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살아남은 자의 슬픔
기업들이 '감원'이다 '정리해고'다 라며 구조조정에 나섰을 때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는 지금의 심정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아무말도 못하고 그냥 묵묵히 듣고 말았는데 여기 그 시를 올려놓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 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브레이트
2. 실컷 울고난 뒤의 평화
큰 깨달음이란 곧 큰 체념을 일컬음이다. 누구나 어린 날들을 기억할 것이다. 한바탕 속 시원히 큰 울음을 울고난 후, 마음 속에 오롯이 고여오던 평화를...
주위에 보면, 울다가 느닷없이 실성한 듯 큰 웃음을 웃어젖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한 인간이 큰 체념을 한 후, 모종의 절실한 깨달음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표임에 틀림없다.
-최동건의 《조금은 가난해도 좋다면》 중에서
* 눈물은 아픔을 씻어냅니다. 슬픔을, 상처를 녹여줍니다. 소설이나 명화(名畵)를 보고, 또는 타인의 죽음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자기 설움에 겨워 쏟아내는 눈물이기 쉽습니다. 울고싶거든 목놓아 실컷 우십시오. 그러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 올 것입니다. 눈물은 체념이 아니라 또다시 새로운 무지개를 펼쳐내는 마음의 정화수(淨化水)입니다.
3. 고뇌를 지나 환희에
베토벤은 어릴 때부터 음악의 천재로 인정받았다. 그는 빈에 유학해 정착한 후인 17,1 8세기경에는 피아니스트로서 또 작곡가로서 활약을 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도 많이 들었지만 그의 일생은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육체적으로 28세 때부터 청각을 잃었다.
가정적으로는 양자로 들인 동생이 불량자가 되어 말썽을 많이 피워 고생 을 했고, 또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그에게도 한때 사랑하는 여성이 있었으나 실연을 당해서 상처를 받았다.
그 중 가장 큰 고통은 청각을 잃은 것으로 이것은 음악가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한때 자살하려고 유서까지 써놓았으나 다행히 베토벤이 가진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오기와 플루타크가 쓴 <영웅전>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이 그의 마음을 돌이키게 해주었다.
"사람을 무언가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동안은 자살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는 생각을 고쳐먹고는 "제2 교향곡"(1802)부터 "제9 교향곡" 까지를 비롯해 많은 명곡을 세상에 내놓았다. 베토벤이 한 "고뇌를 지나 환희에"라는 말도 그의 처절한 인생 경험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4. 슬픔 극복 지혜
미국의 시인인 롱펠로는 어느날 아내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달려가보니 그녀는 촛불로 일을 하다가 실수해 옷에 불이 붙었고 심한 화상을 입었다. 결국 그녀는 그 화상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얼마동안 롱펠로는 그 때의 무서운 경험이 생각나 몸서리쳤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어린 자식 셋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슬픔을 초월하여 자식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노릇을 해야 했다. 그는 아이들 손을 잡고서 함께 공원을 걸었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같이 놀았다. 또 아이들을 위해서 단테의 ‘신곡’을 번역했다. 그는 이처럼 여러가지 일로 분주했기 때문에 자신의 비탄을 잊어버렸으며 마음의 평화를 회복했다. 대구 지하철 참사.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모든 국민이 슬픔에 잠겨 있다. 우리는 이 참사를 지혜를 모아 극복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예방을 해야 한다. 1년이 걸려도 2년이 걸려도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일에 몰두하여 이 슬픔을 극복해야 한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떠난 그들의 삶까지 우리가 살아야 한다. 하나님,우리가 일에 몰두하여 이 슬픔을 슬기롭게 극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최염순(카네기연구소장)
5. 내 슬픔 씻어줄 울음
누구나 맘껏 울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누구나 울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사람들은 흔히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바라지만 사실 나 자신을 위해서 진정 슬퍼하며 울어줄 수 있고 꼭 그래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겨 허둥대며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슬픔에 대해 울어줄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통곡의 시간은 치유의 질을 결정한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엔 자신이 스스로의 슬픔에 대해 울어주고 알아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야만 그 도움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전문가의 도움이 없인 자신의 슬픔을 표현할 수도 없고 달래줄 수도 없게 된다면 더욱더 그 사람은 전문가나 어떤 프로그램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 자신이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자신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는 한에서 어떤 도움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람들은 그런 차이를 모르고 있다. 상담과 심리치료에서 가장 심각한 경우는 울 수 없는 내담자이다. 어떤 충격적인 경험과 처절한 상처보다도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것을 지금까지 맘껏 표현하지 못했거나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우선적으로 이 내담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껏 울고 슬퍼할 수 있는 변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매우 처절한 경험과 상처라도 그것을 충분히 슬퍼할 수만 있다면 내면 깊숙한 곳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던 심각한 장애물도 제거되는 것이다. 여기서 ‘충분히 슬퍼함’은 오직 내담자 스스로가 그렇다고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게 ‘충분한 통곡의 시간’을 보내게 되면 마치 꽁꽁 얼어붙은 얼음덩어리가 녹아내리고 메말랐던 땅에 단비가 콸콸 쏟아지는 것같은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다.
/오제은 <천안대 상담학과교수>
6. 주님, 왜 우시나이까?
전도사 시절, 온 마을을 울리던 새벽 종소리는 나의 가슴을 울리는 하늘의 종소리였다. 어느 날 새벽 4시에 종을 치기 위하여 종 줄을 잡고 이렇게 기도 드렸다.
“주님, 이 마을 사람들을 구원하여 주소서. 어두움에 잠든 이 백성들의 잠을 깨우시고, 새벽을 알려 주소서. 멸망으로 달려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살려 주소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종 줄을 힘차게 당겼다. 그 순간 눈물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내리면서 내 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주님의 눈물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것이었다. 나는 종 줄을 놓고 땅에 엎드려 “주님, 왜 우시나이까? ”라고 물었다. 그때 “사랑하는 종아, 지금까지 네가 흘린 그토록 많은 눈물은 너의 눈물이 아니고, 내가 네 안에서 흘린 눈물이었다”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영이 이 비천한 종으로 하여금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을 알았고, 그 후에도 눈물은 샘물처럼 흘러내렸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던 그리스도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되었고, 나사로의 무덤에서 통분히 여기고 흘리시던 그 눈물이 내 눈에서 흐르기 시작했다. 십자가에서 인류 구원을 위해 흘리시던 눈물이 샘솟듯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로 제단을 적시고 고부 땅을 적셨다. 생각할수록 신기한 눈물이었다. 그 눈물은 헛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을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였다.
(눈물을 먹은 마음 / 이중표)
7. 슬픈 날을 맞이한 자들을 위한 기도
오! 하나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가 힘들고 슬프며 어려운 날이 될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자들과 하루 종일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야 할 자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자들, 슬픈 마음을 안고 밖에 나갔지만 집에 돌아와도 아무도 위로해 줄 사람이 없는 자들,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게 될 자들, 오늘 수술을 받아야 하거나 가까운 사람이 수술 받는 것을 지켜보아야 할 자들과 슬픈 소식을 듣게 될 자들, 하루 동안 실망스럽고 마음 아픈 일을 당하게 될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저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슬픔과 고통과 환난 가운데 있는 모든 자들이 당신 안에서 피난처와 용기를 발견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실질적인 도움을 찾게 하옵소서. 모든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윌리암 바클레이)
8. 어느 고추잠자리 이야기
옛날 어느 숲 속에 늘 하늘을 높이 날며 부족한 것 없이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는 고추잠자리가 있었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고추잠자리에게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와 형제, 가족 모두가 날아다니는 새에게 잡혀 먹혔어요. 그래서 이 고추잠자리는 너무 너무 슬펐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마음이 아파서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숲 속의 요정을 찾아가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정님, 저는 죽어야겠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마음이 아파 도저히 더 살 수 없습니다. 어머니와 형제를 하루아침에 다 잃었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 요정이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한 가지 일을 한다면 내가 네 마음의 상처를 깨끗이 씻어주겠다" "그 한 가지가 뭡니까?" "앞으로 일년의 시간을 줄 테니, 네가 일년동안 이 숲 속을 다니면서, 마음에 아픔이 없는 곤충을 아무나 하나 데리고 오면 내가 너의 마음의 상처를 깨끗이 씻어 줄게!" 고추잠자리가 이일은 굉장히 쉬워 보이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눈에 비친 수많은 대부분의 곤충들이 근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 그거야 쉽죠.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고추잠자리는 근심 없는 곤충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걱정 없이 노래부르는 베짱이, 시원한 나무 위에서 노래하는 매미, 그리고 달 밝은 밤에 노래하는 여치와 밤의 적막을 아름다운 멜로디로 수놓는 귀뚜라미 등 너무너무 많을 것 같았어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아 아무 곤충이라도 데리고 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수개월이 지나도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드디어 일년의 시간이 다 지났습니다. 결국 그는 마음에 아픔이 없는 곤충을 한 마리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고추잠자리는 더 이상 요정을 찾아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년 동안 수많은 곤충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아픔이 다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9. 이별의 아픔
얼마 전 우리 교우 중에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분이 있다. 그분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지 몇 개월 후에 중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장례를 치르고 장지에서 돌아와 그분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때 나는 이사야서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 네 남편이다”(사 54:5)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간단히 설교하고 기도 드렸다.
그런데 예배가 끝난 후 서로 이야기가 오고 가던 중, 한 권사님이 남편을 먼저 보내고 삼 남매를 보살펴야 하는 그 부인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를 보세요. 난 44세에 7남매를 거느리고 혼자되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아이들을 다 키우고 이렇게 잘살아가고 있답니다.”
그 부인은 권사님의 말에 큰 위로를 받는 듯했다. 삼 남매를 거느리고 혼자된 부인은 권사님의 더 큰 고난의 이야기를 들을 때 새로운 확신과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환난 속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이다. 그 어떤 고난도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가져 가면, 우리의 고난은 무력해지고 그 고난을 딛고 일어서는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이나 어려움 그 자체가 아니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고난과 아픔이 치료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고난 안에서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 더 큰 아픔 안에서 / 하해룡
10. 한 노인의 슬픔
19세기 전설적인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에게 어느 날 한 노인이 스케치북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자신이 최근에 그린 그림들인데 유명한 ‘로제티’의 평을 좀 받고 싶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 노인은 ‘로제티’에게 자신이 조금이라도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있는지를 솔직하게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로제티’는 찬찬히 그림들을 살펴보다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전혀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로제티’는 할 수 없이 최대한 부드럽게 노인에게 솔직한 자신의 생각을 말해 주었습니다. 노인은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어느 정도 각오한 듯 그리 놀란 표정을 짓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다시 낡은 스케치북 하나를 더 꺼내더니 그 그림들도 한번 봐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자기가 잘 아는 어린 화가 지망생이 그린 그림들이라고 했습니다. ‘로제티’는 노인의 진지한 태도에 이끌려 그 그림들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놀랍게도 그 그림들이 아주 좋았습니다. 흥분한 ‘로제티’는 이 그림을 그린 젊은이는 아주 탁월한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바로 전문적인 화가 수업을 시작하도록 격려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노인은 충격을 받는 듯 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로제티’는 그 그림들을 그린 사람이 혹시 노인의 아들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사실은 이 그림들도 제 것입니다. 40년 전에 그린 것들이지요. 만약 그때 당신같이 뛰어난 화가가 바로 이런 칭찬을 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아무도 그런 말을 해 준 사람이 없었기에 저는 그때 너무 힘이 빠져서 포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말을 하는 노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당대에 이름을 날리는 화가가 될 수 있었던 한 젊은이가 후회만 남은 노인으로 변한 슬픔, 우리는 여기서 영향력 있는 한 사람의 칭찬과 격려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금주 간에 우리 학생들이 수련회에 참가합니다. 한국대학생선교회에서 주관하는 수련회로서 매우 수준 높은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프로그램은 여러분들의 관심입니다. 배움의 도전을 받고 있는 아이들 모두가 공통으로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어른들의 칭찬과 격려입니다. 단 한번의 칭찬이 한 아이의 인생 전체를 바꿔놓을 수도 있습니다. 금번 수련회를 통해서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꿈과 비전을 구체화하고 삶에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얻고 돌아오도록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11. 할머니의 슬픔
출퇴근길에 자주 보는 풍경이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지붕과 부스럼이 난 것처럼 여기저기 벗겨지고 패인 흉물스러운 흙벽, 잡초인지 푸성귀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텃밭, 혼자서 푸성귀를 다듬거나 먼지가 두텁게 내려앉은 마루에 멀거니 앉아 있는 할머니….
할머니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쪽진 머리에 얼굴은 검버섯이 피었다가 벗겨진 듯 군데군데가 허여멀게서 바둑이 얼굴 같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공처럼 둥그렇습니다. 요즘은 봄 텃밭을 가꾸시는가 봅니다. 텃밭에서 풀도 뽑으시고 고랑과 이랑을 만들어 씨앗도 심으십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모든 몸놀림은 삶에 대한 의욕이나 애정에서가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행하는 습관처럼 보입니다. 늘 아무런 기척이 없어 폐가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그 집에 할머니가 살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대부분의 이웃들이 이주해버린 적막하고 흉흉한 동네에서 혼자 사시는 그 할머니를 볼 때마다 나의 마음은 애잔합니다. 처음에는 그런 집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데 대한 놀라움으로, 나중에는 아픔으로…. 때로는 분노가 일기도 하고 나의 부모를 버려둔 것 같은 죄의식이 들기도 합니다. 여덟 자식, 열 자식 마다않고 보듬어 길러내신 우리의 부모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많은 자식들은 다 어디로 가고 가난하고 무력한 어머니를 외롭게 방치해두는 것인지.
- 이경숙,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원종2동
12. 슬픔의 자리에 찾아오신 예수님
동생 론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었습니다. 론은 40대였는데 인기 있는 공무원이요, 뛰어난 지방 검사요, 좋은 아버지이며, 저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론이 죽은 지 3~4주 후, 저는 어머니를 방문하는 길에, 론이 묻혀 있는 산의 공동 묘지로 갔습니다. 춥고 비가 오는 늦은 겨울, 으스스한 날씨였습니다. 공동 묘지에 도착했지만, 동생이 묻힌 자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 무덤에 비석이 세워지지 않았고, 그 구역에 다른 사람들도 매장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추위와 바람과 빗속에 서서 저는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이번 달은 제 생애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 동생의 무덤조차 찾을 수 없군요.”
저는 그때 슬픔으로 인해 거의 잊어버렸던 예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그 말씀으로 저는 위로를 받고, 그 이후로는 묘지에 가지 않았습니다. 다시 거기에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론을 사랑하시고 그를 아셨던 그분께서 슬픔에 잠긴 제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그분의 약속으로 인해, 세상이 달라진 것입니다. 론이 죽은 이후로 힘든 한 해가 이어졌습니다. 다른 것보다도, 장인이 돌아가심으로 슬픔이 배가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홀로 버려진 적이 없었습니다. 비극과 고난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당신의 비극과 고난 중에서도, 당신은 예수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 「당신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스티브 브라운
13.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면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을 느끼겠지요. 견디기 힘든 상실감으로 인해 한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슬픔은 나로 하여금 고통에 자연스럽게 반응하게 합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내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친절은 슬픔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 A.J 셰블리어의《인생반전연습》중에서 -
*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었을 때 그 비통함, 충격, 슬픔은 이루 형용할 길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고스란히 살아있는 사람의 몫입니다. 먼저 망자의 명복을 빌고, 슬픔을 함께 나누며, 그 상실이 남긴 뜻을 찾아내어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 남은 사람들의 몫입니다.
14. 슬픔의 강
우리가 서로 슬퍼질 때 슬픔의 강에 깊이 빠지지 않도록 합시다. 슬픔의 강물에 깊이 빠져 가슴까지 차가워지기 전에 속히 강가로 나와 가슴만은 따뜻하게 지켜가도록 합시다.
- 정용철의《가슴에 남는 좋은 느낌 하나》중에서 -
* 슬픔이 강물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통곡하고, 통분하고, 통탄해도 모자랍니다. 그렇다고 마냥 슬픔의 강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슬픔을 안으로 깊숙히 삼키고 강가로 다시 나와 황량한 들판에 희망의 꽃씨를 뿌려야 합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15. 슬픔을 거두어라
어느 성도가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목사님이 찾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슬퍼하며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지 못하고 계속 영적으로 방황했습니다. 보다 못한 목사님이 그분을 찾아가서 꾸짖었습니다. “성도님,그만 슬퍼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성도님이 계속해서 슬퍼하며 근심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렇게 잃어버린 아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있는데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위해서 한번이라도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이제 그만 눈물을 거두시고 오직 예수님을 위해 눈물을 흘리기 바랍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성도의 마음에 큰 깨달음이 왔다.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자 마음속이 하나님이 주시는 큰 기쁨으로 채워졌다. 아픔과 슬픔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결국 우리의 영혼도 파괴됩니다. 성도는 하늘의 소망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피영민 목사(강남중앙침례교회)
16. 일을 이루기 전
우리 생애에 찾아오는 수고와 아픔과 고통은 우리를 만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관심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게 하기 위해 주시는 표징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기 전에 먼저 고통의 현장으로, 인생의 코너로 몰고 가신다. 그러므로 그러한 일을 당하더라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다면, 그 고통과 상처를 통해 생명을 주시고 문제가 해결되는 축복을 허락하신다.
-김문훈의 ‘네 속에도 하나님의 은사가 있다.’ 중에서-
예기치 못한 슬픔과 감당치 못할 고통을 주님께 내어놓습니다. 주님은 분명 슬픔과 고통을 화하여 주님의 뜻이 있는 곳에 이끌어주실 것임을 지나온 삶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신뢰함이 나의 가장 큰 소망이었음을 베푸신 은혜 통해 잊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17. 희망으로 다시 핀 슬픔
가난한 신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싶다는 뜻으로 1억 원이나 되는 거금을 선뜻 희사한 오애순 권사(70세).
어느 날, 깊은 기도로 믿음을 지키고, 교회를 지켜온 오 권사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딸의 일가족이 뜻밖의 사고로 모두 세상을 떠나는 참변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후 유일한 피붙이로 의지했던 딸은 물론, 친자식처럼 정겹게 굴던 사위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둘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슴이 미어지는 사고 뒤에 뜻밖의 일들이 계속됐습니다. 사고가 있기 얼마 전 사위가 가입한 보험금이 다른 상속인이 없는 관계로 오 권사에게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홀로 근근이 살아온 노구를 이제 조금은 편안한 곳으로 옮겨 살아 보라고 주위에서 입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들의 생명과 바꿔 생긴 귀한 돈을 일신의 안락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은 오 권사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 권사는 아픔 속에 기도하던 중 어려운 형편 속에서 공부하는 신학생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의 뜻대로 그 보험금은 한 푼도 남김없이 교회에 전달되었고, 교회는 이를 ‘오애순 장학금’이라는 이름의 특별 기금으로 조성해 신학생들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물질에 대한 바른 미덕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필요한 이 시대에 오애순 권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깁니다.
/ 임해식
18. 따뜻한 슬픔
어떤 슬픔들은 따뜻하다. 슬픔과 슬픔이 만나 그 알량한 온기로 서로 기대고 부빌 때, 슬픔도 따뜻해진다. 따뜻한 슬픔의 반대편에서 서성이는 슬픔이 있다. 기대고 부빌 등 없는 슬픔들을 생각한다. 차가운 세상, 차가운 인생 복판에서 서성이는 슬픔들...
- 조병준의《따뜻한 슬픔》중에서 -
* 지독히도 춥고 궁핍했던 어린 시절, 오돌오돌 떠는 아들의 언 몸을 녹여주기 위해 품에 가득 안아주던 어머니의 가슴을 생각합니다. 언 몸이 따뜻이 풀려 스르르 잠들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슬픔도 추위를 이겨내는 이치와 같습니다. 혼자서는 견딜 수 없는 슬픔도 누군가와 함께 기대고 부비면 조금씩 조금씩 따뜻하게 녹아내립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19. 슬픔의 바닥
슬플 때 슬픈 음악을 들으면 더 슬퍼지기 때문에 듣지 말아야 한다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때는 차라리 슬픈 음악을 들으면서 꺼이꺼이 울고 철저히 슬퍼하는 게 낫다. 그래야 비로소 슬픔의 바닥이 보인다. 그 바닥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나면, 그때 비로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슬픔이 극복된다. 슬프고 싶어도 더 이상 슬프지 않은 평온한 상태가 찾아오는 것이다.
- 이동준의《연애를 인터뷰하다》중에서 -
* 가장 아름다운 미소는 언제 찾아올까요? 눈물을 쏟은 다음에 짓는 미소가 가장 맑고 아름답습니다. 그렇듯 진정한 기쁨은 슬픔을 걷어낸 다음에 옵니다. 슬픔과 벗하며 함께 걸어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슬픔의 맨 밑바닥을 치고 다시 솟아오르면 더 슬플 것도, 더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20. 슬픔을 통해서
19세기에 있어서 미국의 여러 신학자 가운데 손꼽히는 유명한 신학자 포리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머리를 통해서 많은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많은 저서도 남겼다.
그가 심히 사랑하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딸이 세상을 떠났다. 처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 다음 그는 이번 경험을 통해서 전에 머리를 통해서 깨닫지 못했던 신학을 깨닫고 많은 배움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 슬픔을 통해서 슬픔 당하는 사람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있다. 슬픔을 한번도 당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슬픔을 깨닫지 못한다. 슬픔을 당해 본 사람이 참으로 다른 사람을 동정할 줄 안다.
슬픔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유화해지고, 온유해지고, 다른 사람의 사정을 알게 된다. 슬픔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완숙해지고 인격이 자라난다.
슬픔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많이 있다. 슬픔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많이 있다. 슬픔을 통해서 남을 위한 일의 사명을 주시는 적이 많이 있다.
ⓒ 채수덕
21. 아메리칸 캐론
여러 해 전에 미국에 어떤 돈 많은 부인이 딸 삼형제가 있는데 이들을 데리고 여름에 구라파와 성지를 구경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가게 되었다.
불행히 그 배가 가다가 파선을 당해서 많은 사람이 대서양에 빠져 생명을 희생당하게 되었다. 작은 배로 얼마를 구원하느라고 했지만 많은 사람이 죽었다.
결국 이 부인은 구원을 받았는데 딸들은 다 죽고 말았다. 이 여인이 처음에는 어떻게 할 줄 모르고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 많은 고통과 슬픔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자기 부모가 없어서 바로 자라나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은데 내 딸을 잃었다고 그저 슬퍼만 하고 있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래서 대신 다른 사람의 아들딸들을 기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성지에 가서,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루살렘에 가서, 자기 사재 전부를 다 들여 '아메리칸 캐론'이란 유명한 고아원과 탁아소를 세웠다.
그녀는 많은 불행한 사람을 위로해 주고 봉사한 것이다. 슬픔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발견했다. 우리가 이 세상 길을 갈 때에 이와 같이 슬픔을 당하는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이며,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고아원, 양로원, 모자원을 하나냐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와 같은 슬픈 일을 볼 때에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고 하는 사명적 견지에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22. 슬퍼하지 마세요
채필근 목사는 교역 중에 슬픈 일을 많이 당했다. 장남 희칠은 9세에, 3남 희탁은, 22세에, 4남 희선은 23세에, 6남 희관은 4세에 세상을 떠났다. 장남 희칠이 죽었을 때 채 목사는 고향을 떠나 있었으므로 한 달 후에야 아들이 죽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일은 그를 매우 슬프게 했다. 그 날 밤 그가 산 위에 올라가니 휘장이 둘러쳐져 있는데 그 속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왔다. 도무지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헤매다가 휘장을 마주 맨 틈이 있어 들여다보니 죽은 아이가 아름다운 옷을 입고 꽃 관을 쓰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웃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저는 죽은 것이 아니예요. 정말 재미있게 살고 있어요."
채 목사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웃다가 깨어보니 꿈이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이었다
23. 슬픔
슬픔. 그렇다. 내 마음 속에 들어차고 있는 것은 명백한 슬픔이다. 그러나 나는 자아(自我) 속에서 천천히 나를 분리시키고 있다. 나는 두개로 나누어진다. 슬픔을 느끼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 극기 훈련이 시작된다. '바라보는 나'는 일부러 슬픔을 느끼는 나를 뚫어져라 오랫동안 쳐다본다. 찬물을 조금씩 끼얹다보면 얼마 안 가 물이 차갑다는 걸 모르게 된다. 그러면 양동이째 끼얹어도 차갑지 않다. 슬픔을 느끼자. 그리고 그것을 똑똑히 집요하게 바라보자.
- 은희경의《새의 선물》 중에서 -
* 슬픔, 누구에게나 곁에 파고드는 인생의 동반자입니다. 그 슬픔의 동반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에서 똑똑히 바라볼 정도가 되면, 이미 인생을 관조하는 달관(達觀)의 경지에 오른 사람입니다.슬픔의 늪에 빠져 너무 오래 허우적대면 그 슬픔은 이내 불행으로 탈바꿈을 해버립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24. 내 슬픔 씻어줄 울음
누구나 맘껏 울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누구나 울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사람들은 흔히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바라지만 사실 나 자신을 위해서 진정 슬퍼하며 울어줄 수 있고 꼭 그래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겨 허둥대며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슬픔에 대해 울어줄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통곡의 시간은 치유의 질을 결정한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엔 자신이 스스로의 슬픔에 대해 울어주고 알아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야만 그 도움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전문가의 도움이 없인 자신의 슬픔을 표현할 수도 없고 달래줄 수도 없게 된다면 더욱더 그 사람은 전문가나 어떤 프로그램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 자신이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자신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는 한에서 어떤 도움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람들은 그런 차이를 모르고 있다. 상담과 심리치료에서 가장 심각한 경우는 울 수 없는 내담자이다. 어떤 충격적인 경험과 처절한 상처보다도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것을 지금까지 맘껏 표현하지 못했거나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우선적으로 이 내담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껏 울고 슬퍼할 수 있는 변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매우 처절한 경험과 상처라도 그것을 충분히 슬퍼할 수만 있다면 내면 깊숙한 곳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던 심각한 장애물도 제거되는 것이다. 여기서 ‘충분히 슬퍼함’은 오직 내담자 스스로가 그렇다고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게 ‘충분한 통곡의 시간’을 보내게 되면 마치 꽁꽁 얼어붙은 얼음덩어리가 녹아내리고 메말랐던 땅에 단비가 콸콸 쏟아지는 것같은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다.
/오제은 <천안대 상담학과교수>
25. 기쁨과 슬픔
그대의 기쁨은 가면을 벗은 그대의 슬픔. 그대의 웃음이 떠오르는 바로 그 우물이 때로는 그대의 눈물로 채워지는 것. 그대가 기쁠 때, 그대 가슴속 깊이 들여다보라. 그러면 알게 되리라. 그대에게 슬픔을 주었던 바로 그것이 그대에게 기쁨을 주고 있음을. 그대가 슬플 때도 가슴속을 들여다보라. 그러면 알게 되리라. 그대에게 기쁨을 주었던 바로 그것 때문에 그대가 지금 울고 있음을.
- 칼릴 지브란의《예언자》중에서 -
* 기쁨과 슬픔은 한 짝입니다.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기쁨과 슬픔은 함께 오고, 함께 갑니다. 진정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기뻐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슬픔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기쁨의 맛도 압니다.
26. 슬픔을 맡기면
헤리 로더라는 가수는 공연 중에 자신의 아들이 전쟁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웃으며 노래를 불렀고 공연을 마쳤습니다. 공연 후, 헤리는 아들의 시신이 있는 야전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아들의 시신을 붙잡고 우는 대신에 오히려 군인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헤리 로더는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이 슬프지 않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고난을 맞는 인간의 태도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비관해서 좌절하든지, 술을 계속 마셔서 파멸하든지, 하나님께 슬픔을 맡겨 자유하든지.... 저는 하나님께 저의 슬픔을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위로와 힘을 공급해 주셨고,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슬픔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찬양을 통해 고난 중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삶의 정황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 말씀의 징검다리 / 정장복.주승중
27. 잃어버린 눈물을 되찾자
예전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이런 격언을 본 적이 있다.“바쁜 사람은 눈물 흘릴 시간이 없다” 아마도 그 격언은 눈물 흘리지 말고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라는 그런 의미일 것이다.그러나 나는 그것을 보면서 이런 마음이 들었다.“인간이 눈물 흘릴 시간이 없을 만큼 바빠서야 되겠는가”
오늘날을 스피드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만큼 정신없이 바쁘지 않으면 경쟁에서 낙오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누가 먼저 제품을 개발하고 누가 먼저 시장을 장악하느냐가 기업의 생사를 결정한다. 누가 먼저 승진하고 자격증을 취득하느냐에 의해서 사람이 평가된다. 그런 때문인지 요즘 현대인들은 점점 정서가 메말라가고 인심이 각박해져가는 것같다. 그만큼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메말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이웃을 보아도,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고아들을 보아도,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보아도, 이 땅에 복음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영혼들을 보아도 우리의 눈물이 메말라버렸다.누가복음 10장 38절 이후에 보면 예수님이 마르다라는 여인의 집에 계실 때의 이야기가 나온다. 마르다는 손님들의 음식을 준비하느라 무척이나 분주했던 반면 그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그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다. 마르다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서 예수님께 동생을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정신없이 바쁜 마르다보다 마리아를 인정해주셨다.
만약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물 한잔을 가져다줄 것을 부탁했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마르다가 물 한잔을 가져다 드렸을 것이지만 이런 불평을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음식 준비하느라고 내가 이렇게 정신이 없는 줄 아시면서 왜 귀찮게 하시나”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던 마리아에게 똑같은 요청을 했을 경우 마리아는 기쁜 마음으로 일어나 얼른 예수님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물 한잔을 떠왔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정말 주님과 깊은 관계속에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마르다가 아닌 마리아였을 것이다.
이 세상은 사람들을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도록 만든다.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잘한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주님은 너무 바빠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돌아볼 시간이 없는 사람을 칭찬하시지 않는다. 비록 이 세상에서 경쟁력은 좀 떨어지더라도 삶의 의미를 찾고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그래서 주님의 마음에 동화돼 주님과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 고통받는 이웃과 죄악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자신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인가. 너무 바빠서 주님과 함께 눈물 흘릴 시간조차 없지는 않은가. 내 이웃이 고통을 당하고 차별과 학대로 사람들이 죽어가도 눈물이 메말라버리지는 않은가.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져도 눈물조차 흘릴 수 없을 만큼 바쁘지는 말자.
/조정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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