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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증거(사도행전 11:11~18)

by 【고동엽】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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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증거(사도행전 11:1118)

 

마침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기회를 주셨도다 하니라

 

 

오늘의 본문에는 베드로가 10장에 있었던 사건을 사실증거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상으로는 같은 사건을 반복 말씀하고 있는 셈이지만 다가오는 의미에 있어서는 새로운 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할례자들을 상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건은 한 번 있은 사건이지마는 이것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항상 새로운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는 딱 한 번 있은 사건입니다. 그런데 경험한 당사자가 이해하는 것과 그 사건을 경험하지 못하고 들으면서 이해해야 하는 사람의 이해는 같지 않고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경험한 사람은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이론이 필요없습니다.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그대로 경험한 것이니까요. 사실이니까요. 그대로가 한마디로 말하면 합리적입니다. 나아가 논리적입니다.

합리적인 이론에서 확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확신에서 합리적 인 이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말로든지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 의심도 없습니다. , 그런데 이것을 전해듣는 사람에게는 그 강도가 약해집니다. 전해들은 자들이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래서 이것을 전해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편견, 전이해(前理解) 내지 본래적인 그런 고집 같은 것을 이제는 다 부정하고 불식해야 되는데 그러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경험한 사람은 이것을 쉽게 초월할 수 있는데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극복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래서 할례 자들에게 이것을 이해시킨다고 하는 것은 경험하지 못한 자에게 설명한다고 하는, 다시 말하면 경험해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증거를 통해서 이해한다고 하는 제2차적인 사건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그렇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신학화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체계적으로,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게 됩니다. 곧 그 사건은 theological case---신학적 사건입니다. 신학적 사례가 됩니다. 이 사례가 확증되는 순간에야 이것은 일반화하여서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건에 적용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건은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제 설명이 된다면 이것은 온 세계로, 땅 끝까지, 어느 민족에게도, 어느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건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사건이지만 그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증거는 이방으로 통하는, 온 세계 땅 끝까지 이방으로 통하는 엄청난 선교적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는 유대사람들에게 국한되었던 복음이 마침내 이방으로 전해지는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어떻게 해서 가능해지느냐 하는 문제가 여기서 풀리는 것입니다. 그실 우리도 그 과정을 통해서, 그 설명을 통해서, 그 신학적 해석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 하나의 사건이 실로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신학적 체계를 잡으면서 일반화하고 보편화합니다. 신학적 체계를 잡음으로써 모든 사람 모든 민족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기초 혹은 출발점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문제의 제기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이방사람이 예수를 믿어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는 신앙 문제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습니다. 감히 이방사람들은 예수 믿어서는 안 된다----겉으로야 이런 소리를 할 수는 없지요.

사실 내심으로는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방사람이 예수 믿었다는 데 대해서는 '아니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은 어쨌든 수용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방사람의 집에 들어갔다, 그 집에서 음식을 먹었다, 그 집에 유숙했다, 이방사람들과 상종했다 하는 문제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문화적 차원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이렇게 cultural barrier로 핑계를 삼지마는 그실 깊은 내심은 신앙적인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보면 이렇듯 신앙적인 문제와 문화적인 문제가 있어요. 이럴 때에 우리는 신앙적인 문제를 크게 생각하고 문화적 풍속적인 문제는 아주 작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를 않아요.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문제가 중요한데도 이것은 도외시하고 오히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주변적인 문제, 지엽적인 문제를 너무 중요시합니다. 그것 때문에 결국은 신앙적으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설명합니다. 그의 행동이 합당한 것이며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설명합니다. 본문의 끝에 보면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명을 듣고 다 잠잠해졌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 나와요. 18절 중간에 보니 "그러면"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합니다. 베드로의 말씀 한 대목이 얼마나 중요한지, 베드로가 겪은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들이 베드로가 증거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의심이 없어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제부터는 이방사람도 구원하신다, 이방사람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다 하고 문을 활짝 여는 순간인 것입니다.

사람이 문을 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문을 열었고,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문을 사람들이 이제야 인정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사건을 사람들이 이제 믿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바 대단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루셨습니다. 사람이 알아서 무슨 일을 이룬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이루시고, 창조적으로 이루시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것입니다.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긍정하는 것입니다. 협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이 바로 우리가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본문에 보면 소위 Christian behavior-----기독교인의 행위에 원리가 있습니다. principle of Christian behavior-----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은 모든 일을 행할 때에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원칙을 따라 일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여기에 조목조목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세상에 삽니다. 그렇게 때문에 세상 법에 매입니다. 풍속에 매입니다. 문화와 제도에 매입니다. 세금도 내고 결혼도 하고 합니다.

결혼하다보니 결혼 풍속도 있습니다. 옛날 식으로 결혼하느냐 신식으로 하느냐 하는 것도 요새는 꽤나 문제가 되나봅니다. 식장에서 신랑 신부가 입장하는데 신랑이 먼저 들어오고 신부가 그 뒤에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 팔을 붙든 채 천천히 부끄러운 듯이 들어오는 것으로 알았는데 요새는 신부가 아예 고개 내저으면서 들어옵디다. 한번은 주례를 맡은 나에게 신랑 신부가 엉뚱한 소리를 합디다. "목사님, 신부가 아버지 팔 붙들고 입장할 것 없이 아예 우리 둘이 팔짱끼고 입장하면 안됩니까?" 그래 "괜찮아" 했더니 처음 만난 게 언젠데, 서로 팔짱끼고 돌아다닌 지가 언제부터인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처음 만나는 것처럼 식을 올린다는 것이 재미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풍속입니다. 굳이 이래야 된다, 저러면 안 된다 하고 티격태격할 것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상당한 culture pattern---문화적 표본을 지니고 삽니다. 상당히 자유를 누리는 것 같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한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패턴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생각하고 그 안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듯 제도에 매여 살고 풍속에 매여 살고 체면도 지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행동에 어느 정도의 규범과 원리는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높은 법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하다 저것이 중요하다 하지마는 가장 높은 법이 앞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결혼을 한다 할 때에 돈이다, 명예다, 지식이다, 성품이다, 가문이다 하고 별것을 다 들먹이겠지만 여러분, 최우선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최우선적인 것, 그것이 먼저입니다. 시시하게 다이아반지부터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야 껴도 되고 안 껴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건강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성품입니다. 이렇듯 우선적인 것이 먼저 있는데 우선적인 것은 뒷전으로 가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중요하게 여겨질 때에 문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법을 지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법보다는 양심 법입니다. 양심의 자유가 더 중요합니다. 양심 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법입니다. 내 양심은 아무래도 타락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입니다. 성령의 법이 먼저입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법은 이것입니다. 국법이 있지만 국법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따르는 진리의 법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라고 로마서 138절에서 말씀합니다. 10절에서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법 저런 법 다 몰라도 좋아요.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울 수 있습니다. 사랑은 더 높은 차원의 법을,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높은 차원의 법을 따라갑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몇 가지 원리를 찾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원리 그 첫째는 베드로가 행한 일을 가만히 보니 사건이 먼저입니다. 사실이 먼저였습니다. 철학이 먼저가 아니라 사건이, fact가 먼저입니다. 그 진리가 그 증거가 모든 것보다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좋으냐 나쁘냐보다 사실이냐 아니냐가 먼저입니다. 저는 언젠가 한번 답답한 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할아버지가 전사였다고 해요. 옛날에 양반이었지요. 그랬다는데 그 집에 가보니 그 할아버지 사진이 있는데 의젓하게 의관을 갖추고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그 손녀 하나가 연애를 했어요. 연애하는 중에 임신을 했어요. 실수였지요. 어쨌든 임신을 했어요. 그런데 이 사실을 놓고 결혼 문제가 임박해지자 '양반 집'에서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못한다고 딱 버팁니다. 심지어는 "나가라, 너 같은 딸은 없다"하고 딸을 내쫓아요. 딸은 나갈 수밖에요. 나가 가지고 할 수 없이 저들끼리 살았어요. 그리고 아기를 낳았습니다. 어떻게 하겠어요? 그제야 "들어와라"해서 아기 낳은 다음에야 결혼식을 하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할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물간 양반, 끝난 양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미 임신을 했다는 것,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쓸데없는 체면 세우려들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가운데 가문망신만 당했지 않습니까?

사실이 먼저입니다. 사건이 앞선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갔습니다. 이것은 사건입니다. 사실입니다. 엄연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 하셨습니다. 딴소리가 있을 수 없어요. 이해가 되고 안 되고는 나중에 볼 것이요 사건 자체를 먼저 받아들이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역사성과 실제성과 생명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제때에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할 때쯤에는 공부가 잘 안됐습니다. 그렇다면 공부가 안 되는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하겠는데 옛날로 돌아가 ", 그러게 내가 뭐라고 하더냐, 그렇게도 공부하라 공부하라 해도 말 안 듣더니 꼴좋다"-----이런 식으로 쓸데없이 10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당면한 사실-----여기서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몇십 년을 살고도 아, 그 때에 내가 잘못 생각했지, 이런 맹추 같은 사람과 결혼하다니…… 합니다. 딱한 일이지요. 운명은 정해진 것입니다.

모름지기 사실이 먼저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특별히 본문에는 베드로가 가이사랴로 갈 때에 형제 6명이 함께 갔다고 말씀합니다.

이에 대한 해석이 많습니다. 6명이면 베드로까지 7명입니다. 한 사람이 경험한 것이 아니라 일곱 명이 함께 경험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 사람이 보고 한 사람이 깨달은 것이 아니라 7명이 함께 경험한 것이므로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당시에 애굽사람들은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에는 7명의 증인을 세웠다고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두 사람 세우는데 애굽사람들은 7명을 세워요. 로마사람들은 유서나 혹은 계약서를 쓸 때에 인장으로 거기다 싸인을 하는데 7명이 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완전한 문서가 되었다고 합니다. 본문은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이 경험한 것이 아니라, 일곱 명이 함께 경험한 것이다-----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선교적 경륜을 생각할 줄 알 아야 합니다. 선교적 경륜, 다시말 하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 얻게 하기 위하여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언제나 앞서야 합니다. 혹 내가 실수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혹 죄를 짓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내가 죄인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왜입니까?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그다지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나 의로워지고자 하는 마음보다 다른 사람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유대사람에게는 유대사람처럼, 헬라사람한테는 헬라사람처럼, 아는 사람한테는 아는 사람처럼 되는, 여러 모양의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나 하나 희생해서 저 사람 살릴 수만 있다면, 나 하나 희생해서 다른 사람 구원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을 못할까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고마운 분들을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주일예배에 그렇게 일찍 나올 분이 아닌데 1부 예배에 나 온 분이 있기에 "일찍 나오셨군요"하고 인사했더니 대답이 참 고마웠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오기 편리한 시간을 양보하고 자기는 나오기 어려운 시간을 택하여 나오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참 좋은 마음입니다. 어찌 그것뿐이겠습니까? 어떤 일이든 지간에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4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오늘의 본문 14절을 봅시다.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구원의 말씀을 전하게 되는 이 시간인데 내가 무엇을 주저하겠느냐, 이방사람의 집에 왜 못 들어가겠느냐 함입니다. 한 심령이 구원받는 엄청난 사건이 여기에 있는데 이방사람의 집이라고 못 들어가다니, 말이 되느냐 함입니다. 규례 좀 어기는 것쯤이 무슨 대수냐 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그런 엄청난 사건을 치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고 죄인이 되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렇거늘 우리는 이렇게 한 심령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도 여기서 지금 풍속이 어떻고 제도가 어떻고 따지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된 심정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에 목자가 얼마나 기뻐합니까? 온 동네사람들을 다 불러서 잔치를 벌이고 기뻐합니다. 이렇게 기쁜 마음이 중요합니다. 교회에 새로 나오는 분들이 있어요. 이렇게 새로 나온 사람 하나를 영접하는 것,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예배당 좁아 터졌는데 왜 자꾸 나오나, 다른 교회에 나가라지……" 하는 분이 있습니까? 안될 일입니다.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치르겠다고 하는 마음, 그것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언제나 선교적 경륜을 앞세우는 법입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것이라도 극복할 수 있다,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수 있다고 하는 선교 우선적 세계관을 가져야 합니다.

세 번째는 본문을 자세히 보면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합니다. 성령이 명령하십니다. 아무 것도 의심하지 말라, 저 사람들과 함께 가라하시므로 명령대로 함께 갔노라 합니다. 성령이 말씀하면 가는 것입니다. 딴소리가 왜 있습니까?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할 것입니다. 또한 아무 의심도 하지 말라 합니다. 그러면 판단중지 해야지요. 성령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저 사람을 사랑하라 합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무엇을 가릴 것입니까? 어떤 희생을 지불해서 라도 사랑할 것입니다. 성령이 말씀하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방사람의 집에 가라 하시니 가는 것이요, 저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시니 전해야 하는 것이지 이방사람의 집이니 안됩니다, 풍속이 다릅니다, 나는 그런 일을 해본 일이 없습니다, 고고한 유대인이 천한 이방사람의 집에 어떻게 들어갑니까-----이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의심하지 말라 하시면 의심 안 하는 것입니다. 판단중지-----사실 사람의 판단이라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이것이 옳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것이 옳고, 밑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판단하기로 들면 끝이 없어요.

오직 성령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성령이 가라 하시면 나는 알겠습니다 할 것이요, 의심하지 말라 하시면 않겠습니다 할 것이요, 먹어라 하시면 먹겠습니다 할 것이요, 복음을 전하라 하시면 전하겠습니다 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복음을 전했더니 오순절에 120문도 에게 성령이 임한 것과 같이 저들에게도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이 임하는 데야 그 누가 이러쿵저러쿵 합니까? 우리에게 임하던 성령이 똑같이 역사해서 저들에게도 임하더라, 그런데 규례를 어겼다고 따질 것이냐-----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먼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우선합니다. 나의 판단도 중요하지 않고 너의 판단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그에 따라 순종합니다. 세상법도 무섭지 않아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여기다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내게 납득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문제되지 않아요. 합리적이냐 불합리적이냐, 그런 것은 나와 상관이 없어요.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라고만 생각한다면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 야 합니다. 16절에 "생각났노라"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같이 있을 때는 듣기는 들어도 잘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오늘 와서 보니 그 때에 주님께서 하신 그 말씀이 생각났다는 것입니다. 생각나는 순간, '맞다, 그거다'하고 이제는 더 판단할 것이 없어요. 사람이 뭐라고 하든 그것 때문에 망설이지 않아요. 어떤 후유증이 오건 상관 안 해요. 주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냥 밀고 나간 것입니다. 용기 있는 태도였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예수님 친히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1:5). 베드로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말씀이 그 시간에 그 현장에서 생각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어떤 현장에 갔을 때, 그 현장에 딱 부딪히는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바로 이미 깨달았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 때에 주셨던 말씀이 거기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용기가 납니다. 이제는 좌우를 돌아볼 필요가 없어요. 주저할 것이 없어요.

그야말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확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하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하여 체포될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두 명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내서 진멸할 수도 있지마는 그렇게 되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건사건마다 순간순간마다 성경을 생각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성경을 생각하시고 목마르다 말씀하셨노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평판을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합리적인 이론을 생각하시지 않았어요.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하여, 약속과 성취, 예언과 말씀을 성취케 하는 현장감각을 가지고 역사 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오늘,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설교하는 동안에 성령 받는 것을 보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노라 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는 하나님 뜻이 먼저입니다. 내가 누구관데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것을 누가 가로막으며, 누가 비판할 것이냐, 내가 누군데 그것을 막겠으며 너희는 누군데 그것을 막겠느냐, 너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느냐, 너희들도 도리가 없어, 너희도 나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너희도 나와 같은 경험을 했다면, 너희에게도 나에게와 같은 사건이 있었다면, 너희도 나같이 생각을 했다면, 그 자리에서 성령 받는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의 역사다 하는 확신이 오는 순간에 세례를 베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너희가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것 일리 있다, 나도 원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엄연하게 역사, 확실하게 역사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문을 여시는데 누가 있어 막겠으며 누가 있어 닫겠느냐, 그런고로 나는 거기에 동참하고 그 사건을 수용하고 그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노라---이렇게 사실증거를 합니다. 이 말을 듣던 사람들, 오늘 본문에 보니 참 좋아요. 다시는 더 묻지도 않아요. 그 말씀을 듣고 잠잠해졌습니다. 이제 의심은 끝났어요. 결론도 끝났어요.

모두가 공감대를 이루어요.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 다고 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 세상을 사는 데 어떤 원리를 따라야 하겠습니까? 모름지기 베드로가 취했던 그 생활 원리, 행위 원리를 따라 오늘도 내일도 승리의 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의 증거(사도행전 11:1118)

 

마침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기회를 주셨도다 하니라

 

 

오늘의 본문에는 베드로가 10장에 있었던 사건을 사실증거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상으로는 같은 사건을 반복 말씀하고 있는 셈이지만 다가오는 의미에 있어서는 새로운 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할례자들을 상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건은 한 번 있은 사건이지마는 이것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항상 새로운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는 딱 한 번 있은 사건입니다. 그런데 경험한 당사자가 이해하는 것과 그 사건을 경험하지 못하고 들으면서 이해해야 하는 사람의 이해는 같지 않고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경험한 사람은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이론이 필요없습니다.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그대로 경험한 것이니까요. 사실이니까요. 그대로가 한마디로 말하면 합리적입니다. 나아가 논리적입니다.

합리적인 이론에서 확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확신에서 합리적 인 이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말로든지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 의심도 없습니다. , 그런데 이것을 전해듣는 사람에게는 그 강도가 약해집니다. 전해들은 자들이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래서 이것을 전해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편견, 전이해(前理解) 내지 본래적인 그런 고집 같은 것을 이제는 다 부정하고 불식해야 되는데 그러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경험한 사람은 이것을 쉽게 초월할 수 있는데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극복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래서 할례 자들에게 이것을 이해시킨다고 하는 것은 경험하지 못한 자에게 설명한다고 하는, 다시 말하면 경험해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증거를 통해서 이해한다고 하는 제2차적인 사건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그렇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신학화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체계적으로,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게 됩니다. 곧 그 사건은 theological case---신학적 사건입니다. 신학적 사례가 됩니다. 이 사례가 확증되는 순간에야 이것은 일반화하여서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건에 적용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건은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제 설명이 된다면 이것은 온 세계로, 땅 끝까지, 어느 민족에게도, 어느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건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사건이지만 그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증거는 이방으로 통하는, 온 세계 땅 끝까지 이방으로 통하는 엄청난 선교적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는 유대사람들에게 국한되었던 복음이 마침내 이방으로 전해지는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어떻게 해서 가능해지느냐 하는 문제가 여기서 풀리는 것입니다. 그실 우리도 그 과정을 통해서, 그 설명을 통해서, 그 신학적 해석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 하나의 사건이 실로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신학적 체계를 잡으면서 일반화하고 보편화합니다. 신학적 체계를 잡음으로써 모든 사람 모든 민족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기초 혹은 출발점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문제의 제기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이방사람이 예수를 믿어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는 신앙 문제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습니다. 감히 이방사람들은 예수 믿어서는 안 된다----겉으로야 이런 소리를 할 수는 없지요.

사실 내심으로는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방사람이 예수 믿었다는 데 대해서는 '아니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은 어쨌든 수용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방사람의 집에 들어갔다, 그 집에서 음식을 먹었다, 그 집에 유숙했다, 이방사람들과 상종했다 하는 문제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문화적 차원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이렇게 cultural barrier로 핑계를 삼지마는 그실 깊은 내심은 신앙적인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보면 이렇듯 신앙적인 문제와 문화적인 문제가 있어요. 이럴 때에 우리는 신앙적인 문제를 크게 생각하고 문화적 풍속적인 문제는 아주 작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를 않아요.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문제가 중요한데도 이것은 도외시하고 오히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주변적인 문제, 지엽적인 문제를 너무 중요시합니다. 그것 때문에 결국은 신앙적으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설명합니다. 그의 행동이 합당한 것이며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설명합니다. 본문의 끝에 보면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명을 듣고 다 잠잠해졌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 나와요. 18절 중간에 보니 "그러면"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합니다. 베드로의 말씀 한 대목이 얼마나 중요한지, 베드로가 겪은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들이 베드로가 증거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의심이 없어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제부터는 이방사람도 구원하신다, 이방사람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다 하고 문을 활짝 여는 순간인 것입니다.

사람이 문을 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문을 열었고,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문을 사람들이 이제야 인정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사건을 사람들이 이제 믿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바 대단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루셨습니다. 사람이 알아서 무슨 일을 이룬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이루시고, 창조적으로 이루시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것입니다.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긍정하는 것입니다. 협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이 바로 우리가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본문에 보면 소위 Christian behavior-----기독교인의 행위에 원리가 있습니다. principle of Christian behavior-----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은 모든 일을 행할 때에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원칙을 따라 일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여기에 조목조목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세상에 삽니다. 그렇게 때문에 세상 법에 매입니다. 풍속에 매입니다. 문화와 제도에 매입니다. 세금도 내고 결혼도 하고 합니다.

결혼하다보니 결혼 풍속도 있습니다. 옛날 식으로 결혼하느냐 신식으로 하느냐 하는 것도 요새는 꽤나 문제가 되나봅니다. 식장에서 신랑 신부가 입장하는데 신랑이 먼저 들어오고 신부가 그 뒤에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 팔을 붙든 채 천천히 부끄러운 듯이 들어오는 것으로 알았는데 요새는 신부가 아예 고개 내저으면서 들어옵디다. 한번은 주례를 맡은 나에게 신랑 신부가 엉뚱한 소리를 합디다. "목사님, 신부가 아버지 팔 붙들고 입장할 것 없이 아예 우리 둘이 팔짱끼고 입장하면 안됩니까?" 그래 "괜찮아" 했더니 처음 만난 게 언젠데, 서로 팔짱끼고 돌아다닌 지가 언제부터인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처음 만나는 것처럼 식을 올린다는 것이 재미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풍속입니다. 굳이 이래야 된다, 저러면 안 된다 하고 티격태격할 것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상당한 culture pattern---문화적 표본을 지니고 삽니다. 상당히 자유를 누리는 것 같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한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패턴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생각하고 그 안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듯 제도에 매여 살고 풍속에 매여 살고 체면도 지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행동에 어느 정도의 규범과 원리는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높은 법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하다 저것이 중요하다 하지마는 가장 높은 법이 앞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결혼을 한다 할 때에 돈이다, 명예다, 지식이다, 성품이다, 가문이다 하고 별것을 다 들먹이겠지만 여러분, 최우선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최우선적인 것, 그것이 먼저입니다. 시시하게 다이아반지부터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야 껴도 되고 안 껴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건강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성품입니다. 이렇듯 우선적인 것이 먼저 있는데 우선적인 것은 뒷전으로 가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중요하게 여겨질 때에 문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법을 지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법보다는 양심 법입니다. 양심의 자유가 더 중요합니다. 양심 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법입니다. 내 양심은 아무래도 타락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입니다. 성령의 법이 먼저입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법은 이것입니다. 국법이 있지만 국법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따르는 진리의 법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라고 로마서 138절에서 말씀합니다. 10절에서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법 저런 법 다 몰라도 좋아요.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울 수 있습니다. 사랑은 더 높은 차원의 법을,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높은 차원의 법을 따라갑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몇 가지 원리를 찾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원리 그 첫째는 베드로가 행한 일을 가만히 보니 사건이 먼저입니다. 사실이 먼저였습니다. 철학이 먼저가 아니라 사건이, fact가 먼저입니다. 그 진리가 그 증거가 모든 것보다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좋으냐 나쁘냐보다 사실이냐 아니냐가 먼저입니다. 저는 언젠가 한번 답답한 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할아버지가 전사였다고 해요. 옛날에 양반이었지요. 그랬다는데 그 집에 가보니 그 할아버지 사진이 있는데 의젓하게 의관을 갖추고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그 손녀 하나가 연애를 했어요. 연애하는 중에 임신을 했어요. 실수였지요. 어쨌든 임신을 했어요. 그런데 이 사실을 놓고 결혼 문제가 임박해지자 '양반 집'에서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못한다고 딱 버팁니다. 심지어는 "나가라, 너 같은 딸은 없다"하고 딸을 내쫓아요. 딸은 나갈 수밖에요. 나가 가지고 할 수 없이 저들끼리 살았어요. 그리고 아기를 낳았습니다. 어떻게 하겠어요? 그제야 "들어와라"해서 아기 낳은 다음에야 결혼식을 하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할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물간 양반, 끝난 양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미 임신을 했다는 것,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쓸데없는 체면 세우려들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가운데 가문망신만 당했지 않습니까?

사실이 먼저입니다. 사건이 앞선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갔습니다. 이것은 사건입니다. 사실입니다. 엄연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 하셨습니다. 딴소리가 있을 수 없어요. 이해가 되고 안 되고는 나중에 볼 것이요 사건 자체를 먼저 받아들이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역사성과 실제성과 생명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제때에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할 때쯤에는 공부가 잘 안됐습니다. 그렇다면 공부가 안 되는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하겠는데 옛날로 돌아가 ", 그러게 내가 뭐라고 하더냐, 그렇게도 공부하라 공부하라 해도 말 안 듣더니 꼴좋다"-----이런 식으로 쓸데없이 10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당면한 사실-----여기서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몇십 년을 살고도 아, 그 때에 내가 잘못 생각했지, 이런 맹추 같은 사람과 결혼하다니…… 합니다. 딱한 일이지요. 운명은 정해진 것입니다.

모름지기 사실이 먼저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특별히 본문에는 베드로가 가이사랴로 갈 때에 형제 6명이 함께 갔다고 말씀합니다.

이에 대한 해석이 많습니다. 6명이면 베드로까지 7명입니다. 한 사람이 경험한 것이 아니라 일곱 명이 함께 경험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 사람이 보고 한 사람이 깨달은 것이 아니라 7명이 함께 경험한 것이므로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당시에 애굽사람들은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에는 7명의 증인을 세웠다고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두 사람 세우는데 애굽사람들은 7명을 세워요. 로마사람들은 유서나 혹은 계약서를 쓸 때에 인장으로 거기다 싸인을 하는데 7명이 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완전한 문서가 되었다고 합니다. 본문은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이 경험한 것이 아니라, 일곱 명이 함께 경험한 것이다-----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선교적 경륜을 생각할 줄 알 아야 합니다. 선교적 경륜, 다시말 하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 얻게 하기 위하여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언제나 앞서야 합니다. 혹 내가 실수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혹 죄를 짓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내가 죄인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왜입니까?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그다지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나 의로워지고자 하는 마음보다 다른 사람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유대사람에게는 유대사람처럼, 헬라사람한테는 헬라사람처럼, 아는 사람한테는 아는 사람처럼 되는, 여러 모양의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나 하나 희생해서 저 사람 살릴 수만 있다면, 나 하나 희생해서 다른 사람 구원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을 못할까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고마운 분들을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주일예배에 그렇게 일찍 나올 분이 아닌데 1부 예배에 나 온 분이 있기에 "일찍 나오셨군요"하고 인사했더니 대답이 참 고마웠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오기 편리한 시간을 양보하고 자기는 나오기 어려운 시간을 택하여 나오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참 좋은 마음입니다. 어찌 그것뿐이겠습니까? 어떤 일이든 지간에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4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오늘의 본문 14절을 봅시다.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구원의 말씀을 전하게 되는 이 시간인데 내가 무엇을 주저하겠느냐, 이방사람의 집에 왜 못 들어가겠느냐 함입니다. 한 심령이 구원받는 엄청난 사건이 여기에 있는데 이방사람의 집이라고 못 들어가다니, 말이 되느냐 함입니다. 규례 좀 어기는 것쯤이 무슨 대수냐 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그런 엄청난 사건을 치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고 죄인이 되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렇거늘 우리는 이렇게 한 심령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도 여기서 지금 풍속이 어떻고 제도가 어떻고 따지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된 심정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에 목자가 얼마나 기뻐합니까? 온 동네사람들을 다 불러서 잔치를 벌이고 기뻐합니다. 이렇게 기쁜 마음이 중요합니다. 교회에 새로 나오는 분들이 있어요. 이렇게 새로 나온 사람 하나를 영접하는 것,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예배당 좁아 터졌는데 왜 자꾸 나오나, 다른 교회에 나가라지……" 하는 분이 있습니까? 안될 일입니다.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치르겠다고 하는 마음, 그것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언제나 선교적 경륜을 앞세우는 법입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것이라도 극복할 수 있다,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수 있다고 하는 선교 우선적 세계관을 가져야 합니다.

세 번째는 본문을 자세히 보면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합니다. 성령이 명령하십니다. 아무 것도 의심하지 말라, 저 사람들과 함께 가라하시므로 명령대로 함께 갔노라 합니다. 성령이 말씀하면 가는 것입니다. 딴소리가 왜 있습니까?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할 것입니다. 또한 아무 의심도 하지 말라 합니다. 그러면 판단중지 해야지요. 성령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저 사람을 사랑하라 합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무엇을 가릴 것입니까? 어떤 희생을 지불해서 라도 사랑할 것입니다. 성령이 말씀하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방사람의 집에 가라 하시니 가는 것이요, 저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시니 전해야 하는 것이지 이방사람의 집이니 안됩니다, 풍속이 다릅니다, 나는 그런 일을 해본 일이 없습니다, 고고한 유대인이 천한 이방사람의 집에 어떻게 들어갑니까-----이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의심하지 말라 하시면 의심 안 하는 것입니다. 판단중지-----사실 사람의 판단이라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이것이 옳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것이 옳고, 밑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판단하기로 들면 끝이 없어요.

오직 성령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성령이 가라 하시면 나는 알겠습니다 할 것이요, 의심하지 말라 하시면 않겠습니다 할 것이요, 먹어라 하시면 먹겠습니다 할 것이요, 복음을 전하라 하시면 전하겠습니다 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복음을 전했더니 오순절에 120문도 에게 성령이 임한 것과 같이 저들에게도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이 임하는 데야 그 누가 이러쿵저러쿵 합니까? 우리에게 임하던 성령이 똑같이 역사해서 저들에게도 임하더라, 그런데 규례를 어겼다고 따질 것이냐-----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먼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우선합니다. 나의 판단도 중요하지 않고 너의 판단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그에 따라 순종합니다. 세상법도 무섭지 않아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여기다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내게 납득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문제되지 않아요. 합리적이냐 불합리적이냐, 그런 것은 나와 상관이 없어요.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라고만 생각한다면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 야 합니다. 16절에 "생각났노라"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같이 있을 때는 듣기는 들어도 잘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오늘 와서 보니 그 때에 주님께서 하신 그 말씀이 생각났다는 것입니다. 생각나는 순간, '맞다, 그거다'하고 이제는 더 판단할 것이 없어요. 사람이 뭐라고 하든 그것 때문에 망설이지 않아요. 어떤 후유증이 오건 상관 안 해요. 주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냥 밀고 나간 것입니다. 용기 있는 태도였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예수님 친히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1:5). 베드로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말씀이 그 시간에 그 현장에서 생각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어떤 현장에 갔을 때, 그 현장에 딱 부딪히는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바로 이미 깨달았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 때에 주셨던 말씀이 거기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용기가 납니다. 이제는 좌우를 돌아볼 필요가 없어요. 주저할 것이 없어요.

그야말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확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하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하여 체포될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두 명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내서 진멸할 수도 있지마는 그렇게 되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건사건마다 순간순간마다 성경을 생각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성경을 생각하시고 목마르다 말씀하셨노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평판을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합리적인 이론을 생각하시지 않았어요.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하여, 약속과 성취, 예언과 말씀을 성취케 하는 현장감각을 가지고 역사 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오늘,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설교하는 동안에 성령 받는 것을 보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노라 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는 하나님 뜻이 먼저입니다. 내가 누구관데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것을 누가 가로막으며, 누가 비판할 것이냐, 내가 누군데 그것을 막겠으며 너희는 누군데 그것을 막겠느냐, 너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느냐, 너희들도 도리가 없어, 너희도 나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너희도 나와 같은 경험을 했다면, 너희에게도 나에게와 같은 사건이 있었다면, 너희도 나같이 생각을 했다면, 그 자리에서 성령 받는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의 역사다 하는 확신이 오는 순간에 세례를 베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너희가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것 일리 있다, 나도 원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엄연하게 역사, 확실하게 역사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문을 여시는데 누가 있어 막겠으며 누가 있어 닫겠느냐, 그런고로 나는 거기에 동참하고 그 사건을 수용하고 그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노라---이렇게 사실증거를 합니다. 이 말을 듣던 사람들, 오늘 본문에 보니 참 좋아요. 다시는 더 묻지도 않아요. 그 말씀을 듣고 잠잠해졌습니다. 이제 의심은 끝났어요. 결론도 끝났어요.

모두가 공감대를 이루어요.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 다고 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 세상을 사는 데 어떤 원리를 따라야 하겠습니까? 모름지기 베드로가 취했던 그 생활 원리, 행위 원리를 따라 오늘도 내일도 승리의 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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