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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신명기 24장 17절~22절)

by 【고동엽】 2024.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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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신명기 24장 17절~22절)

 

 

사람이나 짐승이나 은혜를 모르면 자유를 누릴 권리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마는, 우리나라의 옛 민담(民譚)에 은혜를 저버린 호랑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산길을 가던 나그네가 함정에 빠져 고생하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했습니다. 호랑이는 나그네를 보자 살려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나그네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호랑이를 살려 주었습니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호랑이가 숨을 돌리더니, 자기를 살려 준 고마운 나그네한테 뜻밖의 요구를 합니다. "내가 여러 날을 굶어서 몹시 시장하니 부득이 너를 잡아먹어야 되겠다." 나그네는 몹시도 억울하고 분했습니다.

그래서 재판을 받아 보자고 했습니다. 호랑이도 찬성을 하므로, 둘은 먼저 소한테 물어 보았습니다. "나는 배가 고프니 이 사람을 잡아먹어야 되겠다." 호랑이가 주장하자 "나는 억울하다" 하고 나그네가 반박했습니다. 소는 판결을 내립니다. "사람이 나쁘다. 사람들은 모두 우리를 실컷 부려먹고 나서 끝내는 잡아먹기까지 하지 않는가." 나그네와 호랑이는 다시 소나무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나무도 호랑이 편을 들지 뭡니까. "사람들은 우리 소나무를 때리고 꺾고 자기네 마음대로 하다가 나중에는 통째로 베어 버린다. 그러므로 사람이 나쁘다." 나그네는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려는데, 때마침 토끼 한 마리가 지나갔습니다. 둘은 마지막으로 토끼한테 물어 보았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둘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던 토끼가 호랑이를 보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너를 구해 주기 전에 너는 어 떤 처지에 있었더냐?" 호랑이가 대답합니다. "아, 저기 있는 구덩이에 들어가 있었지 뭐." 호랑이의 대답을 듣자 "그래?" 하고 토끼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현장 검증을 해 봐야 되겠다. 그 구덩이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고 있었더냐? 한번 그 실연을 해 보아라." 호랑이는 함정으로 다시 뛰어 들어가 "요렇게 하고 있었단 말이야" 하고 토끼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마침내 토끼는 호랑이를 내려다보며 판결을 내렸습니다. "너는 거기서 좀더 고생을 하다가 죽어야 되겠다!"----은혜를 모르는 자는 자유를 누릴 권리가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가르쳐 주는 민담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윤리는 은총적 윤리라고 합니다. 기독교 윤리의 규범을 한번 간결하게 분석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가령 사랑의 문제를 놓고 보더라도 "사랑은 귀한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철학입니다. "사랑하라" 하고 명령을 한다면 이것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하고 할 때, 이것이 종교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에게 거듭거듭 말씀하고 증거하고 해설해 주고, 깨달아 알 때까지 이것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합니다.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 링컨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목자는 양의 목을 물고 가는 이리를 쫓아 버렸다. 양은 제 생명을 구해 준 목자를 해방자라 부르는데, 이리는 목자를 가리켜 자기의 자유를 빼앗은 파괴자라고 부른다. 양과 이리가 갖고 있는 자유의 개념이 서로 다른 것이다"----이런 이야기입니다. 자유라는 것이 무 엇입니까? 루스벨트는 1941년에 저 유명한 네 가지의 자유를 천명하였습니다. 언론의 자유, 신앙의 자유, 그리고 궁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경제적 자유와, 공포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정치적 자유---이 네 가지 자유를 누려야만 진정한 자유라고 말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자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종 된다고 하는 것, 노예 된다고 하는 것도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선 정치적인 노예, 사회적인 노예가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격이 말하고 있는 도덕적인 노예입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 됩니다. 이래서 죄인은 노예입니다. 죄인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양심의 자유도 없고 사회적인 자유도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혜의 자유도 없습니다. 세 번째는 율법의 노예입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이 없는 자가 율법의 노예입니다. 죄를 지은 자는 형벌 의식에 매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무서운 율법의 속박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절망을 안겨 주고, 교만의 원인이 되기도 하며, 반항적이고 극악한 인간을 만들기도 합니다.

율법의 노예에 대하여 성경은 매우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로는 사랑의 노예, 자유의 노예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스스로 자유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하여 결코 어려운 조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가령 어느 정도의 선행을 해야 한다든가, 어느 정도의 구제를 해야 한다든가, 혹은 금욕 생활을 한다든가, 고행을 해야 한다든가,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한다든가 하는 규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오히려 새로운 은총적 윤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들이 스스로 자행하는 자유를 위한 투쟁을 말해 주는 투쟁사가 아닙니다. 자유를 위한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기술해 주는 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은 은총을 설명해 주는 증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자유케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란 무엇인가? 그 자유를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이것을 계속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생각해 봅시다.

성경에서 속박과 자유를 말하게 되면 먼저 출애굽 사건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계시적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부터 구속함을 받는 출애굽이야말로 자유에로의 하나님 은총의 결정적 계시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미 애굽에 있던 요셉까지 야곱의 혈속 70인은 당초 바로 왕으로부터 VIP(귀빈) 대접을 받습니다. 특별히 고센 땅에서 특권을 누리며 귀족의 예우를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생존해 있는 동안 요셉을 우대하던 힉소스 왕조가 무혈 쿠데타로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 서고부터는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학대를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끝내 애굽의 노예로 전락하여 무진 고생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제 성경은 하나님께서 저러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자유케 하셨는지, 어떻게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셨는지를 누누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가 창조적이요 주도적인 사역이었음을 문자 그대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절대로 스스로는 자유할 수 없는 존재요, 그런 처지였습니다. 그대로 두면 영구히 노예 처지로 끝나고 말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점을 분명히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 인간은 전적인 타락---완전히 죄와 사단의 노예가 된 상태로부터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유케 하시는 역사(役事)의 과정은 그 신학적 의미가 네 가지 차원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실제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잊어버리고 있는 사건 하나가 있습니다. 출애굽의 제 1 장은 막바로 고된 노예 생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마는 막바지에 이르러 더더욱 혹심한 노예 생활을 합니다. 그들은 흙을 이기고 짚도 공급받지 못한 채 매를 맞아 가면서 벽돌을 구웠고, 세계 7 대 불가사의의 하나라고 하는 피라밋 건축에 동원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역을 치르면서도 이스라엘은 그 자손이 날로 창대해 갔습니다. 애굽은 이러한 이스라엘 때문에 근심하던 나머지 히브리 산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신생아가 아들이면 다 죽이도록 할만큼 핍박을 가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출애굽 바로 직전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 생활치고도 더는 상상을 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한 고역을 치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출애굽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런 참경(慘境)에서야 자유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먹고산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님을, 그런 가운데에서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해방이 되어야 한다고,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할만큼 자유의 고귀함을 거기서부터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샛말로 하 면 이른바 자유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사실 자유 의식은 쉽사리 가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란 노예 생활을 하면서도 먹고 살 만하면 그대로 노예화하고 마는 속성이 있습니다. 노예 체질이 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주인에게 복종함으로써 얻어지는 편안한 생활에 길들여져, 자유라는 것에 대해서는 도무지 매력도 흥미도 느끼지 못하며 그저 처해진 현실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무섭고 극심한 학대를 받으면 비로소 살아도 죽어도 자유함을 얻어야 되겠다고 해방에로의 올바른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배고플 때에는 코가 예민해지지만, 반대로 배가 부르면 후각(嗅覺)이 둔해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가난한 사람이 정의감에 강하고 무엇에건 민감하게 반응을 합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야 세상일이 다 그렇고 그런 것이 아니냐며 대범하게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어도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좀처럼 참아 내지를 못합니다. 자유에로의 열망이 아주 민감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십시오. 일본 사람들에게 짓눌려 고생을 할 때에 별다른 의식도 없이 일본 사람들 편에 붙어서 적당히 살던 사람들은 해방된 다음에도 해방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조금 어려운 일만 있으면 "그 때가 좋았지" 하고 일본 사람들에게 눌려 지내던 때를 속도 없이 그리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곧 자유 의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일제 때에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 가운데에도 그런 분이 계십니다. 박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일제 말년에 7년 동안 감옥에서 고생을 했는데, 그분은 자신의 복부(腹部) 에다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놓아서 한때는 그 사진이 온 세계에 알려질 만큼 유명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이분을 고문하면서 불에 달군 인두로 배를 지졌습니다. 그래서 배가 온통 만신창이가 된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일제 때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매맞고 감옥에서 고생하던 분들은 해방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고생을 한 사람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해방된 것, 자유 얻은 것이 좋습니다. 모진 고생을 겪을수록 자유의 진가가 더 절실하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렇게 고생을 시켜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광야에 나왔을 때,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니까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어" 하고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홍해를 건넜으니 이젠 죽어도 좋아"라고 말했어야 옳습니다. 그렇게 말할 때 비로소 그들은 참으로 자유할 권리를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무서운 고난---이것이 출애굽의 제 1장이라면 그 다음은 기적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를 위해서 스스로 한 일은 한가지도 없습니다. 출애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도 독자적인 역사(役事)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내려진 열 가지 재앙, 갈라진 홍해, 그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유---이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루신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기적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을 성경은 명백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자유케 하시는 역사(役事)의 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세 번째 의미는 출애굽이 40년에 걸친 긴 역사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곧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무려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여기에 진정한 출애굽의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애굽에서 배운 우상 숭배, 그 좋지 못한 문화, 그 모든 노예적 생리 구조와 잘못된 질서, 잘못된 신앙을 광야 생활 40년이라는 길고도 넓은 학습장에서 모두 고치고 온전한 출애굽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기 직전, 그 때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이 한창 극에 달하여 교회에서 설교는 물론 찬송가까지 일본말로만 부르게 하는가 하면, 이 찬송은 괜찮다, 저 찬송은 못 부른다 하고 여러 모로 제재를 가해 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모진 핍박을 받다가 해방이 되었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은 해방과 함께 이제 비로소 우리말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자 너무나도 기쁘고 감격한 나머지 교인들 앞에서 인사말을 한 마디 한다는 것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제부터는 일본말 앗사리하지 맙시다." '앗사리'는 일본말이 아닙니까?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해방은 되었으나 이미 뿌리깊어진 일본 문화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일본말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일본인 같은 발상(發想), 일본인 같은 행동이 자연스럽게 표출됩니다. 어는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은 이런 말을 다 하더군요. "한국 민족은 분열이 심합니다." 한민족이 분열이 심하다고요? 이것은 누가 가르쳐 준 사상입니까?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들의 단합을 두려워하여 이간시키느라고 만들어 낸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을 그대로 배워 가지고 그대로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의 잔재, 그 식민지 통치하에서의 노예 근성---이것이 완전히 뿌리뽑히려면 앞으로도 수많은 세월이 더 흘러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일본에 갔을 때입니다. 저는 한국 자동차가 일본의 거리에 굴러다니는 것을 보고 무척 기뻤습니다. 그 때 함께 있던 일본인들의 이야기가, 처음에는 한국에서 자동차를 만든다고 할 때 그래봐야 자기 나라 부속품들을 가져다가 조립이나 하는 정도겠지 하고 비웃었더랍니다. 그런데 요즘은 거꾸로 한국에서 부속품을 가져다가 일본에서 조립을 하는 실정이라지 뭡니까.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우리 나라도 이제야 독립이 되어 가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경제적 문화적 독립, 신앙적인 자유, 해방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이라는 하나의 사건에 40년이라는 긴 시간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유케 하시는 역사(役事)의 네 번째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또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유란, 그 절대적 가치 그 최고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그 고통과 그 대가와 그 아픔을 기억치 못하는 자는 자유할 권리가 없습니다. 자유를 얻더라도 곧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 나라가 인구의 약 70%가 6․25를 모르는 세대라고 합니다. 또 80%는 해방의 기쁨을 모릅니다. 언젠가는 그 80%가 90%, 100%라는 수치로 나타날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슬 픈 일입니다. 뼈아픈 과거의 역사, 그 소중한 경험이 자꾸 잊혀져 가고, 퇴색되어 가고, 사라져 간다는 것은 크나큰 손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20%의 세대가 겪었던 지난날의 그 귀중한 고통의 역사는 어떻게 해야 후손들에게 전승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길이길이 기억될 수 있겠습니까? 과거의 고통과, 그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유월절을 지켜라. 그래서 길이길이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여라. 그래야 네가 자유할 수 있겠다." 신명기 5장 6절 이하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십계명 주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귀한 복음을 주시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나는 너희를 해방시킨 여호와다. 그런고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그런고로 우상을 섬기지 마라.

그런고로 안식일을 지키라---이 말씀에서 대전제가 되는 것은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그 감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그 감격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매우 아름답고 재미있는 말씀이 거기에 있습니다. '너희는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이삭을 남겨 놓아라. 만일 거기에 한 단을 놓고 돌아왔거든 도로 가서 가져올 생각을 말아라. 배고픈 나그네를 위해서 버려 두어라. 감람나무 열매를 딸 때에 깨끗이 따지 말고 좀 남겨 두어라.

불쌍한 사람들이 따가도록. 포도를 딸 때에도 말끔히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고부들을 위해 남겨 두어라. 너희가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너희가 남의 상에서 얻어먹고 살지 않았느냐? 주인이 남기지 않으면 너희는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지 않았더냐? 그런고로 너희도 남겨라. 다른 사람들이 그 남은 것으로 배를 부르게 할 수 있도록. 너희는 빌어먹고 살지 않았느냐? 그런고로 빌어먹는 사람들에게 후하게 하라. 너희가 남에게 억울함을 당하지 않았느냐? 그런고로 너희는 남을 억울하게 하지 말아라. 또 네가 가난할 때에 학대를 받지 않았느냐? 그런고로 이제 너는 남을 학대하지 말아라. 네가 종 되었을 때에 얼마나 뼈아픈 고통을 겪었느냐? 그런고로 이제 너는 그 일을 기억하여 네 종을 해방하라.' 신명기 5장 14-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이 되거든 종을 쉬게 하라. 너희도 종 되었었으니 이제 너희는 종을 속박하지 말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그 감격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1945년 10월, 히틀러 치하에서 고난을 당하던 교회가 해방을 맞이하자, 그들은 그동안 세속화된 신앙을 정비하면서 하나님 앞에 참회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슈투트가르트 선언문'을 만들어 공포했습니다. 그 선언문은 곧 회개의 고백이었습니다. 첫째, 더욱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지 못한 죄를 자복합니다. 둘째, 더 진실하게 기도하지 못한 죄를 자복합니다. 셋째, 더 감사와 기쁨에 넘쳐 살지 못한 죄를 자복합니다. 넷째, 더 뜨겁게 사랑하지 못한 죄를 회개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 같은 회개를 해야 할 것입니다. 자유와 해방, 해 방과 독립은 같은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해방되었다고 해서 자유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자유인이 되고, 계명을 지킬 때에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때에 자유의 참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유는 얻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렵습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유를 즐길 줄 알아야 하고, 자유를 깨달아야 하고, 자유를 베풀어야 합니다.

또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들에게 자유를 베풀어야 합니다. 또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들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은총을 기억하며 종에서 자유인이 되었을 때의 감격을 잊지 않을 때에 우리는 세상과 죄악과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 말씀을 마음속에 되새기십시오---"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  

종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신명기 24장 17절~22절)

 

 

사람이나 짐승이나 은혜를 모르면 자유를 누릴 권리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마는, 우리나라의 옛 민담(民譚)에 은혜를 저버린 호랑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산길을 가던 나그네가 함정에 빠져 고생하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했습니다. 호랑이는 나그네를 보자 살려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나그네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호랑이를 살려 주었습니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호랑이가 숨을 돌리더니, 자기를 살려 준 고마운 나그네한테 뜻밖의 요구를 합니다. "내가 여러 날을 굶어서 몹시 시장하니 부득이 너를 잡아먹어야 되겠다." 나그네는 몹시도 억울하고 분했습니다.

그래서 재판을 받아 보자고 했습니다. 호랑이도 찬성을 하므로, 둘은 먼저 소한테 물어 보았습니다. "나는 배가 고프니 이 사람을 잡아먹어야 되겠다." 호랑이가 주장하자 "나는 억울하다" 하고 나그네가 반박했습니다. 소는 판결을 내립니다. "사람이 나쁘다. 사람들은 모두 우리를 실컷 부려먹고 나서 끝내는 잡아먹기까지 하지 않는가." 나그네와 호랑이는 다시 소나무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나무도 호랑이 편을 들지 뭡니까. "사람들은 우리 소나무를 때리고 꺾고 자기네 마음대로 하다가 나중에는 통째로 베어 버린다. 그러므로 사람이 나쁘다." 나그네는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려는데, 때마침 토끼 한 마리가 지나갔습니다. 둘은 마지막으로 토끼한테 물어 보았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둘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던 토끼가 호랑이를 보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너를 구해 주기 전에 너는 어 떤 처지에 있었더냐?" 호랑이가 대답합니다. "아, 저기 있는 구덩이에 들어가 있었지 뭐." 호랑이의 대답을 듣자 "그래?" 하고 토끼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현장 검증을 해 봐야 되겠다. 그 구덩이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고 있었더냐? 한번 그 실연을 해 보아라." 호랑이는 함정으로 다시 뛰어 들어가 "요렇게 하고 있었단 말이야" 하고 토끼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마침내 토끼는 호랑이를 내려다보며 판결을 내렸습니다. "너는 거기서 좀더 고생을 하다가 죽어야 되겠다!"----은혜를 모르는 자는 자유를 누릴 권리가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가르쳐 주는 민담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윤리는 은총적 윤리라고 합니다. 기독교 윤리의 규범을 한번 간결하게 분석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가령 사랑의 문제를 놓고 보더라도 "사랑은 귀한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철학입니다. "사랑하라" 하고 명령을 한다면 이것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하고 할 때, 이것이 종교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에게 거듭거듭 말씀하고 증거하고 해설해 주고, 깨달아 알 때까지 이것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합니다.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 링컨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목자는 양의 목을 물고 가는 이리를 쫓아 버렸다. 양은 제 생명을 구해 준 목자를 해방자라 부르는데, 이리는 목자를 가리켜 자기의 자유를 빼앗은 파괴자라고 부른다. 양과 이리가 갖고 있는 자유의 개념이 서로 다른 것이다"----이런 이야기입니다. 자유라는 것이 무 엇입니까? 루스벨트는 1941년에 저 유명한 네 가지의 자유를 천명하였습니다. 언론의 자유, 신앙의 자유, 그리고 궁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경제적 자유와, 공포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정치적 자유---이 네 가지 자유를 누려야만 진정한 자유라고 말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자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종 된다고 하는 것, 노예 된다고 하는 것도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선 정치적인 노예, 사회적인 노예가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격이 말하고 있는 도덕적인 노예입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 됩니다. 이래서 죄인은 노예입니다. 죄인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양심의 자유도 없고 사회적인 자유도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혜의 자유도 없습니다. 세 번째는 율법의 노예입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이 없는 자가 율법의 노예입니다. 죄를 지은 자는 형벌 의식에 매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무서운 율법의 속박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절망을 안겨 주고, 교만의 원인이 되기도 하며, 반항적이고 극악한 인간을 만들기도 합니다.

율법의 노예에 대하여 성경은 매우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로는 사랑의 노예, 자유의 노예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스스로 자유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하여 결코 어려운 조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가령 어느 정도의 선행을 해야 한다든가, 어느 정도의 구제를 해야 한다든가, 혹은 금욕 생활을 한다든가, 고행을 해야 한다든가,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한다든가 하는 규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오히려 새로운 은총적 윤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들이 스스로 자행하는 자유를 위한 투쟁을 말해 주는 투쟁사가 아닙니다. 자유를 위한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기술해 주는 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은 은총을 설명해 주는 증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자유케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란 무엇인가? 그 자유를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이것을 계속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생각해 봅시다.

성경에서 속박과 자유를 말하게 되면 먼저 출애굽 사건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계시적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부터 구속함을 받는 출애굽이야말로 자유에로의 하나님 은총의 결정적 계시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미 애굽에 있던 요셉까지 야곱의 혈속 70인은 당초 바로 왕으로부터 VIP(귀빈) 대접을 받습니다. 특별히 고센 땅에서 특권을 누리며 귀족의 예우를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생존해 있는 동안 요셉을 우대하던 힉소스 왕조가 무혈 쿠데타로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 서고부터는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학대를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끝내 애굽의 노예로 전락하여 무진 고생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제 성경은 하나님께서 저러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자유케 하셨는지, 어떻게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셨는지를 누누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가 창조적이요 주도적인 사역이었음을 문자 그대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절대로 스스로는 자유할 수 없는 존재요, 그런 처지였습니다. 그대로 두면 영구히 노예 처지로 끝나고 말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점을 분명히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 인간은 전적인 타락---완전히 죄와 사단의 노예가 된 상태로부터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유케 하시는 역사(役事)의 과정은 그 신학적 의미가 네 가지 차원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실제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잊어버리고 있는 사건 하나가 있습니다. 출애굽의 제 1 장은 막바로 고된 노예 생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마는 막바지에 이르러 더더욱 혹심한 노예 생활을 합니다. 그들은 흙을 이기고 짚도 공급받지 못한 채 매를 맞아 가면서 벽돌을 구웠고, 세계 7 대 불가사의의 하나라고 하는 피라밋 건축에 동원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역을 치르면서도 이스라엘은 그 자손이 날로 창대해 갔습니다. 애굽은 이러한 이스라엘 때문에 근심하던 나머지 히브리 산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신생아가 아들이면 다 죽이도록 할만큼 핍박을 가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출애굽 바로 직전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 생활치고도 더는 상상을 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한 고역을 치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출애굽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런 참경(慘境)에서야 자유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먹고산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님을, 그런 가운데에서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해방이 되어야 한다고,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할만큼 자유의 고귀함을 거기서부터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샛말로 하 면 이른바 자유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사실 자유 의식은 쉽사리 가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란 노예 생활을 하면서도 먹고 살 만하면 그대로 노예화하고 마는 속성이 있습니다. 노예 체질이 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주인에게 복종함으로써 얻어지는 편안한 생활에 길들여져, 자유라는 것에 대해서는 도무지 매력도 흥미도 느끼지 못하며 그저 처해진 현실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무섭고 극심한 학대를 받으면 비로소 살아도 죽어도 자유함을 얻어야 되겠다고 해방에로의 올바른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배고플 때에는 코가 예민해지지만, 반대로 배가 부르면 후각(嗅覺)이 둔해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가난한 사람이 정의감에 강하고 무엇에건 민감하게 반응을 합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야 세상일이 다 그렇고 그런 것이 아니냐며 대범하게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어도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좀처럼 참아 내지를 못합니다. 자유에로의 열망이 아주 민감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십시오. 일본 사람들에게 짓눌려 고생을 할 때에 별다른 의식도 없이 일본 사람들 편에 붙어서 적당히 살던 사람들은 해방된 다음에도 해방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조금 어려운 일만 있으면 "그 때가 좋았지" 하고 일본 사람들에게 눌려 지내던 때를 속도 없이 그리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곧 자유 의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일제 때에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 가운데에도 그런 분이 계십니다. 박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일제 말년에 7년 동안 감옥에서 고생을 했는데, 그분은 자신의 복부(腹部) 에다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놓아서 한때는 그 사진이 온 세계에 알려질 만큼 유명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이분을 고문하면서 불에 달군 인두로 배를 지졌습니다. 그래서 배가 온통 만신창이가 된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일제 때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매맞고 감옥에서 고생하던 분들은 해방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고생을 한 사람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해방된 것, 자유 얻은 것이 좋습니다. 모진 고생을 겪을수록 자유의 진가가 더 절실하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렇게 고생을 시켜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광야에 나왔을 때,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니까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어" 하고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홍해를 건넜으니 이젠 죽어도 좋아"라고 말했어야 옳습니다. 그렇게 말할 때 비로소 그들은 참으로 자유할 권리를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무서운 고난---이것이 출애굽의 제 1장이라면 그 다음은 기적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를 위해서 스스로 한 일은 한가지도 없습니다. 출애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도 독자적인 역사(役事)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내려진 열 가지 재앙, 갈라진 홍해, 그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유---이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루신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기적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을 성경은 명백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자유케 하시는 역사(役事)의 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세 번째 의미는 출애굽이 40년에 걸친 긴 역사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곧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무려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여기에 진정한 출애굽의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애굽에서 배운 우상 숭배, 그 좋지 못한 문화, 그 모든 노예적 생리 구조와 잘못된 질서, 잘못된 신앙을 광야 생활 40년이라는 길고도 넓은 학습장에서 모두 고치고 온전한 출애굽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기 직전, 그 때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이 한창 극에 달하여 교회에서 설교는 물론 찬송가까지 일본말로만 부르게 하는가 하면, 이 찬송은 괜찮다, 저 찬송은 못 부른다 하고 여러 모로 제재를 가해 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모진 핍박을 받다가 해방이 되었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은 해방과 함께 이제 비로소 우리말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자 너무나도 기쁘고 감격한 나머지 교인들 앞에서 인사말을 한 마디 한다는 것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제부터는 일본말 앗사리하지 맙시다." '앗사리'는 일본말이 아닙니까?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해방은 되었으나 이미 뿌리깊어진 일본 문화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일본말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일본인 같은 발상(發想), 일본인 같은 행동이 자연스럽게 표출됩니다. 어는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은 이런 말을 다 하더군요. "한국 민족은 분열이 심합니다." 한민족이 분열이 심하다고요? 이것은 누가 가르쳐 준 사상입니까?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들의 단합을 두려워하여 이간시키느라고 만들어 낸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을 그대로 배워 가지고 그대로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의 잔재, 그 식민지 통치하에서의 노예 근성---이것이 완전히 뿌리뽑히려면 앞으로도 수많은 세월이 더 흘러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일본에 갔을 때입니다. 저는 한국 자동차가 일본의 거리에 굴러다니는 것을 보고 무척 기뻤습니다. 그 때 함께 있던 일본인들의 이야기가, 처음에는 한국에서 자동차를 만든다고 할 때 그래봐야 자기 나라 부속품들을 가져다가 조립이나 하는 정도겠지 하고 비웃었더랍니다. 그런데 요즘은 거꾸로 한국에서 부속품을 가져다가 일본에서 조립을 하는 실정이라지 뭡니까.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우리 나라도 이제야 독립이 되어 가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경제적 문화적 독립, 신앙적인 자유, 해방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이라는 하나의 사건에 40년이라는 긴 시간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유케 하시는 역사(役事)의 네 번째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또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유란, 그 절대적 가치 그 최고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그 고통과 그 대가와 그 아픔을 기억치 못하는 자는 자유할 권리가 없습니다. 자유를 얻더라도 곧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 나라가 인구의 약 70%가 6․25를 모르는 세대라고 합니다. 또 80%는 해방의 기쁨을 모릅니다. 언젠가는 그 80%가 90%, 100%라는 수치로 나타날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슬 픈 일입니다. 뼈아픈 과거의 역사, 그 소중한 경험이 자꾸 잊혀져 가고, 퇴색되어 가고, 사라져 간다는 것은 크나큰 손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20%의 세대가 겪었던 지난날의 그 귀중한 고통의 역사는 어떻게 해야 후손들에게 전승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길이길이 기억될 수 있겠습니까? 과거의 고통과, 그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유월절을 지켜라. 그래서 길이길이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여라. 그래야 네가 자유할 수 있겠다." 신명기 5장 6절 이하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십계명 주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귀한 복음을 주시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나는 너희를 해방시킨 여호와다. 그런고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그런고로 우상을 섬기지 마라.

그런고로 안식일을 지키라---이 말씀에서 대전제가 되는 것은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그 감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그 감격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매우 아름답고 재미있는 말씀이 거기에 있습니다. '너희는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이삭을 남겨 놓아라. 만일 거기에 한 단을 놓고 돌아왔거든 도로 가서 가져올 생각을 말아라. 배고픈 나그네를 위해서 버려 두어라. 감람나무 열매를 딸 때에 깨끗이 따지 말고 좀 남겨 두어라.

불쌍한 사람들이 따가도록. 포도를 딸 때에도 말끔히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고부들을 위해 남겨 두어라. 너희가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너희가 남의 상에서 얻어먹고 살지 않았느냐? 주인이 남기지 않으면 너희는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지 않았더냐? 그런고로 너희도 남겨라. 다른 사람들이 그 남은 것으로 배를 부르게 할 수 있도록. 너희는 빌어먹고 살지 않았느냐? 그런고로 빌어먹는 사람들에게 후하게 하라. 너희가 남에게 억울함을 당하지 않았느냐? 그런고로 너희는 남을 억울하게 하지 말아라. 또 네가 가난할 때에 학대를 받지 않았느냐? 그런고로 이제 너는 남을 학대하지 말아라. 네가 종 되었을 때에 얼마나 뼈아픈 고통을 겪었느냐? 그런고로 이제 너는 그 일을 기억하여 네 종을 해방하라.' 신명기 5장 14-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이 되거든 종을 쉬게 하라. 너희도 종 되었었으니 이제 너희는 종을 속박하지 말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그 감격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1945년 10월, 히틀러 치하에서 고난을 당하던 교회가 해방을 맞이하자, 그들은 그동안 세속화된 신앙을 정비하면서 하나님 앞에 참회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슈투트가르트 선언문'을 만들어 공포했습니다. 그 선언문은 곧 회개의 고백이었습니다. 첫째, 더욱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지 못한 죄를 자복합니다. 둘째, 더 진실하게 기도하지 못한 죄를 자복합니다. 셋째, 더 감사와 기쁨에 넘쳐 살지 못한 죄를 자복합니다. 넷째, 더 뜨겁게 사랑하지 못한 죄를 회개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 같은 회개를 해야 할 것입니다. 자유와 해방, 해 방과 독립은 같은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해방되었다고 해서 자유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자유인이 되고, 계명을 지킬 때에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때에 자유의 참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유는 얻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렵습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유를 즐길 줄 알아야 하고, 자유를 깨달아야 하고, 자유를 베풀어야 합니다.

또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들에게 자유를 베풀어야 합니다. 또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들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은총을 기억하며 종에서 자유인이 되었을 때의 감격을 잊지 않을 때에 우리는 세상과 죄악과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 말씀을 마음속에 되새기십시오---"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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