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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자기 극복이다(고린도전서 13장 1절~7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슬픈 것은 그 아름다운 사랑이 타락하고 변질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결에 그 아름답고 귀한 사랑이 병들어서 무력화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랑이 악으로 기울어지고, 악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데에 우리들의 슬픔이 있습니다. 지금도 시립 병원에 가 보면 어머니와 함께 왔다가 버려진 어린아이들이 3백 명 이상이나 울고 있습니다. 그 대부분이 불구 아동들입니다. 사랑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이 어머니의 사랑인데, 그 사랑마저 타락한 현장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사랑은 능력이라고, 사랑은 단순한 감상(感傷)이 아니라 위대한 힘이라고---우리는 그렇게 듣고 배워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사랑은 이다지도 무기력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다스리는 데에, 내 이기심을 다스리고 내 정욕을 다스리는 데에, 사랑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이처럼 무기력한 사랑, 이것은 변질된 사랑입니다.
여러분, 웃음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이렇다 할 봉사를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루종일 웃고 다닐 수만 있다면 그 또한 큰 봉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단 근심거리가 되지 않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봉사입니까? 적어도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으니 절반 선행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웃음을 잃지 않고 사는 것처럼 많은 사람을 윤택하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입니다. 유럽 사람들에게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도 다 통하는 언어입니다. 어느 나라를 가든지 쓸 수 있는 만국 공용어입니다. 동물들조차도 이 언어는 알아듣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것이지만, 이 웃음도 변질되면 그렇게 추할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소녀의 웃음을 보십시오. 얼마나 맑고 깨끗합니까? 그러나 그 아름다운 얼굴에 그 아름다운 웃음이 변질된다면 그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고 그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슬픔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이 타락한다는 것은 곧 수단화한다는 뜻입니다. 수단화 할 때에 거짓이 나옵니다. 모든 생각이 자기 중심으로 기울어집니다. 물질화하고, 육체화하고, 정욕화해 버립니다. 여러분, 욕정과 사랑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런데 어느틈에 욕정과 사랑이 동의어(同義語)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사랑은 소유욕도 아닙니다. 말로는 '사랑은 주는 것이다. 주는 것이다'라 하지만 어느 사이에 '사랑은 얻는 것, 받는 것, 빼앗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질투로 바뀌고, 마침내는 증오와 복수로 치닫습니다. 사랑이 타락할 때에도 단계적으로, 점증적(漸增的)으로 타락합니다. 처음에는 욕망으로, 질투로, 증오로, 그리고 마침내 보복과 악으로 끝난다---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타락한 사랑은 이토록 추하고 무섭습니다.
사랑은 지혜를 줍니다. 사랑할 때에 명랑해지고, 명랑할 때에 창의력도 생기고 식별력도 생깁니다. 밝은 마음이 있을 때에 모든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사랑이 장님을 만드는 것입니까? 사랑 때문에 맹목적인 인간이 되어 버리고, 바보 같은 사람, 멍청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면 이 사랑은 타락한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사람에게 지혜를 줍니다. 노예화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주십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 사랑의 정의 앞에 여러분의 사랑을 한번 비추어 보고 조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부끄러움이 있다면, 여기에서 어긋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눈물과 절망으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 '자기의 유익'으로 번역된 헬라 원문 '타 헤아우테스'에는 좀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의 유익'뿐만 아니라 '자기의 것'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중심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 자기로 향하고자 하는 모든 마음, 유익을 찾는 마음, 소유욕, 자기 권리 등을 총칭하는, 강력하고도 고유한 뜻을 가진 용어입니다. 또 '구한다'의 '제테이'는 열심히 구하는 정열을 이릅니다. 역시 강력한 표현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유익을 강력히 주장하고 구할 때에 저도 모르게 깊은 함정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욕심 많은 사람과 질투심 많은 사람이 한 수도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수도사는 두 사람과 헤어지는 기념으로 무엇이든지 소원을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한사람이 소원을 말하면 다른 사람은 앞 사람이 소원한 것의 두 배를 가지게 될 것이오." 욕심 많은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내가 먼저 소원을 말하면 저 녀석이 나보다 두 배로 많은 것을 가지게 되겠지. 그렇게 큰 손해를 볼 수는 없다. 암, 없구 말구.' 질투심 많은 사람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입을 꼭 다문채 서로 상대방이 먼저 소원을 말하기만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마침내 수도사는 더 기다릴 수 없다고 재촉했습니다. 그러자 욕심 많은 사람이 질투심 많은 사람의 멱살을 부여잡고 위협했습니다. "네가 먼저 소원을 말하지 않으면 당장 죽여버리겠다!" 질투심 많은 사람은 힘으로 상대방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눈을 흘기며 말했습니다. "좋다! 내가 먼저 말하지! 수도사님, 제 왼쪽 눈을 멀게 해주십시오!" 자, 어떻게되겠습니까? 질투심 많은 사람은 한쪽 눈을 잃고, 욕심 많은 사람은 두 눈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제 유익만을 생각하다가 결국은 둘 다 망한 것입니다.
참사랑은 사람에게 지혜를 줍니다. 사랑은 이기심이라고 하는 속박으로부터 나를 자유하게 해줍니다. 이기심은 사람을 노예화해서 마음을 어둡게 만듭니다. 고독하게 만듭니다. 누구든지 고독한 사람은 이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또한 이기심은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무력하고 어리석게 만듭니다. 나아가 부끄럽게 합니다. 사람 만나기가 꺼려지든가 부끄럽거든 돌아가 거울을 보십시오. 이기심 때문에 사람들은 나의 권리만 앞세우고 특별 대우 받기를 원합니다. 자기를 별개시하고 교만해집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절망에 빠져 버립니다. 그렇다면 이 무서운 이기심으로부터, 이 엄청난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이기심을 극복하게 합니다.
참사랑을 알 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됩니다. 참사랑을 깨달을 때에 이기심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고 참사랑을 느낄 때에 온전한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자유를 체험한 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부자로 살지 못해도 좋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래 살지 못한다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신비 하나만은 알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먹고 삽니다. 돈 없어서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받지 못해서 괴롭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다 없다 하더라도 사랑의 이치만은, 사랑의 신비만은 터득하고 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참사랑이 사랑의 참뜻을 알게 하고, 지혜롭게 하고, 나아가 사랑의 능력을 향유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이 참사랑은 자기 사랑의 확장에서 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마다 신랑 신부에게 꼭 읽어 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처음주례를 섰던 25년 전부터 저는 한결같이 똑같은 말씀만을 읽어 주어 왔습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의, 아내들과 남편들을 향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제가 강조해서 설명하는 말씀은 28절 말씀입니다. "……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확대하여 음미해보십시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자기 남편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웃 사랑이 별개가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 사랑의 확장입니다. 자기 사랑의 영역이요, 자기 사랑의 성장입니다. 자기 사랑의 완성이 바로 이웃 사랑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코 혼자서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유기적 공동체 의식 속에 진정한 자기 사랑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우는데 내가 웃을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을 괴롭히고 내가 즐거울 수 없습니다. 자기 사랑이 무엇인가, 내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사람이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일본에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라는 기독교인 여류 작가가 있습니다. 그가 쓴「빙점」이라는 소설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분은 한때, 남편의 월급만 가지고는 살림을 꾸려 나가기가 어려웠으므로 집 앞에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냈습니다. 그러나 돈만 벌겠다고 악착을 부리지 않고 오는 손님들에게 조용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봉사했습니다. 그 결과, 이 구멍가게는 사람들의 신용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장사도 잘되어서 나중에는 트럭으로 물건을 들여올 만큼 번창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바쁘게 일하는 아내를 보고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가게가 이렇게 잘되는 것은 좋지만 이웃이 다 어려운 사람들뿐인데 우리 가게로만 손님이 몰려서 다른 가게들이 문을 닫게 되면 어떡하지?" 미우라 아야코 여사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곧 가게 물건을 줄였습니다. 어떤 물건은 아예 가져다 놓지도 않았습니다. 손님이 찾으면 "그 물건은 저 집에 가면 사실 수 있습니다"하고 다른 구멍가게로 손님을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녀에게는 남모르는 기쁨과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하여「빙점」이라는 소설을 완성시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기주의로 가득 찬 머리에서는 창작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저만 잘살아 보겠다고 바둥바둥 기를 쓰는데 무슨 생각이 있고 창작이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결국은 지치고 메말라서 자신이 죽습니다. 그러나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영감이 있고 생각이 있어서 가정 주부로서 그처럼 좋은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을 수단화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 유익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 유익이라는 것은 자기한테만 국한된다는 뜻입니다. 강력한 표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권리'라는 소중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나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이것을 아낌없이 내어줍니다. 여러분은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권리, 당당히 취할 수 있는 이익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 사람만이 진정으로 사람답게 사는 사람입니다. 비로소 행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고 자기 권리만을 찾으려 할 때,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구원하려 하고 자기 명예를 자기가 지키려 할 때, 나는 노예가 되어 버리고 비참한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여러분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지나치리만큼 스포츠 붐에 빠져 있습니다. 프로 야구다, 프로 축구다 해서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아이들까지 경기 내용을 평할 정도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들 스포츠 박사입니다. 저는 특별히 좋아하거나 잘하는 운동도 없습니다. 다만 중학교 다닐 때에 축구공 몇 번 차 본 것뿐입니다. 그런데 요즘 텔레비전으로 축구경기 하는 것을 보면 조금 못마땅한 점이 있습니다. "골인!"하고 점수가 날 때마다 아무개가 차 넣었다고, 그 아무개 한 사람을 스타로 만들어 버리는 태도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늘 못마땅합니다. 마지막 사람이 잘 차 넣을 수 있도록 옆에서 볼 배급을 해 준 사람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영 알아주지를 않습니다. 뒤에서 수고하는 풀백(fullback)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우리가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두가 스타 되겠다고 한다면 골 들어가겠습니까? 더러는 내가 골을 넣겠다고, 저마다 스타 되겠다고 하다가 한 골도 못 넣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팀 플레이를 위해서 서로 협력하는 중에 기회가 생기면 넣을 수도 있고 넣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 스타가 되겠다고 이기적으로 대들면 다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스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끝났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도 나라도 망하고 맙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 그 다음은 다른 사람의 유익,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랑을 아는 사람이 취할 순서요, 행복을 아는 사람이 누리는 생활입니다. 다른 사람,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시간으로 자기 시간을 살아가는 삶---여기에 사랑의 신비로운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특별한 볼일 없이 남대문시장 같은 복잡한 시장 거리를 왔다갔다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목사로서 생생한 삶의 현장도볼 겸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런 취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시장에는 구경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요새 와서 그런 구경하기도 좀 거북살스럽게 되었습니다. 아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목사님, 저 소망교회 교인인데 아십니까?" 하고 인사하는 분을 만날 때면 그것 참 곤란합니다. 얼굴이야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이름까지 알 재간이 있나요! 그래서 어떤 때에는 이렇게 궁색한 대답을 해보기도 합니다. "저는 자고로여자 얼굴은 똑똑히 보지 않습니다." 남은 나를 알아보는데 내가 모르면 그것처럼 미안하고 어정쩡한 일이 없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하루에 대여섯 번도 더 마주칩니다. 분명히 조금 전에 인사했는데 또 웃으면서 목례를 하십니다. 좀 돌다 보면 또 마주치고 또 마주치고…… 저는 장바구니 들고 찬거리 사러 다니는 어머니들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이런 시간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라고!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신성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질 때입니다. 내 입에 맞는 것을 찾지 않습니다. 남편이 무엇을 좋아할까, 아이들한테는 어떤 음식이 좋을까, 오로지 식구들 입맛을 생각하면서 시장을 빙빙 돕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깨끗한 마음입니까? 얼마나 행복한 순간입니까? 그러나 장보러 나온 어머니가 자기 입맛에 맞는 것 먼저 찾고, 자기 먼저 먹자고 시장 바닥에 쭈그리고 앉는다면 얼마나 볼성사납겠습니까?
장바구니 들고 싱싱한 채소를 고르는 어머니, 이 반찬으로 할까 저 반찬으로 할까 망설이는 어머니---나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녁 식탁에 둘러앉을 식구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순간이야말로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시간입니까? 이러한 시간이 오래가지 못해서 문제이지요. 범사에 지혜롭게 사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길도 여기에 있고, 행복하게 사는 길도 여기에 있습니다. 생각도 말도 행위도 항상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데에 지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사랑으로부터 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이해인 시인의 '몽당연필'이라는 시를 읽어 보셨습니까? 아주 예쁜 시입니다.
너무 작아
손에 쥘 수도 없는 연필 한 개가
누군가 쓰다 남은 이 초라한 토막이
왜 이리 정다울까.
욕심 없으면
바보되는 이 세상에
몽땅 주기만 하고
아프게 잘려 왔구나.
댓가를 바라지 않는
깨끗한 소멸을
그 소박한 순명을
본받고 싶다.
헤픈 말을 버리고
진실만 표현하며
너처럼 묵묵히 살고 싶다.
묵묵히 아프고 싶다.
여러분, 나 자신을 주기에 아까워하지 맙시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을 위하여 나 자신을 주기에 아깝지 않은 사람, 그리고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랑은 신비로운 힘입니다. 가장 강한 힘입니다. 이 힘은 가장 무서운 이기심을 극복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마음을 극복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유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합니다. 사랑의 기쁨을 향유하게 합니다. 사랑의 신비를 마음껏 누리고 살게 합니다. 이 엄청난 일을 가능케 하는 근원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 거룩한 사랑이 내 마음에 올 때에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됩니다. 사랑을 알 때에 자기의 일을,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을 깨끗이 청산하는 오직 사랑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극복이다(고린도전서 13장 1절~7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슬픈 것은 그 아름다운 사랑이 타락하고 변질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결에 그 아름답고 귀한 사랑이 병들어서 무력화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랑이 악으로 기울어지고, 악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데에 우리들의 슬픔이 있습니다. 지금도 시립 병원에 가 보면 어머니와 함께 왔다가 버려진 어린아이들이 3백 명 이상이나 울고 있습니다. 그 대부분이 불구 아동들입니다. 사랑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이 어머니의 사랑인데, 그 사랑마저 타락한 현장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사랑은 능력이라고, 사랑은 단순한 감상(感傷)이 아니라 위대한 힘이라고---우리는 그렇게 듣고 배워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사랑은 이다지도 무기력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다스리는 데에, 내 이기심을 다스리고 내 정욕을 다스리는 데에, 사랑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이처럼 무기력한 사랑, 이것은 변질된 사랑입니다.
여러분, 웃음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이렇다 할 봉사를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루종일 웃고 다닐 수만 있다면 그 또한 큰 봉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단 근심거리가 되지 않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봉사입니까? 적어도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으니 절반 선행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웃음을 잃지 않고 사는 것처럼 많은 사람을 윤택하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입니다. 유럽 사람들에게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도 다 통하는 언어입니다. 어느 나라를 가든지 쓸 수 있는 만국 공용어입니다. 동물들조차도 이 언어는 알아듣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것이지만, 이 웃음도 변질되면 그렇게 추할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소녀의 웃음을 보십시오. 얼마나 맑고 깨끗합니까? 그러나 그 아름다운 얼굴에 그 아름다운 웃음이 변질된다면 그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고 그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슬픔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이 타락한다는 것은 곧 수단화한다는 뜻입니다. 수단화 할 때에 거짓이 나옵니다. 모든 생각이 자기 중심으로 기울어집니다. 물질화하고, 육체화하고, 정욕화해 버립니다. 여러분, 욕정과 사랑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런데 어느틈에 욕정과 사랑이 동의어(同義語)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사랑은 소유욕도 아닙니다. 말로는 '사랑은 주는 것이다. 주는 것이다'라 하지만 어느 사이에 '사랑은 얻는 것, 받는 것, 빼앗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질투로 바뀌고, 마침내는 증오와 복수로 치닫습니다. 사랑이 타락할 때에도 단계적으로, 점증적(漸增的)으로 타락합니다. 처음에는 욕망으로, 질투로, 증오로, 그리고 마침내 보복과 악으로 끝난다---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타락한 사랑은 이토록 추하고 무섭습니다.
사랑은 지혜를 줍니다. 사랑할 때에 명랑해지고, 명랑할 때에 창의력도 생기고 식별력도 생깁니다. 밝은 마음이 있을 때에 모든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사랑이 장님을 만드는 것입니까? 사랑 때문에 맹목적인 인간이 되어 버리고, 바보 같은 사람, 멍청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면 이 사랑은 타락한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사람에게 지혜를 줍니다. 노예화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주십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 사랑의 정의 앞에 여러분의 사랑을 한번 비추어 보고 조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부끄러움이 있다면, 여기에서 어긋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눈물과 절망으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 '자기의 유익'으로 번역된 헬라 원문 '타 헤아우테스'에는 좀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의 유익'뿐만 아니라 '자기의 것'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중심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 자기로 향하고자 하는 모든 마음, 유익을 찾는 마음, 소유욕, 자기 권리 등을 총칭하는, 강력하고도 고유한 뜻을 가진 용어입니다. 또 '구한다'의 '제테이'는 열심히 구하는 정열을 이릅니다. 역시 강력한 표현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유익을 강력히 주장하고 구할 때에 저도 모르게 깊은 함정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욕심 많은 사람과 질투심 많은 사람이 한 수도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수도사는 두 사람과 헤어지는 기념으로 무엇이든지 소원을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한사람이 소원을 말하면 다른 사람은 앞 사람이 소원한 것의 두 배를 가지게 될 것이오." 욕심 많은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내가 먼저 소원을 말하면 저 녀석이 나보다 두 배로 많은 것을 가지게 되겠지. 그렇게 큰 손해를 볼 수는 없다. 암, 없구 말구.' 질투심 많은 사람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입을 꼭 다문채 서로 상대방이 먼저 소원을 말하기만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마침내 수도사는 더 기다릴 수 없다고 재촉했습니다. 그러자 욕심 많은 사람이 질투심 많은 사람의 멱살을 부여잡고 위협했습니다. "네가 먼저 소원을 말하지 않으면 당장 죽여버리겠다!" 질투심 많은 사람은 힘으로 상대방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눈을 흘기며 말했습니다. "좋다! 내가 먼저 말하지! 수도사님, 제 왼쪽 눈을 멀게 해주십시오!" 자, 어떻게되겠습니까? 질투심 많은 사람은 한쪽 눈을 잃고, 욕심 많은 사람은 두 눈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제 유익만을 생각하다가 결국은 둘 다 망한 것입니다.
참사랑은 사람에게 지혜를 줍니다. 사랑은 이기심이라고 하는 속박으로부터 나를 자유하게 해줍니다. 이기심은 사람을 노예화해서 마음을 어둡게 만듭니다. 고독하게 만듭니다. 누구든지 고독한 사람은 이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또한 이기심은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무력하고 어리석게 만듭니다. 나아가 부끄럽게 합니다. 사람 만나기가 꺼려지든가 부끄럽거든 돌아가 거울을 보십시오. 이기심 때문에 사람들은 나의 권리만 앞세우고 특별 대우 받기를 원합니다. 자기를 별개시하고 교만해집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절망에 빠져 버립니다. 그렇다면 이 무서운 이기심으로부터, 이 엄청난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이기심을 극복하게 합니다.
참사랑을 알 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됩니다. 참사랑을 깨달을 때에 이기심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고 참사랑을 느낄 때에 온전한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자유를 체험한 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부자로 살지 못해도 좋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래 살지 못한다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신비 하나만은 알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먹고 삽니다. 돈 없어서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받지 못해서 괴롭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다 없다 하더라도 사랑의 이치만은, 사랑의 신비만은 터득하고 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참사랑이 사랑의 참뜻을 알게 하고, 지혜롭게 하고, 나아가 사랑의 능력을 향유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이 참사랑은 자기 사랑의 확장에서 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마다 신랑 신부에게 꼭 읽어 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처음주례를 섰던 25년 전부터 저는 한결같이 똑같은 말씀만을 읽어 주어 왔습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의, 아내들과 남편들을 향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제가 강조해서 설명하는 말씀은 28절 말씀입니다. "……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확대하여 음미해보십시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자기 남편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웃 사랑이 별개가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 사랑의 확장입니다. 자기 사랑의 영역이요, 자기 사랑의 성장입니다. 자기 사랑의 완성이 바로 이웃 사랑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코 혼자서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유기적 공동체 의식 속에 진정한 자기 사랑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우는데 내가 웃을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을 괴롭히고 내가 즐거울 수 없습니다. 자기 사랑이 무엇인가, 내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사람이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일본에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라는 기독교인 여류 작가가 있습니다. 그가 쓴「빙점」이라는 소설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분은 한때, 남편의 월급만 가지고는 살림을 꾸려 나가기가 어려웠으므로 집 앞에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냈습니다. 그러나 돈만 벌겠다고 악착을 부리지 않고 오는 손님들에게 조용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봉사했습니다. 그 결과, 이 구멍가게는 사람들의 신용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장사도 잘되어서 나중에는 트럭으로 물건을 들여올 만큼 번창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바쁘게 일하는 아내를 보고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가게가 이렇게 잘되는 것은 좋지만 이웃이 다 어려운 사람들뿐인데 우리 가게로만 손님이 몰려서 다른 가게들이 문을 닫게 되면 어떡하지?" 미우라 아야코 여사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곧 가게 물건을 줄였습니다. 어떤 물건은 아예 가져다 놓지도 않았습니다. 손님이 찾으면 "그 물건은 저 집에 가면 사실 수 있습니다"하고 다른 구멍가게로 손님을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녀에게는 남모르는 기쁨과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하여「빙점」이라는 소설을 완성시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기주의로 가득 찬 머리에서는 창작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저만 잘살아 보겠다고 바둥바둥 기를 쓰는데 무슨 생각이 있고 창작이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결국은 지치고 메말라서 자신이 죽습니다. 그러나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영감이 있고 생각이 있어서 가정 주부로서 그처럼 좋은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을 수단화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 유익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 유익이라는 것은 자기한테만 국한된다는 뜻입니다. 강력한 표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권리'라는 소중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나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이것을 아낌없이 내어줍니다. 여러분은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권리, 당당히 취할 수 있는 이익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 사람만이 진정으로 사람답게 사는 사람입니다. 비로소 행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고 자기 권리만을 찾으려 할 때,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구원하려 하고 자기 명예를 자기가 지키려 할 때, 나는 노예가 되어 버리고 비참한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여러분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지나치리만큼 스포츠 붐에 빠져 있습니다. 프로 야구다, 프로 축구다 해서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아이들까지 경기 내용을 평할 정도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들 스포츠 박사입니다. 저는 특별히 좋아하거나 잘하는 운동도 없습니다. 다만 중학교 다닐 때에 축구공 몇 번 차 본 것뿐입니다. 그런데 요즘 텔레비전으로 축구경기 하는 것을 보면 조금 못마땅한 점이 있습니다. "골인!"하고 점수가 날 때마다 아무개가 차 넣었다고, 그 아무개 한 사람을 스타로 만들어 버리는 태도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늘 못마땅합니다. 마지막 사람이 잘 차 넣을 수 있도록 옆에서 볼 배급을 해 준 사람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영 알아주지를 않습니다. 뒤에서 수고하는 풀백(fullback)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우리가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두가 스타 되겠다고 한다면 골 들어가겠습니까? 더러는 내가 골을 넣겠다고, 저마다 스타 되겠다고 하다가 한 골도 못 넣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팀 플레이를 위해서 서로 협력하는 중에 기회가 생기면 넣을 수도 있고 넣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 스타가 되겠다고 이기적으로 대들면 다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스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끝났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도 나라도 망하고 맙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 그 다음은 다른 사람의 유익,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랑을 아는 사람이 취할 순서요, 행복을 아는 사람이 누리는 생활입니다. 다른 사람,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시간으로 자기 시간을 살아가는 삶---여기에 사랑의 신비로운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특별한 볼일 없이 남대문시장 같은 복잡한 시장 거리를 왔다갔다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목사로서 생생한 삶의 현장도볼 겸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런 취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시장에는 구경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요새 와서 그런 구경하기도 좀 거북살스럽게 되었습니다. 아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목사님, 저 소망교회 교인인데 아십니까?" 하고 인사하는 분을 만날 때면 그것 참 곤란합니다. 얼굴이야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이름까지 알 재간이 있나요! 그래서 어떤 때에는 이렇게 궁색한 대답을 해보기도 합니다. "저는 자고로여자 얼굴은 똑똑히 보지 않습니다." 남은 나를 알아보는데 내가 모르면 그것처럼 미안하고 어정쩡한 일이 없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하루에 대여섯 번도 더 마주칩니다. 분명히 조금 전에 인사했는데 또 웃으면서 목례를 하십니다. 좀 돌다 보면 또 마주치고 또 마주치고…… 저는 장바구니 들고 찬거리 사러 다니는 어머니들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이런 시간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라고!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신성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질 때입니다. 내 입에 맞는 것을 찾지 않습니다. 남편이 무엇을 좋아할까, 아이들한테는 어떤 음식이 좋을까, 오로지 식구들 입맛을 생각하면서 시장을 빙빙 돕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깨끗한 마음입니까? 얼마나 행복한 순간입니까? 그러나 장보러 나온 어머니가 자기 입맛에 맞는 것 먼저 찾고, 자기 먼저 먹자고 시장 바닥에 쭈그리고 앉는다면 얼마나 볼성사납겠습니까?
장바구니 들고 싱싱한 채소를 고르는 어머니, 이 반찬으로 할까 저 반찬으로 할까 망설이는 어머니---나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녁 식탁에 둘러앉을 식구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순간이야말로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시간입니까? 이러한 시간이 오래가지 못해서 문제이지요. 범사에 지혜롭게 사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길도 여기에 있고, 행복하게 사는 길도 여기에 있습니다. 생각도 말도 행위도 항상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데에 지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사랑으로부터 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이해인 시인의 '몽당연필'이라는 시를 읽어 보셨습니까? 아주 예쁜 시입니다.
너무 작아
손에 쥘 수도 없는 연필 한 개가
누군가 쓰다 남은 이 초라한 토막이
왜 이리 정다울까.
욕심 없으면
바보되는 이 세상에
몽땅 주기만 하고
아프게 잘려 왔구나.
댓가를 바라지 않는
깨끗한 소멸을
그 소박한 순명을
본받고 싶다.
헤픈 말을 버리고
진실만 표현하며
너처럼 묵묵히 살고 싶다.
묵묵히 아프고 싶다.
여러분, 나 자신을 주기에 아까워하지 맙시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을 위하여 나 자신을 주기에 아깝지 않은 사람, 그리고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랑은 신비로운 힘입니다. 가장 강한 힘입니다. 이 힘은 가장 무서운 이기심을 극복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마음을 극복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유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합니다. 사랑의 기쁨을 향유하게 합니다. 사랑의 신비를 마음껏 누리고 살게 합니다. 이 엄청난 일을 가능케 하는 근원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 거룩한 사랑이 내 마음에 올 때에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됩니다. 사랑을 알 때에 자기의 일을,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을 깨끗이 청산하는 오직 사랑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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