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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신앙은 다르다 마25:14~30

by 【고동엽】 2024. 12. 12.

종말 신앙은 다르다    마25:14~30     

본문은 너무 잘 알려져 있는 종말론적인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종말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옵니다. 
서고 싶지 않아도 서야 됩니다. 

종말론적이라는 말은,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특히 시간에 있어 유한한, 한정된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시간의 한계 속에 긴박성을 담고 있습니다. 

언젠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딱 멈추는 순간이, 모두에게 옵니다.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이 멈추는 것을 우리는 죽음이라고 얘기하고요. 
또 인류적으로 멈추는 시간이 최종적 종말입니다. 
그 누구도 이 시간의 한계를 넘어 설 수도 없고, 저항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계획을 하며 살아야죠. 그러나 동시에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될 이유가 
그 시간을, 우리가 계획한대로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방종하게 되고, 
또 쓸데없는 것에 집착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주1)

심판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입니다.        주2)

◑한 달란트 받은 종에 대한 심판

셋 중에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 대한 평가가 워낙 혹독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 대한 평가가 왜 이렇게 가혹한가 의아해집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한 달란트를 주인에게 다시 되돌려 주었습니다. 
뭐 이거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잘 한 것도 아니지만, 잘못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가 받은 것을 축낸 게 아닙니다. 잃어버린 것도 아닙니다. 
자칫하면 오히려 빚을 지거나, 마이너스로 만들 수도 있었는데, 
한 달란트 받은 것을 고스란히 그대로 돌려준 것, 이거 선방한 거 아닙니까? 

좀 아쉬운 부분은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욕먹을 일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받은 것을 그대로 되돌려줬어요. 
그런데 본문을 보면, 주인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 대한 평가가 최악입니다. 

▲달란트 비유가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의 골격이 무엇입니까? 
세 사람은 모두 각각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달란트란, 우리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게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받은게 없다' 이렇게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달란트의 분량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건 우리가 따질 일은 아닙니다. 
주인이 자기 뜻대로 준 것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실 한 달란트도 엄청난 액수입니다. 
'나는 왜 한 달란트냐?' 이런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소관이 아닌 걸 가지고 세월을 보내면 낭비가 됩니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시비를 걸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왜 한국인으로 태어났는가? 내 외모는 왜 이런가? 
나는 왜 이런 집안에 태어났는가? 내 머리는 왜 별로 안 좋은가? 

이건 우리가 다룰 영역이 아닙니다. 의미 없는 질문입니다. 
내가 결정한 것도 아니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받은 달란트는 정해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내게 주어진 것에 대한, 나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언젠가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도 그겁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나의 반응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게 과제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무엇인가 각자에게 주셨다는 겁니다. 
우리 각자가 뭔가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나라는 존재, 
-나에게 주어진 생명 자체, 
-나에게 주어진 시간,
-나에게 주어진이 복음,
-나를 함께 맺어져 있는 모든 관계들... 이게 다 달란트들입니다. 
뭐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을 땅에 묻어 버렸습니다. 
치명적인 실수입니다. 

주인의 책망이 이 부분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심판

삶의 태도는 그냥 만들어진게 아니죠. 
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이런 태도가 나왔을까요? 

그 안에는 두려움이라는게 있었습니다. 주인에 대한 두려움. 
24절을 보면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굳은 사람'이란 말은, 주인은 굉장히 냉엄하고, 무서운 사람이고, 
아주 인색하고,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이라는 인식입니다. 
조금도 자비가 없는 냉엄한 주인이기 때문에 
섣불리 시도하다가 달란트를 잃어버린다면 
자기가 받게 될 처분이 두려웠던 거죠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 심판에 대한 두려움, 
그 두려움에, 달란트를 받자마자 몸이 얼어붙었던 거죠. 

그래서 25절 이렇게 나옵니다.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었나이다.'
자기 한 달란트를 땅에 묻었던 이유가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의 삶아가는 방식이 있습니다. 
소극적입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어요. 행동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몸도 마음도 움츠려져 있어요. 무엇을 해도 망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100% 안전이 보장이 되어야 움직이는 거예요. 
근데 세상에 100% 안전이 보장되는게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항상 결론이 똑같습니다. '안 하는게 잘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파묻어 버렸습니다. 사용하거나 심을 줄 모르는 거죠. 

여러분 심는 것과, 묻는 것은 다른 거죠. 
심는 것은, 재생산을 위한다면 
묻어 버리는 것은, 비생산입니다. 

모든 것을 묻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묻어 버립니다. 
자신이 가진 자원을 묻어 버립니다. 
심지어 자기의 감정마저도 묻어 버립니다. 모든 걸 억제해 버립니다. 

기쁘면 기쁘다. 슬프면 슬프다고 해야 합니다. 
근데 억눌러 버려요. 그러니까 그게 병이 되는 겁니다. 

책임을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삶이 갈수록 좁아집니다. 
특히 코로나 이후에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습니다. 
노출을 꺼려합니다. 잠수를 탑니다. 은둔형이 많아졌습니다. 
'나는 조용히 살래' 행동 반경이 점점 좁아집니다. 자기를 찾지 말라는 거예요. 
가입했던 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는 겁니다. 

갈수록 모든게 축소됩니다. 굉장히 매우 위험한 징조죠. 
결국 어떻게 되죠? 생각보다 심각해집니다. 

▲그냥 묻어둔 것에 대한 주인의 심판은 뭘까요?
결국 가지고 있는 것(한 달란트)까지 빼앗아 버립니다. 

삶이 갈수록 소멸되어져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사람. 
자신이 스스로 만든 감옥 안으로, 자기가 들어가는 사람인데
이걸 가르쳐 '자폐적 삶'이라고 얘기합니다. 

결국 무슨 심판이 따릅니까? 30절에 보니까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강제 격리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소외시켰는데, 이제 나중에는 강제 격리를 당합니다. 

안전한 삶을 추구한 결과는, 안전한 삶과 거리가 먼 심판으로 주어집니다. 
계속적으로 쪼그라드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더 펴져 가는 인생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인생이 쪼그라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소극적인 생각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그런게 아니라, 나이 들수록 더 풍성해져 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이에요.
이 두려움은 주인에 대한 오해에서 시작됐다는 거예요. 주인을 의심하고 있는 거죠. 
그 주인의 사랑과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주인은 종에게 분명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인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비가 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그런 까다로우신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은요, 기회를 주고 또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두려움에 벗어나야 합니다. 

두려움은, 우리 생각(예상)보다 무서운 장애물입니다. 
신자들 안에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러나 믿음과 두려움은 상극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에 포로가 되면, 할 일이 없어져요. 

두려움은 결국 체념의 단계로 가게 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삶은 고립됩니다. 
믿음의 삶은, 두려움과 맞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해가 지나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으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우리는 한 번도 안 가본 길을 걸어가게 되는 거죠. 

2024년은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미래는 늘 예측불허 입니다.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하려면,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모험이 포함됩니다.      ☞ <모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 길을 걷는 이유는, 믿음으로 가는 겁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걷는 사람들을 향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게 있어요.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분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꽤 많이 나와요. 
믿음의 길을 선택할 때 찾아오는 두려움이 있는데,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 주인의 판정은 무엇입니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 대한 주인의 평가가 이렇습니다.
26절,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악한 것은 게으른 것이고요. 게으른 것은 악한 것이에요. 
기독교 역사 속에 내려오는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가 있습니다. 
이것을 '일곱 대죄'라고 해요.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 이게 일곱 가지 대죄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게으름 이라는 죄입니다. 
여러분 게으름은 작은 죄가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에 의하면 굉장히 큰 죄에요. 

게으름은 무엇을 행함으로 짓는 죄가 아니라, 행하지 않는 죄예요. 
여러분 이것이 어디로부터 처음 출발했습니까? 두려움으로부터 출발했어요. 

두려워서 무엇을 안 하려고 하다 보니, 결국은 게을러지는 단계까지 가는 거죠.
두려움은 게으름으로 연결되는 겁니다. 

믿음이 없으면 두려움이 오는 것이고, 
그 두려움이 결국은 게으르게 살게 만든다는 거죠.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게을러지게 만들었다는 거죠.

현대인들이 갈수록 게을러지는 문화에 익숙하기 쉬워요.
모든게 너무 편리하니까요. 문명의 이기 덕분입니다. 
편리해도 너무 편리해졌어요.

우리나라 한국이  '편리'한 것으로 따지면, 세계적 수준인 것 같아요.
요즘은 특별히 인터넷으로 모든게 다 해결됩니다. 클릭 한번으로 다 해결이 돼요. 
모든게 원하는 순간 단번에 오토매틱이에요. 

또 상업주의는 더 편리하게, 더 편안하게 해주려고 합니다. 더 게을러지게 만듭니다.
미래 사회는 AI가 우리의 생각마저 대신 해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로 하여금 점점 게을러지게 하는 이 문화, 
여러분, 이 나태 게으름은.. 무기력하게 만드는 영혼의 병으로 이어집니다. 

▲근데 나태는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거슬러 올라가면 무관심에서 나옵니다. 
모든 것에 무관심으로 대하는 거예요. '흥미 없음' 입니다. 

왜 관심이 없을까요? 냉담한 마음이에요. 
그 안에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무정한 마음이라고 그러죠. 냉랭합니다. 
싸늘하게 식어서 냉담해진 가슴입니다. 느낌이 별로 없어요. 
얼굴에도 써 놨어요. '아무 느낌 없음'

요즘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 이런 단어들을 심심치 않게 우리 사회에서 듣고 있습니다. 
왜 이런 증상들이 일어나죠? 공통점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음이에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에도 관심이 없어요. 
여러분 고통하는 사람을 보면, 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정상입니다.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을 해야 정상입니다. 근데 그게 없어져 버린 거예요. 

자 그러면 더 나아가면 어떤 증상이 나타납니까?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점점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건 중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굉장히 많이 일어나고 있는 정서입니다. 

여러분, 게으름이라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나 위에 다른 것에 별 관심이 없어요. 
왜 게을러졌는가요? 나 외에는 일체 관심이 없다니까요. 

여러분, 관심이 없으면 결국 아무것도 행하지 않습니다. 
그 관심이 우리를 뭔가로 이끌잖아요. 근데 관심이 없는 거예요. 
현대인들에게 발견되는 모습이 뭡니까? 자기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걸 가르쳐서 우리는 '병적 자기애'라고 얘기합니다

여기에 핸드폰도 한몫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눈을 떼지 않습니다. 
가족 간에 거실에 함께 앉아 있는데, 각자 핸드폰을 따로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가족을 바라보아야 할 시선을, 핸드폰에게 빼앗겼습니다.
아이를 바라보아야 할 엄마의 눈도, 핸드폰에 빼앗겨 있어요. 

이웃에게 돌려야 할 시선이 핸드폰에게 집중하고 있고, 
운전할 때도 핸드폰을 봅니다.
작은 기계에 자기 시간과 시선을 바친 사람의 가슴은 갈수록 더 싸늘해집니다. 

이웃을 향해 내밀어야할 손에는, 핸드폰이 굳게 줘어져 있습니다. 
삶이 갈수록 고립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이기적이게 됩니다. 
결국은 자기 하나 돌보는 일에도 힘들어 합니다. 

모든 걸 묻어 버립니다. 
시간을 묻어 버립니다. 
따뜻한 관계들도 묻어 버립니다. 
자기의 감정도 묻어 버립니다. 억제해 버립니다. 
기쁨도 슬픔도 묻어 버려요. 눌러 버려요. 

여기서 뭐가 오죠? 공감의 기능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갈수록 사람이 차가워진다..를 넘어서 잔인해진다는 거죠. 

여러분, 게으른 사람은 결국 어디로 가요? 
잔인한 겁니다. 냉혹해지는 겁니다. 

오늘 주인의 평가를 보십시오. '악하고 게으른 종아!' 
게으른 사람은 무정한 사람이 되고, 게으르면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게 결국은 악한 종이 되는 거죠.

사랑은 부지런해야 가능합니다. 저절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죠. 
사랑에는 어마어마한 수고가 따릅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게으른 삶은 점점 더 메말라져 갑니다. 
그 삶은 지루해요. 기쁨이 없어요. 
비관적이에요. 우울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자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파괴합니다. 
그래서 점점 소멸되어져 가는 거죠.
삶의 계획도, 목적도, 의미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것을 파묻으면 안 돼요. 
파 묻어 버리는 것은 은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그것을 '악'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

 16절에 보니까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시 달란트를 남기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겼다'는 거예요. 
달란트를 주인이 맡긴 목적은, 남겨라고 준 거예요. 남겨야 되는 거예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결정적 실수는, 남기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게 악한 거라는 거예요. 

한 달란트 받은 자에 대한 주인의 책망을 보세요. 
27절에 '그러면 내가 마땅히 내 돈을 치리하는 자들에게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했을 것이다'

'하다못해 빌려주어서라도 이자라도 받았어야 되는 거 아니냐?' 
남겨야 되는 거예요. 

▲자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남겼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장사했다는 거죠. 
'바로' at once, 순발력이에요. 지체하지 않았어요.   

여러분 순종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순발력입니다. 
오래 머뭇거리지 않아요. 
순종하는 사람과 불순종하는 사람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불순종하는 사람도 순종하려고 했어요. 근데 미룬 거예요.            
미루면 불순종으로 가는 거예요. 

순종은 즉각적입니다. 주어진 미션에 대한 순발력이 중요합니다. 
열매를 남긴 사람들은, 말씀이 주어질 때 순종이 빨랐어요. 오래 고민하지 않습니다. 
여기 '바로 가서'라고 하는 거죠. 

▲자 여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바로 가서' 뭘 했다고요? 장사를 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장사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움직였다, 행동했다는 거예요. 
고민하지 않고,  즉각적인 반응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장사가 뭡니까? 주고받는 행위를 통하여 남기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고, 거래하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것이 이익입니다.

좋은 것을 거래하고, 장사하려면
무엇인가 계속 생각하고 움직여야 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것에 대한 지혜로운 태도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주고 받는 일을 계속합니다. 
세상에 돌아가는 힘도, 주고받는 행위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모두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 움켜쥐고 있다면, 다 같이 죽는 거예요. 

나는 무엇인가 줄 것이 있고, 그것을 받아서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인 것이죠. 이것이 본래 주인이 의도한 것이었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풍성합니다. 
요셉의 스토리도 마찬가지죠.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있었지만 
하나님이 요셉에게 복을 주시는데, 요셉에게만 복을 주시는게 아니라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도 복을 받아요. 

보디발의 집까지 복을 주시는 이유는 뭐냐? 
그것은 요셉을 믿는 하나님이 복의 하나님이라는 걸 알려 주시기 위해서죠. 

그러니까 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는 풍성함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복을 주시는게 아니라 
그 백성으로 인하여, 그 주변 사람들까지 복을 미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죠.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가지고, 장사를 하라는 거죠.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창의성을 발휘해서, 거래를 통해서 계속 남겨라는 거죠. 

여러분 우리는 받은게 많습니다. 받은 은혜가 많습니다. 받은 재능들이 있습니다. 
나만 가지고 있는게 있습니다. 나만이 가진 경험이나 기술이 있습니다.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그게 쪼그라드는 거예요. 
그걸 확장시키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점점 커져 가야 된다는 거죠.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지혜롭게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심은대로 거둔다는 거죠. 

고후9:6절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중요한 법칙이죠. 가능한 많이 심으라는 거죠. 
심은 것을 거두고, 심지 않으면 거둘게 없고... 이건 너무도 뻔한 일반적인 법칙입니다.

눅6: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먼저 주라는 거예요.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이것은 먼저 내 편에서 주는 행위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나는 주지도 않았는데, 돌아올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근데 줬는데, 너무도 후히 되어, 흔들어 넘치도록 우리에게 안겨주는 이 보상의 원리, 
돌아오는게 더 많아요.. 이게 남는 장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전도를 어떤 사람에게 했어요. 
내가 받은 복음을 내 혼자 가지고 있지 않고, 파묻어두지 않고, 누구에겐가 나누어 줬어요. 

근데 그 복음을 받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너무 잘 하는 거예요.
그가 또 다른 사람에게 전도를 하고 양육하고 하는 거죠. 이거 장사를 잘한 겁니다. 
마치 다섯 달란트 남긴 것과 같죠.

그러나 나 혼자 예수 믿고 끝나버렸다면 
받은 달란트를 그대로 묻어 둔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통하여 또 다른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면, 그건 남긴 것이에요. 

내가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위로하며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어려움 중에서 살아났어요. 

자신이 가진 것을 부지런히 나누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죠. 
누군가를 용서하면 그 용서가 돌아오는 거에요. 이게 남는 장사입니다.
주고받는 원리입니다. 가만히 가지고만 있지 않고, 즉각적인 삶이라는 거죠. 

마7: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은 골든 룰, 황금률이라고 그래요. 
어마어마한 비밀이 그 안에 들어있다는 거잖아요. 

근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가 내게 대접하는 거 보고 내가 하겠다'
그런 생각은 매우 소극적이고 게으른 생각입니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상대가 하는 거에 따라서 반응하는 거거든요. 
너무너무 소극적이라는 거예요. 
반대로,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적극적으로 내가 먼저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황금률에 놀라운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장사하여 남기는 삶은, 생각 자체가 달라요. 자기가 먼저 주는 쪽을 선택하는 겁니다. 
나누는 일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이 황금률의 삶은, 예수님이 사신 삶이에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이 뭡니까?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어요.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셨어요. 
우리에게 주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어요. 우리의 구원을 주셨어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어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들을 주셨어요. 소망을 주셨어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 내놓으셨어요. 
여러분, 하나님께는 주시되 아낀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내어 주셨어요. 
마리아의 향유 옥합을 깨뜨린 사건을 보면, 
마리아는 자기의 가장 귀중한 옥합을 주님께 깨뜨립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주변에 가룟유다는 그걸 보고 '낭비'라고 했어요. 
사랑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은 낭비로 볼 수밖에 없죠. 
돈 계산에 밝아지면, 사랑은 물 건너가는 거에요.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행위가 위대한게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무한하게 사랑을 베풀어 주신 
그 예수님의 삶이 위대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받은 자는 능동적입니다. 사랑은 적극적인 삶을 살게 하고요. 
사랑을 하면 창의적이게 됩니다. 

여러분 장사를 하더라도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사랑을 하세요. 
찾아오는 손님을 사랑하세요.

식당에서 그냥 밥을 먹고 가게 하는게 아니라, 사랑을 먹고 가게 해 보세요. 
사람들은 사랑을 받는 곳에 모입니다. 
사랑하면 아이디어가 생깁니다. 사랑하면 피곤함도 이겨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폭발력을 갖고 있습니다. 

▲5달란트, 2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장사를 하고 남겼습니다. 
그들은 주인에 대한 관점이 매우 긍정적입니다. 
주인에 대해서 관점이 열려 있습니다. 

그들은 달란트를 받자마자 가슴이 들떴던 것 같아요. '바로 갔다'는 거예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을 경험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부딪힌 사람은, 소극적인 태도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너무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단 게을러질 수가 없습니다.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누려고 하는 거죠.
이게 사랑의 속성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도 보니까, 봉사를 하는 분들이 다양해요. 
진짜 봉사는 뭐냐면, 내가 수영로교회에 와서 너무 받은 은혜가 커요. 
아무리 내가 봉사해도 그 받은 은혜에는 내가 미치지 못해..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봉사에 문제가 없어요. 

근데 '내가 받은 은혜는 별로 없는데, 내가 하는 일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그러면 시험에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 무엇이든지 더 하고 싶어지는 거, 
이게 받은게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에요. 
항상 나누려고 하는 인생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달란트 비유는 종말론적입니다. 끝이 온다는 거죠. 
그 끝은 막연한 시간이 아닙니다.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짧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고귀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남겨라는 거예요. 
남기는 인생이 되어야지, 묻으면 안 된다, 숨기기기만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파묻어버렸는데 더 줄 의미가 없는 거잖아요. 
여러분 나이가 들어서도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무엇이라도 나누어야 합니다. 
나눌게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면 됩니다. 

'나는 가진게 없어요.'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에겐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나누어 주면, 더 줄게 생긴다는 거예요. 이게 성경의 원리에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지만, 있는 자는 더 받는 거예요.
'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는 거에요.
29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우리가 받아서 모시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가진 이 복음을 나누어 줄 때 
사람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고, 
주변에 힘들고 지쳐 있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는 복음이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습니다. 혹시 한 달란트라도 분명히 받아서 가지고 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는 <암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이런 책을 썼어요. 
존 파이퍼 목사님이 이제 암에 걸렸어요. 투병생활을 오랫동안 했어요.
그 사선에서 암과 싸우면서 받았던 독특한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 은혜를 나누어야 된다는 생각을, 목사님은 하게 된 거예요. 

'그 암이 아니면 내가 결코 결코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거예요. 
그걸 아무에게도 안 하고 감추고 있으면, 묻어두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거죠. 
낭비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자신의 경험을 모아 책을 쓰고,
또 암으로 고생하는 환우들을 위로하는 그런 사역을 해 나가고 계십니다. 

21절에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게 구원이에요. 
여러분, 이게 한 달란트 받은 자와는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일을 갊이 있으리라'
이건 구원도 못 받는 거죠. 자기의 소중한 구원도 불확실한 거죠.

여러분 1월 1일이 시작되면서, 금년에 내가 무엇을 시작해야 될 것인지, 
어떤 것으로 남기는 인생이 될 것인지, 기도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욕에 차고, 기대감이 넘쳐서
막 가슴이 뛰는 그런 새로운 한해를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이 금년에 나를 통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실까요? 
12개월이 지나서, 2024년 한 해 끝에서 
우리는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들처럼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 칭찬을 우리 모두가 받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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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어떤 젊은 청년이, 아직 중년은 아니었어요.
젊어서 외국에 가서 공부도 하고,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성공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병원에 갔습니다. 왜냐면 감기가 잘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하고, 진단을 해 보았는데, 무슨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몇 개월 못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병원으로 심방을 갔습니다. 
그 청년은 목사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으면, 제가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요...'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목사님 귀에, 그 청년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으면, 제가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요...'

여러분, '이런 날'은 그 청년에게만 특별히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다 찾아옵니다. 
그 청년은, 그 날이 남들보다 비교적 더 일찍 찾아온 것 뿐이에요.

우리는 그 청년처럼 탄식하면 안 되겠습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으면...'
이런 (최후의, 종말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성경에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으면...' 하며 당황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주2)심판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세 사람의 종에게 각각 달란트를 주고 타국으로 떠납니다. 
떠났던 주인은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돌아오죠. 
돌아와서 달란트를 받은 종들에 대한 결산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때는 심판주로 오십니다. 
그리고 달란트를 받은 세 사람은, 각각 평가를 받는 거죠. 

우리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날에 주어질 심판은, 가정별로, 그룹별로, 교회 별로 이렇게 심판받지 않아요. 
어느 교회 다녔느냐, 그것도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는, 개인적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지상에서는 교회가 있고, 목회자들이 있고, 사역자들이, 또 동료들이 신앙을 돕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책임은 최종적으로 각자가 져야 합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왜 그렇게 살았냐?' 이렇게 물었을 때 
'내가 다닌 교회가 신통치 않아서 내 신앙이 이렇게 되었습니다'가 안 통합니다. 
'목사를 잘못 만나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안 통합니다. 
내 신앙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됩니다. 개별적이라는 거죠. 심판은 개별적입니다. 
책임이 있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있어야 되는 것이죠. 
거기에 어떤 변명이나 합리화는 통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왜 그렇게 살았냐?' 이렇게 물었을 때 
'내가 다닌 교회가 신통치 않아서 내 신앙이 이렇게 되었습니다'가 안 통합니다. 
'목사를 잘못 만나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안 통합니다. 
내 신앙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됩니다. 개별적이라는 거죠. 심판은 개별적입니다. 
책임이 있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있어야 되는 것이죠. 
거기에 어떤 변명이나 합리화는 통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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