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
한 신앙인의 감사 찬송(시편 103편 1절~18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사람의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깨달음에 있습니다. 깨달음만이 아니라 좀더 나아가서는 고맙게 여기는 마음 곧 감사하는 마음에 행복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떠한 여건에 있든지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 그만큼 그는 행복한 것입니다.
종은 울려서 소리가 나야만 종입니다. 소리가 나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닙니다. 어떠한 여건에서건 그 마음으로부터 고마운 마음이 우러나고 이것이 가슴 가득히 채워져서 감격으로 화할 때에야 사람은 행복한 법입니다.
오늘의 이 세대는 불평과 불만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불평 불만이 화평과 만족으로 채워지는 것 보셨습니까? 여건을 바꾸어준다고 사고방식이 달라지던가요? 누구할 것 없이 갈수록 태산입니다. 생각해보면 오늘의 우리는 분에 넘치리만큼 잘삽니다. 그런데 불평 불만은 못살 때보다도 더 많습니다.
세계를 한바퀴 돌아보면 우리가 잘사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중국 다녀온 분들을 보면 이구동성(異口同聲) 대한민국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만큼 잘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살던 옛 시절의 그 어느 때보다도 불평이 많고 문제가 많습니다.
육체적 본능이나 물질적 소유욕을 채운다고 행복해지지는 않습니다. 식욕을 채우고 명예욕, 권위욕을 채운다고 기쁨이 오고 만족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만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순간적이요 찰나적인 것입니다. 금방 불평으로 바뀌고 마는 것입니다.
참감사는 깊은 깨달음에서 비롯됩니다. 생각을 깊이 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법입니다. 무엇을 감사하고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기뻐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사람된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받아서 기쁜 사람이 있고 주어서 기쁜 사람이 있습니다. 먹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있고 남을 먹임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문제는 생각을 깊이 할 수 있어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가정에 들어갔더니 문간에 큰 그림틀이 하나 걸려 있습니다. 비교적 자주 볼 수 있는 그림입디다. 식구도 없이 홀로 외롭게 사는 노인이 다 낡은 식탁에 말라빠진 빵 하나를 놓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그 그림 밑에 어느 시인의 싯귀가 적혀 있습니다. '눈물 젖은 빵 조각을 먹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인생의 맛을 모른다' ---- 옳은 말입니다.
젊은이들에게 문제가 많은 것은 배가 불러서입니다. 회개의 경험이 없어서 입니다. 너무 얕고 너무 유치합니다. 깊이 생각할 줄 모릅니다. 사람이란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깊이 생각할 줄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감사가 있습니다. 먹고 입고 자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깊은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여느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감사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나만이 아는 신비로운 웃음을 웃으며 살아갑니다.
역시 감사는 절대적 성격을 지녔습니다. 상대적인 감사는 상대적인 이유로 소멸하게 마련입니다. 얻어 감사한다면 잃어서 원망합니다. 얼마큼 가져서 감사한다면 더 가진 사람을 보아서 불평을 합니다. 감사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에라도 감사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비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부인이 병에 걸리고 척추가 부러지다시피 해서 고생을 해도 감사를 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3년 동안이나 자리보전하고 있는 딱한 생활 가운데서도 늘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얼굴빛이 환하고 번들번들합니다. 빛이 납니다. 교인들이 그에게 '예수 동생'이라고 별명을 붙여줄 정도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감사할 수 있느냐 ---- 거기에는 그분 나름의 비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분의 집 안방에 먼지가 하얗게 묻은 낡은 룩색(rucksack)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40여 년 전의 것입니다. 피난 내려올 때에 짊어지고 온 룩색인데, 총알이 날아와 사람들이 마구 쓰러지는 가운데서도 그분은 그 룩색 덕분에 죽음을 면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다가 조금이라도 원망이나 불평이 생기면 그때마다 그 룩색을 쳐다본답니다. 그것을 보고 그 옛날을 생각하여 '내가 어떻게 살아난 사람인데. 불평을 하면 천벌을 받지' 하고 감사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감사하니까 감사할 일이 또 생기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미국의 한 부흥사가 하루는 버스를 탔는데, 뚱뚱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개구쟁이 어린아이 다섯을 데리고 올라탔습니다. 억지를 부리는 놈, 떼를 쓰는 놈,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놈에다 버스 안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난리를 피우는 놈 해서 버스 안이 이 어린아이들로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뚱뚱한 아주머니는 이런 아이들을 때리고 욕하고 저주하고 팔짝팔짝 뜁니다. 피곤해서 쉬고 싶었던 그 부흥사는 도무지 참아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금방이라도 짜증을 부릴 지경입니다. 그런데 문득 마음속에 감동이 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그래, 감사해야지. 하나님이시여, 저 여자가 내 아내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하고 그는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할 줄 아는 자기 나름의 비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한 사도 바울 ---- 저는 그를 만나본 일이 없습니다마는 그의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도 감사했으며 풍랑 속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도 감사했습니다. 그 나름의 비결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다메섹의 경험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사울아"하시는 예수님의 개인적인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된 사람입니다. 이제 무슨 원망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문득문득 다메섹 도상의 그 옛날 경험을 떠올리게 되면 새로 겸손해지고 다시 오묘해지고 거듭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비결로 원망을 극복할 수 있는 감사를 지닙니까? 나름대로의 깊은 체험이 있어야 할 줄로 압니다. 파피니라고 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 가지만 있으면 누구도 원망할 자격이 없다. 먼저, 한끼의 양식이 있으면 감사하라, 오늘 건강하면 감사하라" ---- 오늘도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오고 싶지만 건강을 잃어서 병원에 누운 채 이 시간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형제자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은 불평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소망이 있으면 더더욱 하나님께 감사하라" ----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만이 아는 비밀한 감사의 요령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다윗 왕은 한 신앙인으로서 감사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시편 1O3편은 다윗이 나이 많아졌을 때에 일생을 회고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여 읊은 찬송의 시입니다. 깊고 신실한 감사, 진실하고 뜻깊은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다윗이 자신을 보고하는 말입니다. 너 아무개야, 내 영혼아, 하나님을 찬송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지성이든 감성이든 의지든, 내 모든 것들아 하나님을 찬송하라, 이렇게 감사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 귀한 말씀들을 다 해설할 시간은 없습니다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 세 가지만을 들어서 함께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첫째는 사죄 받은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내 모든 죄악을 사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 이것이 감사의 첫걸음입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이것입니다. 인생 최대의 궁극적 관심은 죄입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느끼거나 못 느끼거나 사람은 자기 양심을 압니다. 그 영혼은 알고 있습니다. 모든 고민의 윈인은 깊은데 있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실존적인 관심이 죄 문제입니다.
죄 문제로 고민해본 바가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은 죄 문제로 고민하고 이 때문에 시달립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해결을 얻고 사함 받았다고 하는 것, 이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습니다. 사죄 받지 못한 자의 재물은 축복이 아닙니다. 죄로 인하여 고민하는 사람의 출세는 영광이 아니라 굴욕입니다. 죄로 인하여 견딜 수 없이 고통 당하는 사람이 받는 칭찬은 절대로 칭찬이 아닙니다. 오히려 욕입니다.
오직 죄 사함 받은 사람, 오직 죄 사함 받고, 죄 문제에 해결을 보고, 죄의 고통으로부터 자유한 사람이 누리는 부가 축복이요, 그런 사람의 건강이 축복입니다. 그런 사람의 가정이, 그런 사람의 명예가 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우선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말씀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그리고 이어서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 또한 8장에서도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1~2절)."
이렇게 사죄의 은총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만 감사가 있고 그만이 진실한 감사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깊은 회개와 함께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가 곧 사죄의 결과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라고 믿었기 때문이요, 내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옮기셨다 하는 고백을 자기 생활 속에서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라는 요염한 여인 때문에 실수를 하게 됐고, 그 남편을 죽이는 죄까지 범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며 베개가 썩도록 깊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십니다. 문자 그대로 그의 죄를 깨끗이 사하시는 날에 마침내 그는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할 뿐더러 그들 사이에서 솔로몬 왕이 태어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권고로 누구의 해설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저 스스로 성경을 읽어나가던 중 마태복음 1장을 읽다가 혼자서 말없이 울어본 경험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또 누가 누구를 낳고 하다가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6절)" ---- 자기의 아내여야지 어찌하여 우리야의 아내입니까? 왕들의 족보는 이처럼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 어떻게 그런 사이에서 태어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이 가정의 죄를 사하실 때에 다윗의 죄를 사하실 때에 조건부로 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깨끗이 용서하십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 태어나서 왕위를 계승케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께 감사하라, 내 죄를 사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렇게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여집사님은 참 어려운 고통 중에도 늘 감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녀가 여럿인데, 한 아이는 집을 들락날락합니다. 가출했다 들어왔다 합니다. 또 어떤 아이는 공부가 밑바닥을 돌아서 말썽입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이쯤 되면 으레 죽느니 사느니, 별소리가 다 나올 법한데 그 집사님은 언제나 명랑합니다. 언제나 기쁩니다. 어느 날은 제게 찾아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 깊은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저만이 아는 것입니다, 하고 집사님은 고백합니다. "저는 본래 창녀였습니다. 성병까지 얻어서 죽어 버리려고 했는데, 지금의 남편이 구해주었고 결혼까지 했습니다. 저같은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가 있었겠어요? 그러나 이렇게 귀한 자식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하신 결과입니다. 남편을 볼 때마다 저는 얼마나 고마운지요. 그런 은혜 앞에서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무엇을 불평하겠습니까? 항상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어찌 이분의 감사뿐이겠습니까? 여러분, 감사가 없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이요, 기쁨이 없는 것은 자기 의에 매달려 있는 위선 때문이요, 찬송이 없는 것은 깊은 참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참 회개에 참 감사가 있습니다. 참 기쁨은 사죄의 기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죄 사함 받은 기쁨, 이것이 감사의 근본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모든 것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건강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 참으로 깜짝 놀랄 기사가 났습니다. 지나치다 싶어서 그런 것은 차라리 싣지 말아주었으면 싶었습니다. 큰 타이틀로 '살인식품' 이라 했는데, 좀 불만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마는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니 모든 식품이 다 살인식품이 됩니다. 먹고 죽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다 죽게 되니 결국은 모든 식품이 다 독약이지 별것인가 ---- 그렇게 너그럽게 이해하고 말았습니다.
자, 이것도 먹으면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물도 먹으면 안 된다, 공기도 오염되었다 세상에 살인식품을 먹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 감사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살인식품을 먹고사는데도 인간의 수명은 점점 길어만 진다니까 더더욱 감사해야지요.
여러분, 최고의 복은 건강입니다. 이 시간에 나와 예배하시는 분들, 혹 몸이 불편하시더라도 나와서 예배하시니 더 할말없습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또한 이것이 사죄의 은총이요, 이것이 내게 향한 축복이요,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의 상징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위기로부터 건져내어 건강하게 해주시는 것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프린스턴대학의 전신인 뉴저지대학에 총장으로 있던 워터폰박사님이 어느 날 교회에 갔더니 한 장로님이 "박사님, 감사합시다." 그러더랍니다. "박사님, 제가 지금 한 2마일 밖에 있는 저 마을에 살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기까지 올 때에는 마차를 타고 옵니다.
오늘 아침에 교회에 나오다가 언덕으로 내려오는데 말이 그만 무슨 소리에 놀라서 냅다 뛰는 바람에 마차 바퀴가 빠지고 몇 바퀴 뒹굴었습니다. 아이쿠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툭툭 털고 일어나 보니 아무 데도 상한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박사님이 말씀하셨답니다. "나는 그 언덕을 수천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는데도 오늘까지 무사했으니 내가 더 감사하지요." 사람들이 약아 빠져서 꼭 죽을 뻔해야 감사를 합니다. 그러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간간이 죽을 뻔해야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것을 감사합시다. 굉장한 체험이 따로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사한 것을 감사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 이 평범한 가운데 주신 은혜를 더 크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다윗은 소원을 만족케 하신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찌무라 간조라고 하는 일본의 신학자가 임종이 가까웠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해서 고백한 말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 멋대로 드리는 기도를 받아주셨으면 나는 거만하고 인정이 없고 밉살스러운 인간이 됐었을 것입니다. 아, 실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영혼을 죄다 물리치시고 나의 원하시는 것을 파괴하십니다. 당신은 내가 원치 않는 길로 나를 이끌어가시사 나로 하여금 구하지 않는 길로 가게 하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원하는 그 시시한 소원대로만 모든 일이 다 되어졌다면 어떠한 꼴이 될 뻔했습니까? 안 들어주시기를 잘 하셨지요. 어떤 분은 이러한 간증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이것저것을 구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때에 몹시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도 차마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워서 '들어주십시오' 라고 말하지 못하겠더래요. 가졌으면 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것까지 달라고 할 수는 없지' 하고 지나갔는데, 얼마 후에 보니까 그것이 자기 손에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늘 이런 경험을 하고 삽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라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언제 벌써 준비해놓으시고 내가 기분으로 잠깐 가지고 싶었던 것까지도 다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내 지혜보다 크시고 내 의보다 크시고 내가 은혜를 모를 때에도 은혜를 주시고, 내 노력보다 크게 주시고, 내 작은 수고보다 더 크게 주시고, 내 소원을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 참 좋으신 하나님 ---- 이렇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잊지 마십시다. 적어도 은혜를 잊어버리는 자는 되지 맙시다. 이렇다하게 큰 일은 못해도 제발 원망하는 사람은 되지 맙시다. 기쁨과 감사, 그리고 새로운 용기로 살아가십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고 그 영광이 들의 꽃과 같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영원합니다. 그 은혜는 영원한 것입니다.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사 오늘 내가 있는 것입니다. 깊은 감사를 드리고, 다시 저 앞에 있는 약속을 바라보며 감사하십시다.
새로운 믿음을 가지고 소망 중에 다시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 주신 은혜를 바라보면서 감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
한 신앙인의 감사 찬송(시편 103편 1절~18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사람의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깨달음에 있습니다. 깨달음만이 아니라 좀더 나아가서는 고맙게 여기는 마음 곧 감사하는 마음에 행복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떠한 여건에 있든지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 그만큼 그는 행복한 것입니다.
종은 울려서 소리가 나야만 종입니다. 소리가 나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닙니다. 어떠한 여건에서건 그 마음으로부터 고마운 마음이 우러나고 이것이 가슴 가득히 채워져서 감격으로 화할 때에야 사람은 행복한 법입니다.
오늘의 이 세대는 불평과 불만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불평 불만이 화평과 만족으로 채워지는 것 보셨습니까? 여건을 바꾸어준다고 사고방식이 달라지던가요? 누구할 것 없이 갈수록 태산입니다. 생각해보면 오늘의 우리는 분에 넘치리만큼 잘삽니다. 그런데 불평 불만은 못살 때보다도 더 많습니다.
세계를 한바퀴 돌아보면 우리가 잘사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중국 다녀온 분들을 보면 이구동성(異口同聲) 대한민국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만큼 잘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살던 옛 시절의 그 어느 때보다도 불평이 많고 문제가 많습니다.
육체적 본능이나 물질적 소유욕을 채운다고 행복해지지는 않습니다. 식욕을 채우고 명예욕, 권위욕을 채운다고 기쁨이 오고 만족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만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순간적이요 찰나적인 것입니다. 금방 불평으로 바뀌고 마는 것입니다.
참감사는 깊은 깨달음에서 비롯됩니다. 생각을 깊이 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법입니다. 무엇을 감사하고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기뻐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사람된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받아서 기쁜 사람이 있고 주어서 기쁜 사람이 있습니다. 먹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있고 남을 먹임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문제는 생각을 깊이 할 수 있어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가정에 들어갔더니 문간에 큰 그림틀이 하나 걸려 있습니다. 비교적 자주 볼 수 있는 그림입디다. 식구도 없이 홀로 외롭게 사는 노인이 다 낡은 식탁에 말라빠진 빵 하나를 놓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그 그림 밑에 어느 시인의 싯귀가 적혀 있습니다. '눈물 젖은 빵 조각을 먹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인생의 맛을 모른다' ---- 옳은 말입니다.
젊은이들에게 문제가 많은 것은 배가 불러서입니다. 회개의 경험이 없어서 입니다. 너무 얕고 너무 유치합니다. 깊이 생각할 줄 모릅니다. 사람이란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깊이 생각할 줄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감사가 있습니다. 먹고 입고 자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깊은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여느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감사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나만이 아는 신비로운 웃음을 웃으며 살아갑니다.
역시 감사는 절대적 성격을 지녔습니다. 상대적인 감사는 상대적인 이유로 소멸하게 마련입니다. 얻어 감사한다면 잃어서 원망합니다. 얼마큼 가져서 감사한다면 더 가진 사람을 보아서 불평을 합니다. 감사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에라도 감사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비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부인이 병에 걸리고 척추가 부러지다시피 해서 고생을 해도 감사를 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3년 동안이나 자리보전하고 있는 딱한 생활 가운데서도 늘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얼굴빛이 환하고 번들번들합니다. 빛이 납니다. 교인들이 그에게 '예수 동생'이라고 별명을 붙여줄 정도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감사할 수 있느냐 ---- 거기에는 그분 나름의 비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분의 집 안방에 먼지가 하얗게 묻은 낡은 룩색(rucksack)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40여 년 전의 것입니다. 피난 내려올 때에 짊어지고 온 룩색인데, 총알이 날아와 사람들이 마구 쓰러지는 가운데서도 그분은 그 룩색 덕분에 죽음을 면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다가 조금이라도 원망이나 불평이 생기면 그때마다 그 룩색을 쳐다본답니다. 그것을 보고 그 옛날을 생각하여 '내가 어떻게 살아난 사람인데. 불평을 하면 천벌을 받지' 하고 감사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감사하니까 감사할 일이 또 생기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미국의 한 부흥사가 하루는 버스를 탔는데, 뚱뚱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개구쟁이 어린아이 다섯을 데리고 올라탔습니다. 억지를 부리는 놈, 떼를 쓰는 놈,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놈에다 버스 안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난리를 피우는 놈 해서 버스 안이 이 어린아이들로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뚱뚱한 아주머니는 이런 아이들을 때리고 욕하고 저주하고 팔짝팔짝 뜁니다. 피곤해서 쉬고 싶었던 그 부흥사는 도무지 참아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금방이라도 짜증을 부릴 지경입니다. 그런데 문득 마음속에 감동이 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그래, 감사해야지. 하나님이시여, 저 여자가 내 아내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하고 그는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할 줄 아는 자기 나름의 비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한 사도 바울 ---- 저는 그를 만나본 일이 없습니다마는 그의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도 감사했으며 풍랑 속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도 감사했습니다. 그 나름의 비결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다메섹의 경험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사울아"하시는 예수님의 개인적인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된 사람입니다. 이제 무슨 원망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문득문득 다메섹 도상의 그 옛날 경험을 떠올리게 되면 새로 겸손해지고 다시 오묘해지고 거듭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비결로 원망을 극복할 수 있는 감사를 지닙니까? 나름대로의 깊은 체험이 있어야 할 줄로 압니다. 파피니라고 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 가지만 있으면 누구도 원망할 자격이 없다. 먼저, 한끼의 양식이 있으면 감사하라, 오늘 건강하면 감사하라" ---- 오늘도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오고 싶지만 건강을 잃어서 병원에 누운 채 이 시간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형제자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은 불평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소망이 있으면 더더욱 하나님께 감사하라" ----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만이 아는 비밀한 감사의 요령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다윗 왕은 한 신앙인으로서 감사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시편 1O3편은 다윗이 나이 많아졌을 때에 일생을 회고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여 읊은 찬송의 시입니다. 깊고 신실한 감사, 진실하고 뜻깊은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다윗이 자신을 보고하는 말입니다. 너 아무개야, 내 영혼아, 하나님을 찬송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지성이든 감성이든 의지든, 내 모든 것들아 하나님을 찬송하라, 이렇게 감사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 귀한 말씀들을 다 해설할 시간은 없습니다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 세 가지만을 들어서 함께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첫째는 사죄 받은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내 모든 죄악을 사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 이것이 감사의 첫걸음입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이것입니다. 인생 최대의 궁극적 관심은 죄입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느끼거나 못 느끼거나 사람은 자기 양심을 압니다. 그 영혼은 알고 있습니다. 모든 고민의 윈인은 깊은데 있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실존적인 관심이 죄 문제입니다.
죄 문제로 고민해본 바가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은 죄 문제로 고민하고 이 때문에 시달립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해결을 얻고 사함 받았다고 하는 것, 이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습니다. 사죄 받지 못한 자의 재물은 축복이 아닙니다. 죄로 인하여 고민하는 사람의 출세는 영광이 아니라 굴욕입니다. 죄로 인하여 견딜 수 없이 고통 당하는 사람이 받는 칭찬은 절대로 칭찬이 아닙니다. 오히려 욕입니다.
오직 죄 사함 받은 사람, 오직 죄 사함 받고, 죄 문제에 해결을 보고, 죄의 고통으로부터 자유한 사람이 누리는 부가 축복이요, 그런 사람의 건강이 축복입니다. 그런 사람의 가정이, 그런 사람의 명예가 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우선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말씀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그리고 이어서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 또한 8장에서도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1~2절)."
이렇게 사죄의 은총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만 감사가 있고 그만이 진실한 감사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깊은 회개와 함께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가 곧 사죄의 결과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라고 믿었기 때문이요, 내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옮기셨다 하는 고백을 자기 생활 속에서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라는 요염한 여인 때문에 실수를 하게 됐고, 그 남편을 죽이는 죄까지 범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며 베개가 썩도록 깊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십니다. 문자 그대로 그의 죄를 깨끗이 사하시는 날에 마침내 그는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할 뿐더러 그들 사이에서 솔로몬 왕이 태어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권고로 누구의 해설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저 스스로 성경을 읽어나가던 중 마태복음 1장을 읽다가 혼자서 말없이 울어본 경험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또 누가 누구를 낳고 하다가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6절)" ---- 자기의 아내여야지 어찌하여 우리야의 아내입니까? 왕들의 족보는 이처럼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 어떻게 그런 사이에서 태어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이 가정의 죄를 사하실 때에 다윗의 죄를 사하실 때에 조건부로 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깨끗이 용서하십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 태어나서 왕위를 계승케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께 감사하라, 내 죄를 사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렇게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여집사님은 참 어려운 고통 중에도 늘 감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녀가 여럿인데, 한 아이는 집을 들락날락합니다. 가출했다 들어왔다 합니다. 또 어떤 아이는 공부가 밑바닥을 돌아서 말썽입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이쯤 되면 으레 죽느니 사느니, 별소리가 다 나올 법한데 그 집사님은 언제나 명랑합니다. 언제나 기쁩니다. 어느 날은 제게 찾아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 깊은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저만이 아는 것입니다, 하고 집사님은 고백합니다. "저는 본래 창녀였습니다. 성병까지 얻어서 죽어 버리려고 했는데, 지금의 남편이 구해주었고 결혼까지 했습니다. 저같은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가 있었겠어요? 그러나 이렇게 귀한 자식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하신 결과입니다. 남편을 볼 때마다 저는 얼마나 고마운지요. 그런 은혜 앞에서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무엇을 불평하겠습니까? 항상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어찌 이분의 감사뿐이겠습니까? 여러분, 감사가 없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이요, 기쁨이 없는 것은 자기 의에 매달려 있는 위선 때문이요, 찬송이 없는 것은 깊은 참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참 회개에 참 감사가 있습니다. 참 기쁨은 사죄의 기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죄 사함 받은 기쁨, 이것이 감사의 근본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모든 것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건강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 참으로 깜짝 놀랄 기사가 났습니다. 지나치다 싶어서 그런 것은 차라리 싣지 말아주었으면 싶었습니다. 큰 타이틀로 '살인식품' 이라 했는데, 좀 불만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마는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니 모든 식품이 다 살인식품이 됩니다. 먹고 죽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다 죽게 되니 결국은 모든 식품이 다 독약이지 별것인가 ---- 그렇게 너그럽게 이해하고 말았습니다.
자, 이것도 먹으면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물도 먹으면 안 된다, 공기도 오염되었다 세상에 살인식품을 먹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 감사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살인식품을 먹고사는데도 인간의 수명은 점점 길어만 진다니까 더더욱 감사해야지요.
여러분, 최고의 복은 건강입니다. 이 시간에 나와 예배하시는 분들, 혹 몸이 불편하시더라도 나와서 예배하시니 더 할말없습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또한 이것이 사죄의 은총이요, 이것이 내게 향한 축복이요,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의 상징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위기로부터 건져내어 건강하게 해주시는 것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프린스턴대학의 전신인 뉴저지대학에 총장으로 있던 워터폰박사님이 어느 날 교회에 갔더니 한 장로님이 "박사님, 감사합시다." 그러더랍니다. "박사님, 제가 지금 한 2마일 밖에 있는 저 마을에 살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기까지 올 때에는 마차를 타고 옵니다.
오늘 아침에 교회에 나오다가 언덕으로 내려오는데 말이 그만 무슨 소리에 놀라서 냅다 뛰는 바람에 마차 바퀴가 빠지고 몇 바퀴 뒹굴었습니다. 아이쿠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툭툭 털고 일어나 보니 아무 데도 상한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박사님이 말씀하셨답니다. "나는 그 언덕을 수천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는데도 오늘까지 무사했으니 내가 더 감사하지요." 사람들이 약아 빠져서 꼭 죽을 뻔해야 감사를 합니다. 그러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간간이 죽을 뻔해야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것을 감사합시다. 굉장한 체험이 따로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사한 것을 감사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 이 평범한 가운데 주신 은혜를 더 크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다윗은 소원을 만족케 하신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찌무라 간조라고 하는 일본의 신학자가 임종이 가까웠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해서 고백한 말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 멋대로 드리는 기도를 받아주셨으면 나는 거만하고 인정이 없고 밉살스러운 인간이 됐었을 것입니다. 아, 실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영혼을 죄다 물리치시고 나의 원하시는 것을 파괴하십니다. 당신은 내가 원치 않는 길로 나를 이끌어가시사 나로 하여금 구하지 않는 길로 가게 하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원하는 그 시시한 소원대로만 모든 일이 다 되어졌다면 어떠한 꼴이 될 뻔했습니까? 안 들어주시기를 잘 하셨지요. 어떤 분은 이러한 간증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이것저것을 구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때에 몹시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도 차마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워서 '들어주십시오' 라고 말하지 못하겠더래요. 가졌으면 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것까지 달라고 할 수는 없지' 하고 지나갔는데, 얼마 후에 보니까 그것이 자기 손에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늘 이런 경험을 하고 삽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라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언제 벌써 준비해놓으시고 내가 기분으로 잠깐 가지고 싶었던 것까지도 다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내 지혜보다 크시고 내 의보다 크시고 내가 은혜를 모를 때에도 은혜를 주시고, 내 노력보다 크게 주시고, 내 작은 수고보다 더 크게 주시고, 내 소원을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 참 좋으신 하나님 ---- 이렇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잊지 마십시다. 적어도 은혜를 잊어버리는 자는 되지 맙시다. 이렇다하게 큰 일은 못해도 제발 원망하는 사람은 되지 맙시다. 기쁨과 감사, 그리고 새로운 용기로 살아가십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고 그 영광이 들의 꽃과 같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영원합니다. 그 은혜는 영원한 것입니다.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사 오늘 내가 있는 것입니다. 깊은 감사를 드리고, 다시 저 앞에 있는 약속을 바라보며 감사하십시다.
새로운 믿음을 가지고 소망 중에 다시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 주신 은혜를 바라보면서 감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야 사십 년의 이유(신명기 8장 1절~6절) (0) | 2023.10.04 |
---|---|
종교개혁자의 용기(로마서 8장 31절~39절) (0) | 2023.10.03 |
만남이 있는 마음(말라기 4 : 1-6) (0) | 2023.10.01 |
성령을 근심케 말라(에베소서 4 : 25-32) (0) | 2023.09.28 |
주의 길을 보이소서(출애굽기 33 : 12-23) (0) | 2023.09.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