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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의 탕자(누가복음 15:22-3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람들은 대체로 극적인 변화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죽을 뻔하고 살아야 하는 재미가 있고, 다 잃어버렸다가 얻어야 무엇인가 얻었다는 새로운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역시 건강할 때는 별로 건강의 고마움을 생각하기 어렵고 입원하고 병원에서 나와야 비로소 하루 하루의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됩니다. 잃어버리고야 가치를 알고, 끝난 후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는 어리석음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굉장한 일, 깜짝 놀라는 일이 일어나야 정신을 차리게 되고 무엇인가 깨달음을 갖는 것 같습니다. 평범한 가운데 조용한 중에서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 것임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무사고와 안녕, 평안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 첫 탕자의 동생은 극적인 변화를 가진 사람입니다. 일단 집을 나갔다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나서야 다시 돌아옵니다. 어떻게 보면 생활 자체에 획이 분명합니다. 새 사람이 되고, 완전히 중생하고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은 집을 나가지도 않았고 오랫동안 사랑하는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집안 일을 돌보며 평범하게 살아 왔습니다. 얼핏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 마음속을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살펴보면 또 하나의 다른 탕자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갔다가 돌아온 동생보다 조금도 더 나을 것이 없는 형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더 구제불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동생을 회심자라고 한다면 형은 모태적부터 신앙을 가진 자로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가끔 우리들도 모태적부터 예수를 믿었다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무엇을 알고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사실은 이렇게 자기를 의식도 하지 못했을 때부터 예수를 믿었다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많습니다.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니고 그저 습관적으로 믿어 왔기 때문입니다. 큰아들은 몸은 비록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밖에 있었기에 또 하나의 다른 탕자로 보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슬프게 했고 스스로 고독해 했으며, 방황했고, 불평하며 원망도 했습니다. 오히려 집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뉘우침도 회개도 깨달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형은 은혜를 율법으로 소화한 사람으로 은혜의 관계를 율법의 관계로 이해한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달려들면서 하는 말이 "내가 여러 해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명을 어긴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명을 어긴 것이 없다라는 말 그대로를 한 번 생각해봅시다. 여러분 아들, 딸이 여러분께 "나는 부모의 명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형식적으로 순종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순종이라는 것 뒤에 대단한 위험한 저항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20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율법을 아느냐 하고 물으시니 이 젊은 율법사는 어릴 적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 율법사가 "어떻게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있습니까? 도저히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면 길이 있었을 텐데 "어릴 적부터 다 지켰습니다. 영생을 어떻게 얻을까요?" 하고 길을 막아버렸습니다. 율법을 다 지킨 자가 어째서 또 영생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착실한 것 같으나 자기 의에 빠진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예수 믿으라고 권고하면 "네, 나 같은 죄인이 빨리 구원받아야 하겠는데"하고 대답하면 길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지성인은 "예수 믿어봐야 별 수 있나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요? 교회에 가 보니 울고불고 하는데 죄인들이 많은가 봐요, 나야 뭐 깨끗한 사람이죠"하는 분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상대적인 의의, 형식적인 의의, 어디까지 병이 들었는지 자신이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큰아들은 명을 어긴 것이 없다고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아버지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나타난 행위로는 타당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내면적인 생활에서는 얼마나 부족하고 불효한 아들이었나를 그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높이 칭찬할는지 모릅니다만 그러나 그는 자기만이 아는 깊은 고민이 없는 메마른 사람입니다. 내가 부족함을 알고, 죄인임을 알고 내적인 고민과 심각성이 있어야 하겠는데 이런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괜찮다는 의식뿐이었습니다. 이 교만 때문에 복음의 능력이 있을 수 없고, 성령의 감화가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내적인 생활의 깊은 관심이 없기 때문에 위선자가 되었고, 스스로 소외당했고, 마침내 고독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리고 아버지는 나를 즐겁게 해준 적이 없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나를 위해 잡은 적이 없다고 불평을 합니다. 염소 새끼를 잡고 파티를 열어야 부모 사랑을 받은 것입니까? 나는 수고 많이 했고 의롭게 살았는데 받은 것이 없다는 불만은 무서운 것입니다.
은혜의 세계관으로 보면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받은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잃어버린 자는 나만이 은혜에서 소외된 것 같고, 나만이 버림받은 것 같습니다. 은혜 안에 들어가면 나만이 축복 받았고,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만이 입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 농부가 한 여름 동안 수고하고 가을에 추수를 한 다음, 내가 한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한 것이 무엇인가 하고 한 번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햇빛과 비나 주셨을 뿐 나머지는 다 내가 한 것같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좀더 깊이 생각해보니 하나님은 바람도 불게 하셨고, 내게 건강도 주셨고, 여러 가지가 자꾸만 나타났습니다. 결론은 내가 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스스로 인정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한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기를 크게 보는 동안은 은혜는 작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아무 것도 받은 것이 없는 자는 내가 너무 커졌기 때문입니다. 여기 큰아들은 정말 불쌍하게 아무 것도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것은 다 네 것인데 무엇을 못 받았다고 하느냐, 아버지의 가슴은 아팠습니다.
일생 동안 불구로 얻어먹은 거지가 추수감사절날 상당한 액수의 돈을 가지고 교회에 왔었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얻어먹은 신세에 무슨 감사 헌금이냐고 물었습니다. "나를 업신여기지 마시오, 나도 하루 세끼 먹었답니다." 어쨌든 하루 세끼 먹었으니 감사하는 마음은 당신들이나 나나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여러분, 받은 것이 없습니까? 여태껏 먹었으니 살아있고, 입었으니 살아있는 것 아닙니까? 은혜를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율법적인 관계에서 은혜의 차원으로 올라와 세상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이해하고, 자기를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또 큰아들은 경제 관념이 분명하여 살림 계산에 머리가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돈에 대한 관심만 있었기에 얼마나 벌었고, 얼마나 잃었냐에 계산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규례와 법도에 보면 아들이 둘일 경우, 형은 유산의 ⅔를 갖고 동생은 ⅓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동생은 아버지가 세상도 떠나시기 전에 미리 유산을 챙겨 ⅓을 가지고 방탕하고 돌아왔습니다.
지금 현재 아버지의 재산은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만 아버지의 것이지 돌아가시기만 하면 이 재산은 모두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왔으니 오늘 잔치 비용부터 시작하여 앞으로 동생이 쓰는 돈은, 즉 내 돈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의 계산이 나오는 것입니다.
머리가 이렇게 돌아가니 동생이 돌아온 것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창기와 함께 살림을 먹어버린 "당신의 아들"이 돌아왔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쓴 아들이나, 아버지가 죽기를 기다려 유산이 자기의 것으로 되기를 고대하는 아들이나 누가 더 낫단 말입니까? 탕자는 마찬가지입니다. 집을 나가지 않았다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이렇게 돈을 앞세우고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면 우리의 이성은 마비되기 쉬운 것입니다.
어떤 배가 파산이 되어 배에 탔던 사람들이 조그마한 구명선에 올라타게 되었는데, 구명선에 도달하려면 가느다란 줄을 타고 가야만 했습니다. 한 사람씩 건너가는데 제일 마지막까지 타지 못한 한 사람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금덩어리를 많이 갖고 있었기에 금을 두고는 도저히 구명선을 탈수가 없어 금덩어리를 자기 허리에다 차고 건너가게 됩니다. 무거운 몸으로 가느다란 줄을 잡고 건너가는데 가운데쯤 오자 너무 무거워 그만 줄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중요합니까?
아버지는 말씀하시기를 이 아들은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가 얻었고 더군다나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생명이 제일 중요하기에 재산 없어진 것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건강하게 돌아온 것에 만족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형은 지금 내 재산 축난다는 계산이 앞섰기에 동생을 영접하는 것에 불만이 대단했습니다. 무엇이 우선이어야 합니까?
우리는 생명 중심, 은혜 중심의 세계관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낭비성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아까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형은 돈만 생각하고 잃어버린 것만 생각했으므로 얻은 귀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강퍅해졌습니다. 그는 형제애를 잃고 있었습니다. 30절에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당신의 아들이란 표현에서 마치 아버지의 아들일 뿐 내 동생이라는 개념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아버지는 32절에서 "내 동생이 죽었다가 다시 살지 않았느냐?"하시며 네 동생이라는 형제애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면 내 동생이지, 어째서 당산의 아들이란 말이 나옵니까? 동양의 윤리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버릇이었습니다.
룻기 1:16에서 룻은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아버지의 아들이면 내 동생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잃어버리고 마음 아파하는 그 아픈 마음을 큰아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동생이 집을 나갔을 때 형으로서 마음이 아팠다면 다시 돌아올 때 기쁨을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그는 동생이 나갈 때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남의 아픔에 공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의 집에 불이 났어도 내 집이 아니면 괜찮고, 전쟁이 일어나도 우리나라가 아니면 괜찮습니까? 좁은 이 땅에 우리는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살아야 나도 살고, 그들이 평안해야 나도 평안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고통이 있다면 감히 아파하고, 남의 자식이 잘못되면 같이 걱정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간 자식이 돌아왔다면 같이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되고 슬픔은 나누면 나눌수록 줄어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고 이웃을 그리스도 한 형제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지구 안에 사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는,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재산이야 어떻게 되었든 죽었다고 생각한 동생이 돌아왔는데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사정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아버지의 아들도 아니요, 탕자의 형도 아닌 것입니다. 그는 비록 아버지의 집안에 살지만 고독하게 탕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와 나 사이에 은혜로운 관계를 맺고 그 은혜에 항상 감격하며 내 마음에는 비록 부족한 형제일지라도 서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넓은 마음으로 형제애를 베풀어야 아버지 집에 사는 자가 됩니다.
여러분, 집밖으로 나갔습니까? 돌아옵시다. 아버지의 넓은 품으로 돌아와서 탕자를 뜨거운 사랑 속에 안깁시다. 소를 잡고 잔치하며 낭비하면서까지 기뻐하는 아버지의 가슴으로 빨리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 오라, 아버지의 마음으로 돌아 오라, 형제의 사랑으로 돌아 오라, 그리할 때 하나님의 큰 기쁨과 축복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기도 : 아버지 하나님, 집 나간 탕자는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집에 있는 탕자는 돌아올 줄 몰랐습니다. 우리는 주의 전에 출입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있는 것 같으나 또 다른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아픔을 모르고 또한 주 앞에 나오는 자를 같은 형제로 영접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마음에서부터 집으로 돌아오고 아버지의 넓은 품안에 돌아오고 또 그 귀한 사랑으로 우리의 형제를 영접할 수 있는 새로운 은혜의 관계를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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