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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자기 인식(로마서 6장 6절~11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중국 춘추시대의 철학자이자 도가의 시조인 노자(老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의 일을 잘 아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다.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그 이상으로 총명한 사람이다. 그리고 남을 이기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자신을 이겨내는 사람은 그 이상으로 강한 사람이다'---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 가장 총명한 사람이요,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칼럼니스트가 "현대인에게 특징지을 수 있는 성격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라고 당대의 석학을 보고 물었습니다. 그 석학의 대답은 간단명료했습니다. "현대인은 우주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으며, 세상에 대해서는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앞으로 점점 더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앞으로 점점 더 무식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대체로 보면 우리는 감정적인 면에서 자신을 알고 있습니다.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압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나는 어찌어찌하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기초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느낌을 너무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우리는 육체적으로 자신을 압니다. '나는 젊었다, 나에게는 건강이 있다, 나의 외모는 어떻다'라고 육체적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육체적 존재이기에 육체적으로 자신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온전하지는 않습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으로 나를 아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내가 있습니다. 남들이 예쁘다고 하면 예쁜 줄 알고, 남들이 나를 안다고 하면 정말 아는 줄로 믿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에게는 능력이 있다. 당신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에게 또는 그 회사에 정말로 내가 필요한 것처럼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자기, 그 속에서 자기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세 가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존재에 대한 발견입니다. 이것이 본질이요 종말론적 존재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옷을 입었다가 벗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옷을 입었건 벗었건 간에 내 몸은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는 자동차에 탔다가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는 학창시절 무척이나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것으로 내 가치를 높여보기도 합니다마는 나이만 들어보십시오. 건망증이 생겨서 그간에 익혔던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남는 것은 누렇게 절은 옛날 졸업장뿐입니다. 머리 속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뭘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사회적 지위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회에서 인정해주는 지위도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순간이 오면 뒷사람에게 내놓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정년퇴직을 하고 그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서 퇴직과 함께 몇 달 못살고 죽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사회가 인정해주는 자기밖에 몰랐던 사람입니다. '나'라고 하는 본래적 존재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회가 필요 없다고 하는 순간, 정말 나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믿고 실의에 빠져 죽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영적 존재가 건강하고 온전하게 서 있을 때에는 남이 내게 하는 어떤 말도 사회적 지위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영적 존재입니다. 이것이 건전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 존재에 대한 자기 인식이 모든 것의 우선이요 근본이요 궁극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떠나고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내 존재는 그대로 있어야 합니다. 흔들리는 자는 시원치 않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첫째,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를 가졌든, 얼마나 알든, 얼마나 정직하든, 얼마나 진실하든지 간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먼저 정직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를 못하고 자기 자신을 번번이 속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듯 한번 두번 속여 버릇하면 나중에는 어디까지가 사실인지조차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기가 자기에게 속게 됩니다. 거짓으로 꾸며진 자신을 참모습으로 알고 살다가 어느 순간 그 존재가 펑하고 터지면서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나의 존재가 드러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형편이 없었던가'하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오랫동안 자기가 자기를 속여 왔기 때문에 허상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정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동시에 자기의 유죄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절대로 자기의 우월감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특권을 인정하기보다는 거부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실수할 때에는 나도 그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사회적 지위가 높고 낮을 수는 있습니다마는 사람됨의 본질은 똑같은 것입니다. 베드로도 "다른 사람이 실수하는 것을 보면서 나 자신을 살피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제가 모스크바에 갔을 때, 어느 식당에서 겪은 일입니다. 무척 시장기가 들어 식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나온 음식이 제게 맞지 않아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배가 고팠던 터라 약간의 빵과 수프만을 먹고는 그냥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가 물러서자마자 누군가가 번개처럼 달려들어 남은 음식을 모두 먹어치우는 것이 아닙니까?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에 거지가 우글우글합니다. 그들은 돈만을 요구하는 우리네의 사치스런 거지들과는 다릅니다. 당장 주린 배를 해결해야 하는 거지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우리가 겪은 6․25때를 떠올려보았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미군들이 먹다 남긴 잡동사니 음식을 모아 끓인 꿀꿀이죽도 마다 않고 먹었습니다. 담배꽁초 같은 이물질이 들어 있어도 개의치 않고 맛나게 먹었습니다. 그것도 없어서 못 먹던 시절이 우리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음식 낭비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어찌해서 이리도 시건방져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려웠던 과거를 너무도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이야기가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가 어떻게 남의 이야기일 수만 있으며, 남의 실수가 어떻게 남의 실수일 수만 있습니까? 오늘 아침에도 신문을 보니 어떤 사람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자살했다는 기사가 났더군요. 이것 역시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죽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대하면서 내 존재의 가치, 내 존재의 의미를 똑바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든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대우를 받아왔든지 간에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고, 나의 죄인됨을 인정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 안에서 사는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그 시선 앞에서 늘 정직하게 자기 모습을 내놓고 자기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자기'라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첫째, 물려받은 바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끗하게 인정하십시다. 몸이라는 것도 키가 크든지 작든지, 그것은 물려받은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보니 물려받은 그 얼굴을 예뻐지게 만들려고 어지간히 애를 쓰더군요. 크림을 바르고 마사지를 받고 그것도 모자라 자르고 꿰매고 하며 예쁘게 꾸며보려고 무척 애를 씁니다마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 본바탕이 그것뿐인데 제대로 되겠습니까? 특히, 외국으로 이민간 우리 아이들 사이에 이런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백인촌에 가서 살며 주로 백인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가보니 모두들 피부가 하얀데 자기만 노랗거든요. 그래서 아침마다 세수를 다섯 차례나 한답니다. 자꾸 씻다보면 혹시 깨끗해질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물려받은 그 본바탕이 누런데 씻는다고 하얘지겠습니까? 또 어떤 아이는 왜 저 아이들처럼 내 눈은 파랗지 않고 까마냐고 손가락으로 쑤시기도 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키가 작다고 늘 높은 굽의 구두만 신고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도 모자라서 걸을 때에도 몸을 될 수 있는 대로 늘이면서 걷습니다. 그런다고 물려받은 그 키가 1센티미터라도 더 높아집니까? 물려받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려들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피곤한 사람입니다. 남까지도 피곤하게 만듭니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후하면 후한대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주어진 그대로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 더우면 더운 대로 좋게 살고, 추우면 추운 대로 좋게 사십시오. 주어진 바를 부정하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입니다. 바로 이것이 한계입니다. 몸뿐만 아니라 신분도 물려받은 것입니다. 특히나 옛날에는 양반의 자식은 양반이요, 상놈의 자식은 상놈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물려받은 바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세계관도 지식도 재능도 때로는 속성, 성격, 적성까지도 물려받은 부분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얻어진 바를 정직하게 인정해야만 자기를 알게 됩니다. '자기'는 분명히 물려받은 것입니다.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둘째, 얻어진 바가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지식과 경험을 얻었습니다. 재산과 재능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물려받은 바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가 물려받은 것이요, 얼마가 내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까? 이것을 바로 평가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다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큰 교만은 없습니다.
물려받은 것이 전부요, 내가 노력한 것은 아주 적은 부분이었음을 깨달아야만 자기 존재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내가 노력해야 될 부분이 있었습니다. 내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된 일이 많습니다. 내가 버린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비로소 자기를 바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셋째, 여겨지는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justify되는 부분입니다. 은사에 관한 것입니다. 거저 얻어지는 것입니다. 수고는 적었는데 대가는 컸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 이어의 이적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렇듯 내가 드린 바는 적은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역사는 컸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주어지는 이 부분에 대해서 바른 평가를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루어진 일을 놓고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대가가 적다고 불평까지 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기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얼마나 거저 얻어진 부분이 많습니까? 구약성경 사무엘하 9장에 므비보셋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므비보셋은 절뚝발이요 꼽추입니다.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 왕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의 친구였던 요나단을 생각해서 그의 하나 남은 혈육인 므비보셋을 곁으로 불러들여 그를 자신의 식탁에 앉게 하고 귀히 대접합니다. 므비보셋의 할아버지 사울에게 주어졌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물려줍니다. 사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의 손자인 므비보셋을 불러들여 은혜를 베풉니다. 므비보셋은 선한 대우를 받으면서 그 상황에서 어떻게 자기 인식을 해야 할지 어리둥절합니다.
보십시오. 자기 자신은 꼽추요 절뚝발이입니다. 그런가하면 그의 할아버지는 다윗 왕에 대하여 원수입니다. 므비보셋은 원수의 손자입니다. 물론 아버지 요나단은 다윗의 가장 가까운 친구입니다. 그는 다윗 왕의 친구의 아들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면 절뚝발이요,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자기를 생각하면 원수요. 아버지를 생각하고 자기를 생각하면 왕의 총애를 받는 왕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왕 앞에서 말합니다.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자기 인식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너는 내 아들이다"하는 다윗의 말을 그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 평가가 가장 정확한 것입니다. 또한 이 평가가 그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자기 인식을 바로 합니다. 자기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겨지는 바에 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사실을 사실화하면서 시작합니다. reality를 realize 하는 데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현실화해야 합니다. 은혜의 현실화, 자기 존재에 대한 진정한 인정, 그리고 사실화해나갈 때에 비로소 신앙의 바른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안다'라는 말이 6절과 9 절에, '믿는다'라는 말이 8절에, '여기노라'라는 말이 11절에 나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믿어야 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야만 합니다. 그리고 현실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현실이 우리의 모든 생활 구석구석에 그대로 영향을 미칩니다. 믿음에는 옳고 그름의 분별없이 어떠한 깨달음도 없이 막연하게 무작정 믿어버리는 맹신(盲信)이 있는가 하면, 이성을 잃고 덮어놓고 믿는 광신(狂信)도 있습니다. 혼미하게 무엇인가 찾아 헤매는 미신(迷信)도 있습니다. 이들은 절대로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사실에 근거하고, 역사성에 근거하고, 진리에 근거합니다. 이것을 내가 알면서부터 믿고, 믿으면서부터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요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안다'라고 하는 문제를 상당히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아는 진리가, 받아들이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사건의 뜻을 알고,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알고, 하나님의 세계를 알면서 그 안에 있는 내 존재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참된 신앙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6절)…" 예수와 함께 죽어진다---거기서부터 신앙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얼마나 철저하게 죽었느냐?'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뒤, 한 청년이 다가와서 "죽는다는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습니다. 목사님은 그 청년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합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죽은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공로가 많은 사람들이라고 칭찬을 해보게나. 그리고 다시 한번 찾아가서 이번에는 나쁜 놈들이라고 욕을 해보게나." 그 말대로 해본 청년이 다시 목사님을 찾아와서는 "아무 대답도 없던데요"라고 다소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빙긋 웃고 "그것이 바로 죽었다는 뜻일세"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죽었느냐로 예수를 잘 믿느냐 못 믿느냐를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대하여 얼마나 민감합니까? 요즘 사람들은 민감하다못해 과민합니다. 남들이 조금 인정해주면 좋다고 떠들다가도 조금 억울한 말이라도 한마디 들으면 축 처져서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세상사에 대하여 지나치게 민감합니다. 아직도 내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근심이 있고 걱정이 있습니다. 아직도 내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문제가 많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내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죽을 필요가 있습니다. 정(情)과 함께 욕심도 십자가에 못박아버려야 합니다. 십자가란 죽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죽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7절)" --죄와 관계없이 자유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참된 신앙을 가질 수 있겠다고 말씀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얼마나 자유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평가됩니다. 세상 것들로부터 양심이 자유합니다.
누구에게도 거침이 없습니다. 욕심에 대해서도 거침이 없고, 비방에 대해서도 거침이 없습니다. 죽음과 사망에 대해서도, 죄에 대해서도 거침이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사단의 권세에 대해서도, 세상의 권세에 대해서도 아무 거침이 없습니다. 전혀 억압을 느끼지 않습니다. 무한한 자유를 느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별명이 '자유인'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영적인 지고(至高)의 자유를 향유하고 있을 때에 그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에 매이고 저것에 매여 정신없이 끌려 다니는 것은 노예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온전한 자유인을 의미합니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은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얻어진 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를 앞에 하시면 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환자들은 어김없이 그 말씀을 듣고 감격해서 그대로 병석에서 일어섭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긴 이야기입니다. 네 죄를 사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신 죄를 내가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십자가로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는 이웃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그 많은 날 동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무엇엔가 빠져 밤낮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를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구하고 있을 뿐, 자신이 이미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용서함 받은 것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자신을 용서하는 데서부터 가능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의인으로 행세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로마서 8장 1절은 말씀합니다. '아멘'했으면 이젠 내가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다시 옛사람으로 매여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여기에 자유함이 있고, 진정한 의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내 의로, 그리스도께서 인정해주시고 베푸신 의를 내 의로 수용하는 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마음 속 깊숙이 받아들여서 마지막에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역사,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11절)"---내 스스로 여겨야 합니다. 내가 인정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받을만해서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사랑을 받을만한 것입니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뵙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온전히 자유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사랑할 줄 압니다. 자기가 소중합니다.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역사적인 나를 생각하십시오. 현재의 실제적인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종말론적인 나를 주님의 약속 가운데서 평가하십시오. 그래야만 성령에 이끌리어 살고, 그리스도의 주장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를 중심해서 생각하고 행하고 또한 역사할 수 있습니다. 나 아닌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이고, 나를 바로 알고 찾아서 살아갈 때에 그 안에서 참으로 위대한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존재를, 자기 인식을 그리스도 안에서 똑바로 하게 될 때에야 귀한 역사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신앙인의 자기 인식(로마서 6장 6절~11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중국 춘추시대의 철학자이자 도가의 시조인 노자(老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의 일을 잘 아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다.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그 이상으로 총명한 사람이다. 그리고 남을 이기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자신을 이겨내는 사람은 그 이상으로 강한 사람이다'---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 가장 총명한 사람이요,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칼럼니스트가 "현대인에게 특징지을 수 있는 성격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라고 당대의 석학을 보고 물었습니다. 그 석학의 대답은 간단명료했습니다. "현대인은 우주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으며, 세상에 대해서는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앞으로 점점 더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앞으로 점점 더 무식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대체로 보면 우리는 감정적인 면에서 자신을 알고 있습니다.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압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나는 어찌어찌하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기초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느낌을 너무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우리는 육체적으로 자신을 압니다. '나는 젊었다, 나에게는 건강이 있다, 나의 외모는 어떻다'라고 육체적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육체적 존재이기에 육체적으로 자신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온전하지는 않습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으로 나를 아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내가 있습니다. 남들이 예쁘다고 하면 예쁜 줄 알고, 남들이 나를 안다고 하면 정말 아는 줄로 믿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에게는 능력이 있다. 당신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에게 또는 그 회사에 정말로 내가 필요한 것처럼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자기, 그 속에서 자기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세 가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존재에 대한 발견입니다. 이것이 본질이요 종말론적 존재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옷을 입었다가 벗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옷을 입었건 벗었건 간에 내 몸은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는 자동차에 탔다가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는 학창시절 무척이나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것으로 내 가치를 높여보기도 합니다마는 나이만 들어보십시오. 건망증이 생겨서 그간에 익혔던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남는 것은 누렇게 절은 옛날 졸업장뿐입니다. 머리 속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뭘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사회적 지위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회에서 인정해주는 지위도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순간이 오면 뒷사람에게 내놓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정년퇴직을 하고 그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서 퇴직과 함께 몇 달 못살고 죽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사회가 인정해주는 자기밖에 몰랐던 사람입니다. '나'라고 하는 본래적 존재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회가 필요 없다고 하는 순간, 정말 나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믿고 실의에 빠져 죽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영적 존재가 건강하고 온전하게 서 있을 때에는 남이 내게 하는 어떤 말도 사회적 지위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영적 존재입니다. 이것이 건전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 존재에 대한 자기 인식이 모든 것의 우선이요 근본이요 궁극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떠나고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내 존재는 그대로 있어야 합니다. 흔들리는 자는 시원치 않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첫째,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를 가졌든, 얼마나 알든, 얼마나 정직하든, 얼마나 진실하든지 간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먼저 정직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를 못하고 자기 자신을 번번이 속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듯 한번 두번 속여 버릇하면 나중에는 어디까지가 사실인지조차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기가 자기에게 속게 됩니다. 거짓으로 꾸며진 자신을 참모습으로 알고 살다가 어느 순간 그 존재가 펑하고 터지면서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나의 존재가 드러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형편이 없었던가'하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오랫동안 자기가 자기를 속여 왔기 때문에 허상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정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동시에 자기의 유죄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절대로 자기의 우월감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특권을 인정하기보다는 거부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실수할 때에는 나도 그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사회적 지위가 높고 낮을 수는 있습니다마는 사람됨의 본질은 똑같은 것입니다. 베드로도 "다른 사람이 실수하는 것을 보면서 나 자신을 살피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제가 모스크바에 갔을 때, 어느 식당에서 겪은 일입니다. 무척 시장기가 들어 식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나온 음식이 제게 맞지 않아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배가 고팠던 터라 약간의 빵과 수프만을 먹고는 그냥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가 물러서자마자 누군가가 번개처럼 달려들어 남은 음식을 모두 먹어치우는 것이 아닙니까?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에 거지가 우글우글합니다. 그들은 돈만을 요구하는 우리네의 사치스런 거지들과는 다릅니다. 당장 주린 배를 해결해야 하는 거지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우리가 겪은 6․25때를 떠올려보았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미군들이 먹다 남긴 잡동사니 음식을 모아 끓인 꿀꿀이죽도 마다 않고 먹었습니다. 담배꽁초 같은 이물질이 들어 있어도 개의치 않고 맛나게 먹었습니다. 그것도 없어서 못 먹던 시절이 우리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음식 낭비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어찌해서 이리도 시건방져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려웠던 과거를 너무도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이야기가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가 어떻게 남의 이야기일 수만 있으며, 남의 실수가 어떻게 남의 실수일 수만 있습니까? 오늘 아침에도 신문을 보니 어떤 사람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자살했다는 기사가 났더군요. 이것 역시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죽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대하면서 내 존재의 가치, 내 존재의 의미를 똑바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든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대우를 받아왔든지 간에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고, 나의 죄인됨을 인정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 안에서 사는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그 시선 앞에서 늘 정직하게 자기 모습을 내놓고 자기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자기'라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첫째, 물려받은 바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끗하게 인정하십시다. 몸이라는 것도 키가 크든지 작든지, 그것은 물려받은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보니 물려받은 그 얼굴을 예뻐지게 만들려고 어지간히 애를 쓰더군요. 크림을 바르고 마사지를 받고 그것도 모자라 자르고 꿰매고 하며 예쁘게 꾸며보려고 무척 애를 씁니다마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 본바탕이 그것뿐인데 제대로 되겠습니까? 특히, 외국으로 이민간 우리 아이들 사이에 이런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백인촌에 가서 살며 주로 백인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가보니 모두들 피부가 하얀데 자기만 노랗거든요. 그래서 아침마다 세수를 다섯 차례나 한답니다. 자꾸 씻다보면 혹시 깨끗해질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물려받은 그 본바탕이 누런데 씻는다고 하얘지겠습니까? 또 어떤 아이는 왜 저 아이들처럼 내 눈은 파랗지 않고 까마냐고 손가락으로 쑤시기도 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키가 작다고 늘 높은 굽의 구두만 신고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도 모자라서 걸을 때에도 몸을 될 수 있는 대로 늘이면서 걷습니다. 그런다고 물려받은 그 키가 1센티미터라도 더 높아집니까? 물려받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려들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피곤한 사람입니다. 남까지도 피곤하게 만듭니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후하면 후한대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주어진 그대로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 더우면 더운 대로 좋게 살고, 추우면 추운 대로 좋게 사십시오. 주어진 바를 부정하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입니다. 바로 이것이 한계입니다. 몸뿐만 아니라 신분도 물려받은 것입니다. 특히나 옛날에는 양반의 자식은 양반이요, 상놈의 자식은 상놈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물려받은 바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세계관도 지식도 재능도 때로는 속성, 성격, 적성까지도 물려받은 부분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얻어진 바를 정직하게 인정해야만 자기를 알게 됩니다. '자기'는 분명히 물려받은 것입니다.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둘째, 얻어진 바가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지식과 경험을 얻었습니다. 재산과 재능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물려받은 바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가 물려받은 것이요, 얼마가 내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까? 이것을 바로 평가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다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큰 교만은 없습니다.
물려받은 것이 전부요, 내가 노력한 것은 아주 적은 부분이었음을 깨달아야만 자기 존재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내가 노력해야 될 부분이 있었습니다. 내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된 일이 많습니다. 내가 버린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비로소 자기를 바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셋째, 여겨지는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justify되는 부분입니다. 은사에 관한 것입니다. 거저 얻어지는 것입니다. 수고는 적었는데 대가는 컸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 이어의 이적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렇듯 내가 드린 바는 적은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역사는 컸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주어지는 이 부분에 대해서 바른 평가를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루어진 일을 놓고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대가가 적다고 불평까지 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기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얼마나 거저 얻어진 부분이 많습니까? 구약성경 사무엘하 9장에 므비보셋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므비보셋은 절뚝발이요 꼽추입니다.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 왕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의 친구였던 요나단을 생각해서 그의 하나 남은 혈육인 므비보셋을 곁으로 불러들여 그를 자신의 식탁에 앉게 하고 귀히 대접합니다. 므비보셋의 할아버지 사울에게 주어졌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물려줍니다. 사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의 손자인 므비보셋을 불러들여 은혜를 베풉니다. 므비보셋은 선한 대우를 받으면서 그 상황에서 어떻게 자기 인식을 해야 할지 어리둥절합니다.
보십시오. 자기 자신은 꼽추요 절뚝발이입니다. 그런가하면 그의 할아버지는 다윗 왕에 대하여 원수입니다. 므비보셋은 원수의 손자입니다. 물론 아버지 요나단은 다윗의 가장 가까운 친구입니다. 그는 다윗 왕의 친구의 아들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면 절뚝발이요,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자기를 생각하면 원수요. 아버지를 생각하고 자기를 생각하면 왕의 총애를 받는 왕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왕 앞에서 말합니다.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자기 인식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너는 내 아들이다"하는 다윗의 말을 그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 평가가 가장 정확한 것입니다. 또한 이 평가가 그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자기 인식을 바로 합니다. 자기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겨지는 바에 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사실을 사실화하면서 시작합니다. reality를 realize 하는 데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현실화해야 합니다. 은혜의 현실화, 자기 존재에 대한 진정한 인정, 그리고 사실화해나갈 때에 비로소 신앙의 바른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안다'라는 말이 6절과 9 절에, '믿는다'라는 말이 8절에, '여기노라'라는 말이 11절에 나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믿어야 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야만 합니다. 그리고 현실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현실이 우리의 모든 생활 구석구석에 그대로 영향을 미칩니다. 믿음에는 옳고 그름의 분별없이 어떠한 깨달음도 없이 막연하게 무작정 믿어버리는 맹신(盲信)이 있는가 하면, 이성을 잃고 덮어놓고 믿는 광신(狂信)도 있습니다. 혼미하게 무엇인가 찾아 헤매는 미신(迷信)도 있습니다. 이들은 절대로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사실에 근거하고, 역사성에 근거하고, 진리에 근거합니다. 이것을 내가 알면서부터 믿고, 믿으면서부터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요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안다'라고 하는 문제를 상당히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아는 진리가, 받아들이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사건의 뜻을 알고,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알고, 하나님의 세계를 알면서 그 안에 있는 내 존재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참된 신앙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6절)…" 예수와 함께 죽어진다---거기서부터 신앙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얼마나 철저하게 죽었느냐?'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뒤, 한 청년이 다가와서 "죽는다는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습니다. 목사님은 그 청년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합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죽은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공로가 많은 사람들이라고 칭찬을 해보게나. 그리고 다시 한번 찾아가서 이번에는 나쁜 놈들이라고 욕을 해보게나." 그 말대로 해본 청년이 다시 목사님을 찾아와서는 "아무 대답도 없던데요"라고 다소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빙긋 웃고 "그것이 바로 죽었다는 뜻일세"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죽었느냐로 예수를 잘 믿느냐 못 믿느냐를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대하여 얼마나 민감합니까? 요즘 사람들은 민감하다못해 과민합니다. 남들이 조금 인정해주면 좋다고 떠들다가도 조금 억울한 말이라도 한마디 들으면 축 처져서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세상사에 대하여 지나치게 민감합니다. 아직도 내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근심이 있고 걱정이 있습니다. 아직도 내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문제가 많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내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죽을 필요가 있습니다. 정(情)과 함께 욕심도 십자가에 못박아버려야 합니다. 십자가란 죽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죽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7절)" --죄와 관계없이 자유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참된 신앙을 가질 수 있겠다고 말씀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얼마나 자유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평가됩니다. 세상 것들로부터 양심이 자유합니다.
누구에게도 거침이 없습니다. 욕심에 대해서도 거침이 없고, 비방에 대해서도 거침이 없습니다. 죽음과 사망에 대해서도, 죄에 대해서도 거침이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사단의 권세에 대해서도, 세상의 권세에 대해서도 아무 거침이 없습니다. 전혀 억압을 느끼지 않습니다. 무한한 자유를 느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별명이 '자유인'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영적인 지고(至高)의 자유를 향유하고 있을 때에 그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에 매이고 저것에 매여 정신없이 끌려 다니는 것은 노예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온전한 자유인을 의미합니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은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얻어진 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를 앞에 하시면 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환자들은 어김없이 그 말씀을 듣고 감격해서 그대로 병석에서 일어섭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긴 이야기입니다. 네 죄를 사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신 죄를 내가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십자가로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는 이웃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그 많은 날 동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무엇엔가 빠져 밤낮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를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구하고 있을 뿐, 자신이 이미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용서함 받은 것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자신을 용서하는 데서부터 가능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의인으로 행세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로마서 8장 1절은 말씀합니다. '아멘'했으면 이젠 내가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다시 옛사람으로 매여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여기에 자유함이 있고, 진정한 의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내 의로, 그리스도께서 인정해주시고 베푸신 의를 내 의로 수용하는 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마음 속 깊숙이 받아들여서 마지막에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역사,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11절)"---내 스스로 여겨야 합니다. 내가 인정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받을만해서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사랑을 받을만한 것입니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뵙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온전히 자유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사랑할 줄 압니다. 자기가 소중합니다.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역사적인 나를 생각하십시오. 현재의 실제적인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종말론적인 나를 주님의 약속 가운데서 평가하십시오. 그래야만 성령에 이끌리어 살고, 그리스도의 주장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를 중심해서 생각하고 행하고 또한 역사할 수 있습니다. 나 아닌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이고, 나를 바로 알고 찾아서 살아갈 때에 그 안에서 참으로 위대한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존재를, 자기 인식을 그리스도 안에서 똑바로 하게 될 때에야 귀한 역사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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