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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광야 사십 년의 이유(신명기 8장 1절~6절)

by 【고동엽】 2023.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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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사십 년의 이유(신명기 816)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 시편 4020절의 말씀입니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님에서 불행은 비롯됩니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가난도 아니요 질병도 아닙니다.

전쟁도 아니요 재난도 아닙니다. 깨달음이 없어서 불행해집니다.

잘 아시다시피 재산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재난을 만났다 해서 반드시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 없을 때에 사람은 비인간화(非人間化)합니다.

인간의 본질을 상실함으로 불행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깨달음을 쉽게 흘려버립니다. 여기서 불행이 싹틉니다. 우리는 문득문득 소중한 것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엄청난 값을 치르고 깨닫습니다. 큰 질병, 큰 실패, 큰 고난, 큰 재난을 만났을 때에 '이것이다'라고 문득 참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은 바를 너무나도 쉽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그 소중한 것을 안타깝게도 망각해버립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고난을 당합니다. 하릴없이 고통의 악순환을 겪어야 합니다. 이것은 누구할것없이 다 겪는 일입니다.

깨달음에는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깨달은 바에 따라 행함이 없을 때,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의 그 갈등이 또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알기는 아는데 행하는 바가 없습니다. 듣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는 생명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이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는 참으로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라고 탄식을 하기에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이것 하나도 못 끊으니까요" 하고 담배를 가리킵니다. "그거야 안 피우면 되지 않습니까?" 했더니 그것 한 가지를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행입니다. 어쨌든 담배는 나쁜 것입니다. 나에게도 해롭고 남에게도 해롭습니다. 해롭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끊지를 못합니다.

술도 그렇습니다. 어느 의사가 쓴 수필에 보니, 술을 마시는 것은 사람의 간장(肝腸)을 알코올에 푹 담갔다가 꺼내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한 잔씩 마실 때마다 간장이 얼마나 수고를 하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간장이 처리해낼 수 있는 알코올의 분량은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를 넘으면 알코올이 온몸에 퍼져서 피부까지도 절어 버린다고 합니다. 한번은 술에 잔뜩 취해 있는 사람을 보고 해로운데 왜 그리 퍼마시느냐고 했더니 대답이 걸작입니다. "술 먹으면 죽는다고 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마시지요." 풍류라고 보아주기에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불행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되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내 처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여기 깜짝 놀랄 통계 한 가지가 있습니다. 미국의 인구가 약 2억입니다. 그런데 그 3분의 1이 마약을 복용한 경험이 있다는 통계입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단속한다는 이야기조차 난센스입니다. 경찰서장까지도 걸린 데가 있다니까요.

그래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마는, 일찍이 성경 공부를 교과목에서 빼버렸던 국립학교들이 요새 와서는 '이거 안되겠다. 성경을 가르치지 않아서 이 모양이 되었다' 하고 부랴부랴 성경을 다시 교과목으로 채택한다고 합니다. 그런 학교들이 자꾸 늘어난다고 합니다. '우리 학교에는 아편이 없습니다(No Drug School.)' ---- 신입생 모집 광고에 이런 문구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세상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아편이 나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 망하고 남 망치고, 사회며 도덕이며 모두가 온통 성할 수가 없지요. 이것을 다 압니다. 알면서도 돌이키지 못하고 내처 그 길로 가야 하는 데에 불행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굶어죽는 것이 아니라 썩어죽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깨달은 바를 따라 행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불행입니다.

가장 큰 축복은 가시적(可視的)이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이요 도덕적이요 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 무턱대고 물질적 축복만 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이나 채워주시는 물주(物主)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가르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기 바라십니다. "나는 인애(仁愛)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소원의 간절함을 짐작하시겠습니까? 마치 부모가 자식한테 "나의 이 마음을 알아다오!" 하고 간청하는 것과도 같다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믿으라' 하십니다. '너의 운명이 나에게 있다, 너의 과거가 나에게 있고 너의 미래도 나에게 있다, 나를 믿으라, 나를 믿고 안심하라, 나를 믿고 두려워하지 말라, 나를 의지하고 용기를 내어라, 네 짐을 나에게 맡겨라' ---- 전적으로 믿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total commitment ---- 완전히 위탁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따라서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비판하려 하지 말고, 멀리 가지 말고, 방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모든 말씀이, 당신의 계명이 너를 위한 것이니 과거를 묻지 말고 순종하라. 순종의 사람이 되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십니다. 사랑함으로 순종하라,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라, 감사한 마음으로 순종하라고 간곡히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셨습니다. 구원하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40년을 광야에 있게 하십니다. 이 광야 생활에 이스라엘사람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지난날에 받은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열 재앙으로 저들을 구해낼 때의 이야기, 홍해를 육지인 양 건널 때의 감격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지난날에 받은 은혜도 오늘 주시는 은혜도 까맣게 잊어버렸기 때문에 당찮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저 약속의 땅 가나안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책임지고 인도한다, 가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저 앞에 있느니라, 그리로 너희를 인도할 것이니라' ---- 그런데도 잊어버립니다.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하나님의 각본이 있습니다. 저는 서부극 영화를 퍽 좋아합니다. 스토리가 아무리 복잡하고 악당들이 아무리 기세 등등해도 마음을 턱 놓고 볼 수 있어서 좋은 것입니다. 에필로그는 반드시 의로운 사람이 이기는 해피 엔딩이기 때문이지요. 워낙 각본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게 서부극입니다.

다시말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각본이 있습니다. 걱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가나안땅에 들어가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을진대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오늘을 살 따름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일이 하나님의 책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데도, 그리로 따라가는데도 어찌하여 길이 막히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왜 이토록 고달프단 말인가 이처럼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며 원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약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만일에 광야에 나온 다음에 '너희가 이 광야에 40년을 머물러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일찌감치 말씀해주셨더라면 이스라엘사람들은 모두가 진작 애굽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그러니 날마다 아침인가 저녁인가, 내일인가 모레인가, 하마나 하마나 하고 천막을 걷었다 쳤다 하면서 맴돌기를 40, 그러는 동안에 그들은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께 많은 죄를 짓게 된 것이다."

저들은 초조했습니다. 저들은 조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시간표, 그 스케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그 코스가, 과정이, 그 광야의 도정(道程)이 못마땅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원망했습니다.

더욱이 저들은 하루빨리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싶었습니다. 양도 치고 싶었습니다. 집도 짓고 성도 쌓고 왕궁도 세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우(No)!' 하셨습니다. 40년 동안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고,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공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훈련기간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성급한 이들이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이런 열정을 보였습니다. "제가 선교사로 나가겠습니다." 놀라운 결심이지요. 그래서 "예수 믿은 지 몇 년 되었습니까?" 하고 물으니 "2년 되었습니다" 해요. 아서라! "섣불리 그러시지 마세요. 사도 바울은 그토록 훌륭한 성서학자였는데도 예수 믿고 중생한 다음에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을 온전히 수련하는 기간으로 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나서야 복음을 전파했지만 그러고도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저지릅니까?"

여러분, 혹이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일이 중요합니다.

나의 사업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 더 우선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용할 양식 만나만 먹으면서 단조롭더라도 광야에서 공부하라고 하십니다. 전적으로 훈련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훈련의 교과 과정은 우리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고 소유하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돈벌고 잘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되어라 ---- 이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존재의 문제가 우선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유가 우선이 아닙니다. 지식도 별것 아닙니다. 지식은 공부를 해서 얻는 것이고 사람이 하는 공부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런데 세상 공부라는 것은 아무리 많이, 아무리 깊이 해보아도 그것 가지고 교양(敎養)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봅니다.

요즈음 보자하니 해외 여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남에게서 빈축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좀 여유가 생기고 자유로워졌다고 너도나도 해외 여행들을 많이 하는데, 저도 실제로 목격한 일이 있습니다마는 교양 없는 우리 나라 분들 때문에 얼굴이 뜨거워질 때가 많습니다. 돈푼 깨나 벌어서 어쩌다 비행기는 탔습니다마는 그 사람됨이야 어찌하겠습니까?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도 되고 교수도 되었다고들 하는데 처신하는 꼴을 보면 그 인간의 바탕은 변한 게 없이 여전합니다. 돈이 많건 적건, 공부를 많이 했건 적게 했건, 그것과 사람됨과는 이상하게도 별개입니다. 인격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생각해야 합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공부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부자가 되고 ----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먼저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은 들어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마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생국에 근무하는 여직원이 절름발이 어린이 하나를 데리고 의사를 찾아왔습니다. 와서 하는 말이 "선생님, 이 아이의 다리를 고쳐주십시오. 입원비나 수술비는 드리지 못하나 수술하면 정상으로 돌아올 것 같으니 좋은 일 한번 해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의사가 아이를 보니 참 똘똘하게 생겼습니다. 의사는 마음이 내켰습니다. '내가 이 아이를 성하게 만들어보리라' 하고 제반 비용을 다 부담하면서까지 그 아이를 고쳐주었습니다. 아이는 성한 몸이 되어 퇴원했습니다. 후생국 여직원은 감사에 넘쳐 아이와 함께 돌아갔습니다.

20년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는 의사 앞에 하루는 그 후생국 여직원이 나타났습니다. 옛일을 상기해낸 의사가 그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박사가 되었습니까? 의사가 되었습니까? 아니면 과학자? 사업가?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반색을 하며 궁금해하는 의사에게 그 여인은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녀석은 지금 사람을 죽인 죄로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 아이를 걷도록만 만들어주었지 걸어갈 길을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돈을 주면 돈 쓰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공부를 시켜서 지위만 높여줄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우선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건을 가르치고 가치관을 심어 주고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는 일이 우선적이었습니다. 깨달음이 있는 인간, 깨달음을 따라 사는 인간을 만들려 하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가나안땅까지는 그리 머나먼 코스가 아닙니다. 제아무리 소걸음으로 느리게 가도 열 나흘이면 다다를 수 있는 거리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요단강까지 갔었습니다.

그런데 정탐을 나갔던 열두 사람 중 두 사람만이 믿음으로 살피고 와 백성들을 격려했습니다. 불 신앙적으로 살핀 사람들은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133233)" 어쩌고 하면서 겁먹은 보고를 합니다.

백성들이 동요합니다. 이제는 망했다며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몰아붙입니다. 당장에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야단을 피웁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십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자격 미달이다,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들어갈 자격이 너희에게는 없다 ---- 그래서 되돌리셨습니다.

광야 40년은 하나님이 정하신 주행 코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과정에서 참된 출애굽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들은 분명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 그 문화, 그 사상, 그 도덕, 그 종교 면에서 이스라엘사람들은 아직도 애굽에 살고 있습니다.

한때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마는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원망입니다. 모세가 잠깐 보이지 않는다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지를 않나, 그들의 행위는 하릴없이 이방사람이요 애굽적이요 타락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출애굽 하는 데에는 무려 40년이나 걸립니다. 이 점을 똑똑히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스스로를 잘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아직도 이방적이요, 아직도 불신앙적이요, 아직도 속에 남아 있는 바로 그것 말입니다. 내가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버리십니다. 내가 잘라버리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잘라버리시는 사건이 생깁니다. 여기에 구체적인 출애굽 사건이 있습니다.

일본의 어느 할머니가 예수 잘 믿어서 '감사 할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리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이 할머니는 어린아이가 병원에 입원하는데도 '감사합니다' 하고 그 아이가 죽었을 때에도 '감사합니다' 할 정도로 감사밖에 모르는 할머니였습니다. 돈 많은 할머니였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교회에 나왔다가 돌아가는데 요란하게 사이렌소리가 나고 소방차가 지나갑니다. 부지런히 달려가 보았더니 불난 집은 바로 자기 집이었습니다. 이 할머니, 망연자실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무심코 불쑥 한다는 소리가 딱하게도 '나무아미타불'이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홀연히 튀어나온 것입니까? 이런 것을 빼버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 빼버리는 데 40년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을 겪어도 ',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어떠한 경황중에도 '할렐루야' 할 수 있도록, 그처럼 내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오리엔테이션을 바꾸어버리십니다. 이것은 긴 과정이요 어려운 주행 코스입니다.

깨닫고, 깨달은 바를 계속 지키고, 깨달은 바로 행하고, 그대로 살 때까지입니다. 깨닫기는 했으나 행함이 없었습니까? 행할 수 있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가나안에 이르는 과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교과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험하시고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낮추시고 겸손하게 만드셨습니다. 모든 사건을 통하여 겸손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구원 얻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 ---- 이것을 아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겸손은 복의 그릇입니다. 겸손한 만큼 깨닫습니다. 겸손할 때에 진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만큼 큰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험하시고, 낮추시고 ---- 이것은 하나님의 긍정적 시험입니다. 시험을 통하여 믿음을 주시고, 시험을 통하여 강함을 주시고,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된 인격을 주십니다. 지혜를 주십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일깨워주십니다. 시험을 통하여 우리로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다 포기하고 말씀을 찾게 만드십니다. 다 버리고 말씀을 따르게 하십니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근본 유일한 것이 말씀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니라" ---- 오늘의 816절을 깨닫기 바랍니다.

 

여러분, 내 소원 이루어지기 바라십니까? 조금 더 생각해보십시다. 내 간절한 이 소원이 한시바삐 이루어지기를 바라십니까? 한번 더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소유보다 진리를, 환경보다는 내 존재를 변화시키고자 하십니다.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늘 기억케 하십니다. 순종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참으로 소유하고 향유케 하시는 것입니다.

광야 40년에 대하여 불만을 품지 맙시다. 하나님의 지혜인 줄 알고 받아들입시다. 내게 꼭 필요한 사건이요 꼭 필요한 시간인 줄 아시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락하십시다. 약속의 땅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그리고 나서 요단강을 열어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  

광야 사십 년의 이유(신명기 816)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 시편 4020절의 말씀입니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님에서 불행은 비롯됩니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가난도 아니요 질병도 아닙니다.

전쟁도 아니요 재난도 아닙니다. 깨달음이 없어서 불행해집니다.

잘 아시다시피 재산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재난을 만났다 해서 반드시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 없을 때에 사람은 비인간화(非人間化)합니다.

인간의 본질을 상실함으로 불행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깨달음을 쉽게 흘려버립니다. 여기서 불행이 싹틉니다. 우리는 문득문득 소중한 것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엄청난 값을 치르고 깨닫습니다. 큰 질병, 큰 실패, 큰 고난, 큰 재난을 만났을 때에 '이것이다'라고 문득 참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은 바를 너무나도 쉽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그 소중한 것을 안타깝게도 망각해버립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고난을 당합니다. 하릴없이 고통의 악순환을 겪어야 합니다. 이것은 누구할것없이 다 겪는 일입니다.

깨달음에는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깨달은 바에 따라 행함이 없을 때,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의 그 갈등이 또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알기는 아는데 행하는 바가 없습니다. 듣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는 생명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이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는 참으로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라고 탄식을 하기에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이것 하나도 못 끊으니까요" 하고 담배를 가리킵니다. "그거야 안 피우면 되지 않습니까?" 했더니 그것 한 가지를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행입니다. 어쨌든 담배는 나쁜 것입니다. 나에게도 해롭고 남에게도 해롭습니다. 해롭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끊지를 못합니다.

술도 그렇습니다. 어느 의사가 쓴 수필에 보니, 술을 마시는 것은 사람의 간장(肝腸)을 알코올에 푹 담갔다가 꺼내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한 잔씩 마실 때마다 간장이 얼마나 수고를 하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간장이 처리해낼 수 있는 알코올의 분량은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를 넘으면 알코올이 온몸에 퍼져서 피부까지도 절어 버린다고 합니다. 한번은 술에 잔뜩 취해 있는 사람을 보고 해로운데 왜 그리 퍼마시느냐고 했더니 대답이 걸작입니다. "술 먹으면 죽는다고 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마시지요." 풍류라고 보아주기에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불행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되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내 처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여기 깜짝 놀랄 통계 한 가지가 있습니다. 미국의 인구가 약 2억입니다. 그런데 그 3분의 1이 마약을 복용한 경험이 있다는 통계입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단속한다는 이야기조차 난센스입니다. 경찰서장까지도 걸린 데가 있다니까요.

그래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마는, 일찍이 성경 공부를 교과목에서 빼버렸던 국립학교들이 요새 와서는 '이거 안되겠다. 성경을 가르치지 않아서 이 모양이 되었다' 하고 부랴부랴 성경을 다시 교과목으로 채택한다고 합니다. 그런 학교들이 자꾸 늘어난다고 합니다. '우리 학교에는 아편이 없습니다(No Drug School.)' ---- 신입생 모집 광고에 이런 문구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세상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아편이 나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 망하고 남 망치고, 사회며 도덕이며 모두가 온통 성할 수가 없지요. 이것을 다 압니다. 알면서도 돌이키지 못하고 내처 그 길로 가야 하는 데에 불행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굶어죽는 것이 아니라 썩어죽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깨달은 바를 따라 행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불행입니다.

가장 큰 축복은 가시적(可視的)이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이요 도덕적이요 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 무턱대고 물질적 축복만 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이나 채워주시는 물주(物主)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가르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기 바라십니다. "나는 인애(仁愛)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소원의 간절함을 짐작하시겠습니까? 마치 부모가 자식한테 "나의 이 마음을 알아다오!" 하고 간청하는 것과도 같다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믿으라' 하십니다. '너의 운명이 나에게 있다, 너의 과거가 나에게 있고 너의 미래도 나에게 있다, 나를 믿으라, 나를 믿고 안심하라, 나를 믿고 두려워하지 말라, 나를 의지하고 용기를 내어라, 네 짐을 나에게 맡겨라' ---- 전적으로 믿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total commitment ---- 완전히 위탁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따라서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비판하려 하지 말고, 멀리 가지 말고, 방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모든 말씀이, 당신의 계명이 너를 위한 것이니 과거를 묻지 말고 순종하라. 순종의 사람이 되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십니다. 사랑함으로 순종하라,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라, 감사한 마음으로 순종하라고 간곡히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셨습니다. 구원하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40년을 광야에 있게 하십니다. 이 광야 생활에 이스라엘사람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지난날에 받은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열 재앙으로 저들을 구해낼 때의 이야기, 홍해를 육지인 양 건널 때의 감격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지난날에 받은 은혜도 오늘 주시는 은혜도 까맣게 잊어버렸기 때문에 당찮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저 약속의 땅 가나안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책임지고 인도한다, 가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저 앞에 있느니라, 그리로 너희를 인도할 것이니라' ---- 그런데도 잊어버립니다.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하나님의 각본이 있습니다. 저는 서부극 영화를 퍽 좋아합니다. 스토리가 아무리 복잡하고 악당들이 아무리 기세 등등해도 마음을 턱 놓고 볼 수 있어서 좋은 것입니다. 에필로그는 반드시 의로운 사람이 이기는 해피 엔딩이기 때문이지요. 워낙 각본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게 서부극입니다.

다시말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각본이 있습니다. 걱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가나안땅에 들어가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을진대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오늘을 살 따름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일이 하나님의 책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데도, 그리로 따라가는데도 어찌하여 길이 막히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왜 이토록 고달프단 말인가 이처럼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며 원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약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만일에 광야에 나온 다음에 '너희가 이 광야에 40년을 머물러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일찌감치 말씀해주셨더라면 이스라엘사람들은 모두가 진작 애굽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그러니 날마다 아침인가 저녁인가, 내일인가 모레인가, 하마나 하마나 하고 천막을 걷었다 쳤다 하면서 맴돌기를 40, 그러는 동안에 그들은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께 많은 죄를 짓게 된 것이다."

저들은 초조했습니다. 저들은 조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시간표, 그 스케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그 코스가, 과정이, 그 광야의 도정(道程)이 못마땅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원망했습니다.

더욱이 저들은 하루빨리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싶었습니다. 양도 치고 싶었습니다. 집도 짓고 성도 쌓고 왕궁도 세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우(No)!' 하셨습니다. 40년 동안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고,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공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훈련기간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성급한 이들이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이런 열정을 보였습니다. "제가 선교사로 나가겠습니다." 놀라운 결심이지요. 그래서 "예수 믿은 지 몇 년 되었습니까?" 하고 물으니 "2년 되었습니다" 해요. 아서라! "섣불리 그러시지 마세요. 사도 바울은 그토록 훌륭한 성서학자였는데도 예수 믿고 중생한 다음에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을 온전히 수련하는 기간으로 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나서야 복음을 전파했지만 그러고도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저지릅니까?"

여러분, 혹이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일이 중요합니다.

나의 사업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 더 우선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용할 양식 만나만 먹으면서 단조롭더라도 광야에서 공부하라고 하십니다. 전적으로 훈련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훈련의 교과 과정은 우리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고 소유하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돈벌고 잘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되어라 ---- 이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존재의 문제가 우선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유가 우선이 아닙니다. 지식도 별것 아닙니다. 지식은 공부를 해서 얻는 것이고 사람이 하는 공부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런데 세상 공부라는 것은 아무리 많이, 아무리 깊이 해보아도 그것 가지고 교양(敎養)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봅니다.

요즈음 보자하니 해외 여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남에게서 빈축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좀 여유가 생기고 자유로워졌다고 너도나도 해외 여행들을 많이 하는데, 저도 실제로 목격한 일이 있습니다마는 교양 없는 우리 나라 분들 때문에 얼굴이 뜨거워질 때가 많습니다. 돈푼 깨나 벌어서 어쩌다 비행기는 탔습니다마는 그 사람됨이야 어찌하겠습니까?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도 되고 교수도 되었다고들 하는데 처신하는 꼴을 보면 그 인간의 바탕은 변한 게 없이 여전합니다. 돈이 많건 적건, 공부를 많이 했건 적게 했건, 그것과 사람됨과는 이상하게도 별개입니다. 인격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생각해야 합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공부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부자가 되고 ----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먼저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은 들어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마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생국에 근무하는 여직원이 절름발이 어린이 하나를 데리고 의사를 찾아왔습니다. 와서 하는 말이 "선생님, 이 아이의 다리를 고쳐주십시오. 입원비나 수술비는 드리지 못하나 수술하면 정상으로 돌아올 것 같으니 좋은 일 한번 해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의사가 아이를 보니 참 똘똘하게 생겼습니다. 의사는 마음이 내켰습니다. '내가 이 아이를 성하게 만들어보리라' 하고 제반 비용을 다 부담하면서까지 그 아이를 고쳐주었습니다. 아이는 성한 몸이 되어 퇴원했습니다. 후생국 여직원은 감사에 넘쳐 아이와 함께 돌아갔습니다.

20년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는 의사 앞에 하루는 그 후생국 여직원이 나타났습니다. 옛일을 상기해낸 의사가 그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박사가 되었습니까? 의사가 되었습니까? 아니면 과학자? 사업가?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반색을 하며 궁금해하는 의사에게 그 여인은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녀석은 지금 사람을 죽인 죄로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 아이를 걷도록만 만들어주었지 걸어갈 길을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돈을 주면 돈 쓰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공부를 시켜서 지위만 높여줄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우선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건을 가르치고 가치관을 심어 주고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는 일이 우선적이었습니다. 깨달음이 있는 인간, 깨달음을 따라 사는 인간을 만들려 하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가나안땅까지는 그리 머나먼 코스가 아닙니다. 제아무리 소걸음으로 느리게 가도 열 나흘이면 다다를 수 있는 거리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요단강까지 갔었습니다.

그런데 정탐을 나갔던 열두 사람 중 두 사람만이 믿음으로 살피고 와 백성들을 격려했습니다. 불 신앙적으로 살핀 사람들은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133233)" 어쩌고 하면서 겁먹은 보고를 합니다.

백성들이 동요합니다. 이제는 망했다며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몰아붙입니다. 당장에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야단을 피웁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십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자격 미달이다,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들어갈 자격이 너희에게는 없다 ---- 그래서 되돌리셨습니다.

광야 40년은 하나님이 정하신 주행 코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과정에서 참된 출애굽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들은 분명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 그 문화, 그 사상, 그 도덕, 그 종교 면에서 이스라엘사람들은 아직도 애굽에 살고 있습니다.

한때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마는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원망입니다. 모세가 잠깐 보이지 않는다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지를 않나, 그들의 행위는 하릴없이 이방사람이요 애굽적이요 타락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출애굽 하는 데에는 무려 40년이나 걸립니다. 이 점을 똑똑히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스스로를 잘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아직도 이방적이요, 아직도 불신앙적이요, 아직도 속에 남아 있는 바로 그것 말입니다. 내가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버리십니다. 내가 잘라버리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잘라버리시는 사건이 생깁니다. 여기에 구체적인 출애굽 사건이 있습니다.

일본의 어느 할머니가 예수 잘 믿어서 '감사 할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리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이 할머니는 어린아이가 병원에 입원하는데도 '감사합니다' 하고 그 아이가 죽었을 때에도 '감사합니다' 할 정도로 감사밖에 모르는 할머니였습니다. 돈 많은 할머니였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교회에 나왔다가 돌아가는데 요란하게 사이렌소리가 나고 소방차가 지나갑니다. 부지런히 달려가 보았더니 불난 집은 바로 자기 집이었습니다. 이 할머니, 망연자실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무심코 불쑥 한다는 소리가 딱하게도 '나무아미타불'이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홀연히 튀어나온 것입니까? 이런 것을 빼버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 빼버리는 데 40년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을 겪어도 ',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어떠한 경황중에도 '할렐루야' 할 수 있도록, 그처럼 내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오리엔테이션을 바꾸어버리십니다. 이것은 긴 과정이요 어려운 주행 코스입니다.

깨닫고, 깨달은 바를 계속 지키고, 깨달은 바로 행하고, 그대로 살 때까지입니다. 깨닫기는 했으나 행함이 없었습니까? 행할 수 있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가나안에 이르는 과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교과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험하시고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낮추시고 겸손하게 만드셨습니다. 모든 사건을 통하여 겸손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구원 얻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 ---- 이것을 아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겸손은 복의 그릇입니다. 겸손한 만큼 깨닫습니다. 겸손할 때에 진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만큼 큰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험하시고, 낮추시고 ---- 이것은 하나님의 긍정적 시험입니다. 시험을 통하여 믿음을 주시고, 시험을 통하여 강함을 주시고,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된 인격을 주십니다. 지혜를 주십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일깨워주십니다. 시험을 통하여 우리로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다 포기하고 말씀을 찾게 만드십니다. 다 버리고 말씀을 따르게 하십니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근본 유일한 것이 말씀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니라" ---- 오늘의 816절을 깨닫기 바랍니다.

 

여러분, 내 소원 이루어지기 바라십니까? 조금 더 생각해보십시다. 내 간절한 이 소원이 한시바삐 이루어지기를 바라십니까? 한번 더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소유보다 진리를, 환경보다는 내 존재를 변화시키고자 하십니다.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늘 기억케 하십니다. 순종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참으로 소유하고 향유케 하시는 것입니다.

광야 40년에 대하여 불만을 품지 맙시다. 하나님의 지혜인 줄 알고 받아들입시다. 내게 꼭 필요한 사건이요 꼭 필요한 시간인 줄 아시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락하십시다. 약속의 땅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그리고 나서 요단강을 열어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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