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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일하는 자의 복(요한복음 6장 26절~33절)

by 【고동엽】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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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자의 복(요한복음 626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떡을 너희에게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을 만들어 우리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에덴 동산을 일컬어 파라다이스(낙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옛날 범죄하기 전의 파라다이스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막연히 에덴 동산을 그리워하기 전에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에덴 동산이 놀고먹는 곳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에덴 동산을 주실 때에, 만물을 다스리고 주관하라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셨으나 안일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자유를 주셨으나 방종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고,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실 때에는 복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다고 하는 복의 개념을 분명히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좋은 저택, 좋은 음식, 좋은 옷을 꿈꾸며 복된 여건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그런 것들에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복된 여건이 아니라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누리고 즐기는 사람이 복된 람입니다. 복을 복으로 알아 소유하고 즐기는 데에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어느 집에 심방을 갔는데 그곳에 '싱어(SINGER)' 재봉틀이 있었습니다. 컴퓨터 시설을 한 재봉틀인데, 아름다운 수를 놓을 수도 있는 아주 편리한 최신형 재봉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저 재봉틀 누가 쓰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아무도 만질 줄 모른다고 하지 뭡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좋은 재봉틀인들 무슨 소용입니까? '내가 이렇게 좋은 것을 가졌다'고 과시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까? 오히려 도둑맞을까봐 걱정이지요. 없는 것만도 못합니다.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좋은 기계만 가지고 있으면 뭐합니까? 기능과 능력을 잘 알아서 활용할 수 있을 때에 즐거움이 있는 것 아닙니까? 이제 복의 개념을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우리는 흔히 복이라는 것은 어떠한 환경이 주어지기만 하면다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복된 사람은 어떠한 여건에서도 복됩니다. 복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어디서든지 스스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복을 즐길 줄 아는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디서나 하나님과 동행하고, 어디서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어디서나 감사하며 그 영광의 길을 가는 사람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그런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저는 본능과 복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먹고 싶어하는 본능을 예로 들어 볼까요? 먹고 싶다는 것---이것은 생존의 욕구입니다 살아 있다는 증거이지요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큰일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싶을 때에 좋은 음식이 주어진다는 것은 즐겁고 복된 일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음식이 주어져도 왕성한 식욕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좋은 음식과 좋은 입맛, 이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면 저는 입맛 쪽을 택하겠습니다. 좋은 음식이 따로 있나요? 꽁보리밥에다 고추장만 비벼 먹어도 입맛 좋은 사람한테는 더없이 좋은 음식입니다. 고급 음식을 앞에 놓고도 소화가 되지 않아 빈 수저만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다면 그보다 더 딱한 일이 없습니다. 없어서 못 먹는 사람보다 있어도 못 먹는 사람, 음식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 정말 불쌍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입맛이 좋겠습니까? 일하는 사람이라야 입맛이 좋습니다. 노동을 하는 사람, 열심히 일한 사람만이 음식을 즐길 수 있습니다. 자다 일어난 사람한테 무슨 입맛이 있겠습니까? 모래알을 씹는 것 같지요.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옛날 장작불을 때는 난로 앞에 이런 글을 새겨 놓았었다고 합니다. '장작을 몸소 패면 겹으로 더워진다.' 이 얼마나 그럴듯한 말입니까? 잠자리에서 금방 일어나 불을 쬐려고 하면 불 속에 들어가도 춥습니다. 그러나 몸소 장작을 패면 패는 동안에 덥고, 불피워서 덥습니다. 이중으로 따뜻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음식으로 인한 즐거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일한 뒤 허기진 상태에서 대하는 음식이라야 더욱 맛있고 즐거운 것 아니겠습니까? 재벌 아버지가 자식에게 많은 돈을 물려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돈을 벌면서 얻은 행복만은 물려줄 수가 없습니다. 그 가치는 절대로 물려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 자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알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까? 공부해야지요. 스스로 공부하면서 깨닫고 즐기는 것입니다. 가지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까? 벌어야지요. 땀흘려서 내 손에 넣을 때, 거기에 뿌듯한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나에게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인내해야 합니다. 이루고 싶은 성취욕이 있다면 힘써야 합니다.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가꾸어야 합니다. 언제나 복이 있고, 복된 길로 향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하지 않고는 복이 주어지지도 않고, 깨달아지지도 않습니다. 그 복을 즐길 수도 없고 복의 가치를 지켜나갈 수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을 금식하신 후에 사단이 와서 시험을 합니다. 그 시험은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돌로 떡을 만들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줄 테니 내게 절을 해보아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험에서 사단이 애써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쉽게 얻으라는 말입니다. 뭐 힘들게 수고할 필요 없다, 쉽게 얻어라---우리도 얼마나 많이 이러한 시험을 받습니까? 그러나 공부에 지름길이 없습니다. 성공에 쉬운 길이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행복으로 통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사람은 부득이 일을 하여야만 살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라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생업, 직업, 천직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이 세 가지를 구분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째, 생업(生業)이란 문자 그대로 '살기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살아야 되겠으니까 일하는 것입니다. 가족 먹여 살리고 자기도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사실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영국의 극작가인 버나드 쇼(G. Bernard Shaw)는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바보스러운 사람은 자기 직업을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의무 때문에 하는 일은 괴롭고 따분합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에 쫓겨 직장에 나가고, 먹고살아야 하니까 일을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피곤한 노릇인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한테는 출근 시간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시간과 같습니다. 그저 안 나가 보려고 바둥바둥 거리다가 할 수 없이 끌려나갑니다. 그러니까 퇴근 시간만 되면'어휴, 살았다' 하고 뛰쳐나옵니다. 공휴일이면 무슨 큰 횡재나한 것처럼 좋아합니다. 어떻게든지 일에서 벗어나 볼 궁리만 합니다. 이렇게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내가 왜 직장에 나가지?' 하는 회의가 생기고, 그러다 보니 '저 사람들 때문이야' 하고 가족들을 원망합니다. 그러니 집에 들어오면 짜증이 나고 그래서 온 집안을 다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대전에 내려가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에 어느 장로님과 마주 앉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차를 마시다가 무심코 제가 물었습니다. "장로님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이렇게 직업을 물었는데 그 장로님이 어찌나 쩔쩔매고 전전긍긍 하시던지 나중에는 제가 그 질문 한 것을 크게 후회했습니다. 그 장로님, 마침내 하시는 말씀이 "신탄진 담배 공장에 나갑니다" 하는 거예요. , 담배 공장과 장로님--어딘지 걸맞지 않은 느낌이 들지요? 그렇다면 장로님한테 담배 공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업입니다. 먹기 위해 하는 일입니다. 집사님이 양조장에 근무하는 것도 비슷한 이야기지요.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먹고살아야 하겠으니 이것을 생업이라고 억지로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피곤하고 얼마나 짜증스러운 일입니까? 마침내 자기 자신한테도 환멸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불평꾼이 되고 맙니다. 어느 사이에 인간성은 점점 나빠지고, 자칫하면 신앙까지도 저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생업입니다. 오래 할 것이 못 되지요.

둘째, 직업이란 일 자체를 즐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 일을 힘들게 생각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아이고 힘들어, 이거 너무 바빠서, 너무 어려워서…… 하고 고개를 흔들어 본 적이 없습니까? 물론 일하다 보면 힘들 때도 있고 한숨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평은 금물입니다. 불평하지 맙시다. 일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정년 퇴직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퇴직한다는 것, 일이 없다는 것---이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아십니까? 아침에 눈을 떠도 갈 곳이 없어요. 할 일이 없습니다.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때 가서는 월급 못 받아도 좋으니 제발 책상 한 귀퉁이에라도 앉아 일 좀 하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월급이야 많든 적든 그저 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感之德之)하여야 합니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아이고, 나도 빨리 건강해져서 일하러나갔으면 좋겠어요." 돈 생각은 둘째 문제입니다. 부하고 가난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회전의자냐 나무의자냐, 이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답답한 병실에 하루종일 누워 있다보니 건강한 몸으로 바쁘게 일하던 때가 그리운 것입니다. 일할 때는 일의 고마움을 모르고 '한번 푹 쉬어 봤으면……'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북적거리는 사무실, 상사의 고함소리,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 벨 소리…… 다 그리운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일 자체의 고마움과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은 대체로 잃고 난 다음입니다. 진작 깨달았더라면 직장 생활이 얼마나 더 밝고 힘찼겠습니까? 일한다는 것---그 자체가 얼마나 보람되고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일 자체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직업에 전문성이 있고, 일하는 사람의 소질과 재능에 맞는다면 금상첨화이지요. 세 사람의 예를 들어봅시다.

처칠은 평생을 정치로 살았습니다. 피카소는 그림으로, 토스카니니는 음악으로 살았습니다. 세 사람 다 아흔이 넘도록 오래 산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평생동안 휴식 시간을 따로 가지거나 별다른 레저 생활을 즐겨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일 자체가 즐거움이니까요. 일 자체가 곧 휴식이니까요. 일 자체를 즐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다른 휴식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쯤은 되어야 직업을 똑바로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처칠은 남달리 어려운 생을 살았습니다. 2차대전을 끝맺고 마감해야 하는 어려운 고비를 겪었습니다. 한창 어려운 때에 수상직에 올라 영국의 정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수상직에서 물러났을 때에는 돈이 없어서 사글세로 이집 저집 옮겨다니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오로지 정치에만 몸바쳐왔습니다. 팔순 고령으로 의정단상(議政壇上)에서 정치와 씨름하다갔습니다. 그는 한번도 돈에 마음을 쓴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치가입니다. 곁눈 팔지 않고 정치만 즐겨야 정치가입니다. 정치가가 돈에 마음을 쓰면 그 나라 정치는 그릇됩니다. 적어도 정치를 위해 산 사람이라면 퇴직할 때에 세 얻을 돈조차 없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별나게 입에 담을 화제거리가 될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직업인이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있습니까? 가르치면 그만이지 무엇을 더 바랍니까? 우리는 가끔 평생을 교직에 몸담아 온 사람이 어렵게 지냈다고 하면 그것을 치하합니다마는 치하할 일이 못 됩니다. 당연히 그랬어야지요. 돈을 바라고 산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것 하나만을 즐기고 살았으니까요. 간혹 우리는 어떤 공무원이 퇴직한 경우, 엄청나게 많은 돈을 가지고 좋은 집을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공무원이 어떻게 살아왔겠는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공무원의 빠듯한 봉급만으로는 그만한 돈을 모을 수가 없다는 것, 초등학생이라도 셈을 놓을 수 있지요.

정치가는 정치만으로, 교육자는 교육만으로 족합니다. 의사라면 환자를 치료해 주고 그가 쾌유되는 것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합니다. 의사가 돈에 눈독을 들이면 끝장난 것입니다. 적어도 직업인이라면 정정당당하게 그 일을 위해서 살고, 그 일을 즐기고, 그 일을 위해 자신을 전부 바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직업인에게는 일 자체가 휴식이요 휴양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하루 18시간씩 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하루도 일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나 모든 일을 오직 재미로 했을 뿐이다." 일 자체를 즐겼기에 하루에 18시간을 일해도 따로 휴식이 필요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전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한 여자가 중생하는 것을 보시고 너무나 기쁘신 나머지, 목도 갈하고 시장하실 때였지만 제자들이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잡수소서"할 때에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라고 대답하십니다.

한 사람을 전도해서 구원하고 보니 시장기가 다 가시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에 휴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휴식법입니다.

셋째, 천직(天職)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이루신다고 하는 사명감을 가질 때, 그 일이 곧 천직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자기의 천직을 발견하는 사람이다'---이런 멋진 말이 있습니다. '천직 말고 다른 복을 묻지 말라'---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이것이 내 천직이다' 싶으면 그밖에 딴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치면 그만이고, 의사는 치료하면 그만입니다. 수위는 문 지키는 것으로 족하고, 요리사는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으로 족합니다. 다른 복을 묻지 말라! 기대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의 천직, 거기에 진정한 행복과 멋지게 사는 길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천직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고 고용하셨다는 소명 의식과, 특별히 나같은 죄인을 구속하고 써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감격, 그리고 나의 미래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은총에 대한 감사가 뒤따릅니다. 이것이 바로 천직입니다. 천직 의식이 투철했던 사람으로 사도 바울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죄인의 괴수'였던 자신에게 사도 직분이 주어졌다는 것 때문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 하나로 만족합니다. 달리 바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감옥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아니할 영원한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이 시대가 안고있는 문제는 허무주의에 있습니다. 왜 이렇게 늘 피곤합니까? 왜 해소되지 않는 스트레스가 먼지처럼 쌓여갑니까? 왜 끝없이 주저앉고 절망합니까? 문제는 일의 뜻을 모르고 있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곤합니다. 돈을 벌지 못해서 피곤한 것이 아닙니다. 목적과 방향이 잘못되어서 피곤합니다. 출세하지 못해서 피곤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피곤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피곤한 것입니다. 절대로 일을 기피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양식을 인자가 주리라! 이 양식을 인자가 주리라!"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신다고 하십니다. 일하게 하시고, 일하여 행복하게 하시고, 일하여 능력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일을 통하여 주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인자가 너희에게 양식을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사는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동시에 죽는 이유도 분명해야 합니다. ()와 봉사는 힘겨운 의무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즐거움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순교가 결코 굴욕과 수치가 될 수 없습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시작이요 일은 생()의 지속입니다. 믿음은 안이요 일은 겉입니다. 믿음은 동기요 일은 결과입니다. 믿음은 뿌리요 일은 열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하고 제자들이 물을 때에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확실한 믿음 가운데에서 행하는 일이라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다 성직(聖職)입니다. 거룩한 일이 될 것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내 일의 목적이 거기에 있고, 내 일의 결과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즐거움, 현재의 배부름을 생각하며 일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언제나 원망과 불평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일 자체를 복되게 여기고 분명한 목적과 확실한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일 자체가 중생되어야 합니다. 또한 중생한 사람으로서 영원한 가치를 위하여 활기차고 행복하게 일해야 할 것입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일하는 자의 복(요한복음 626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떡을 너희에게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을 만들어 우리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에덴 동산을 일컬어 파라다이스(낙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옛날 범죄하기 전의 파라다이스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막연히 에덴 동산을 그리워하기 전에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에덴 동산이 놀고먹는 곳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에덴 동산을 주실 때에, 만물을 다스리고 주관하라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셨으나 안일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자유를 주셨으나 방종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고,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실 때에는 복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다고 하는 복의 개념을 분명히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좋은 저택, 좋은 음식, 좋은 옷을 꿈꾸며 복된 여건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그런 것들에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복된 여건이 아니라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누리고 즐기는 사람이 복된 람입니다. 복을 복으로 알아 소유하고 즐기는 데에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어느 집에 심방을 갔는데 그곳에 '싱어(SINGER)' 재봉틀이 있었습니다. 컴퓨터 시설을 한 재봉틀인데, 아름다운 수를 놓을 수도 있는 아주 편리한 최신형 재봉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저 재봉틀 누가 쓰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아무도 만질 줄 모른다고 하지 뭡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좋은 재봉틀인들 무슨 소용입니까? '내가 이렇게 좋은 것을 가졌다'고 과시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까? 오히려 도둑맞을까봐 걱정이지요. 없는 것만도 못합니다.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좋은 기계만 가지고 있으면 뭐합니까? 기능과 능력을 잘 알아서 활용할 수 있을 때에 즐거움이 있는 것 아닙니까? 이제 복의 개념을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우리는 흔히 복이라는 것은 어떠한 환경이 주어지기만 하면다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복된 사람은 어떠한 여건에서도 복됩니다. 복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어디서든지 스스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복을 즐길 줄 아는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디서나 하나님과 동행하고, 어디서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어디서나 감사하며 그 영광의 길을 가는 사람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그런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저는 본능과 복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먹고 싶어하는 본능을 예로 들어 볼까요? 먹고 싶다는 것---이것은 생존의 욕구입니다 살아 있다는 증거이지요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큰일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싶을 때에 좋은 음식이 주어진다는 것은 즐겁고 복된 일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음식이 주어져도 왕성한 식욕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좋은 음식과 좋은 입맛, 이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면 저는 입맛 쪽을 택하겠습니다. 좋은 음식이 따로 있나요? 꽁보리밥에다 고추장만 비벼 먹어도 입맛 좋은 사람한테는 더없이 좋은 음식입니다. 고급 음식을 앞에 놓고도 소화가 되지 않아 빈 수저만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다면 그보다 더 딱한 일이 없습니다. 없어서 못 먹는 사람보다 있어도 못 먹는 사람, 음식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 정말 불쌍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입맛이 좋겠습니까? 일하는 사람이라야 입맛이 좋습니다. 노동을 하는 사람, 열심히 일한 사람만이 음식을 즐길 수 있습니다. 자다 일어난 사람한테 무슨 입맛이 있겠습니까? 모래알을 씹는 것 같지요.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옛날 장작불을 때는 난로 앞에 이런 글을 새겨 놓았었다고 합니다. '장작을 몸소 패면 겹으로 더워진다.' 이 얼마나 그럴듯한 말입니까? 잠자리에서 금방 일어나 불을 쬐려고 하면 불 속에 들어가도 춥습니다. 그러나 몸소 장작을 패면 패는 동안에 덥고, 불피워서 덥습니다. 이중으로 따뜻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음식으로 인한 즐거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일한 뒤 허기진 상태에서 대하는 음식이라야 더욱 맛있고 즐거운 것 아니겠습니까? 재벌 아버지가 자식에게 많은 돈을 물려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돈을 벌면서 얻은 행복만은 물려줄 수가 없습니다. 그 가치는 절대로 물려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 자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알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까? 공부해야지요. 스스로 공부하면서 깨닫고 즐기는 것입니다. 가지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까? 벌어야지요. 땀흘려서 내 손에 넣을 때, 거기에 뿌듯한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나에게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인내해야 합니다. 이루고 싶은 성취욕이 있다면 힘써야 합니다.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가꾸어야 합니다. 언제나 복이 있고, 복된 길로 향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하지 않고는 복이 주어지지도 않고, 깨달아지지도 않습니다. 그 복을 즐길 수도 없고 복의 가치를 지켜나갈 수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을 금식하신 후에 사단이 와서 시험을 합니다. 그 시험은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돌로 떡을 만들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줄 테니 내게 절을 해보아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험에서 사단이 애써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쉽게 얻으라는 말입니다. 뭐 힘들게 수고할 필요 없다, 쉽게 얻어라---우리도 얼마나 많이 이러한 시험을 받습니까? 그러나 공부에 지름길이 없습니다. 성공에 쉬운 길이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행복으로 통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사람은 부득이 일을 하여야만 살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라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생업, 직업, 천직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이 세 가지를 구분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째, 생업(生業)이란 문자 그대로 '살기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살아야 되겠으니까 일하는 것입니다. 가족 먹여 살리고 자기도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사실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영국의 극작가인 버나드 쇼(G. Bernard Shaw)는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바보스러운 사람은 자기 직업을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의무 때문에 하는 일은 괴롭고 따분합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에 쫓겨 직장에 나가고, 먹고살아야 하니까 일을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피곤한 노릇인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한테는 출근 시간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시간과 같습니다. 그저 안 나가 보려고 바둥바둥 거리다가 할 수 없이 끌려나갑니다. 그러니까 퇴근 시간만 되면'어휴, 살았다' 하고 뛰쳐나옵니다. 공휴일이면 무슨 큰 횡재나한 것처럼 좋아합니다. 어떻게든지 일에서 벗어나 볼 궁리만 합니다. 이렇게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내가 왜 직장에 나가지?' 하는 회의가 생기고, 그러다 보니 '저 사람들 때문이야' 하고 가족들을 원망합니다. 그러니 집에 들어오면 짜증이 나고 그래서 온 집안을 다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대전에 내려가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에 어느 장로님과 마주 앉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차를 마시다가 무심코 제가 물었습니다. "장로님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이렇게 직업을 물었는데 그 장로님이 어찌나 쩔쩔매고 전전긍긍 하시던지 나중에는 제가 그 질문 한 것을 크게 후회했습니다. 그 장로님, 마침내 하시는 말씀이 "신탄진 담배 공장에 나갑니다" 하는 거예요. , 담배 공장과 장로님--어딘지 걸맞지 않은 느낌이 들지요? 그렇다면 장로님한테 담배 공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업입니다. 먹기 위해 하는 일입니다. 집사님이 양조장에 근무하는 것도 비슷한 이야기지요.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먹고살아야 하겠으니 이것을 생업이라고 억지로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피곤하고 얼마나 짜증스러운 일입니까? 마침내 자기 자신한테도 환멸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불평꾼이 되고 맙니다. 어느 사이에 인간성은 점점 나빠지고, 자칫하면 신앙까지도 저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생업입니다. 오래 할 것이 못 되지요.

둘째, 직업이란 일 자체를 즐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 일을 힘들게 생각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아이고 힘들어, 이거 너무 바빠서, 너무 어려워서…… 하고 고개를 흔들어 본 적이 없습니까? 물론 일하다 보면 힘들 때도 있고 한숨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평은 금물입니다. 불평하지 맙시다. 일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정년 퇴직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퇴직한다는 것, 일이 없다는 것---이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아십니까? 아침에 눈을 떠도 갈 곳이 없어요. 할 일이 없습니다.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때 가서는 월급 못 받아도 좋으니 제발 책상 한 귀퉁이에라도 앉아 일 좀 하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월급이야 많든 적든 그저 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感之德之)하여야 합니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아이고, 나도 빨리 건강해져서 일하러나갔으면 좋겠어요." 돈 생각은 둘째 문제입니다. 부하고 가난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회전의자냐 나무의자냐, 이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답답한 병실에 하루종일 누워 있다보니 건강한 몸으로 바쁘게 일하던 때가 그리운 것입니다. 일할 때는 일의 고마움을 모르고 '한번 푹 쉬어 봤으면……'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북적거리는 사무실, 상사의 고함소리,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 벨 소리…… 다 그리운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일 자체의 고마움과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은 대체로 잃고 난 다음입니다. 진작 깨달았더라면 직장 생활이 얼마나 더 밝고 힘찼겠습니까? 일한다는 것---그 자체가 얼마나 보람되고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일 자체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직업에 전문성이 있고, 일하는 사람의 소질과 재능에 맞는다면 금상첨화이지요. 세 사람의 예를 들어봅시다.

처칠은 평생을 정치로 살았습니다. 피카소는 그림으로, 토스카니니는 음악으로 살았습니다. 세 사람 다 아흔이 넘도록 오래 산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평생동안 휴식 시간을 따로 가지거나 별다른 레저 생활을 즐겨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일 자체가 즐거움이니까요. 일 자체가 곧 휴식이니까요. 일 자체를 즐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다른 휴식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쯤은 되어야 직업을 똑바로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처칠은 남달리 어려운 생을 살았습니다. 2차대전을 끝맺고 마감해야 하는 어려운 고비를 겪었습니다. 한창 어려운 때에 수상직에 올라 영국의 정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수상직에서 물러났을 때에는 돈이 없어서 사글세로 이집 저집 옮겨다니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오로지 정치에만 몸바쳐왔습니다. 팔순 고령으로 의정단상(議政壇上)에서 정치와 씨름하다갔습니다. 그는 한번도 돈에 마음을 쓴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치가입니다. 곁눈 팔지 않고 정치만 즐겨야 정치가입니다. 정치가가 돈에 마음을 쓰면 그 나라 정치는 그릇됩니다. 적어도 정치를 위해 산 사람이라면 퇴직할 때에 세 얻을 돈조차 없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별나게 입에 담을 화제거리가 될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직업인이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있습니까? 가르치면 그만이지 무엇을 더 바랍니까? 우리는 가끔 평생을 교직에 몸담아 온 사람이 어렵게 지냈다고 하면 그것을 치하합니다마는 치하할 일이 못 됩니다. 당연히 그랬어야지요. 돈을 바라고 산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것 하나만을 즐기고 살았으니까요. 간혹 우리는 어떤 공무원이 퇴직한 경우, 엄청나게 많은 돈을 가지고 좋은 집을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공무원이 어떻게 살아왔겠는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공무원의 빠듯한 봉급만으로는 그만한 돈을 모을 수가 없다는 것, 초등학생이라도 셈을 놓을 수 있지요.

정치가는 정치만으로, 교육자는 교육만으로 족합니다. 의사라면 환자를 치료해 주고 그가 쾌유되는 것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합니다. 의사가 돈에 눈독을 들이면 끝장난 것입니다. 적어도 직업인이라면 정정당당하게 그 일을 위해서 살고, 그 일을 즐기고, 그 일을 위해 자신을 전부 바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직업인에게는 일 자체가 휴식이요 휴양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하루 18시간씩 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하루도 일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나 모든 일을 오직 재미로 했을 뿐이다." 일 자체를 즐겼기에 하루에 18시간을 일해도 따로 휴식이 필요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전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한 여자가 중생하는 것을 보시고 너무나 기쁘신 나머지, 목도 갈하고 시장하실 때였지만 제자들이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잡수소서"할 때에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라고 대답하십니다.

한 사람을 전도해서 구원하고 보니 시장기가 다 가시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에 휴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휴식법입니다.

셋째, 천직(天職)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이루신다고 하는 사명감을 가질 때, 그 일이 곧 천직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자기의 천직을 발견하는 사람이다'---이런 멋진 말이 있습니다. '천직 말고 다른 복을 묻지 말라'---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이것이 내 천직이다' 싶으면 그밖에 딴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치면 그만이고, 의사는 치료하면 그만입니다. 수위는 문 지키는 것으로 족하고, 요리사는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으로 족합니다. 다른 복을 묻지 말라! 기대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의 천직, 거기에 진정한 행복과 멋지게 사는 길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천직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고 고용하셨다는 소명 의식과, 특별히 나같은 죄인을 구속하고 써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감격, 그리고 나의 미래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은총에 대한 감사가 뒤따릅니다. 이것이 바로 천직입니다. 천직 의식이 투철했던 사람으로 사도 바울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죄인의 괴수'였던 자신에게 사도 직분이 주어졌다는 것 때문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 하나로 만족합니다. 달리 바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감옥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아니할 영원한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이 시대가 안고있는 문제는 허무주의에 있습니다. 왜 이렇게 늘 피곤합니까? 왜 해소되지 않는 스트레스가 먼지처럼 쌓여갑니까? 왜 끝없이 주저앉고 절망합니까? 문제는 일의 뜻을 모르고 있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곤합니다. 돈을 벌지 못해서 피곤한 것이 아닙니다. 목적과 방향이 잘못되어서 피곤합니다. 출세하지 못해서 피곤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피곤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피곤한 것입니다. 절대로 일을 기피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양식을 인자가 주리라! 이 양식을 인자가 주리라!"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신다고 하십니다. 일하게 하시고, 일하여 행복하게 하시고, 일하여 능력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일을 통하여 주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인자가 너희에게 양식을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사는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동시에 죽는 이유도 분명해야 합니다. ()와 봉사는 힘겨운 의무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즐거움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순교가 결코 굴욕과 수치가 될 수 없습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시작이요 일은 생()의 지속입니다. 믿음은 안이요 일은 겉입니다. 믿음은 동기요 일은 결과입니다. 믿음은 뿌리요 일은 열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하고 제자들이 물을 때에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확실한 믿음 가운데에서 행하는 일이라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다 성직(聖職)입니다. 거룩한 일이 될 것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내 일의 목적이 거기에 있고, 내 일의 결과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즐거움, 현재의 배부름을 생각하며 일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언제나 원망과 불평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일 자체를 복되게 여기고 분명한 목적과 확실한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일 자체가 중생되어야 합니다. 또한 중생한 사람으로서 영원한 가치를 위하여 활기차고 행복하게 일해야 할 것입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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