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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일꾼 바나바(사도행전 11:19~30)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다(數多)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 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扶助)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實行)하여 바나바와 사 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예루살렘교회-----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시 고, 그리고 성령이 임함으로 말미암아서 예루살렘교회는 마침내 확 고히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루살렘 안에 안주하 려고 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저들은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성령은 말씀 하시지만 저들은 성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큰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이 핍박으로 인하여 복음은 온세계로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마치 불똥이 튀는 것과도 같이 전해지는데, 이렇게 전해지는 노정을 차례차례 설명하는 것이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입니다.
복음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먼저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그것도 핍박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빌립이 사마리아로 가는가 하면 또 베드로가 가이사랴의 고넬료네 집에 가서 로마사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지정학적으로는 가이사랴이지만 인종이나 문화적으로 볼 때에는 이미 로마까지 갔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이제 오늘의 본문을 보면 안디옥까지 갔다고 합니다.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라고 말씀합니다. "안디옥까지"-----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안디옥 중심의 선교 사역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시사해 줍니다. 교회가 세계교회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무르익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일이 어떻게,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안디옥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누구의 선 교 전략에서도 아닙니다. 누구의 선교 열심으로도 아닙니다. 누구의 신학도 누구의 사상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지식과 정열을 통하여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어느 단체의 선교전략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략, 그것은 곧 핍박이라고 하는 전략입니다. 환난과 핍박-----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부정해 버리고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의 전략,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선교는 이루어졌습니다. 결국은 스데반이 순교했지요.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이 사람이 돌에 맞아 죽는 사건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사도들만 남겨놓고 다 흩어졌습니다. 흩어진 길에 저들은 전도를 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는 대로 익명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찬, 익명의 이방 교민 그리스도인, 그들을 통해서 안디옥교회가 세워집니다. 누구라고 이름이 적혀 있지 않습니다. 누가 주도했고 누가 전도했다는 말이 없지마는 어쨌건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피난해온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미도 보았습니다마는 사도행전 8장 4절에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고 말씀합니다. 이 한마디가 그렇게 중요할 수가 없어요. 흩어질 때에 그 사람들이 저 가고 싶은 길로 간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집을 버리고 저들은 도망을 합니다. 정처 없이 도망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 하나를 지키기 위하여, 예수 바로 믿고 살기 위하여 저들은 고향을 떠나고 친척을 떠나고 재산을 다 버리고 이방으로 정처 없이 나섭니다.
나설 때에는 이렇듯 인간적으로는 참 불행하게 나섰지만 나서서 방황하면서 저들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우리가 여기 왔느냐---여기서 의미를 찾게 됩니다. 왜 내가 이 고생을 하느냐, 왜 내 재산을 다 잃어버렸느냐, 왜 직업도 떠나야 했더냐----흩어질 때에는 강압적으로 할 수 없이 흩어진 것입니다 마는 흩어진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율배반적이요 역설적입니다. 흩어지는 것은 피동적이나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발적입니다. 자원적입니다. 억지로 된 현실 속에서 이제 선교적 자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운명이 어떻게 주어졌는지, 지금 어떤 현실 속에 있는지 모르나 알 바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선교적 의미를 찾으면서 여기서 자발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안디옥까지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환난을 당했고, 그래서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까지 갔다-----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몇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핍박 때문에 흩어졌지 저들의 자의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컨대 피난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직업도 버렸습니다. 그런고로 아주 홀가분합니다. 이미 집은 떠났고, 돌아갈 생각도 없습니다. 고향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서게 됩니다. 또 한 가지는, 환난 중에 있었기 때문에, 환난 중에 가정을 버리고 집을 버리고 떠날 정도의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강인합니다. 독실한 믿음입니다. 이제 어떤 사건을 만나든지 상관없습니다. 혹 맞아죽어도 상관없습니다. 어떤 핍박을 받아도 절대로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요? 핍박 가운데서 얻어진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들의 신앙입니다.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이 사람들은 우선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치지 않고 스데반을 친 것입니다. 지성인들입니다. 그들이 이제 고향을 떠나서 이렇게 먼 곳으로 피난을 온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이 헬라파 사람들이요 헬라 문화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언어가 통합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도망은 왔다 하더라도 벙어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말이 안 통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이니 헬라말을 잘합니다. 그들이 헬라 문화권에 온 것이니 어디 가나 능통하게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요. 다시말 하면 문화적 장벽과 문화적 장애가 없는, 유리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불러서 여기 갖다놓으신 것입니다. 전 도하기에 아주 적절한 사람들이니까요. 핍박과 환난 속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이기에 헬라 문화에 대중없이 동화되지는 않습니다. 요샛말로 세속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충분한 선교사적 자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또 나아가서는 본문에 보는 대로 헬라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자질, 그럴 수 있는 언어적 능력을 다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안디옥이 어디입니까? 당시 로마 의 셋째 가는 도시입니다. 로마,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가 안디옥입니다. 2천 년 전 그 당시로는 세계 3대 도시의 하나인 것입니다. 역사가들의 기록을 보면 그 당시에 벌써 인구가 오십 만 명이었다고 해요. 굉장한 수준입니다. 특기할 것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 오십만 명의 7분의 1이 유대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곧 헬라파 유대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거기에 살았어요. 당연히 회당도 많고 유대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도하기에 아주 적절한 곳이지요. 여기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시가 크므로 그만큼 영향력이 크고, 여기서 복음이 전파될 때 에 그것은 온 세계로 복음이 확산되는 데에 아주 유리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디옥까지 복음이 전파되고 이방사람들이 예수 믿게 되었다는 소문이 나니까 예루살렘교회에서는 교회의 일치성을 위하여, 교회 연합을 위하여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바나바, 23절에 보니 대단히 은혜로운 말씀을 합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역시 바나바는 좋은 사람입니다. 몇 사람이 믿는가, 어떤 일이 생겼는가, 과거가 어떤 사람들인가 따위는 묻지 않았습니다. 이방사람이냐 유대사람이냐-----이런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은혜를 보세요. 사람을 보아도 은혜부터 먼저 보세요. 사람을 사귈 때에도 은혜를 보고 사귀세요. 은혜 있는 사람과 사귀면 여러분도 은혜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 없는 사람하고 사귀면 있던 믿음도 다 떨어집니다. 이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마치 식사와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이 있지요? 무엇을 먹든지 맛있게 먹습니다. 말을 해도 이거 맛있다 저거 맛있다 하면서 먹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사람하고 같이 먹으면 나도 입맛이 돌아요. 나도 맛있게 먹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음식을 내놓으면서까지 "좀 상한 냄새가 나는데 어떨는지 모르겠어요"하면서 내놓습니다. 그러니 이것 먹을 수가 있나요? 게다가 음식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잔소리가 많은 사람하고 앉아서 먹으려면 입맛이 싹없어집니다. 그와 꼭 같아요. 여러분, 교회에 나와서도 은혜가 충만해 있는 사람 옆에 앉으면 여러분도 은혜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옆에 앉아 가지고 끄덕끄덕 졸고 있다거나 낙서나 하고 있다거나 기지개 켜고 하품이나 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나까지 그렇게 됩니다.
모름지기 은혜 있는 자와 사귈 것입니다. 우선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 돈이 많으냐 적으냐, 상관없습니다.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 상관없습니다. 믿는 사람의 눈에는 항상 은혜만 보이는 것입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한 바나바가 볼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밖에 보지 않았어요. 이것이 바나바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헬라파 유대인들을 구원하셔서 많은 사람이 예수 믿게 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이방사람도 성령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는 문화적인 얘기, 인간적인 편견 같은 것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사람도 구원하시는구나,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는구나, 안디옥사람들까지도 구원하시는구나,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 나타나고 있구나-----이런 것을 보았기 때문에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할 뿐 다른 말이 없어요. 주님을 열심히 섬기세요. 굳게 붙어서 주님과 함께 하십시다-----이렇게 권면을 합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바나바는 첫째, 착한 사람입니다. 선한 사람입니다. 둘째,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4장 37절을 보면 오순절 성령이 강림해서 모두가 은혜 충만 할 때에 바나바는 자기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어 구제했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마음에만 간직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실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이 사람에게 특별히 나타나는 것은 사도 바울의 옹호자였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아직도 큰 사도로 역사하기 이전에 먼저 예루살렘에 갔고, 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고 전도하고자 했지마는 심지어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 도 만나주지 않았어요. 바울을 보고 '이 사람이 한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다메섹까지 가던 사람인데 지금은 또 무슨 음모를 꾸미려고 하는 것인가'싶어 무서워서 사람들이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모두가 피하고 있을 때에 바나바가 나타났었고, 바나바는 바울에게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는 바울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고, 그리고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를 만났고, 세례를 받았고 하는 이야기를 전부 듣고는 '아, 은혜가 거기 있었구나, 하나님께서 역사 하셨구나' 하고 바울을 믿었습니다. 믿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추천을 했어요.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오, 하고 말입니다.
바울 스스로가 자기를 증명할 수 없지 않습니까? 바나바가 먼저 바울의 사람됨과 그리스도인 됨을 알고, 알아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전도하고 옹호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 바나바는 이렇듯 중요한 사람이요, 덕망이 높은 사람입니다. 그 의 덕을 다시 분석해 말씀드리지요. 그는 우선 남의 장점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장점을 못 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믿음의 사람, 은혜의 사람은 남의 장점을 봅니다.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장단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약점도 있고 강점도 있습니다. 그런데 덕 있는 사람은 그 중에서 장점을 봅니다.
또한 바나바는 사람을 알아보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그 사람 못 믿겠다 하고 의심하지만 바나바는 변화한 사울을 알아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 변화하고 중생한 것을 인정할 줄 압니까? 우 리는 때때로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된 것을 보면서도 과거에 그 사람이 전과자였는데, 과거에 이런 실수를 범한 사람인데…… 하고, 변화한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인정하지 아니하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 기는 회개하고 새사람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면서도 다른 사람의 회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변화한 모습을 알아달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의 변화한 존재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남의 족보까지 들먹이면서 이러쿵저러쿵 합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래서 위대한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을 더 크게 알고 있어요. 예수로 말미암아 변화하고 중생한 바울임을 그는 믿고 있어요.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고 변화한 바울을 믿어요.
그런고로 그는 자기의 명예를 걸고 사도 바울을 천거했던 것입니다.
또한 바나바는 허물을 용서할 줄 압니다. 지난날에 큰 허물이 있었으나 이것을 용서하고 돌아보지 않을 수 있는 덕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바나바의 전 생애를 보면 그는 그렇듯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점점 높아지는 데 반하여 그 자신은 존재가 희미해집니다. 바나바는 질투가 없는 사람입니다. 바울에 대하여 추호라도 내가 추천한 사람이다. 내가 천거한 사람이다, 내가 돌아본 사람이다, 내가 키운 사람이다, 하고 자기를 내세우는 법이 없어요.
하나님의 큰 사역 앞에서 인간적인 질투며 좁은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 세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착한 사람인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 바나바는 다소까지 가서 바울을 만납니다. "바나바 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25, 26절)-----바나바는 고향에 가서 묻혀 있는 바울을 데려옵니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세웁니다. 함께 복음을 전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선교사로서의 발동이 걸려요.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장에 넘어가면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할 때에 바울과 바나바의 두 사람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년 동안 바나바와 함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하면서 요샛말로 말하면 적성검사에 합격한 것입니다. 선교사로서의 실력검사에 합격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인정합니다. 그리하여 선교사로 파송됩니다.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바나바가 1년 동안 바울의 후견인이 되어준 것입니다. 매우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기의 권위로써 그의 신분을 보장했고 동사 동역 하면서 주의 일을 어떤 의미에서는 가르치기도 하고 권고도 하고 인도하는 중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굳게 서도록 인도한 것입니다.
저렇듯 바울이 바울 되게 되는 데는 바나바의 추천이 절대적으로 힘이 되었습니다. 그의 후원과 그의 공로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역시 바나바는 큰 인물입니다. 자기가 훌륭한 일을 한 것도 훌륭하지만 다른 사람을 훌륭한 일 하게 한 것은 더욱 훌륭한 일입니다. 나 혼자서 하는 것을 가산적(加算的)이라 한다면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함께 하는 것은 승법적(乘法的)인 것입니다. 얼마나 능률적이고 더 효과적인지 알 수 없어요. 바나바는 이래서 위대합니다. 바나바의 이름은 성경에 많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라는 사람 하나를 이렇게 내세워 놓았다는 것으로 인해서 얼마나 큰일을 한 것이 됩니까?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한 것입니까?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바울은 아무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다소에 그냥 묻혀 살고 말았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별명이 붙여집니다.
크리스티아누스 곧 크리스찬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됩니다. 크리스티아누스-----그리스도의 사람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 자신이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예수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비방하면서 붙여준 것입니다. 예수밖에 모르는 사람들, 예수쟁이들, 예수 도당-----이런 투로 붙여준 것입니다. 교만한 유대인들이 자기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결국은 이 때부터 유대종교에, 유대교라고 하는 종교의 한 분파인 양 되었던 기독교가 비로소 기독교로 독립하게 됩니다. 사실은 그 때까지 기독교는 유대교의 하나로 취급되었습니다. 유대교 안에 속한 기독교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밖에 모르는 사람들, 예수 도당, 예수에 속한 사람들이라 호칭하게 되니까 여기서 기독교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중심한, 예수만을 높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가 생깁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마침내 새로운 의미의 교회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종교학적으로 독립하는 때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 수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밖에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만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이후로 2천 년-우리는 다같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된 것입니다.
큰 일꾼 바나바(사도행전 11:19~30)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다(數多)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 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扶助)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實行)하여 바나바와 사 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예루살렘교회-----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시 고, 그리고 성령이 임함으로 말미암아서 예루살렘교회는 마침내 확 고히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루살렘 안에 안주하 려고 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저들은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성령은 말씀 하시지만 저들은 성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큰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이 핍박으로 인하여 복음은 온세계로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마치 불똥이 튀는 것과도 같이 전해지는데, 이렇게 전해지는 노정을 차례차례 설명하는 것이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입니다.
복음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먼저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그것도 핍박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빌립이 사마리아로 가는가 하면 또 베드로가 가이사랴의 고넬료네 집에 가서 로마사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지정학적으로는 가이사랴이지만 인종이나 문화적으로 볼 때에는 이미 로마까지 갔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이제 오늘의 본문을 보면 안디옥까지 갔다고 합니다.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라고 말씀합니다. "안디옥까지"-----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안디옥 중심의 선교 사역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시사해 줍니다. 교회가 세계교회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무르익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일이 어떻게,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안디옥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누구의 선 교 전략에서도 아닙니다. 누구의 선교 열심으로도 아닙니다. 누구의 신학도 누구의 사상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지식과 정열을 통하여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어느 단체의 선교전략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략, 그것은 곧 핍박이라고 하는 전략입니다. 환난과 핍박-----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부정해 버리고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의 전략,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선교는 이루어졌습니다. 결국은 스데반이 순교했지요.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이 사람이 돌에 맞아 죽는 사건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사도들만 남겨놓고 다 흩어졌습니다. 흩어진 길에 저들은 전도를 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는 대로 익명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찬, 익명의 이방 교민 그리스도인, 그들을 통해서 안디옥교회가 세워집니다. 누구라고 이름이 적혀 있지 않습니다. 누가 주도했고 누가 전도했다는 말이 없지마는 어쨌건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피난해온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미도 보았습니다마는 사도행전 8장 4절에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고 말씀합니다. 이 한마디가 그렇게 중요할 수가 없어요. 흩어질 때에 그 사람들이 저 가고 싶은 길로 간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집을 버리고 저들은 도망을 합니다. 정처 없이 도망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 하나를 지키기 위하여, 예수 바로 믿고 살기 위하여 저들은 고향을 떠나고 친척을 떠나고 재산을 다 버리고 이방으로 정처 없이 나섭니다.
나설 때에는 이렇듯 인간적으로는 참 불행하게 나섰지만 나서서 방황하면서 저들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우리가 여기 왔느냐---여기서 의미를 찾게 됩니다. 왜 내가 이 고생을 하느냐, 왜 내 재산을 다 잃어버렸느냐, 왜 직업도 떠나야 했더냐----흩어질 때에는 강압적으로 할 수 없이 흩어진 것입니다 마는 흩어진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율배반적이요 역설적입니다. 흩어지는 것은 피동적이나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발적입니다. 자원적입니다. 억지로 된 현실 속에서 이제 선교적 자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운명이 어떻게 주어졌는지, 지금 어떤 현실 속에 있는지 모르나 알 바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선교적 의미를 찾으면서 여기서 자발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안디옥까지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환난을 당했고, 그래서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까지 갔다-----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몇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핍박 때문에 흩어졌지 저들의 자의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컨대 피난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직업도 버렸습니다. 그런고로 아주 홀가분합니다. 이미 집은 떠났고, 돌아갈 생각도 없습니다. 고향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서게 됩니다. 또 한 가지는, 환난 중에 있었기 때문에, 환난 중에 가정을 버리고 집을 버리고 떠날 정도의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강인합니다. 독실한 믿음입니다. 이제 어떤 사건을 만나든지 상관없습니다. 혹 맞아죽어도 상관없습니다. 어떤 핍박을 받아도 절대로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요? 핍박 가운데서 얻어진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들의 신앙입니다.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이 사람들은 우선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치지 않고 스데반을 친 것입니다. 지성인들입니다. 그들이 이제 고향을 떠나서 이렇게 먼 곳으로 피난을 온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이 헬라파 사람들이요 헬라 문화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언어가 통합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도망은 왔다 하더라도 벙어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말이 안 통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이니 헬라말을 잘합니다. 그들이 헬라 문화권에 온 것이니 어디 가나 능통하게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요. 다시말 하면 문화적 장벽과 문화적 장애가 없는, 유리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불러서 여기 갖다놓으신 것입니다. 전 도하기에 아주 적절한 사람들이니까요. 핍박과 환난 속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이기에 헬라 문화에 대중없이 동화되지는 않습니다. 요샛말로 세속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충분한 선교사적 자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또 나아가서는 본문에 보는 대로 헬라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자질, 그럴 수 있는 언어적 능력을 다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안디옥이 어디입니까? 당시 로마 의 셋째 가는 도시입니다. 로마,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가 안디옥입니다. 2천 년 전 그 당시로는 세계 3대 도시의 하나인 것입니다. 역사가들의 기록을 보면 그 당시에 벌써 인구가 오십 만 명이었다고 해요. 굉장한 수준입니다. 특기할 것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 오십만 명의 7분의 1이 유대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곧 헬라파 유대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거기에 살았어요. 당연히 회당도 많고 유대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도하기에 아주 적절한 곳이지요. 여기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시가 크므로 그만큼 영향력이 크고, 여기서 복음이 전파될 때 에 그것은 온 세계로 복음이 확산되는 데에 아주 유리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디옥까지 복음이 전파되고 이방사람들이 예수 믿게 되었다는 소문이 나니까 예루살렘교회에서는 교회의 일치성을 위하여, 교회 연합을 위하여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바나바, 23절에 보니 대단히 은혜로운 말씀을 합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역시 바나바는 좋은 사람입니다. 몇 사람이 믿는가, 어떤 일이 생겼는가, 과거가 어떤 사람들인가 따위는 묻지 않았습니다. 이방사람이냐 유대사람이냐-----이런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은혜를 보세요. 사람을 보아도 은혜부터 먼저 보세요. 사람을 사귈 때에도 은혜를 보고 사귀세요. 은혜 있는 사람과 사귀면 여러분도 은혜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 없는 사람하고 사귀면 있던 믿음도 다 떨어집니다. 이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마치 식사와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이 있지요? 무엇을 먹든지 맛있게 먹습니다. 말을 해도 이거 맛있다 저거 맛있다 하면서 먹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사람하고 같이 먹으면 나도 입맛이 돌아요. 나도 맛있게 먹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음식을 내놓으면서까지 "좀 상한 냄새가 나는데 어떨는지 모르겠어요"하면서 내놓습니다. 그러니 이것 먹을 수가 있나요? 게다가 음식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잔소리가 많은 사람하고 앉아서 먹으려면 입맛이 싹없어집니다. 그와 꼭 같아요. 여러분, 교회에 나와서도 은혜가 충만해 있는 사람 옆에 앉으면 여러분도 은혜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옆에 앉아 가지고 끄덕끄덕 졸고 있다거나 낙서나 하고 있다거나 기지개 켜고 하품이나 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나까지 그렇게 됩니다.
모름지기 은혜 있는 자와 사귈 것입니다. 우선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 돈이 많으냐 적으냐, 상관없습니다.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 상관없습니다. 믿는 사람의 눈에는 항상 은혜만 보이는 것입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한 바나바가 볼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밖에 보지 않았어요. 이것이 바나바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헬라파 유대인들을 구원하셔서 많은 사람이 예수 믿게 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이방사람도 성령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는 문화적인 얘기, 인간적인 편견 같은 것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사람도 구원하시는구나,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는구나, 안디옥사람들까지도 구원하시는구나,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 나타나고 있구나-----이런 것을 보았기 때문에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할 뿐 다른 말이 없어요. 주님을 열심히 섬기세요. 굳게 붙어서 주님과 함께 하십시다-----이렇게 권면을 합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바나바는 첫째, 착한 사람입니다. 선한 사람입니다. 둘째,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4장 37절을 보면 오순절 성령이 강림해서 모두가 은혜 충만 할 때에 바나바는 자기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어 구제했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마음에만 간직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실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이 사람에게 특별히 나타나는 것은 사도 바울의 옹호자였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아직도 큰 사도로 역사하기 이전에 먼저 예루살렘에 갔고, 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고 전도하고자 했지마는 심지어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 도 만나주지 않았어요. 바울을 보고 '이 사람이 한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다메섹까지 가던 사람인데 지금은 또 무슨 음모를 꾸미려고 하는 것인가'싶어 무서워서 사람들이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모두가 피하고 있을 때에 바나바가 나타났었고, 바나바는 바울에게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는 바울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고, 그리고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를 만났고, 세례를 받았고 하는 이야기를 전부 듣고는 '아, 은혜가 거기 있었구나, 하나님께서 역사 하셨구나' 하고 바울을 믿었습니다. 믿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추천을 했어요.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오, 하고 말입니다.
바울 스스로가 자기를 증명할 수 없지 않습니까? 바나바가 먼저 바울의 사람됨과 그리스도인 됨을 알고, 알아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전도하고 옹호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 바나바는 이렇듯 중요한 사람이요, 덕망이 높은 사람입니다. 그 의 덕을 다시 분석해 말씀드리지요. 그는 우선 남의 장점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장점을 못 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믿음의 사람, 은혜의 사람은 남의 장점을 봅니다.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장단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약점도 있고 강점도 있습니다. 그런데 덕 있는 사람은 그 중에서 장점을 봅니다.
또한 바나바는 사람을 알아보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그 사람 못 믿겠다 하고 의심하지만 바나바는 변화한 사울을 알아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 변화하고 중생한 것을 인정할 줄 압니까? 우 리는 때때로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된 것을 보면서도 과거에 그 사람이 전과자였는데, 과거에 이런 실수를 범한 사람인데…… 하고, 변화한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인정하지 아니하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 기는 회개하고 새사람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면서도 다른 사람의 회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변화한 모습을 알아달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의 변화한 존재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남의 족보까지 들먹이면서 이러쿵저러쿵 합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래서 위대한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을 더 크게 알고 있어요. 예수로 말미암아 변화하고 중생한 바울임을 그는 믿고 있어요.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고 변화한 바울을 믿어요.
그런고로 그는 자기의 명예를 걸고 사도 바울을 천거했던 것입니다.
또한 바나바는 허물을 용서할 줄 압니다. 지난날에 큰 허물이 있었으나 이것을 용서하고 돌아보지 않을 수 있는 덕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바나바의 전 생애를 보면 그는 그렇듯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점점 높아지는 데 반하여 그 자신은 존재가 희미해집니다. 바나바는 질투가 없는 사람입니다. 바울에 대하여 추호라도 내가 추천한 사람이다. 내가 천거한 사람이다, 내가 돌아본 사람이다, 내가 키운 사람이다, 하고 자기를 내세우는 법이 없어요.
하나님의 큰 사역 앞에서 인간적인 질투며 좁은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 세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착한 사람인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 바나바는 다소까지 가서 바울을 만납니다. "바나바 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25, 26절)-----바나바는 고향에 가서 묻혀 있는 바울을 데려옵니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세웁니다. 함께 복음을 전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선교사로서의 발동이 걸려요.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장에 넘어가면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할 때에 바울과 바나바의 두 사람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년 동안 바나바와 함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하면서 요샛말로 말하면 적성검사에 합격한 것입니다. 선교사로서의 실력검사에 합격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인정합니다. 그리하여 선교사로 파송됩니다.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바나바가 1년 동안 바울의 후견인이 되어준 것입니다. 매우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기의 권위로써 그의 신분을 보장했고 동사 동역 하면서 주의 일을 어떤 의미에서는 가르치기도 하고 권고도 하고 인도하는 중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굳게 서도록 인도한 것입니다.
저렇듯 바울이 바울 되게 되는 데는 바나바의 추천이 절대적으로 힘이 되었습니다. 그의 후원과 그의 공로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역시 바나바는 큰 인물입니다. 자기가 훌륭한 일을 한 것도 훌륭하지만 다른 사람을 훌륭한 일 하게 한 것은 더욱 훌륭한 일입니다. 나 혼자서 하는 것을 가산적(加算的)이라 한다면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함께 하는 것은 승법적(乘法的)인 것입니다. 얼마나 능률적이고 더 효과적인지 알 수 없어요. 바나바는 이래서 위대합니다. 바나바의 이름은 성경에 많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라는 사람 하나를 이렇게 내세워 놓았다는 것으로 인해서 얼마나 큰일을 한 것이 됩니까?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한 것입니까?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바울은 아무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다소에 그냥 묻혀 살고 말았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별명이 붙여집니다.
크리스티아누스 곧 크리스찬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됩니다. 크리스티아누스-----그리스도의 사람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 자신이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예수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비방하면서 붙여준 것입니다. 예수밖에 모르는 사람들, 예수쟁이들, 예수 도당-----이런 투로 붙여준 것입니다. 교만한 유대인들이 자기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결국은 이 때부터 유대종교에, 유대교라고 하는 종교의 한 분파인 양 되었던 기독교가 비로소 기독교로 독립하게 됩니다. 사실은 그 때까지 기독교는 유대교의 하나로 취급되었습니다. 유대교 안에 속한 기독교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밖에 모르는 사람들, 예수 도당, 예수에 속한 사람들이라 호칭하게 되니까 여기서 기독교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중심한, 예수만을 높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가 생깁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마침내 새로운 의미의 교회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종교학적으로 독립하는 때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 수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밖에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만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이후로 2천 년-우리는 다같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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