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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종말론적 윤리(베드로전서 4장 7절~11절)

by 【고동엽】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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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윤리(베드로전서 4711)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시각(視覺)이 있습니다.

역사를 하나의 사이클로 보아 반복 순환한다고 생각하는 사관(史觀)입니다. 그런가 하면 역사를 직선적인 흐름으로 보는 시각이있습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생각하는 역사관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역사는 창조가 있듯이 종말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창조로 시작되고 최후 심판으로 끝난다는 사관(史觀)입니다. 예수님의 교훈을 들으며 따른 3년 동안, 제자들은 바로 그러한 문제를 놓고 그들이 들은 바에 따라 응답하면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마태복음 243절을 보면, 세상 끝에 무슨 징조가 있겠느냐고 제자들이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부터 세 장()에 걸쳐 세상 끝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징조가 있겠느냐고 질문한 제자들의 내심(內心)에는 다분히기회주의 적인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때쯤에 끝이 있습니까?" "무엇을 보고 끝이 왔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이런 것을 미리 알아두고, 세상을 그럭저럭 기분대로 살다가, 끝이 올 때쯤 가서 정신차리고 바로 믿으면 되겠지 하는 속셈이 엿보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학생들 가운데도 시험 보는 날을 미리 알고 싶어 안달하는 학생들이 있지 않습니까 ? 시험을 언제 보든지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평소에 당연히 해야 할 공부를 꾸준히 해나간다면, 어느 때에 시험을 보든지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시험 날짜를 미리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되는대로 빈둥거리다가 시험 날이 코앞에 닥치면

'벼락치기'로 공부하겠다는 속셈이지요. 결코 바람직한 자세가 못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그렇고, 인생을 사는 것도 그렇습니다. 무슨 징조가 있는지, 어느 때쯤 종말이 오는지, 물을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오늘을 나의 마지막 날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끝 날이 눈앞에 왔다는 생각으로 나날을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자세입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윌리엄 바클리(William Barclay)라고 하는 신학자는 말합니다. "현대는 신학의 위기라기보다 윤리의 위기이다"---일리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세상에 살면서 종말론적 윤리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끔찍한 일들이 하도 많으니 새삼 되씹을 필요도 없는 줄 압니다. 어느 하루도 말세의 조짐을 보지 않는 날이 없고, 때마다 세상 끝났다는 탄식이 넘칩니다. 동아일보 525일자에 대충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린 것을 읽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마약중독 상태의 신생아가 연평균 37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부모가 마약중독 상태에서 낳았기 때문이지요. 아기들이 태어날 때부터 마약중독 현상을 보이다니 말문이 막힙니다. 애초부터 무기력하고, 성장해도 학업 등 모든 사회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야간 공포증에 시달리는 등 정서가 불안하고, 신체적으로도 폐렴, 뇌막염, 만성 설사 등 갖가지 심각한 병에 걸릴 뿐 아니라, 별의별 후유증을 다 겪는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미국에만 있는 일도 아니고, 그 문제가 이 아이들의 단계에서 그칠 것도 아니요 연쇄적으로 파급될 것이고 보면, 앞날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결코 먼 뒷날의 이야기도, 강 건너 불도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는 엄청나게 끔찍한 말세의 조짐을 너무도 많이 보고 삽니다. 입이 있어도 일일이 매거(枚擧)하지 못합니다.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습니까?'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물을 필요도 없고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의 예언은 다 응했고, 우리는 바야흐로 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남은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것---이 한 가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24 : 14)."'온 세상---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그밖에는 다 이루어졌습니다. '지구는 둥근데 땅 끝이 어디냐' 하고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땅 끝이란 아마도 북한일 것이다. 가장 깨우치기 어려운 공산 폐쇄 사회가 곧 땅 끝이다" 하고 짚어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마지막에 대해서 가부(可否)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17, 8절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것만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때가 언제냐고, 징조가 무엇이냐고, 다시는 묻지 맙시다.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오늘 하루를 더 연장시켜 주시니 고맙고, 이렇게 한 시간이라도 더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게 하여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는 매시간 인내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이 시간 내가 땅 끝까지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문제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란 최종 심판의 날이요, 동시에 최종 구원의 날입니다. 종말은 단순한 세상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말의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종말에 대하여 재미있는 비유를 이야기했는데 들어보십시오. 관객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는 어느 극장 뒤쪽에서 불이 났습니다. 관객들은 재미있는 연극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극장 주인은 불난 사실을 갑자기 알릴 경우에 벌어질 큰 혼잡을 예상하고 조용한 설득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배우들 중에 가장 인기 있는 배우 한 사람을 불러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가서 관객이 당황하지 않도록 잘 설명하고 모두 차분하게 이 극장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유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인기 배우는 막중한 사명을 띠고 무대 위에 서서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이러저러해서 불이 났는데 모두 차례를 지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그랬더니 관객들은 이것이 연극인 줄 알고 모두들 박수만 칩니다. 아주 재미있어 합니다. 당황한 연극 배우가 이것은 연극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곧 불길이 번져올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관객들은 더 열심히 박수만 칩니다. 아무도 믿어 주지를 않습니다. ,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극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서로가 먼저 빠져나가려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여러분, 말세다 말세다 하니까 무슨 연극인 줄 아십니까? 농담이 아닙니다. 진담입니다. 말세는 임박한 현실입니다. 먼 훗날의 이야기로 듣지 마십시오. 그렇게 듣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세상 끝이 정말 왔습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윤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종말론적 윤리가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종말론적 윤리에 대한 말씀을 객관적으로 조명(照明)해 봅시다. 첫째, 종말론적 윤리는 절대적 윤리입니다. 상황 윤리가 아닙니다. 실존적이요, 절대적인 윤리입니다. 이제는 세상이 어떻고, 남들이 어떻고, 남들이 나에 대해서 하는 말이 어떻고 에 신경쓰지 맙시다. 잘살고 못살고, 잘나고 못나고, 그런 이야기 할 때가 아닙니다. 상대적인 이야기는 이제 필요 없습니다. 돈 많이 벌면 뭐합니까? 잘살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종말이 눈앞에 있는데 말입니다. 며칠이 될지, 몇 시간이 될지 모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신경써야 할 것은 절대적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입니다. 내 생명이 관계된 문제라는 말입니다.

둘째, 종말론적 윤리는 내적 삶의 윤리입니다. 세상 문제도 아니고 물질적 문제도 아닙니다. 법률적 문제도, 도덕적 기준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내적인 문제입니다. 내 영혼의 문제, 내 영성(靈性)의 문제----하나님의 형상인 내 생명이 어떻게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제는 누구를 원망할 것도, 세상을 탓할 것도 없습니다. 내적인 문제에 온 관심을 다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셋째, 종말론적 윤리는 실제적 윤리입니다. 지금은 이론적으로 도덕관이나 지식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종결 시기가 실제적인 문제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4 : 13-14)." 그렇습니다. 지금은 열심히 돈을 벌고 1년쯤 후에야 선하게 살아 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큰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상황이 아주 급하게 되었습니다. 종결 시기가 왔습니다. 내년 이야기도 아니고 내달 이야기도 아닙니다. 내일 이야기도 아닙니다. 바로 오늘입니다. 이것이 실제적 윤리입니다.

이제 베드로전서에 나타난 종말론적 윤리의 덕목을 살펴봅시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라는 뜻의 헬라어 '소프로네인'은 본래 군사적인 용어입니다. 보초를 향하여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서 있으라!" 하는 말입니다. 보초서는 사람이 흐릿한 자세로 애인 사진이나 들여다보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정신차려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맑은 정신을 가지라, 제정신을 보존하라는 말입니다. 생의 궁극적 목적과 현실에 대해서 그 동안은 너무 먼 거리를 두고 살아왔지만 이제야말로 궁극적 목적에 적합한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할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그 동안은 뭐가 뭔지 모르고 우왕좌왕하며 살았을지라도 마지막 결론만큼은 바로 맺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정신차리라는 것입니다. 종결의 시점에 대하여, 남은 시간에 대하여, 나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분명한 의식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내 정신이 엉뚱한 곳으로 끌려가 있지는 않은지, 엉뚱한 것에 홀려 있지는 않은지, 항시 점검하고 주의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다음, '근신하라'---'네포'라는 말은 '술에서 깬다'는 뜻입니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어름어름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방탕에, 향락에, 탐닉에, 혹은 게으름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곧 썩어질 육체를 위하여 너무 많이 고민하고 너무 많이 투자했습니다. 자기 한 몸을 즐겁게 하려고 그 많은 세월을 허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종말론적 윤리는 말합니다. 끌려가는 상태에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 육체 주도적인 생활을 멈추고 이제는 영 주도적인 생활로 생활 태도를 바꾸라---이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근신하라!" 여러분의 생활 전체를 점검해 보시기바랍니다. 영 주도적인 생활로 다시 정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하라'---이 말씀은 앞에 나온 두 동사의 결과요, 목적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했으니 이제 기도하라, 기도하기 위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인류학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간은 모태에서부터 미숙한 존재로 태어난다.' 동물을 보십시오. 그들은 태어날 때 거의 완전하게 모든 것을 배워 가지고 나옵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미 뱃속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응용합니다. 이것은 동물들의 본능입니다. 어미 뱃속에서 동물의 본능을 이어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본능대로 살다가 그 본능대로 죽어갑니다. 더 배울 필요도 없고, 더 배우지 않아도 됩니다. 갓난 강아지를 길러 보셨습니까? 강아지는 눈도 뜨기 전에 자기 어미의 젖을 찾아가 뭅니다. 그것도 자기가 물던 젖꼭지만을 문다고 합니다. 이것을 누가 가르쳐 주었습니까? 강아지 스스로가 어미 뱃속에서 배워 가지고 나온 결과입니다. 강아지한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본능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살고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매우 미숙한 존재로 태어납니다. 먹을 것을 입에 갖다 대주어도 먹지 못합니다. 동물에 비하여 얼마나 미숙하고 불완전한 존재입니까? 그러나 인간에게는 무한한 발전의 여지가 있습니다. 많은 사랑과, 정신적이고 문화적이고 영적인 은사를 받아 가면서 성숙하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인류학자들은 '1%의 자기발전과 99%의 문화적 영향'이라고 말합니다마는 그 배후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은 이제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라가야 할 많은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종말이 임할 때에 우리 인간은 육체나 동물적인 것에 머물러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어느 마을에 나뭇짐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믿음이 어찌나 좋던지 혼자 살면서도 늘 신앙 생활에 힘쓰며 입에서는 찬송이 떠나는 날이 없었습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 가지고 내려올 때에는 언제나 교회 앞에 나뭇짐을 세워 놓고 성전에 들어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도를 드린 뒤에 기쁜 얼굴로 나오곤 했습니다. 날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목사님이 하루는 그 할아버지한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슨 소원이 그렇게 많아서 늘 기도를 하십니까?"

할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특별히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지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이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 얼굴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저를 내려다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마주보는 것만이 저의 유일한 행복입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욥은 말합니다. "그가 나를 낮선 자로 대하지 아니할 것이라."마지막이 가까웠다고 할 때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익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꼭 무슨 소원을 이루고 무엇을 얻자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저 미래로 향한, 영원으로 향한 문턱에 서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도의 자세를 바로 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이것이 종말의 때에 힘써야할 종말론적인 윤리의 첫째 항목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회적 윤리입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사랑을 진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받게 될 질문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십니다. 마태복음 2531절 이하에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것은 말세에 있을 심판에 대한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실제적인 사랑을 물으십니다. 얼마나 잘살다 왔느냐, 얼마나 굉장한 업적을 세웠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사랑했느냐, 네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사랑했느냐---이것만이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이것만이 심판대 앞에서 문제되는 것입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사랑은 먼저 '열심'을 가지고 진단해야 하겠습니다. 열심있는 사랑은 적극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기다리는 사랑이 아니라 찾아가는 사랑이요, 받고서 응답하는 사랑이 아니라 내가 먼저 기회를 만드는 사랑입니다. 받았으니 주고, 못 받았으니 주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제는 그저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원수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더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빚을 갚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빚을 지고 있으니 이제 그것을 갚아나간다 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할 문제가 아닙니다. 종말론적 윤리에서는 다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는가 하는 점만 문제될 뿐입니다.

저와 한 고향 분으로, 김 목사님이라고 하는 원로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저희 집에 오시면 저를 늘 손자처럼 아껴 주시고 많은 도움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한때는 이 목사님과 저 사이에 매우 불편한 문제가 개입된 적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한국 교단에 합동이니, 통합이니 하는 분쟁이 일어났을 때 김 목사님이 저더러 당신이 속해 있는 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겠습니다" 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김 목사님을 매우 섭섭하게 해드렸던 모양입니다. 그후로 목사님은 저를 보실 때마다 언짢은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아무 편이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하고 제가 아무리 설득을 하려 해도 김 목사님은 섭섭하다는 말뿐이셨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덧 김 목사님의 연세 팔순이 넘으셨습니다. 한번은 절 찾아오셔서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뭐 이편 저편 없다.

나는 이제 모두를 사랑한다. 이제 내게는 미운 사람도 미운 교파도 없다. 하나님의 교회이니 이쪽이든 저쪽이든 아무 상관도 없다. 다 사랑한다." 이때부터 김 목사님과 저는 예전보다 더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제가 농담 삼아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사람은 몇 살에야 철이 듭니까?" 목사님이 "팔십은 넘어야 철이 들지" 하면서 껄껄 웃으시기에 저도 따라 웃었습니다. 여러분, 사람 철나기가 이렇게 힘이 듭니다. 오래 산다고 철드는 것 아닙니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는데 아직도 소아병(小兒病)에 걸려가지고 삐지기도 잘하고 섭섭한 것도 많습니다. 이래 가지고야 되겠습니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랑을 원합니까? 이제 며칠 안 남았는데 더 받아서 무엇합니까? 여러분, 이제 그만 합시다. 받겠다는 생각에서 이제 그만 벗어납시다. 그만큼 누렸으면 됐고, 그만큼 받았으면 충분합니다. 이제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가 다릅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세상 끝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습니다.

여러분, 이제 허물을 덮는 것으로 우리의 사랑을 진단해 봅시다.

얼마나 사랑했나---얼마나 많은 허물을 덮어 보았습니까? 우리 교인들 가운데에도 남편 때문에 속썩는 자매님들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한두 가지 결점은 있게 마련이고, 그래서 부부는 서로의 허물을 덮어 주며 참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남편에 대해서 불평합니다. 방탕기가 있어서 속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매님은 아이들을 위해서 할 수 없이 같이 산다고 말했습니다. 남편한테도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주려고 참고 참고 또 노력하지만 끝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 그 자매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 나왔습니다. "그 더러운 인간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렇습니다. 물질을 준다고 사랑이 아닙니다. 내 의()를 주어야 합니다.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죄인이 되고, 더러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오물 통을 뒤집어써야 합니다. 거기까지 가지기 전에는 절대로 남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얼마나 많은 허물을 덮어 주어 봤습니까?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지금 친구의, 남편의, 아내의, 그리고 원수의 허물까지도 덮어 주십시오. 이것이 사랑입니다. 또한 이것이 종말론적인 윤리입니다. 이것이 아니고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종말론적 윤리의 셋째항목은 손님 대접하기에 힘쓰라, 모든 선한 일에 원망 없이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원망도, 시비도, 기대감도 없이 순수하게 이루어지는 선한 역사가 이 종말의 때에 실형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넷째, 교회를 향한 종말론적 윤리가 있습니다. 은사 받은 대로 봉사하라, 청지기같이 봉사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말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봉사하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선한 일을 해서 은혜를 보상으로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봉사 자체를 은혜로 알고 청지기같이 하나님의 사업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마지막 때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마지막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마지막 날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이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여러분의 관심사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지금이라도 당장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주님께서 오신다고 하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분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부터 정신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며, 열심으로 사랑하고, 서로 원망 없이 대접하며, 청지기의 자세로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았든지 이제 남은 시간만은 본문 마지막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지막 시간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시간이 된다면 이보다 더 감사하고 기쁜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종말론적 윤리(베드로전서 4711)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시각(視覺)이 있습니다.

역사를 하나의 사이클로 보아 반복 순환한다고 생각하는 사관(史觀)입니다. 그런가 하면 역사를 직선적인 흐름으로 보는 시각이있습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생각하는 역사관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역사는 창조가 있듯이 종말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창조로 시작되고 최후 심판으로 끝난다는 사관(史觀)입니다. 예수님의 교훈을 들으며 따른 3년 동안, 제자들은 바로 그러한 문제를 놓고 그들이 들은 바에 따라 응답하면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마태복음 243절을 보면, 세상 끝에 무슨 징조가 있겠느냐고 제자들이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부터 세 장()에 걸쳐 세상 끝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징조가 있겠느냐고 질문한 제자들의 내심(內心)에는 다분히기회주의 적인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때쯤에 끝이 있습니까?" "무엇을 보고 끝이 왔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이런 것을 미리 알아두고, 세상을 그럭저럭 기분대로 살다가, 끝이 올 때쯤 가서 정신차리고 바로 믿으면 되겠지 하는 속셈이 엿보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학생들 가운데도 시험 보는 날을 미리 알고 싶어 안달하는 학생들이 있지 않습니까 ? 시험을 언제 보든지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평소에 당연히 해야 할 공부를 꾸준히 해나간다면, 어느 때에 시험을 보든지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시험 날짜를 미리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되는대로 빈둥거리다가 시험 날이 코앞에 닥치면

'벼락치기'로 공부하겠다는 속셈이지요. 결코 바람직한 자세가 못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그렇고, 인생을 사는 것도 그렇습니다. 무슨 징조가 있는지, 어느 때쯤 종말이 오는지, 물을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오늘을 나의 마지막 날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끝 날이 눈앞에 왔다는 생각으로 나날을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자세입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윌리엄 바클리(William Barclay)라고 하는 신학자는 말합니다. "현대는 신학의 위기라기보다 윤리의 위기이다"---일리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세상에 살면서 종말론적 윤리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끔찍한 일들이 하도 많으니 새삼 되씹을 필요도 없는 줄 압니다. 어느 하루도 말세의 조짐을 보지 않는 날이 없고, 때마다 세상 끝났다는 탄식이 넘칩니다. 동아일보 525일자에 대충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린 것을 읽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마약중독 상태의 신생아가 연평균 37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부모가 마약중독 상태에서 낳았기 때문이지요. 아기들이 태어날 때부터 마약중독 현상을 보이다니 말문이 막힙니다. 애초부터 무기력하고, 성장해도 학업 등 모든 사회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야간 공포증에 시달리는 등 정서가 불안하고, 신체적으로도 폐렴, 뇌막염, 만성 설사 등 갖가지 심각한 병에 걸릴 뿐 아니라, 별의별 후유증을 다 겪는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미국에만 있는 일도 아니고, 그 문제가 이 아이들의 단계에서 그칠 것도 아니요 연쇄적으로 파급될 것이고 보면, 앞날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결코 먼 뒷날의 이야기도, 강 건너 불도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는 엄청나게 끔찍한 말세의 조짐을 너무도 많이 보고 삽니다. 입이 있어도 일일이 매거(枚擧)하지 못합니다.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습니까?'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물을 필요도 없고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의 예언은 다 응했고, 우리는 바야흐로 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남은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것---이 한 가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24 : 14)."'온 세상---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그밖에는 다 이루어졌습니다. '지구는 둥근데 땅 끝이 어디냐' 하고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땅 끝이란 아마도 북한일 것이다. 가장 깨우치기 어려운 공산 폐쇄 사회가 곧 땅 끝이다" 하고 짚어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마지막에 대해서 가부(可否)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17, 8절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것만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때가 언제냐고, 징조가 무엇이냐고, 다시는 묻지 맙시다.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오늘 하루를 더 연장시켜 주시니 고맙고, 이렇게 한 시간이라도 더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게 하여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는 매시간 인내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이 시간 내가 땅 끝까지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문제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란 최종 심판의 날이요, 동시에 최종 구원의 날입니다. 종말은 단순한 세상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말의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종말에 대하여 재미있는 비유를 이야기했는데 들어보십시오. 관객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는 어느 극장 뒤쪽에서 불이 났습니다. 관객들은 재미있는 연극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극장 주인은 불난 사실을 갑자기 알릴 경우에 벌어질 큰 혼잡을 예상하고 조용한 설득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배우들 중에 가장 인기 있는 배우 한 사람을 불러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가서 관객이 당황하지 않도록 잘 설명하고 모두 차분하게 이 극장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유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인기 배우는 막중한 사명을 띠고 무대 위에 서서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이러저러해서 불이 났는데 모두 차례를 지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그랬더니 관객들은 이것이 연극인 줄 알고 모두들 박수만 칩니다. 아주 재미있어 합니다. 당황한 연극 배우가 이것은 연극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곧 불길이 번져올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관객들은 더 열심히 박수만 칩니다. 아무도 믿어 주지를 않습니다. ,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극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서로가 먼저 빠져나가려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여러분, 말세다 말세다 하니까 무슨 연극인 줄 아십니까? 농담이 아닙니다. 진담입니다. 말세는 임박한 현실입니다. 먼 훗날의 이야기로 듣지 마십시오. 그렇게 듣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세상 끝이 정말 왔습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윤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종말론적 윤리가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종말론적 윤리에 대한 말씀을 객관적으로 조명(照明)해 봅시다. 첫째, 종말론적 윤리는 절대적 윤리입니다. 상황 윤리가 아닙니다. 실존적이요, 절대적인 윤리입니다. 이제는 세상이 어떻고, 남들이 어떻고, 남들이 나에 대해서 하는 말이 어떻고 에 신경쓰지 맙시다. 잘살고 못살고, 잘나고 못나고, 그런 이야기 할 때가 아닙니다. 상대적인 이야기는 이제 필요 없습니다. 돈 많이 벌면 뭐합니까? 잘살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종말이 눈앞에 있는데 말입니다. 며칠이 될지, 몇 시간이 될지 모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신경써야 할 것은 절대적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입니다. 내 생명이 관계된 문제라는 말입니다.

둘째, 종말론적 윤리는 내적 삶의 윤리입니다. 세상 문제도 아니고 물질적 문제도 아닙니다. 법률적 문제도, 도덕적 기준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내적인 문제입니다. 내 영혼의 문제, 내 영성(靈性)의 문제----하나님의 형상인 내 생명이 어떻게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제는 누구를 원망할 것도, 세상을 탓할 것도 없습니다. 내적인 문제에 온 관심을 다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셋째, 종말론적 윤리는 실제적 윤리입니다. 지금은 이론적으로 도덕관이나 지식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종결 시기가 실제적인 문제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4 : 13-14)." 그렇습니다. 지금은 열심히 돈을 벌고 1년쯤 후에야 선하게 살아 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큰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상황이 아주 급하게 되었습니다. 종결 시기가 왔습니다. 내년 이야기도 아니고 내달 이야기도 아닙니다. 내일 이야기도 아닙니다. 바로 오늘입니다. 이것이 실제적 윤리입니다.

이제 베드로전서에 나타난 종말론적 윤리의 덕목을 살펴봅시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라는 뜻의 헬라어 '소프로네인'은 본래 군사적인 용어입니다. 보초를 향하여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서 있으라!" 하는 말입니다. 보초서는 사람이 흐릿한 자세로 애인 사진이나 들여다보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정신차려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맑은 정신을 가지라, 제정신을 보존하라는 말입니다. 생의 궁극적 목적과 현실에 대해서 그 동안은 너무 먼 거리를 두고 살아왔지만 이제야말로 궁극적 목적에 적합한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할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그 동안은 뭐가 뭔지 모르고 우왕좌왕하며 살았을지라도 마지막 결론만큼은 바로 맺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정신차리라는 것입니다. 종결의 시점에 대하여, 남은 시간에 대하여, 나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분명한 의식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내 정신이 엉뚱한 곳으로 끌려가 있지는 않은지, 엉뚱한 것에 홀려 있지는 않은지, 항시 점검하고 주의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다음, '근신하라'---'네포'라는 말은 '술에서 깬다'는 뜻입니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어름어름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방탕에, 향락에, 탐닉에, 혹은 게으름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곧 썩어질 육체를 위하여 너무 많이 고민하고 너무 많이 투자했습니다. 자기 한 몸을 즐겁게 하려고 그 많은 세월을 허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종말론적 윤리는 말합니다. 끌려가는 상태에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 육체 주도적인 생활을 멈추고 이제는 영 주도적인 생활로 생활 태도를 바꾸라---이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근신하라!" 여러분의 생활 전체를 점검해 보시기바랍니다. 영 주도적인 생활로 다시 정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하라'---이 말씀은 앞에 나온 두 동사의 결과요, 목적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했으니 이제 기도하라, 기도하기 위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인류학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간은 모태에서부터 미숙한 존재로 태어난다.' 동물을 보십시오. 그들은 태어날 때 거의 완전하게 모든 것을 배워 가지고 나옵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미 뱃속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응용합니다. 이것은 동물들의 본능입니다. 어미 뱃속에서 동물의 본능을 이어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본능대로 살다가 그 본능대로 죽어갑니다. 더 배울 필요도 없고, 더 배우지 않아도 됩니다. 갓난 강아지를 길러 보셨습니까? 강아지는 눈도 뜨기 전에 자기 어미의 젖을 찾아가 뭅니다. 그것도 자기가 물던 젖꼭지만을 문다고 합니다. 이것을 누가 가르쳐 주었습니까? 강아지 스스로가 어미 뱃속에서 배워 가지고 나온 결과입니다. 강아지한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본능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살고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매우 미숙한 존재로 태어납니다. 먹을 것을 입에 갖다 대주어도 먹지 못합니다. 동물에 비하여 얼마나 미숙하고 불완전한 존재입니까? 그러나 인간에게는 무한한 발전의 여지가 있습니다. 많은 사랑과, 정신적이고 문화적이고 영적인 은사를 받아 가면서 성숙하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인류학자들은 '1%의 자기발전과 99%의 문화적 영향'이라고 말합니다마는 그 배후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은 이제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라가야 할 많은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종말이 임할 때에 우리 인간은 육체나 동물적인 것에 머물러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어느 마을에 나뭇짐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믿음이 어찌나 좋던지 혼자 살면서도 늘 신앙 생활에 힘쓰며 입에서는 찬송이 떠나는 날이 없었습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 가지고 내려올 때에는 언제나 교회 앞에 나뭇짐을 세워 놓고 성전에 들어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도를 드린 뒤에 기쁜 얼굴로 나오곤 했습니다. 날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목사님이 하루는 그 할아버지한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슨 소원이 그렇게 많아서 늘 기도를 하십니까?"

할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특별히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지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이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 얼굴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저를 내려다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마주보는 것만이 저의 유일한 행복입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욥은 말합니다. "그가 나를 낮선 자로 대하지 아니할 것이라."마지막이 가까웠다고 할 때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익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꼭 무슨 소원을 이루고 무엇을 얻자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저 미래로 향한, 영원으로 향한 문턱에 서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도의 자세를 바로 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이것이 종말의 때에 힘써야할 종말론적인 윤리의 첫째 항목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회적 윤리입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사랑을 진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받게 될 질문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십니다. 마태복음 2531절 이하에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것은 말세에 있을 심판에 대한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실제적인 사랑을 물으십니다. 얼마나 잘살다 왔느냐, 얼마나 굉장한 업적을 세웠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사랑했느냐, 네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사랑했느냐---이것만이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이것만이 심판대 앞에서 문제되는 것입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사랑은 먼저 '열심'을 가지고 진단해야 하겠습니다. 열심있는 사랑은 적극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기다리는 사랑이 아니라 찾아가는 사랑이요, 받고서 응답하는 사랑이 아니라 내가 먼저 기회를 만드는 사랑입니다. 받았으니 주고, 못 받았으니 주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제는 그저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원수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더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빚을 갚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빚을 지고 있으니 이제 그것을 갚아나간다 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할 문제가 아닙니다. 종말론적 윤리에서는 다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는가 하는 점만 문제될 뿐입니다.

저와 한 고향 분으로, 김 목사님이라고 하는 원로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저희 집에 오시면 저를 늘 손자처럼 아껴 주시고 많은 도움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한때는 이 목사님과 저 사이에 매우 불편한 문제가 개입된 적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한국 교단에 합동이니, 통합이니 하는 분쟁이 일어났을 때 김 목사님이 저더러 당신이 속해 있는 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겠습니다" 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김 목사님을 매우 섭섭하게 해드렸던 모양입니다. 그후로 목사님은 저를 보실 때마다 언짢은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아무 편이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하고 제가 아무리 설득을 하려 해도 김 목사님은 섭섭하다는 말뿐이셨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덧 김 목사님의 연세 팔순이 넘으셨습니다. 한번은 절 찾아오셔서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뭐 이편 저편 없다.

나는 이제 모두를 사랑한다. 이제 내게는 미운 사람도 미운 교파도 없다. 하나님의 교회이니 이쪽이든 저쪽이든 아무 상관도 없다. 다 사랑한다." 이때부터 김 목사님과 저는 예전보다 더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제가 농담 삼아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사람은 몇 살에야 철이 듭니까?" 목사님이 "팔십은 넘어야 철이 들지" 하면서 껄껄 웃으시기에 저도 따라 웃었습니다. 여러분, 사람 철나기가 이렇게 힘이 듭니다. 오래 산다고 철드는 것 아닙니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는데 아직도 소아병(小兒病)에 걸려가지고 삐지기도 잘하고 섭섭한 것도 많습니다. 이래 가지고야 되겠습니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랑을 원합니까? 이제 며칠 안 남았는데 더 받아서 무엇합니까? 여러분, 이제 그만 합시다. 받겠다는 생각에서 이제 그만 벗어납시다. 그만큼 누렸으면 됐고, 그만큼 받았으면 충분합니다. 이제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가 다릅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세상 끝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습니다.

여러분, 이제 허물을 덮는 것으로 우리의 사랑을 진단해 봅시다.

얼마나 사랑했나---얼마나 많은 허물을 덮어 보았습니까? 우리 교인들 가운데에도 남편 때문에 속썩는 자매님들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한두 가지 결점은 있게 마련이고, 그래서 부부는 서로의 허물을 덮어 주며 참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남편에 대해서 불평합니다. 방탕기가 있어서 속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매님은 아이들을 위해서 할 수 없이 같이 산다고 말했습니다. 남편한테도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주려고 참고 참고 또 노력하지만 끝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 그 자매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 나왔습니다. "그 더러운 인간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렇습니다. 물질을 준다고 사랑이 아닙니다. 내 의()를 주어야 합니다.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죄인이 되고, 더러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오물 통을 뒤집어써야 합니다. 거기까지 가지기 전에는 절대로 남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얼마나 많은 허물을 덮어 주어 봤습니까?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지금 친구의, 남편의, 아내의, 그리고 원수의 허물까지도 덮어 주십시오. 이것이 사랑입니다. 또한 이것이 종말론적인 윤리입니다. 이것이 아니고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종말론적 윤리의 셋째항목은 손님 대접하기에 힘쓰라, 모든 선한 일에 원망 없이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원망도, 시비도, 기대감도 없이 순수하게 이루어지는 선한 역사가 이 종말의 때에 실형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넷째, 교회를 향한 종말론적 윤리가 있습니다. 은사 받은 대로 봉사하라, 청지기같이 봉사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말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봉사하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선한 일을 해서 은혜를 보상으로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봉사 자체를 은혜로 알고 청지기같이 하나님의 사업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마지막 때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마지막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마지막 날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이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여러분의 관심사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지금이라도 당장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주님께서 오신다고 하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분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부터 정신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며, 열심으로 사랑하고, 서로 원망 없이 대접하며, 청지기의 자세로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았든지 이제 남은 시간만은 본문 마지막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지막 시간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시간이 된다면 이보다 더 감사하고 기쁜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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