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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윤리(야고보서 4장 13절~17절)

by 【고동엽】 2024.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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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윤리(야고보서 41317)

 

 

교역자에게 있어서 어려운 일의 하나가 환자를 앞에 놓고 임종을 알리는 일입니다. 의학적으로 분명히 며칠밖에 남지 않아 온 식구들에게 통고한 의사조차도 막상 환자 당사자에게 전하는 것 은 꺼립니다. 물론 가족들은 너무 고통스러워 더욱 말하지 못합니다. , 이런 경우 알리는 것이 사랑입니까, 알리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까? 교역자들은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남은 시간에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독으로 만나 이 사실을 통고하게 됩니다. 정말 가슴아픈 일이지만 겪어야 하는 일이기에 그 역할을 맡습니다. "당신은 이제 의학적으로 얼마동안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시간을 준비하십시다"---이렇게 어렵게 말을 시작할 때, 본인이 이미 알고 있어서 ",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라고 이야기해 준다면 그보다 바람직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죽을 준비는커녕 죽을 생각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내가 왜 죽느냐고 오진(誤診)이 아닌가 하고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현실을 긍정하지 않으려는 사람 앞에서 임종을 통고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여기에 더 괴로운 일은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니 기도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답답한 시간입니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전능이란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것도 전능이지만 산 사람 데려가시는 것도 전능입니다.

어째서 살리시는 것만 전능입니까? 살아 있는 사람을 평안하게 하늘나라로 옮겨놓으시는 것도 큰 전능임을 시인해야 합니다. 죄인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는 것보다 더 큰 전능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옥갈 사람을 천당보내는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권능은 없습니다. 아무튼 임종을 알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괴롭고 힘든 일이지만 또한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가장 실제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지당한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순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남의 이야기로 말할 때에는 잘 통하다가 나의 문제로 오면 생면 부지의 이야기로 당황하며 거부하려고 합니다. 장례식에 가서도 어디까지나 남의 장례식만 생각했지 자기 장례식 날은 생각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남이 죽는 것을 보고는 다음은 내 차례구나 하는 생각을 왜 못합니까? 죽음이 내 문제일 수도 있음을 부인하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생일이 있으면 장례 날도 있단 말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우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임을 시인해야 합니다.

철학자들은 삶을 여러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삶은 추구요, 행동이요, 힘이요, 눈물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보면 삶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삶이 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훈련 과정이요 제자 훈련의 과정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고로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이 세대를 가리켜서 불확실한 시대라고 합니다. 즉 미지의 세계란 말입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빨 리 변하고 근본적인 것이 흔들리며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독일의 의사 안다라는 사람이 전해주는 독일 어느 마을의 전설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마을에는 사람이 들어가서 목욕할 수 있는 큰 컵이 하나 있는데, 컵을 한 바퀴 돌리면 그 컵 속에 들어앉은 사람이 젊어진다고 합니다. 돌리는 횟수만큼 사람이 점점 젊어지는 신비스런 컵입니다. 어느 날 한 할머니가 오셔서 오래오래 살 수 있도록 컵을 여러 번 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컵을 돌리는 사람은 할머니에게 "할머니의 소원대로 젊어지기는 하겠습니다마는, 다만 지금까지 당신이 살아온 그대로 다시 살게 됩니다"라고 말하며 서약서에 싸인을 하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가만히 생각을 하더니, 그러면 젊어지는 것을 취소하겠다고 하며 되돌아갔답니다. 여러분, 끝이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쓸데없이 오래 살겠다거나 계속 젊어지겠다고 몸부림하지 마십시다. 저도 처음부터 다시 돌아가서 살라고 한다면 거절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잘 왔는데 왜 다시 돌아갑니까? 생의 종말이 있어서 끝을 낸다는 것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승리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끝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내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일을 완성하고 난 뒤에 끝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그 기간이 곧 끝나는 시간이요 완성되는 시간입니다. 미완성 중에 완성해야 합니다. 그 시간은 깊이 감추어져 있어 아무도 모릅니다. 모르는 것이 우리들에게 유익하므로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나 내일이나 언제나 끝이 될 수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라고 반드시 더 살다가 가라는 법은 없습니다.

올 때는 순서대로 왔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의미가 크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하루하루, 한 시간 한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들입니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아무 도시에나 가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해서 이를 보리라고 계획하고 있는 그 발상이 참으로 어리석음을 말해줍니다. 사람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 같은 존재인데 어떻게 마음대로 아무 도시에나 가서 일 년 동안 돈벌어 오겠다는 그런 허튼 소리를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중에서도 어리석은 부자가 농사를 잘 지어놓고 "창고를 크게 늘려 오랫동안 먹고 마시며 즐기자, 내 영혼아"라고 말했을 때에 "이 사람아, 오늘밤에 자네 생명을 취한다면 자네 소유가 누구 것이 되겠는가?"고 경고하신 적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영구적(permanent)인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금과 다이아몬드를 가지기를 원합니다. 금과 다이아몬드 자체는 오래갈지 모르나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이 바뀌기 때문에 결국 영구성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알게 되는 것은,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정한 시간에 내가 생각한 방법대로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알고 온유하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잠깐이라도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용납하시지 아니하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이루어지지 않으니까요. 수고는 내가 했어도 결국은 하나님이 지혜와 기회와 능력을 주셨음을 기억하 고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말론적인 윤리를 세워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본문 말씀대로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주님이 허락하시면 할 수 있다는 겸손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다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과거에 대해서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 내 자랑이 아닙니다. 또한 현재는 잠깐 지나갈 것이니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또한 미래는 미지수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 말씀대로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 것입니다.

또한 임시라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나그네의 윤리로 살아가자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갈 것처럼, 영원히 소유할 것처럼 그런 망상을 가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잠깐 소유했다가 내놓아야 합니다. 언제나 끝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작년 여름에 우리 대학부 학생들 약 700여 명이 양수리 수양관에서 닷새 동안 집회를 가졌었습니다. 학생들이 얼마나 진실하고 착한지 저도 함께 갔다가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들은 수련회를 시작하자마자 가지고 있던 시계, 라디오, 잡지 등을 한데 모으고 심지어는 예배실에 있는 시계까지도 종이로 가려서 시간관념을 없애고 오직 기도와 말씀으로만 닷새 동안 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들의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지도자에게 왜 이런 방법을 쓰는냐고 물었더니 죽는 연습을 한다고 재미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죽을 사람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시간이 몇 시인지 알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그 입 장으로 한번씩 생각을 돌려서 죽는 연습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일 지키는 것도 일종의 죽는 연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주일만 되면 모든것을 전부 중단(all stop)하고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어차피 부르시면 다 중단하고 가야 하지 않습니까? 주일 지키는 것이 세상일을 중단하는 훈련이니 죽는 연습을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자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에게 어느 젊은이가 물었다고 합니다. "만약에 내일 밤 12시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다면 지금부터 그 시간까지 무엇을 하겠습니까?" 존 웨슬리는 "지금까지 살아 온대로, 하던 일을 그대로 계속할 것입니다"라고 매우 뜻 있는 대답을 했답니다. 매일매일을 그 날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이제 죽음을 통고 받았다 해서 새삼스럽게 어떤 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던 일을 그대로 계속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윤리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로써 그대로 끝이 나도 괜찮겠습니까? 어제 하였고 오늘하고 있는 일---이 상태에서 끝이 나도 상관없겠느냐는 말입니다. 죽음이 가까이 왔으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일들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학생들 중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시험 때라고 특별나게 공부하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자기 계획대로 열심히 하니 그 실력으로 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시험이 있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부 못하는 학생일수록 시험에 신경 쓰고 언제 시험을 보는지 계속 불안해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죽음의 그 날이 언제와도 상관없이 평소대로 맞이할 수 있도록 종말론적인 자세로 살아 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재창조된, 중생한 사람은 현재가 은혜인고로 오늘에 감사하며 현재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현재에 대해 불만 투성입니다. 열왕기상 178절 이하에 보면 극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큰 흉년이 들어 모두가 굶어죽는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종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르밧이라는 지방에 가게 됩니다. 그가 성문에 이르렀을 때, 한 과부가 외아들과 함께 나뭇가지를 줍고 있어,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과부는 자기 집에 식량이 다 떨어졌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불을 지펴서 한웅큼 남은 가루와 약간의 기름으로 마지막 빵을 만들어서 먹고 죽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때 엘리야는 그 빵을 자기에게 달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남은 빵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 빵이 마지막 식량이라 이것을 먹고는 죽을 터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르밧 과부는 이 빵을 엘리야에게 드립니다. 정말 귀한 믿음입니다. 사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죽을 것인데 이것을 먹고 죽으나 안 먹고 죽으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을 드렸더니 축복의 근원이 되어 먹어도 먹어도 가루가 계속 생기고 기름도 마르지 않아 흉년 동안 내내 먹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게 있는 마지막 빵 하나를 내가 먹어야 합니까?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이 마지막 건강,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겠습니까? 어느 어머니가 너무 열심히 일을 하자, 아들이 보다못해서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십니까?" 어머니는 촛불이 하나밖에 없는데 자꾸만 타 들어가니 꺼지기 전에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본문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4:17)"---무슨 뜻입니까?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도 있고 지식도 있고 능력도 있고 돈도 있는데 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연기합니다. 아무 도시에나 가서 돈을 벌어와서 하겠다고 말하자 성경은 엄하게 심판합니다. "네 생명이 무엇이뇨"---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게으르든지 핑계하든지 미루면 하나님께 크게 책망받을 것이며, 그것이 곧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도둑질이나 살인만이 죄가 아니라 게으른 것도 죄입니다. 게으른 자는 시간을 도둑질하는 것이요, 은사를 남용한 죄로 사형죄에 해당합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왜 책망을 받았습니까? 그가 남의 것을 빼앗았거나 도둑질한 사실이 없습니다. 단지 땅에 묻었다가 그대로 내놓았는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무섭게 책망을 받습니다. 여러분, 내게 주신 은사를 다해서 일해야 합니다. 게으름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끝으로 작자 미상의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어서 시가 주는 그 의미를 잘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밝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 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부르기에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회개도 진실도 겸손도 봉사도 선행도 충성도 다 기회가 있습니다. 지나가면 회개하려고 해도 회개하지 못하고, 진실 하려고 해도 진실하지 못합니다. 겸손하고 싶고 충성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종말이 언제 어떻게 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아무튼 종말은 옵니다. 그러므로, 항상 시작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항상 끝내는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과 믿음과 사랑과 부지런함으로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  

종말론적 윤리(야고보서 41317)

 

 

교역자에게 있어서 어려운 일의 하나가 환자를 앞에 놓고 임종을 알리는 일입니다. 의학적으로 분명히 며칠밖에 남지 않아 온 식구들에게 통고한 의사조차도 막상 환자 당사자에게 전하는 것 은 꺼립니다. 물론 가족들은 너무 고통스러워 더욱 말하지 못합니다. , 이런 경우 알리는 것이 사랑입니까, 알리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까? 교역자들은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남은 시간에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독으로 만나 이 사실을 통고하게 됩니다. 정말 가슴아픈 일이지만 겪어야 하는 일이기에 그 역할을 맡습니다. "당신은 이제 의학적으로 얼마동안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시간을 준비하십시다"---이렇게 어렵게 말을 시작할 때, 본인이 이미 알고 있어서 ",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라고 이야기해 준다면 그보다 바람직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죽을 준비는커녕 죽을 생각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내가 왜 죽느냐고 오진(誤診)이 아닌가 하고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현실을 긍정하지 않으려는 사람 앞에서 임종을 통고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여기에 더 괴로운 일은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니 기도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답답한 시간입니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전능이란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것도 전능이지만 산 사람 데려가시는 것도 전능입니다.

어째서 살리시는 것만 전능입니까? 살아 있는 사람을 평안하게 하늘나라로 옮겨놓으시는 것도 큰 전능임을 시인해야 합니다. 죄인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는 것보다 더 큰 전능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옥갈 사람을 천당보내는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권능은 없습니다. 아무튼 임종을 알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괴롭고 힘든 일이지만 또한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가장 실제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지당한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순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남의 이야기로 말할 때에는 잘 통하다가 나의 문제로 오면 생면 부지의 이야기로 당황하며 거부하려고 합니다. 장례식에 가서도 어디까지나 남의 장례식만 생각했지 자기 장례식 날은 생각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남이 죽는 것을 보고는 다음은 내 차례구나 하는 생각을 왜 못합니까? 죽음이 내 문제일 수도 있음을 부인하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생일이 있으면 장례 날도 있단 말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우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임을 시인해야 합니다.

철학자들은 삶을 여러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삶은 추구요, 행동이요, 힘이요, 눈물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보면 삶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삶이 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훈련 과정이요 제자 훈련의 과정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고로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이 세대를 가리켜서 불확실한 시대라고 합니다. 즉 미지의 세계란 말입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빨 리 변하고 근본적인 것이 흔들리며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독일의 의사 안다라는 사람이 전해주는 독일 어느 마을의 전설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마을에는 사람이 들어가서 목욕할 수 있는 큰 컵이 하나 있는데, 컵을 한 바퀴 돌리면 그 컵 속에 들어앉은 사람이 젊어진다고 합니다. 돌리는 횟수만큼 사람이 점점 젊어지는 신비스런 컵입니다. 어느 날 한 할머니가 오셔서 오래오래 살 수 있도록 컵을 여러 번 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컵을 돌리는 사람은 할머니에게 "할머니의 소원대로 젊어지기는 하겠습니다마는, 다만 지금까지 당신이 살아온 그대로 다시 살게 됩니다"라고 말하며 서약서에 싸인을 하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가만히 생각을 하더니, 그러면 젊어지는 것을 취소하겠다고 하며 되돌아갔답니다. 여러분, 끝이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쓸데없이 오래 살겠다거나 계속 젊어지겠다고 몸부림하지 마십시다. 저도 처음부터 다시 돌아가서 살라고 한다면 거절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잘 왔는데 왜 다시 돌아갑니까? 생의 종말이 있어서 끝을 낸다는 것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승리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끝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내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일을 완성하고 난 뒤에 끝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그 기간이 곧 끝나는 시간이요 완성되는 시간입니다. 미완성 중에 완성해야 합니다. 그 시간은 깊이 감추어져 있어 아무도 모릅니다. 모르는 것이 우리들에게 유익하므로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나 내일이나 언제나 끝이 될 수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라고 반드시 더 살다가 가라는 법은 없습니다.

올 때는 순서대로 왔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의미가 크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하루하루, 한 시간 한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들입니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아무 도시에나 가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해서 이를 보리라고 계획하고 있는 그 발상이 참으로 어리석음을 말해줍니다. 사람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 같은 존재인데 어떻게 마음대로 아무 도시에나 가서 일 년 동안 돈벌어 오겠다는 그런 허튼 소리를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중에서도 어리석은 부자가 농사를 잘 지어놓고 "창고를 크게 늘려 오랫동안 먹고 마시며 즐기자, 내 영혼아"라고 말했을 때에 "이 사람아, 오늘밤에 자네 생명을 취한다면 자네 소유가 누구 것이 되겠는가?"고 경고하신 적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영구적(permanent)인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금과 다이아몬드를 가지기를 원합니다. 금과 다이아몬드 자체는 오래갈지 모르나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이 바뀌기 때문에 결국 영구성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알게 되는 것은,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정한 시간에 내가 생각한 방법대로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알고 온유하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잠깐이라도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용납하시지 아니하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이루어지지 않으니까요. 수고는 내가 했어도 결국은 하나님이 지혜와 기회와 능력을 주셨음을 기억하 고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말론적인 윤리를 세워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본문 말씀대로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주님이 허락하시면 할 수 있다는 겸손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다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과거에 대해서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 내 자랑이 아닙니다. 또한 현재는 잠깐 지나갈 것이니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또한 미래는 미지수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 말씀대로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 것입니다.

또한 임시라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나그네의 윤리로 살아가자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갈 것처럼, 영원히 소유할 것처럼 그런 망상을 가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잠깐 소유했다가 내놓아야 합니다. 언제나 끝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작년 여름에 우리 대학부 학생들 약 700여 명이 양수리 수양관에서 닷새 동안 집회를 가졌었습니다. 학생들이 얼마나 진실하고 착한지 저도 함께 갔다가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들은 수련회를 시작하자마자 가지고 있던 시계, 라디오, 잡지 등을 한데 모으고 심지어는 예배실에 있는 시계까지도 종이로 가려서 시간관념을 없애고 오직 기도와 말씀으로만 닷새 동안 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들의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지도자에게 왜 이런 방법을 쓰는냐고 물었더니 죽는 연습을 한다고 재미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죽을 사람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시간이 몇 시인지 알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그 입 장으로 한번씩 생각을 돌려서 죽는 연습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일 지키는 것도 일종의 죽는 연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주일만 되면 모든것을 전부 중단(all stop)하고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어차피 부르시면 다 중단하고 가야 하지 않습니까? 주일 지키는 것이 세상일을 중단하는 훈련이니 죽는 연습을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자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에게 어느 젊은이가 물었다고 합니다. "만약에 내일 밤 12시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다면 지금부터 그 시간까지 무엇을 하겠습니까?" 존 웨슬리는 "지금까지 살아 온대로, 하던 일을 그대로 계속할 것입니다"라고 매우 뜻 있는 대답을 했답니다. 매일매일을 그 날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이제 죽음을 통고 받았다 해서 새삼스럽게 어떤 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던 일을 그대로 계속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윤리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로써 그대로 끝이 나도 괜찮겠습니까? 어제 하였고 오늘하고 있는 일---이 상태에서 끝이 나도 상관없겠느냐는 말입니다. 죽음이 가까이 왔으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일들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학생들 중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시험 때라고 특별나게 공부하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자기 계획대로 열심히 하니 그 실력으로 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시험이 있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부 못하는 학생일수록 시험에 신경 쓰고 언제 시험을 보는지 계속 불안해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죽음의 그 날이 언제와도 상관없이 평소대로 맞이할 수 있도록 종말론적인 자세로 살아 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재창조된, 중생한 사람은 현재가 은혜인고로 오늘에 감사하며 현재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현재에 대해 불만 투성입니다. 열왕기상 178절 이하에 보면 극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큰 흉년이 들어 모두가 굶어죽는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종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르밧이라는 지방에 가게 됩니다. 그가 성문에 이르렀을 때, 한 과부가 외아들과 함께 나뭇가지를 줍고 있어,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과부는 자기 집에 식량이 다 떨어졌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불을 지펴서 한웅큼 남은 가루와 약간의 기름으로 마지막 빵을 만들어서 먹고 죽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때 엘리야는 그 빵을 자기에게 달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남은 빵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 빵이 마지막 식량이라 이것을 먹고는 죽을 터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르밧 과부는 이 빵을 엘리야에게 드립니다. 정말 귀한 믿음입니다. 사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죽을 것인데 이것을 먹고 죽으나 안 먹고 죽으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을 드렸더니 축복의 근원이 되어 먹어도 먹어도 가루가 계속 생기고 기름도 마르지 않아 흉년 동안 내내 먹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게 있는 마지막 빵 하나를 내가 먹어야 합니까?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이 마지막 건강,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겠습니까? 어느 어머니가 너무 열심히 일을 하자, 아들이 보다못해서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십니까?" 어머니는 촛불이 하나밖에 없는데 자꾸만 타 들어가니 꺼지기 전에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본문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4:17)"---무슨 뜻입니까?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도 있고 지식도 있고 능력도 있고 돈도 있는데 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연기합니다. 아무 도시에나 가서 돈을 벌어와서 하겠다고 말하자 성경은 엄하게 심판합니다. "네 생명이 무엇이뇨"---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게으르든지 핑계하든지 미루면 하나님께 크게 책망받을 것이며, 그것이 곧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도둑질이나 살인만이 죄가 아니라 게으른 것도 죄입니다. 게으른 자는 시간을 도둑질하는 것이요, 은사를 남용한 죄로 사형죄에 해당합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왜 책망을 받았습니까? 그가 남의 것을 빼앗았거나 도둑질한 사실이 없습니다. 단지 땅에 묻었다가 그대로 내놓았는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무섭게 책망을 받습니다. 여러분, 내게 주신 은사를 다해서 일해야 합니다. 게으름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끝으로 작자 미상의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어서 시가 주는 그 의미를 잘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밝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 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부르기에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회개도 진실도 겸손도 봉사도 선행도 충성도 다 기회가 있습니다. 지나가면 회개하려고 해도 회개하지 못하고, 진실 하려고 해도 진실하지 못합니다. 겸손하고 싶고 충성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종말이 언제 어떻게 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아무튼 종말은 옵니다. 그러므로, 항상 시작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항상 끝내는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과 믿음과 사랑과 부지런함으로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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