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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이러한 기쁨에 사는 자(요한복음 3장 22절~30절)

by 【고동엽】 2023.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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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쁨에 사는 자(요한복음 3장 22절~30절)

 

 

'당신은 어떤 마음이 가정 행복한 마음이라고 정의하십니까?'----언젠가「런던 타임스」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이런 설문을 낸 일이 있습니다. 응답을 통계낸 결과 1위에서 4위까지가 퍽 상징적이고 애교스러운 데가 있어서 한번 소개해 봅니다. 첫번째는 모래성을 막 완성하고 난 어린이의 마음이 행복한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아기를 목욕시키고난 어머니의 마음이요, 세 번째는 공예품을 완성하고 난 장인(匠人)의 마음이요, 네 번째는 어려운 수술을 성공하여 한 생명을 구해낸 의사의 마음이 행복한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그의 육체적인 여건이나 지시이나 지위나 소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사람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를테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은 그 사람의 속사람을 드러내는 한 단면입니다. 사람이란 웃고 울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이 정상적이어야 합니다. 가령 울러 마땅할 때에 히죽히죽 웃고 있다면 그는 실성한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웃어야 할 때에는 웃고 울어야 할 때에는 우는 것이 정상입니다.

한걸음 나아가 생각할 때, 훌륭한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인격을 가진 사람은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격이 여느 사람과 좀 다릅니다. 그 기준이 더 높은 데에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기보다는 이웃을 위하고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이웃 중심적입니다. 자기 일로 기뻐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일로 기뻐하고 자기 일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픔으로 해서 괴 로워할 줄 아는 수준 높은 심리 상태에 있습니다. 고상(高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령한 기쁨이 있고 속된 기쁨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기쁨이 있고 육체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먹기를 즐기는 사람이 있고 듣고 보기를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을 읽어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으로 해서 기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받아서 기쁜 사람이 있고 주어서 기쁜 사람이 있습니다. 돈을 버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 있고, 쓰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카네기 같은 사람은 공공도서관 짓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도서관을 지었는데, 한번에 6천만 달러를 희사한 기록도 있습니다. 그밖의 교육 시설을 위해서도 7천만 달러를 희사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여러 교회를 다녀보아서 오르간이 변변찮은 교회가 있으면 멋진 오르간을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그밖에도 여러 모로 좋은 일 하는 데 돈을 많이 쓴 사람으로 이름나 있습니다. 여기에 보기로 든 씀씀이만 하여도 합쳐서 우리 돈으로 삼천억 원쯤이 됩니다. "돈을 남기고 죽는 것처럼 부끄러운 일은 없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다 쓰고 가야 한다." 카네기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번 옳은 말입니다. 돈을 남기고 죽는 사람처럼 바보스러운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쁨으로 살아가십니까? 무슨 낙으로 살아가십니까? 기쁨이 문제입니다. 여기에 음식이 있다고 합시다. 이 음식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음식에 대한 나의 입맛도 중요합니다. 사람에게는 정신적인 입맛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있습 니다. 성향(性向)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일에 슬퍼하십니까? 어떤 일로 기뻐하십니까?

로마서 9장 1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 민족이 회개하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습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공동번역성서)" 하며 괴로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감람산 기슭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눅 13:34)" 하고 40년 후에 망해 없어질 그 미래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슬퍼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슬픔을 맛보신 적이 없습니까? 오늘의 본문 말씀은 제가 매우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29절에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하고 말씀합니다. 생각해 보면 기뻐할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기쁨이 충만하다고 제자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 기쁨이 어떤 기쁨입니까? 절대적인 기쁨, 온전한 기쁨입니다. 영원한 기쁨입니다.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의 단면이었습니다. 말씀에 나타난 문맥대로 살펴본다면 이 기쁨은 시기와 질투가 없는 마음에서 비롯된 기쁨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은 대체 어디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결국 마음의 깊디깊은 곳에 시기심과 질투심이 있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기심과 질투심이 없다면 그 마음은 언제나 기쁜 법입니다. 세상에 시기 나 질투처럼 치사한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합니까? 우리 옛사람들이 하는 말에, 동생을 칭찬하면 형은 좋아하지 않으나, 아들을 칭찬하면 아버지는 좋아한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딸을 칭찬하면 그 어머니가 좋아한다고 합니다. 적어도 부모의 사랑이 지닌 값어치는 질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딸을 질투하는 어머니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날로 못돼가서 며느리 질투하는 시어머니는 예사로 흔하고, 젊은이 질투하는 노인도 많고, 심지어 아들 질투하는 아버지도 있는 모양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왜 없겠습니까? 예사로 생각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올시다. 여러분에게 고민이 있습니까? 마음속에 시기 질투가 있어서 괴로움이 있다고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질투는 눈을 멀게 합니다. 시기의 노예가 되면 마음에 아무 기쁨이 없습니다. 누차 이야기하는 바입니다마는 요즘의 노사 분규만 해도 그렇습니다. 전문적으로 따져서야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기분나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인 것 같습니다. 내가 못살아서가 아닙니다. 잘사는 사람이 눈에 거슬려서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30만 원 월급 받는 사람에게 100만원을 주면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까? 이런식으로 생각한다면 끝없는 이야기가 됩니다. 100만 원을 주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가진 자에게 있습니다. 가진 자가 자제를 해야 됩니다. 돈많은 사람이 검소하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생각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절 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가 일어날 때에는 가진 자 편에서 자세를 바꾸어 해결하는 예가 많습니다. 내가 못살아서 쟁의(爭議)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잘사는 사람이 보기 싫어서 일으킵니다. 가진 자가 턱없이 기고만장해서 흥청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보다 못사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매사에 공명정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진 자가 지켜야 할 분수입니다.

레이몬드 크래머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에「예수 심리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에게는 승부욕이 없다. 누구를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나 남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 그 책을 일관하는 주제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까? 시기와 질투로 말미암은 기쁨이나 스릴을 즐기십니까? 허망한 것입니다. 경쟁 심리나 시샘을 바탕으로 한 기쁨은 이내 허무와 절망으로 끝납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이런 심리를 종속심리라고 합니다.

'나'라는 존재, 나의 기쁨, 나의 행복은 어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나의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누구 때문에 기뻐지고 누구 때문에 슬퍼지고, 무슨 말을 들어서 슬퍼지고 무슨 말을 들어서 좋고---이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나 대우 같은 것에 따라 웃었다. 울었다 할 것이 아닙니다. 타(他)에 좌우되는 '나'라면 이미 '나'가 아니고, '나'라는 것은 사라져 없어진 것이 됩니다.

세례 요한의 마음속에 그처럼 기쁨이 있을 수 있었던 까닭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기 존재와 자기 본래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세상에 온 것은 미리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광야의 소리요, 메시야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봉사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위치, 자기 분수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세상에는 자기 페이스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 할 일은 못하고 남의 이야기만 합니다. 부부간에도, 가령 아내가 스스로, 어떻게 하면 좋은 아내가 될까, 어떻게 하면 진실한 아내가 될까, 이런 걱정만 하는 여자는 문제거리가 없다고 합니다.

스스로 좋은 아내가 될 생각은 하지 않고 남편 탓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내인 '나'는 증발하고 없지 않습니까? 이런 여자가 불평이 많은 법입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걸핏하면 '내 성격이 이렇게 된 것은 아내 탓'이라고 합니다. 남편인 '나'는 어디로 갔습니까? 남편으로서 마땅한 역할, 남편으로서의 페이스는 팽개치고 누구를 탓하는 것입니까? 자기 분수 잘 알고, 자기 할 일 착실히 하고, 자기 페이스를 충실히 지키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동요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느 여집사님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분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랑니가 나는데, 그것을 빼려고 한답니다. 아까운 것을 왜 빼느냐고 하니까, 할일 없는 이빨은 말썽을 부리기 때문이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그거 진리요, 아멘" 하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역할이 있습니다. '나'로서 꼭 할 일이 있는데, 이것을 충실히 하지 않고 쓸데없이 이리저리로 생각을 돌릴 때에는 심지어 하나님께까지 올라가서 세상을 비판하려고 덤빕니다. 이런 주제넘은 생각이 고민을 낳는 법입니다. 나는 내 할 일 착실히 하고 있으면 됩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위치를 꼭 지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지(初志)를 관철했습니다. 초지를 관철한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흔히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생각했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생각이 달라져서 걱정이 아닙니까.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자기 제자를 예수님께 양보해 드렸습니다. 이렇게 잘해 드렸습니다마는 이제 와서 보니 예수님의 제자들은 많아지고 자기 사람은 적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만 자꾸 몰려간다는 소리를 들을 때에 당연히 괴롭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처음 생각, 즉 초지(初志)가 그것 아닙니까. 요한은 처음 생각대로 일관하였습니다. 드리겠다고 생각했으면 끝까지 드릴 것이고, 사랑하겠다고 했으면 끝까지 사랑하고, 복종하기로 결심했으면 끝까지 복종하고, 충성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상황이 어떻게 바뀌든지간에 끝까지 충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를 않고 처음 생각이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면 고민이 많게 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부모에게 효도할 양이면 끝까지 효도해야지 나한테 잘해 주고 못해 주고에 따라 변덕이 생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니, 노망을 한다고 해서 고려장(高麗葬)해 버릴 것입니까? 마음이 변해서 변덕을 부림으로 고민이 많아집니다. 세례 요한은 심지(心志)가 견고했습니다. 이사야서에도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으로 인도한다"고 말씀합니다. 요한은 그래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 다. 또, 그는 함께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기쁨을 서로 나눌 줄 알고, 더불어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마는, 우리는 어려운 일 당한 사람에게 가서 동정도 하고 긍휼을 베풀기도 합니다. 돈을 모금해서 갖다준다든가 하며 남의 고난에 동참하겠다는 생각을 곧잘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보다 나아지는 사람에 대한 태도입니다. 나보다 좀 나아지는 사람에게는 그 기쁨에 동참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것 같아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 데는 수준급인데 나보다 나은 사람의 기쁨에는 함께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교우 가운데 대학에 입학한 학생 하나가 있어요. 입학한 학생이야 어디 이 학생뿐이었겠습니까마는, 이 학생의 집에서는 기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구역 사람들을 초청했지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학생의 입학을 위해서 온 구역 식구들이 힘을 모아 기도를 해 왔었다고 합니다. 물론 다른 집에도 학생이 있어서 더러는 낙방한 집도 있었습니다마는 모두가 위해서 기도한 저 이웃 교인의 집 학생의 입학을 인해서 다같이 모여서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참 보기에 좋았습니다. 참 좋은 마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남의 기쁨을 다같이 기뻐할 줄 아는 마음씨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마는 이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남의 일을 나의 일처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내 친구가 어려운 일 당했을 때에 같이 슬퍼해 주는 것 만큼으로 내 친구의 기쁨에도 함께 기뻐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마음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알고 다른 사람의 영광을 함께 영광으로 생각하는 겸손하고 열린 마음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에 보니,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잔칫날 정말로 기쁠 사람은 신랑 신부 아닙니까? 그런데,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라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요 3:29)" 하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좋은 친구입니까? 아름다운 여자를 내 친구가 취해서 결혼을 한다고 할 때에 시샘 같은 것은 없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멋진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잘사는 사람 볼 때에 기뻐하고 잘되는 친구를 볼 때에 함께 그 기쁨을 나누는 아름다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늘 기쁨 속에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또한 쇠하는 기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0절)"---'나는 이런 기쁨이 있다'는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내가 쇠하여 그가 흥한다면 쇠할 것이요, 내가 참아서 그가 복되다면 내가 참을 것이요, 내가 고난당해서 그에게 영광이 돌아간다면 내가 고난당할 것이요, 내가 죽어 저가 산다면 내가 죽는 것을 기뻐하노라!---이런 신비로운 기쁨을 하는 자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그'라고 지칭한 이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님의 나라를 인하여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종탑이 올라갈 때에 보니까 어떤 분들은 이렇다할 볼일이 없는데도 자꾸 들락거립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저 좋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쳐다보는 것이 재미있다고 합니다. 예배당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보니 그렇게도 기쁠 수가 없다고들 합니다. 내 집 짓는 것보다도 더 좋다고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더욱더 크게 나타나는 것을 볼 때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쇠하는 기쁨,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기쁨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기쁨이 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에 근거한 기쁨이요, 참기쁨을 아는 자의 기쁨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행복입니다. 이 기쁨으로 인해서 생산적인 역사가 나타나고 창조적인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되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  

이러한 기쁨에 사는 자(요한복음 3장 22절~30절)

 

 

'당신은 어떤 마음이 가정 행복한 마음이라고 정의하십니까?'----언젠가「런던 타임스」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이런 설문을 낸 일이 있습니다. 응답을 통계낸 결과 1위에서 4위까지가 퍽 상징적이고 애교스러운 데가 있어서 한번 소개해 봅니다. 첫번째는 모래성을 막 완성하고 난 어린이의 마음이 행복한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아기를 목욕시키고난 어머니의 마음이요, 세 번째는 공예품을 완성하고 난 장인(匠人)의 마음이요, 네 번째는 어려운 수술을 성공하여 한 생명을 구해낸 의사의 마음이 행복한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그의 육체적인 여건이나 지시이나 지위나 소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사람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를테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은 그 사람의 속사람을 드러내는 한 단면입니다. 사람이란 웃고 울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이 정상적이어야 합니다. 가령 울러 마땅할 때에 히죽히죽 웃고 있다면 그는 실성한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웃어야 할 때에는 웃고 울어야 할 때에는 우는 것이 정상입니다.

한걸음 나아가 생각할 때, 훌륭한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인격을 가진 사람은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격이 여느 사람과 좀 다릅니다. 그 기준이 더 높은 데에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기보다는 이웃을 위하고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이웃 중심적입니다. 자기 일로 기뻐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일로 기뻐하고 자기 일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픔으로 해서 괴 로워할 줄 아는 수준 높은 심리 상태에 있습니다. 고상(高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령한 기쁨이 있고 속된 기쁨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기쁨이 있고 육체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먹기를 즐기는 사람이 있고 듣고 보기를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을 읽어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으로 해서 기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받아서 기쁜 사람이 있고 주어서 기쁜 사람이 있습니다. 돈을 버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 있고, 쓰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카네기 같은 사람은 공공도서관 짓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도서관을 지었는데, 한번에 6천만 달러를 희사한 기록도 있습니다. 그밖의 교육 시설을 위해서도 7천만 달러를 희사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여러 교회를 다녀보아서 오르간이 변변찮은 교회가 있으면 멋진 오르간을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그밖에도 여러 모로 좋은 일 하는 데 돈을 많이 쓴 사람으로 이름나 있습니다. 여기에 보기로 든 씀씀이만 하여도 합쳐서 우리 돈으로 삼천억 원쯤이 됩니다. "돈을 남기고 죽는 것처럼 부끄러운 일은 없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다 쓰고 가야 한다." 카네기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번 옳은 말입니다. 돈을 남기고 죽는 사람처럼 바보스러운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쁨으로 살아가십니까? 무슨 낙으로 살아가십니까? 기쁨이 문제입니다. 여기에 음식이 있다고 합시다. 이 음식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음식에 대한 나의 입맛도 중요합니다. 사람에게는 정신적인 입맛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있습 니다. 성향(性向)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일에 슬퍼하십니까? 어떤 일로 기뻐하십니까?

로마서 9장 1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 민족이 회개하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습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공동번역성서)" 하며 괴로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감람산 기슭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눅 13:34)" 하고 40년 후에 망해 없어질 그 미래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슬퍼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슬픔을 맛보신 적이 없습니까? 오늘의 본문 말씀은 제가 매우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29절에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하고 말씀합니다. 생각해 보면 기뻐할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기쁨이 충만하다고 제자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 기쁨이 어떤 기쁨입니까? 절대적인 기쁨, 온전한 기쁨입니다. 영원한 기쁨입니다.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의 단면이었습니다. 말씀에 나타난 문맥대로 살펴본다면 이 기쁨은 시기와 질투가 없는 마음에서 비롯된 기쁨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은 대체 어디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결국 마음의 깊디깊은 곳에 시기심과 질투심이 있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기심과 질투심이 없다면 그 마음은 언제나 기쁜 법입니다. 세상에 시기 나 질투처럼 치사한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합니까? 우리 옛사람들이 하는 말에, 동생을 칭찬하면 형은 좋아하지 않으나, 아들을 칭찬하면 아버지는 좋아한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딸을 칭찬하면 그 어머니가 좋아한다고 합니다. 적어도 부모의 사랑이 지닌 값어치는 질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딸을 질투하는 어머니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날로 못돼가서 며느리 질투하는 시어머니는 예사로 흔하고, 젊은이 질투하는 노인도 많고, 심지어 아들 질투하는 아버지도 있는 모양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왜 없겠습니까? 예사로 생각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올시다. 여러분에게 고민이 있습니까? 마음속에 시기 질투가 있어서 괴로움이 있다고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질투는 눈을 멀게 합니다. 시기의 노예가 되면 마음에 아무 기쁨이 없습니다. 누차 이야기하는 바입니다마는 요즘의 노사 분규만 해도 그렇습니다. 전문적으로 따져서야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기분나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인 것 같습니다. 내가 못살아서가 아닙니다. 잘사는 사람이 눈에 거슬려서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30만 원 월급 받는 사람에게 100만원을 주면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까? 이런식으로 생각한다면 끝없는 이야기가 됩니다. 100만 원을 주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가진 자에게 있습니다. 가진 자가 자제를 해야 됩니다. 돈많은 사람이 검소하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생각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절 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가 일어날 때에는 가진 자 편에서 자세를 바꾸어 해결하는 예가 많습니다. 내가 못살아서 쟁의(爭議)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잘사는 사람이 보기 싫어서 일으킵니다. 가진 자가 턱없이 기고만장해서 흥청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보다 못사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매사에 공명정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진 자가 지켜야 할 분수입니다.

레이몬드 크래머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에「예수 심리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에게는 승부욕이 없다. 누구를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나 남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 그 책을 일관하는 주제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까? 시기와 질투로 말미암은 기쁨이나 스릴을 즐기십니까? 허망한 것입니다. 경쟁 심리나 시샘을 바탕으로 한 기쁨은 이내 허무와 절망으로 끝납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이런 심리를 종속심리라고 합니다.

'나'라는 존재, 나의 기쁨, 나의 행복은 어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나의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누구 때문에 기뻐지고 누구 때문에 슬퍼지고, 무슨 말을 들어서 슬퍼지고 무슨 말을 들어서 좋고---이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나 대우 같은 것에 따라 웃었다. 울었다 할 것이 아닙니다. 타(他)에 좌우되는 '나'라면 이미 '나'가 아니고, '나'라는 것은 사라져 없어진 것이 됩니다.

세례 요한의 마음속에 그처럼 기쁨이 있을 수 있었던 까닭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기 존재와 자기 본래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세상에 온 것은 미리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광야의 소리요, 메시야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봉사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위치, 자기 분수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세상에는 자기 페이스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 할 일은 못하고 남의 이야기만 합니다. 부부간에도, 가령 아내가 스스로, 어떻게 하면 좋은 아내가 될까, 어떻게 하면 진실한 아내가 될까, 이런 걱정만 하는 여자는 문제거리가 없다고 합니다.

스스로 좋은 아내가 될 생각은 하지 않고 남편 탓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내인 '나'는 증발하고 없지 않습니까? 이런 여자가 불평이 많은 법입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걸핏하면 '내 성격이 이렇게 된 것은 아내 탓'이라고 합니다. 남편인 '나'는 어디로 갔습니까? 남편으로서 마땅한 역할, 남편으로서의 페이스는 팽개치고 누구를 탓하는 것입니까? 자기 분수 잘 알고, 자기 할 일 착실히 하고, 자기 페이스를 충실히 지키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동요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느 여집사님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분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랑니가 나는데, 그것을 빼려고 한답니다. 아까운 것을 왜 빼느냐고 하니까, 할일 없는 이빨은 말썽을 부리기 때문이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그거 진리요, 아멘" 하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역할이 있습니다. '나'로서 꼭 할 일이 있는데, 이것을 충실히 하지 않고 쓸데없이 이리저리로 생각을 돌릴 때에는 심지어 하나님께까지 올라가서 세상을 비판하려고 덤빕니다. 이런 주제넘은 생각이 고민을 낳는 법입니다. 나는 내 할 일 착실히 하고 있으면 됩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위치를 꼭 지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지(初志)를 관철했습니다. 초지를 관철한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흔히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생각했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생각이 달라져서 걱정이 아닙니까.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자기 제자를 예수님께 양보해 드렸습니다. 이렇게 잘해 드렸습니다마는 이제 와서 보니 예수님의 제자들은 많아지고 자기 사람은 적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만 자꾸 몰려간다는 소리를 들을 때에 당연히 괴롭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처음 생각, 즉 초지(初志)가 그것 아닙니까. 요한은 처음 생각대로 일관하였습니다. 드리겠다고 생각했으면 끝까지 드릴 것이고, 사랑하겠다고 했으면 끝까지 사랑하고, 복종하기로 결심했으면 끝까지 복종하고, 충성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상황이 어떻게 바뀌든지간에 끝까지 충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를 않고 처음 생각이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면 고민이 많게 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부모에게 효도할 양이면 끝까지 효도해야지 나한테 잘해 주고 못해 주고에 따라 변덕이 생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니, 노망을 한다고 해서 고려장(高麗葬)해 버릴 것입니까? 마음이 변해서 변덕을 부림으로 고민이 많아집니다. 세례 요한은 심지(心志)가 견고했습니다. 이사야서에도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으로 인도한다"고 말씀합니다. 요한은 그래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 다. 또, 그는 함께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기쁨을 서로 나눌 줄 알고, 더불어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마는, 우리는 어려운 일 당한 사람에게 가서 동정도 하고 긍휼을 베풀기도 합니다. 돈을 모금해서 갖다준다든가 하며 남의 고난에 동참하겠다는 생각을 곧잘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보다 나아지는 사람에 대한 태도입니다. 나보다 좀 나아지는 사람에게는 그 기쁨에 동참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것 같아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 데는 수준급인데 나보다 나은 사람의 기쁨에는 함께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교우 가운데 대학에 입학한 학생 하나가 있어요. 입학한 학생이야 어디 이 학생뿐이었겠습니까마는, 이 학생의 집에서는 기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구역 사람들을 초청했지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학생의 입학을 위해서 온 구역 식구들이 힘을 모아 기도를 해 왔었다고 합니다. 물론 다른 집에도 학생이 있어서 더러는 낙방한 집도 있었습니다마는 모두가 위해서 기도한 저 이웃 교인의 집 학생의 입학을 인해서 다같이 모여서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참 보기에 좋았습니다. 참 좋은 마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남의 기쁨을 다같이 기뻐할 줄 아는 마음씨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마는 이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남의 일을 나의 일처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내 친구가 어려운 일 당했을 때에 같이 슬퍼해 주는 것 만큼으로 내 친구의 기쁨에도 함께 기뻐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마음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알고 다른 사람의 영광을 함께 영광으로 생각하는 겸손하고 열린 마음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에 보니,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잔칫날 정말로 기쁠 사람은 신랑 신부 아닙니까? 그런데,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라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요 3:29)" 하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좋은 친구입니까? 아름다운 여자를 내 친구가 취해서 결혼을 한다고 할 때에 시샘 같은 것은 없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멋진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잘사는 사람 볼 때에 기뻐하고 잘되는 친구를 볼 때에 함께 그 기쁨을 나누는 아름다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늘 기쁨 속에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또한 쇠하는 기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0절)"---'나는 이런 기쁨이 있다'는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내가 쇠하여 그가 흥한다면 쇠할 것이요, 내가 참아서 그가 복되다면 내가 참을 것이요, 내가 고난당해서 그에게 영광이 돌아간다면 내가 고난당할 것이요, 내가 죽어 저가 산다면 내가 죽는 것을 기뻐하노라!---이런 신비로운 기쁨을 하는 자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그'라고 지칭한 이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님의 나라를 인하여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종탑이 올라갈 때에 보니까 어떤 분들은 이렇다할 볼일이 없는데도 자꾸 들락거립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저 좋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쳐다보는 것이 재미있다고 합니다. 예배당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보니 그렇게도 기쁠 수가 없다고들 합니다. 내 집 짓는 것보다도 더 좋다고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더욱더 크게 나타나는 것을 볼 때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쇠하는 기쁨,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기쁨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기쁨이 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에 근거한 기쁨이요, 참기쁨을 아는 자의 기쁨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행복입니다. 이 기쁨으로 인해서 생산적인 역사가 나타나고 창조적인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되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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