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K자료 1,910편

복음의 진수(사도행전 10:34~43)

by 【고동엽】 2023. 12. 3.
목차로 돌아가기

복음의 진수(사도행전 10:3443)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頒布)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 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강해도 이제 41회에 접어들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복음의 진수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흔히 본문을 별명 지어 '베드로의 복음'이라고도 말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이해하고 믿고 전하고 있는 복음이 이 가운데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교리, 우리가 믿어야 하고 또 이미 믿고 있는바 기독교 신앙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복음 중의 복음이요, 성경 중의 성경이라 할만합니다. 복음의 진수가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흔히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핵심 부분이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고넬료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 리는 또 다른 측면을 봅니다. 설교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냐? 그 설교의 표본, 능력 있는 설교의 본보기가 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미도 우리가 보았습니다마는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가 시작되는 벽두에, 사도행전 214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는 3천 명 앞에서 도도히 설교를 폅니다. 그 설교야말로 설교의 표본이요, 복음의 진수입니다. 이것은 주로 유대사람들을 상대로 하여 펼치는 설교였습니다.

거기서도 그가 믿고 그가 깨닫고 그가 평생 전한 그 복음이 요약되어 설명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은, 같은 내용입니다 마는, 이방인을 상대로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방인의 대표라고도 할만한 사람 고넬료 앞에서 일장 설교를 펼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설교의 분위기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어떤 분위기 속에서 입을 열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진주를 개한테 던지지 말라고.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어디서나 전해야 하겠습니다마는 심령상태가 지금 개같이 되어 있어서 도리어 물어 찢고 발악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발광을 하고 있는, 그런 사람 앞이라면 거기에 대고 설교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곧 설교에는 분위기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자세로 말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분위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오늘 베드로가 설교하게 되어 있는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먼저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선하신 자리입니다. 고넬료에게 계시를 주셔서 베드로를 청해오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도 환상을 주셔서 고넬료의 초청에 응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쌍방을 다 주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도로 고넬료와 베드로가 한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만나는 이 장면에는 어떠한 장벽도 없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높은 경륜과 주도적 섭리 안에서 이같은 만남의 관계, 설교하는 자와 듣는 자의 올바른 자세와 관계를 이루어 놓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예비할 때에 도 언제나 그렇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요, 목사님이 저 자리에 서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셨다고 하는 확실한 고백과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임할 때에 비로소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분위기가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가졌던 본래의 편견이나 전통이나 규범이나 습관이나, 혹은 생활의 규례 같은 것을 다 어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 나가드리면 좀 전까지 가졌던 편견을 버려야 할 때가 많아요. 내가 가졌던 고집이며 생활 습관, 버려야 될 것이 많아요. 풍습이나 그 문화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지라도 때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에 합당치 못한 일이 있습니다. 때묻은 심령, 잘못된 생각, 잘못된 세계관, 이런 것은 과감히 버리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우선합니다. 내 마음에는 안 들어도, 내 본래적 생각에는 맞지 않아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주님의 뜻이니까 이쪽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뜻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때때로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내 뜻을 버려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어요.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주님을 따를 수 있을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고넬료와 베드로가 다 바로 그런 관계에 있습니다. 저마다 종래에 가졌던 규례나 생활이나 철학을 다 버리고, 오직 위로부터 주신 말씀에만 순종하고 있습니다. , 베드로는 지금 고넬료의 신앙적 경건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고넬료 같은 교인들만 앞에 놓고 설교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고 생각합니다. 설교할 때에 제일 어려운 것이 뭐냐하면 앞에 앉아 그러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조는 것까지는 그렇다해도 하품까지 하고 기지개도 켜요. 이건 참 곤란합니다. 그럴 바에는 좀 멀리라도 앉았으면 좋겠는데 바로 앞에 앉아서 조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참 어렵고, 또 옆에 사람과 이야기를 합니다.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잘 들어둬' 하는 것 같아요. 내가 들을 생각은 안하고 다른 사람보고 들으라 합니다. 그렇게 마음쓰고 앉았어요. 이런 것, 다 좋지 않아요.

아무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가 참 중요합니다. 고넬료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좋습니까? 설교자가 들어오는 순간에 벌 써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절하는 그 자세가 베드로를 향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향한 마음이 베드로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베드로 가 잘생겨서라거나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이 그렇게 나타난 것이지요. 엎드려 절을 하되 얼마나 간절하게 했든지 베드로가 황송해서 얼결에 "나도 사람이오, 일어나시오" 하지 않습니까? 나아가 고넬료의 하는 말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가 듣고자 하여 다 이렇듯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얼마나 귀한 시간입니까? 저는 언젠가 한번 목포에 갔다가 특상을 받았다고 하는 사진 한 장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돌아와 잘 아는 화가에게 그 사진의 내용과 같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화가 분이 그 다음부터는 만나기만 하면 사과부터 먼저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직 못 그렸습니다. 생각이 나질 않아요. 생각이 나질 않아서 도저히 그려볼 수가 없겠으니 그걸 하나 사진으로 찍어와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걸 보고 그리겠습니다"해요.

미상불 그리기 어려운 내용이거든요. 무슨 그림인지 말할까요? 빨랫줄에 제비새끼 세 마리가 앉아 있어요. 그런데 어미제비가 먹이를 물어다 이 새끼들 먹이려고 새끼들 머리 위를 맴돌며 퍼덕거리고 있습니다. 제비새끼 세 마리는 어미의 그 모습을 향하여 저마다 고개를 빼들어 입을 딱딱 벌리고 있어요. 그 노란 입들을 딱딱 벌리고 있어요. 사진의 내용을 바로 어미제비가 그 모이를 새끼들 입에 막 넣어주려고 하는 찰나를 딱 찍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게 그렇게 좋아 보였던 것입니다. 제가 그런 것을 한번 찍어 볼래도 그런 장면을 만나야 찍지요. 참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순간을 잡은 사진이었습니다. 하나님 향한 교인들의 자세가 다 그 제비새끼들만 같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목을 있는 대로 빼고 입을 크게 벌려 어머니가 메뚜기를 주든 개구리를 주든 주는 대로 받아먹는 것입니다. 바로 '고넬료 스타일'인 것입니다. 그런 고넬료를 보고 베드로가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베드로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지금 베드로는 그런 분위기에서 설교를 하고 있어요. 어미를 향하여 입을 딱딱 벌리고 있는 새끼제비들처럼, 고넬료는 그렇게 보고 듣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입을 엽니다.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전적으로,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까요. 무슨 말을 하든지 온전히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이니까요. 그렇게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베드로의 입에서는 현하(懸河)의 기세로 복음의 진수가 쏟아져 나옵니다. 주변적인 얘기가 아니라 골수가, 중심이, 핵심이 개진되는 것입니다.…… 긴 얘기가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제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설교의 분위기입니다. 둘째는 베드로 자신의 받은 은혜입니다. 설교란 우선 듣는 사람이 먼저 기도 많이 하고 나에게 주시는 은혜이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니 준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이것만은 확실해요.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먼저 은혜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설교자의 마음에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맺힌 것이 있으면 안돼요. 뭔가 섭섭함이나 괴로움이나 눈에 걸리는 것이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깨끗한 마음-----설교자 자신의 마음에 이 같은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설교하는 동안에 딴 생각이 나도 안되고 다른 일에 생각이 끌려도 안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그는 벌써 은혜에 감격이 넘쳐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은혜가 충만해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전권적인 역사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오묘하게, 내게 환상을 주시고 고넬료에게 계시를 주시고, 이렇게 해서 이 같은 역사가 이루어졌다-----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이루어 놓으신 역사입니다. 나 베드로는 지금 끌려가고 있을 뿐입니다. 베드로는 그 사실을 깨닫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증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는다고 하 는 감격을 먼저 지니고 있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고넬료를 구원하시고자 하셔서 말씀을 전하려 하시고 그 온 가족을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나아가서는 고넬료를 통하여 로마와 온세계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비밀한 선교적 경륜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플랜(God's plan) 속에서 내가 이 시간에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역사를 생각하면서 감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가만히 보니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렇게 착한 분이 있구나, 이렇게 귀한 분이 있구나 싶어요. 보아하니 이 사람은 이방사람입니다.

고넬료-----외모는 군입니다. 로마군인입니다. 군복을 입은 군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신분으로 보아도 민족으로 보아도 그의 과거로 보아도 안될 일인데 말입니다. 백부장이요 최일선에서 싸우는 군인입니다. 이런 사람을 앞에 놓고 복음을 전하다니, 인간적 상식으로는 얘기가 안되지요. 어떻게 그런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그런 사람이 예수를 믿으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셨어요. 여기 헬라어로 '프로소포렘프테스'라 하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프로소포'는 얼굴이라는 말이고 '렘프테스'는 취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facetake가 합성된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얼굴을 보고 택하시지 않습니다. 인종이나 피부색이나, 신장이나 미모나, 재산이나 지식이나 따위를 보시고 사람을 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그 중심을 보시고 사람을 취하시는 것입니다. 진실을 보시고 취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 방법입니다.

신분이나 지위가 상관없어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에 아랑곳없으십니다. 언제나 중심을 보십니다. 깊은 중심만을 보십니다. 오직 경건입니다. 그것도 행위가 있는 경건, 바리새인처럼 말만 하는 경건이 아니라 행위가 있는 경건입니다. 이런 경건, 행동적 경건을 가진 사람을 보십니다. 이런 사람에게 복음을 주십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도다"라고 베드로가 말씀합니다. 그가 먼저 깨달았어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하나님의 그 선택적 은혜, 그리고 그 귀한 것을 먼저 깨달았어요. 베드로가 먼저 깨닫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은혜가 없으면 설교가 되지 않을 뿐더러 설교를 한다해도 은혜가 없습니다. 설교자 자신의 마음속에 그 같은 은혜가 있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같은 은혜가 있고, 깨달음이 있고, 그 깨달음에 충만해 있을 때에 이제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첫 주제는 본문말씀에 나타난 대로 화평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평의 복음, 평강의 복음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있어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213절로 17절을 보세요.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 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儀文)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자세히 주석을 달아 설명하고 있습니다. 화평의 복음,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이냐 이방이냐, 또 계급과 관계없이 특별히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이루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해한 복음입니다. 그 총 주제는 화평의 복음, 평강의 복음, 샬롬의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제를 제시하고 나서 그는 조목조목 들어 설명을 합니다. 우리가 늘 외고 있는 '사도신경'과 같습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았다-----이것이 주제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자시다, 그런고로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다-----여러분은 예수를 어떻게 이 해합니까? 기독교는 무엇입니까? 종교학적으로 말할 때에는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계시자로 믿는 유일신 종교입니다. 종교학적으로 말하는 바 기독교에 대한 정의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믿습니까? 예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만이 계시자요, 예수만이 심판주요, 예수만이 생명의 주인이요, 길과 진리요 생명이라고 믿는 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오셨고 하나님 의 유일한 계시자이십니다-----이렇게 베드로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에서 뒤늦게 이야기합니다마는 천하 인간의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이름을 주시지 않으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절대성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병고침과 이적과 기사와, 혹은 귀신 내쫓는 일…… 이 모든 일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당신께서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거 하셨다는 것입니다.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심히 착한 일을 하셨어요. 치유하셨고, 귀신을 내쫓았어요. 바다를 잔잔케 하셨어 요. 보리떡 두 개와 물고기 다섯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셨어요. 죽은 자를 살리셨어요. 이 모든 착한 일들, 이 모든 사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가 하나님께로서 오셨고 하나님 되시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고 베드로는 증거 합니다.

세 번째로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다,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 곧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압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장래도 내다봅니다. 그 속에는 모든 진리가 다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네 번째로는, 그는 부활하셨다고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초대교 회, 특별히 사도행전에 있어서는 십자가와 부활이 골치 아픈 문제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이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교회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누이 설명한 것인즉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다, 유대사람들이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우리들이요, 그 예수를 부활시키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 사건 속에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집약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우리가 그 증인이다, 보았다, 우리는 분명히 보았다, 십자가도 보았고 부활하신 모습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배운 것이 아닙니다. 들은 것이 아닙니다. 본 것입니다. 체험한 것입니다. 이론이 아니요 철학이 아니요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엄연한 사건입니다.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 하는 것입니다. 법정에 증인으로 서면 검사나 변호사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하고 묻지 않습니다. 그렇게 묻는 심문은 없어요. 다만 보았느냐, 들었느냐 하고 물을 뿐입니다. 보았어야 되고 들었어야 되고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해요. 그래서 서는 것이 증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모든 제자들이 말씀합니다. '우리가 증인이다'라고.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전도하라고 명령하셨다' '우리는 사명을 받았다, 지상명령을 받았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주님께서 명하셨다'라고.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 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심판주가 되십니다. 만민의 구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다시 오셔서 심판하시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하고 나서 그와 우리와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43절을 보세요.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죄 사함을 받는다, 이것입니다. 그런고로 여러분, 꼭 명심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목적은 흥청 흥청 잘살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 목적은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 문제는 죄에 걸려 있거든요. 우리의 그 모든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죄권을 행사하십니다. 네 죄 사함 받았느니라-----그만이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 말고는 아무도 이 말 할 사람 없습니다. 죄 사함 받는다-----이것이 예수 믿는 목적입니다. 예수 믿는 목적을 하나만 말하라고 한다면 그 대답은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죄 사함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고, 죄 사함 받음으로 영생 얻는 것입니다. 죄 사함 받으니 복도 받는 것입니다. 핵심은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우리의 기도가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회개하고, 순간 순간 다시 죄 사함 받고, 사죄 받은 은혜를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배하는 목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보니 중요한 것은 "믿으면"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증거를 믿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증거해 주는 사실을 믿으면, 사실을 보고 증거 하는 사람들의 증거를 믿으면 그 사건이 나에게 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그 사실은 역사적 사실일 뿐,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믿어야 합니다.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네 죄 사함 받았느니라-----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고 십자가를 쳐다볼 수 있을 때에야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이 귀한 진리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과 꼭 같은 내용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진수입니다. 화평의 복음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의 그러한 말씀을 속속들이 받아들입니다. 다음 시간에 말씀하겠습니다마는 고넬료는 그 말씀 그대로 믿고, 그대로 받으면서 받는 순간에 벌써 그 마음속에 큰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성령이 임하는 것을 봅니다. 베드로는 바로 세례를 베풉니다. 유대의 규례를 어기고 세례를 베풉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를 세우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전한 복음입니다. 이방인에게 전한 복음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이 은혜, 이 복음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  

 

복음의 진수(사도행전 10:3443)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頒布)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 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강해도 이제 41회에 접어들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복음의 진수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흔히 본문을 별명 지어 '베드로의 복음'이라고도 말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이해하고 믿고 전하고 있는 복음이 이 가운데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교리, 우리가 믿어야 하고 또 이미 믿고 있는바 기독교 신앙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복음 중의 복음이요, 성경 중의 성경이라 할만합니다. 복음의 진수가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흔히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핵심 부분이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고넬료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 리는 또 다른 측면을 봅니다. 설교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냐? 그 설교의 표본, 능력 있는 설교의 본보기가 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미도 우리가 보았습니다마는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가 시작되는 벽두에, 사도행전 214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는 3천 명 앞에서 도도히 설교를 폅니다. 그 설교야말로 설교의 표본이요, 복음의 진수입니다. 이것은 주로 유대사람들을 상대로 하여 펼치는 설교였습니다.

거기서도 그가 믿고 그가 깨닫고 그가 평생 전한 그 복음이 요약되어 설명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은, 같은 내용입니다 마는, 이방인을 상대로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방인의 대표라고도 할만한 사람 고넬료 앞에서 일장 설교를 펼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설교의 분위기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어떤 분위기 속에서 입을 열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진주를 개한테 던지지 말라고.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어디서나 전해야 하겠습니다마는 심령상태가 지금 개같이 되어 있어서 도리어 물어 찢고 발악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발광을 하고 있는, 그런 사람 앞이라면 거기에 대고 설교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곧 설교에는 분위기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자세로 말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분위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오늘 베드로가 설교하게 되어 있는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먼저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선하신 자리입니다. 고넬료에게 계시를 주셔서 베드로를 청해오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도 환상을 주셔서 고넬료의 초청에 응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쌍방을 다 주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도로 고넬료와 베드로가 한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만나는 이 장면에는 어떠한 장벽도 없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높은 경륜과 주도적 섭리 안에서 이같은 만남의 관계, 설교하는 자와 듣는 자의 올바른 자세와 관계를 이루어 놓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예비할 때에 도 언제나 그렇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요, 목사님이 저 자리에 서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셨다고 하는 확실한 고백과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임할 때에 비로소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분위기가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가졌던 본래의 편견이나 전통이나 규범이나 습관이나, 혹은 생활의 규례 같은 것을 다 어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 나가드리면 좀 전까지 가졌던 편견을 버려야 할 때가 많아요. 내가 가졌던 고집이며 생활 습관, 버려야 될 것이 많아요. 풍습이나 그 문화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지라도 때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에 합당치 못한 일이 있습니다. 때묻은 심령, 잘못된 생각, 잘못된 세계관, 이런 것은 과감히 버리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우선합니다. 내 마음에는 안 들어도, 내 본래적 생각에는 맞지 않아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주님의 뜻이니까 이쪽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뜻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때때로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내 뜻을 버려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어요.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주님을 따를 수 있을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고넬료와 베드로가 다 바로 그런 관계에 있습니다. 저마다 종래에 가졌던 규례나 생활이나 철학을 다 버리고, 오직 위로부터 주신 말씀에만 순종하고 있습니다. , 베드로는 지금 고넬료의 신앙적 경건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고넬료 같은 교인들만 앞에 놓고 설교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고 생각합니다. 설교할 때에 제일 어려운 것이 뭐냐하면 앞에 앉아 그러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조는 것까지는 그렇다해도 하품까지 하고 기지개도 켜요. 이건 참 곤란합니다. 그럴 바에는 좀 멀리라도 앉았으면 좋겠는데 바로 앞에 앉아서 조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참 어렵고, 또 옆에 사람과 이야기를 합니다.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잘 들어둬' 하는 것 같아요. 내가 들을 생각은 안하고 다른 사람보고 들으라 합니다. 그렇게 마음쓰고 앉았어요. 이런 것, 다 좋지 않아요.

아무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가 참 중요합니다. 고넬료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좋습니까? 설교자가 들어오는 순간에 벌 써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절하는 그 자세가 베드로를 향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향한 마음이 베드로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베드로 가 잘생겨서라거나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이 그렇게 나타난 것이지요. 엎드려 절을 하되 얼마나 간절하게 했든지 베드로가 황송해서 얼결에 "나도 사람이오, 일어나시오" 하지 않습니까? 나아가 고넬료의 하는 말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가 듣고자 하여 다 이렇듯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얼마나 귀한 시간입니까? 저는 언젠가 한번 목포에 갔다가 특상을 받았다고 하는 사진 한 장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돌아와 잘 아는 화가에게 그 사진의 내용과 같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화가 분이 그 다음부터는 만나기만 하면 사과부터 먼저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직 못 그렸습니다. 생각이 나질 않아요. 생각이 나질 않아서 도저히 그려볼 수가 없겠으니 그걸 하나 사진으로 찍어와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걸 보고 그리겠습니다"해요.

미상불 그리기 어려운 내용이거든요. 무슨 그림인지 말할까요? 빨랫줄에 제비새끼 세 마리가 앉아 있어요. 그런데 어미제비가 먹이를 물어다 이 새끼들 먹이려고 새끼들 머리 위를 맴돌며 퍼덕거리고 있습니다. 제비새끼 세 마리는 어미의 그 모습을 향하여 저마다 고개를 빼들어 입을 딱딱 벌리고 있어요. 그 노란 입들을 딱딱 벌리고 있어요. 사진의 내용을 바로 어미제비가 그 모이를 새끼들 입에 막 넣어주려고 하는 찰나를 딱 찍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게 그렇게 좋아 보였던 것입니다. 제가 그런 것을 한번 찍어 볼래도 그런 장면을 만나야 찍지요. 참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순간을 잡은 사진이었습니다. 하나님 향한 교인들의 자세가 다 그 제비새끼들만 같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목을 있는 대로 빼고 입을 크게 벌려 어머니가 메뚜기를 주든 개구리를 주든 주는 대로 받아먹는 것입니다. 바로 '고넬료 스타일'인 것입니다. 그런 고넬료를 보고 베드로가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베드로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지금 베드로는 그런 분위기에서 설교를 하고 있어요. 어미를 향하여 입을 딱딱 벌리고 있는 새끼제비들처럼, 고넬료는 그렇게 보고 듣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입을 엽니다.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전적으로,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까요. 무슨 말을 하든지 온전히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이니까요. 그렇게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베드로의 입에서는 현하(懸河)의 기세로 복음의 진수가 쏟아져 나옵니다. 주변적인 얘기가 아니라 골수가, 중심이, 핵심이 개진되는 것입니다.…… 긴 얘기가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제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설교의 분위기입니다. 둘째는 베드로 자신의 받은 은혜입니다. 설교란 우선 듣는 사람이 먼저 기도 많이 하고 나에게 주시는 은혜이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니 준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이것만은 확실해요.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먼저 은혜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설교자의 마음에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맺힌 것이 있으면 안돼요. 뭔가 섭섭함이나 괴로움이나 눈에 걸리는 것이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깨끗한 마음-----설교자 자신의 마음에 이 같은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설교하는 동안에 딴 생각이 나도 안되고 다른 일에 생각이 끌려도 안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그는 벌써 은혜에 감격이 넘쳐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은혜가 충만해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전권적인 역사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오묘하게, 내게 환상을 주시고 고넬료에게 계시를 주시고, 이렇게 해서 이 같은 역사가 이루어졌다-----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이루어 놓으신 역사입니다. 나 베드로는 지금 끌려가고 있을 뿐입니다. 베드로는 그 사실을 깨닫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증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는다고 하 는 감격을 먼저 지니고 있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고넬료를 구원하시고자 하셔서 말씀을 전하려 하시고 그 온 가족을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나아가서는 고넬료를 통하여 로마와 온세계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비밀한 선교적 경륜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플랜(God's plan) 속에서 내가 이 시간에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역사를 생각하면서 감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가만히 보니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렇게 착한 분이 있구나, 이렇게 귀한 분이 있구나 싶어요. 보아하니 이 사람은 이방사람입니다.

고넬료-----외모는 군입니다. 로마군인입니다. 군복을 입은 군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신분으로 보아도 민족으로 보아도 그의 과거로 보아도 안될 일인데 말입니다. 백부장이요 최일선에서 싸우는 군인입니다. 이런 사람을 앞에 놓고 복음을 전하다니, 인간적 상식으로는 얘기가 안되지요. 어떻게 그런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그런 사람이 예수를 믿으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셨어요. 여기 헬라어로 '프로소포렘프테스'라 하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프로소포'는 얼굴이라는 말이고 '렘프테스'는 취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facetake가 합성된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얼굴을 보고 택하시지 않습니다. 인종이나 피부색이나, 신장이나 미모나, 재산이나 지식이나 따위를 보시고 사람을 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그 중심을 보시고 사람을 취하시는 것입니다. 진실을 보시고 취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 방법입니다.

신분이나 지위가 상관없어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에 아랑곳없으십니다. 언제나 중심을 보십니다. 깊은 중심만을 보십니다. 오직 경건입니다. 그것도 행위가 있는 경건, 바리새인처럼 말만 하는 경건이 아니라 행위가 있는 경건입니다. 이런 경건, 행동적 경건을 가진 사람을 보십니다. 이런 사람에게 복음을 주십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도다"라고 베드로가 말씀합니다. 그가 먼저 깨달았어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하나님의 그 선택적 은혜, 그리고 그 귀한 것을 먼저 깨달았어요. 베드로가 먼저 깨닫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은혜가 없으면 설교가 되지 않을 뿐더러 설교를 한다해도 은혜가 없습니다. 설교자 자신의 마음속에 그 같은 은혜가 있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같은 은혜가 있고, 깨달음이 있고, 그 깨달음에 충만해 있을 때에 이제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첫 주제는 본문말씀에 나타난 대로 화평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평의 복음, 평강의 복음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있어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213절로 17절을 보세요.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 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儀文)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자세히 주석을 달아 설명하고 있습니다. 화평의 복음,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이냐 이방이냐, 또 계급과 관계없이 특별히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이루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해한 복음입니다. 그 총 주제는 화평의 복음, 평강의 복음, 샬롬의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제를 제시하고 나서 그는 조목조목 들어 설명을 합니다. 우리가 늘 외고 있는 '사도신경'과 같습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았다-----이것이 주제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자시다, 그런고로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다-----여러분은 예수를 어떻게 이 해합니까? 기독교는 무엇입니까? 종교학적으로 말할 때에는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계시자로 믿는 유일신 종교입니다. 종교학적으로 말하는 바 기독교에 대한 정의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믿습니까? 예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만이 계시자요, 예수만이 심판주요, 예수만이 생명의 주인이요, 길과 진리요 생명이라고 믿는 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오셨고 하나님 의 유일한 계시자이십니다-----이렇게 베드로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에서 뒤늦게 이야기합니다마는 천하 인간의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이름을 주시지 않으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절대성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병고침과 이적과 기사와, 혹은 귀신 내쫓는 일…… 이 모든 일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당신께서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거 하셨다는 것입니다.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심히 착한 일을 하셨어요. 치유하셨고, 귀신을 내쫓았어요. 바다를 잔잔케 하셨어 요. 보리떡 두 개와 물고기 다섯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셨어요. 죽은 자를 살리셨어요. 이 모든 착한 일들, 이 모든 사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가 하나님께로서 오셨고 하나님 되시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고 베드로는 증거 합니다.

세 번째로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다,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 곧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압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장래도 내다봅니다. 그 속에는 모든 진리가 다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네 번째로는, 그는 부활하셨다고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초대교 회, 특별히 사도행전에 있어서는 십자가와 부활이 골치 아픈 문제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이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교회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누이 설명한 것인즉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다, 유대사람들이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우리들이요, 그 예수를 부활시키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 사건 속에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집약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우리가 그 증인이다, 보았다, 우리는 분명히 보았다, 십자가도 보았고 부활하신 모습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배운 것이 아닙니다. 들은 것이 아닙니다. 본 것입니다. 체험한 것입니다. 이론이 아니요 철학이 아니요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엄연한 사건입니다.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 하는 것입니다. 법정에 증인으로 서면 검사나 변호사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하고 묻지 않습니다. 그렇게 묻는 심문은 없어요. 다만 보았느냐, 들었느냐 하고 물을 뿐입니다. 보았어야 되고 들었어야 되고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해요. 그래서 서는 것이 증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모든 제자들이 말씀합니다. '우리가 증인이다'라고.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전도하라고 명령하셨다' '우리는 사명을 받았다, 지상명령을 받았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주님께서 명하셨다'라고.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 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심판주가 되십니다. 만민의 구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다시 오셔서 심판하시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하고 나서 그와 우리와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43절을 보세요.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죄 사함을 받는다, 이것입니다. 그런고로 여러분, 꼭 명심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목적은 흥청 흥청 잘살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 목적은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 문제는 죄에 걸려 있거든요. 우리의 그 모든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죄권을 행사하십니다. 네 죄 사함 받았느니라-----그만이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 말고는 아무도 이 말 할 사람 없습니다. 죄 사함 받는다-----이것이 예수 믿는 목적입니다. 예수 믿는 목적을 하나만 말하라고 한다면 그 대답은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죄 사함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고, 죄 사함 받음으로 영생 얻는 것입니다. 죄 사함 받으니 복도 받는 것입니다. 핵심은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우리의 기도가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회개하고, 순간 순간 다시 죄 사함 받고, 사죄 받은 은혜를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배하는 목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보니 중요한 것은 "믿으면"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증거를 믿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증거해 주는 사실을 믿으면, 사실을 보고 증거 하는 사람들의 증거를 믿으면 그 사건이 나에게 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그 사실은 역사적 사실일 뿐,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믿어야 합니다.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네 죄 사함 받았느니라-----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고 십자가를 쳐다볼 수 있을 때에야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이 귀한 진리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과 꼭 같은 내용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진수입니다. 화평의 복음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의 그러한 말씀을 속속들이 받아들입니다. 다음 시간에 말씀하겠습니다마는 고넬료는 그 말씀 그대로 믿고, 그대로 받으면서 받는 순간에 벌써 그 마음속에 큰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성령이 임하는 것을 봅니다. 베드로는 바로 세례를 베풉니다. 유대의 규례를 어기고 세례를 베풉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를 세우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전한 복음입니다. 이방인에게 전한 복음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이 은혜, 이 복음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