런 기도를 한 것 같습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적과 표적도 따르게 하시옵소서'-----이 두 가지를 제목으로 하여 기도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바라던 이적은 스스로의 욕망을 채우자는 이적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형통하게 되는 유의 이적이 아닌 줄 압니다. 적어도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었던 사람이 일어난 것과 같은 사건이 우리 앞에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우리도 알고 저 원수들도 알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의 이적을 저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의 상징적이자 증거적인 기적이 나타나기를 기도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 두 가지를 다 생각해보아도 환난을 피하게 해주세요, 고난이 없게 해주세요, 태평하고 무사하게 해주세요, 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는 점입니다. 그런 기도를 드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세요----- 모두가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시간에 베드로는 감옥에서 잠이 들었 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갈릴리바다에 풍랑이 일자 어부 출신의 제자들인데도 배를 어거 할 길이 없어 죽게 되었다며, 이런 경황에도 어찌 그리 무심하시냐고 볼멘소리로 주님을 깨우지만 그 때에 주님께서는 어떠하셨습니까? 고물에 누워서 고요하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런 고요함-----베드로가 지금 감옥 안에서 잠든 상태는 바로 이같은 고요함인 것입니다.

풍랑 가운데서도 마음은 그렇듯 평안하십니다. 베드로-----밤이 되었으니 자는 것입니다. 피곤하니까 자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입니까? 감옥입니다. 이부자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침대가 좋은 것도 아니고 분위기가 좋은 것도 아닙니다. 내일 아침이면 목 베임을 당할는지도 몰라요. 야고보를 죽인 저들이니 이제는 나를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평안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양손이 지금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6)"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평안히 잡니다. 이 안정과 평안함-----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와 응답을 생각해봅니다. 베드로의 이 마음, 이 상태가 곧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진 큰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베드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긴 것 같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된 다면 죽게 하시고,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이면 살게 해주시리라-----일종의 신앙적 체념입니다. 전적인 위탁입니다. 하나님께 운명과 생명을 다 맡길 뿐입니다. 어떤 모양으로 죽느냐-----그것 생각하지 않습니다. 매맞아 죽든 돌에 맞아 죽든 목 베임을 당하든, 알 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하세요-----완전히 맡기고 나니 내일 아침이면 죽는다 해도 오늘은 잠이 오는 것입니다. 평안합니다.

어떤 교인이 웨슬리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당신 이 죽는다고 합시다.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날이라고 합시다. 이럴 경우, 당신은 오늘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에 웨슬리는 담담하게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어제 하던 일, 그저께 하던 일, 오늘도 계속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유별나게 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제 몇 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니 금식해야지, 철야해야지, 이러는 것 이 아닙니다. 내일 아침에 죽는다 해도 오늘은 잠을 자야 됩니다.

이런 마음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안달복달할 것이 아닙니다. 고요 한 마음-----얼마나 부럽습니까? 군사들 틈에서 고요히 자더라----얼마나 아름다워요? 바로 이런 순간에 큰 기적이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기대했던 것도 아니요 은근히 바라던 것도 아닙니다. 이런 일 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칩니다.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합니다. 베드로는 따라나서지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환상을 보는가 했습니다.

본문말씀을 보세요. 11절에 "내가 이제야 참으로" 합니다. 그 앞에서는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라고 말씀합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어요. 감옥 문을 나와서야 정신이 든 것입니다. 감옥 문은 분명히 닫혀 있는 그대로입니다. 베드로의 손에서는 쇠사슬이 벗겨졌으나 천지를 모르고 있는 군사들의 손에는 쇠사슬이 아까 대로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여기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상기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문이 잠겨 있는 방안에 그 문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홀연히 들어서시면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렇듯 공간을 초월하십니다. 밖으로 나온 다음에야 베드로는 정신이 났고,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합니다. 그리고 12절에 "깨닫고"라 말씀합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로 감옥에서 나오게 하셨음을 알았어요. 깨달았어요. 결코 기대했던 바가 아닙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실 일이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요. 생명의 연장-----이것은 내가 평안하게 잘살고 오래 산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나를 통해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결코 기대했던 바가 아닙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실 일이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요. 생명의 연장-----이것은 내가 평안하게 잘살고 오래 산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나를 통해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내가 필요하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것은 베드로가 본래 기대했던 것도 아니고 이런 일이 있도록 기도한 것도 아닌데 사건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 가운데서 이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기도와 응답의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 이 모여 기도했다고 말씀합니다. 마가 요한의 집에 찾아가 보았더니 거기서도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합니다. 이미 125절에서 도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옥에서 나와 곧바로 찾아간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은 바로 예수님께서 생전에 성만찬 예식을 행하셨던 곳입니다. 이 건물이 초대교회의 요샛말로 하자면 총회사무실처 럼 사용된 것 같습니다. 소위 본부로 사용했던 것 같아요.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성만찬 예식을 행하신 곳, 은혜의 본거지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했던 곳도 그곳입니다. 여기를 베드로가 찾아갔더니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의미심장하지요.

저들이 기도를 하는데, 베드로의 출옥을 위하여 기도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신령한 용기를 위해서 기도했고, 하나님의 큰 뜻이 이 모든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기도한 것 같습니다.

전혀 출옥까지는 믿지 못한 것 같습니다. 과연 나올 수 있을까? 저 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와 은사의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기도의 응답이 세 가지로 온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는 '그래라'하는 응답입니다. 달라고 하면 '가져라', 병 걸린 것 고쳐주세요 하면 '나으라' 하시는 응답입니다. 그것 참 매력 있는 일이지요.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응답입니다. 두 번째로, '기다려라' 하시는 응답입니다. 지금은 안돼, 다음에, 좀더 큰 다음에, 좀더 성장한 다음에, 좀더 믿음이 자란 다음에-----이렇게 인내를 요구하시는 응답입니다. '기다려'하시는 응답입니다. 세 번째로, '네 생각이 잘못됐으니 버려라' 하시는 응답입니다. 가져서는 안될 것을 달라고 떼를 씁니다. 이런 때에 부모는 "그건 안돼"라고 응답합니다.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마는 어렸을 때의 일은 늘 생각이 잘 나요. 변변치 않은 스케이트가 하나 있었는데 한번 타러 나갔더니 다른 친구가 타는 스케이트가 더 좋은 것입니다. 내가 타고 있는 것이 멀쩡한데도 불구하고 저는 그것을 가지고 싶어서 억지를 썼는데 안 들어주십니다. 여러 시간을 두고 울고 보챘는데도 안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조금 더 억지를 쓰다가는 얻어맞기 딱 좋은 지경에까지 왔어요. 그래서 제가 눈치 빨라서 그만뒀었습니다. 여러분, 너무 억지를 많이 쓰면 그 다음에 좋은 결과가 오지 않습니다. 그 생각은 잘못됐으니 그만두라면 그만두는 것이지 기어이 가져야 되겠다고 하는 것 은 잘못입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고집을 부리겠어요? 끊어 버리라 시면 끊으세요. 치워 버리라 시면 치우세요. 미련을 가지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이렇게 이렇게 소원하오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꼭 거꾸로 기도해요. 아버지의 뜻이 여기 있는 줄 압니다마는 나 원하는 대로, 요대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릇 기도는 하나님 앞에 관망적인,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향하여 내 시선을 보내는 그런 의미의 기도라야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환상적 기도라고도 합니다. 이런 기도가 귀합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대로되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하나님께 영광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제가 좋든 나쁘든 좀 알게 해주세요, 알고 따랐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이래주세요, 저래 주세요. 합격해야겠습니다, 승진해야겠습니다----이런 기도가 보통입니다. 보아하니 시험치는 사람들 하나같이 다 합격하기를 바라더군요. 딱 하나, 이상한 사람 만나보았어요. "목사님, 우리 딸 시험 봤는데 떨어지게 기도해주세요"하는 부모가 있습디다. "고것이 공부를 잘해 가지고 기고만장하거든요. 그렇게 나가다가는 콧대가 높아 시집도 못 갈 것입니다"하면서 너무 똑똑하고 고집이 세어서, 너무 잘난 체하고 있으니 이번 시험은 꼭 떨어져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이런 이유로 떨어져야 할 사람이 많거든요. 떨어져야 유익할 사람이 많아요. 사실 몇 번쯤 떨어져보고 붙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마음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고 은사는 별도로 오는 것입니다. 응답은 다시 선물로 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보면 모여 있던 사람들은 베드로가 그렇게 희한한 능력으로 감옥을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러나 나왔습니다. 저들은 기도하고 있었어요. 그 기도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이적이 아니었습니다. 열심히 기도했으니 이루어졌고, 그렇게 되도록 구했으니 그렇게 이루어졌고, 나오기를 바랐으니 나왔고-----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고 응답은 또 다른 선물로 주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은사는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 될 수도 있고 감옥에서 죽는 것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기도 응답을 은사로 이해하는 신학적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본문에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두 군데 있어요. 베드로가 와서 문을 두르리니까 로데(로데는 그 이름 자체로 봐서는 로데야라고 하는 준말이라고 합니다. '작은 장미'라는 뜻인데 대개 어린 여종에게 이런 이름이 많이 주어졌다고 합니다)라고 하는 어린아이가 앞으로 나왔다가 음성을 듣고 베드로라는 것을 알았어요. 얼마나 기뻤겠어요? 미처 문도 열 줄 모른 채 안으로 뛰어들어가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하고 보고합니다. 지금 정신없이 들떠 있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15절에 보니 "네가 미쳤다"합니다. 아이는 "참말이라" 힘주어 말합니다. 어느 쪽이 미친 것입니까? 어느 쪽이 참말입니까? 사람들은 소녀보고 미 쳤다 하고 소녀는 참말이라고 우깁니다. 사실이야 사실대로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들이 소녀보고 미쳤다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거든요. 베드로가 어떤 감옥에 어떤 모습으로 갇혀 있다는 것을 아니까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기도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기도하면서도 정작 베드로가 와서 서있는 것은 믿지 않아요. 여기에 참 대단한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에 자세히 보니 그 다음에 해석이 나오는데, 그러면 천사인가보다 합니다. 여기서 히브리사람들의 세계관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그를 수호하는 천사가 함께 한다고 믿습니다. 마태복음 18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십니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분명히 천사를 보내신다는 것이지요. 지켜보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로데의 말을 듣고 밖에 와 섰는 사람이 베드로의 천사인가보다 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돌보는 천사를 배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것을 많이 느낍니다. 천사가 우리를 많은 위험에서 지켜주는 것을 봅니다. 천사가 지켜줍니다.

어떤 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어느 눈오는 날 차를 타고 갑니다. 눈이 많이 오기 때문에 앞이 안보일 지경입니다. 그래도 상당한 속력으로 달리는데 갑자기 눈앞에 아주 큰손이 나타나서 막습니다.

깜짝 놀라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차는 관성으로 죽 미끄러지다가 멈추었습니다. 순간 앞을 보니 큰 트럭이 있습니다. 그대로 들이받았으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그분의 생각에는 분명히 큰손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남이야 믿거나말거나 그분에게는 분명한 사실인 것입니다.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브레이크는 별 효력이 없었고, 분명히 그 손이 차를 멈추어 주었다고 그는 믿고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천사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이 오늘의 본문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까지, 우리는 아주 재미있는 장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어요.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계속 두드렸습니다. 여러분, 생각나는 게 없습니까? 감옥에서 나올 때에 능력으로 쓱 나왔으면 마가의 다락방에 들어갈 때에도 쓱 들어가지 두드리긴 왜 두드립니까? 두드릴 필요가 없지 않겠어요? 감옥 문 안 열고 나올 수 있었다면 다락방 문도 안 열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적이 인색합니다. 이것을 잊지 마세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이적이나 능력은 남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적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능력이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뿐이지 능력 없이도 될 곳에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베드로가 문을 계속 두드립니다. 못 여니까 두드리는 것입니다.

못 들어가니까 두드립니다. 천사가 함께 할 때에 그는 옥문을 나올 수 있었지만 이제 천사는 떠나고 그는 자연인으로 돌아갔습니다. 문을 열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계속 두드리더라 하는 것입니다. 항상 이적이 있고, 아무 데서나 이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대로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장소에서 주시는 것입니다. 또 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대로 그렇게 기도해 왔음에도 정작 베드로가 서 있다는 것을 안 믿어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생각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단산한 그녀는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 하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고 천막 저쪽에서 픽 웃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싶었던 것입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천사가 그걸 알고 사라가 왜 웃느뇨 하고 나무라니까 사라는 얼결에 안 웃었다고 거짓 말을 해요. 내가 천사였다면 괘씸해서도 약속 취소한다고 선언했을 것 같은데 천사는 그렇지 않았어요. 참 인자합니다. 웃었느니라, 그러나 아들은 낳으리라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제야 정신이 나서 믿습니다. 그 믿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이미 아시고 계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의심을 하다가도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어요. 오늘의 본문에도 보니까 그렇게 기다리고 바라던 일이 눈앞에 현실로 나타났는데도 사람들은 믿지 못했어요. 너무 능력이 크고, 너무 희한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베드로는 기도하는 성도들을 방문합니다. 방문해서 안심을 시킵니다. 감옥에서 나왔으면 한시바삐 멀리로 도망을 가든하지 여기는 왜 들러요? 여기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기 머물지는 않습니다. 말씀 몇 마디하고 그것을 전하라 해놓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가 버립니다. 그리고 가이사랴로 내려갑니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응답을 받았다면 기도하는 모든 사람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알려야 됩니다. 내가 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이를테면 내가 수술을 받는데 구역원들이 다 기도를 했습니다. 애썼습니다. 고맙지요. 그러므로 내가 병 나은 다음에는 그 사람들 다 모아 가지고 한번 식사라고 같이 하면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모름지기 은혜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sharing해야 합니다. 베드로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했으니 잠시라도 근심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찾아와 "나 왔소,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나오게 하셨소, 큰 능력이 나타났소"하고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기도로 얻은 은사, 기도로 받은 은사는 함께 나눠야 합니다. 다같이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하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감옥에서 나오는 희한한 능력도 있는데 무엇이 겁이 나 다른 데로 갑니까? 그런데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해요. 피신 겸해서 전도하러 가는 것입니다. 이적을 보았으리만큼 담대하게 나서서 이제는 잡을 테면 잡아보라고 배짱을 보 일 수도 있습니다. 또다시 잡혀 감옥에 가면 다시 나오면 되는 거지, 할 수도 있는 일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큰소리치지 않았어요. 조용히 다른 곳으로 피신했습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는 어떤 능력을 보았을 때면 지나치게 자랑합니다. 과장을 해요. 너무 떠들어요. 이 점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분에 위암으로 고생을 한 이가 있었어요. 수술을 받았지만 효력이 없었어요. 그 다음에 간절히 기도했어요. 나았습니다. 멀쩡하게 나은 것을 보니 참 고맙습디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사람, 좀 조용히 있었으면 좋았겠는데 사방에 다니면서 요란하게 간증을 했어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간증을 하던 끝에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 편에서 필요하시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감옥에서 나를 나오게 했으니까 앞으로도 이런 능력이 또 있을 것으로 여겨 다시 들어가도 좋다고 소리지른다면 옳지 못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가이사랴로 피신 을 합니다. 떠나면서 "이 말을 전하라" 합니다. 감옥에 있을 때에 된 이야기,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나오게 하신 일, 희한하게 나왔다는 이야기들을 말하면서 이 말을 모든 형제들에게,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겸손입니다. 합리적 신앙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써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섭리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선교적 경륜을 알게 되고, 나아가서는 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더불어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번 겸손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 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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