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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바울서신 녹취 9

by 【고동엽】 2022. 6. 6.
한 주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갈라디아서를 보겠습니다. 갈라디아 지방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같은 성읍들이 있는 곳이고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했던 곳이 바로 갈라디아 지방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작은 로마서라고 하는 별명이 있는데 거짓 복음을 질타하고 올바른 믿음 가운데 서야 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갈라디아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바울은 이방 지역 순회 전도자였습니다. 바울이 이방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수용한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를 개척하고 나면 바울은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교회 목회를 맡기고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방 지역에 교회를 세웠다 라는 이야기를 듣고 초대 교회의 모교회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이 세웠던 이방 교회에 가서 이 사람들이 정말 바울로부터 제대로 된 믿음, 제대로 된 신앙을 배웠는지 정말 올바른 신앙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 그런 것을 보면서 그들의 부족한 면을 채워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다음에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왔는데 이 갈라디아 교회에 와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겁니다. 왜 깜짝 놀라는 거냐면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는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는 겁니다. 음식 정결법을 지키지 않는 겁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바울이 너희에게 가르쳐 준 대로만 하면 안 된다 너희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옛날 아브라함 때부터 믿음의 사람들이 해 왔던 할례도 받아야 되고 모세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준 음식 정결법도 지켜야 되고 그런 것들을 행해야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거다”라고 예루살렘 교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가르친 겁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갈라디아 교인들이 생각할 때 바울의 가르침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의 가르침 가운데 어디가 더 훨씬 권위가 있겠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 누굽니까?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죠. 그 예루살렘 교회에 누가 있습니까? 12제자 가운데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가 있죠. 그러니까 이 바울의 가르침과 예루살렘 교회의 가르침이 달랐을 때 갈라디아 교인 대다수가 예루살렘 교회에 더 큰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 이야기를 듣고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를 받는 겁니다. 음식 정결법을 준수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후에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가 제대로 믿음 가운데 잘 서고 있나 이것을 알기 위해서 갈라디아 교회를 찾아왔을 때 깜짝 놀라는 겁니다. 자신이 가르치지 않은 내용들, 한마디로 하자면 율법의 제의법을 열심히 추종하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보면서 바울이 화가 난 겁니다. 막 책망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보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하면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을 많이 합니다. 왜 책망을 많이 하냐면 바울이 가르쳐 준 대로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오랜 세월 동안 형성했던 신앙 문화를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대로 따라 하고 있는 겁니다. 전수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볼 때 예루살렘 교회가 가르쳐줬던 율법의 제의법, 이런 제의법에 여전히 얽매여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는 이야기가 갈라디아서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 바울 사이의 갈등을 기억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에 대해서 어떤 식의 오해를 많이 했냐면 바울은 율법 폐기론자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셨던 율법,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이 수천 년 세월 지켜온 율법을 바울은 무효화시키고 있다, 존중하지 않는다, 바울은 율법 폐기론자다 이런 식의 오해를 예루살렘 교회는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율법 전체를 다 무효화 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 가운데 제의법에 대한 지나친 집착, 그리고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그 율법의 제의법을 여전히 준수해야 한다는 강요를 막으려고 한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율법의 제의법은 끝났고 여전히 율법의 도덕법은 유효하다 이것이 바울의 입장이었습니다.


여기서 제의법과 도덕법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보셔야 합니다. 제의법의 대표적인 것이 할례, 정결법, 음식법, 절기 준수법 이런 겁니다. 오늘날로 이야기 하자면 세례 받음, 예배 참석, 기도 생활, 찬양 이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제의법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준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덕법이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어 내가 정직하고 진실하고 거룩하게 살아간다 라고 했을 때 이것은 항상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다음에 제의법이라고 하는 것은 내 존재를 뒤바꿔 내지 않아도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것이 제의법입니다. 보십시오. 내가 정직하지 않고 진실하지 않아도 주일 예배는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잖아요. 도덕법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법을 제대로 준수하게 되면 우리의 인격이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개인적인 준수, 존재의 변화가 없어도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그런 제의법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도덕법의 준수이다 라고 주장한 겁니다. 어떻게 보면 구약 예언서의 중심 메시지와 연결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언서 공부할 때도 여러번 강조 했지만 예언서 보다 보면 하나님께서 매 시대마다 예언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왜 책망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습니까? 예배를 안 드렸었나요? 기도 생활을 게을리해서 였나요? 찬양을 제대로 안 불러서 였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책망하실 때 이스라엘은 사실 종교 생활에 과유불급이라고 할 정도로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책망하시죠? 심판하셨죠? 종교 생활에는 열과 성을 다했지만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내지 못했던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라고 하는 것,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는 큐티 생활이라고 하는 것 이런 것은 기름을 주유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기름을 주유하는 목적이 어디 있습니까? 기름을 주유하는 자체가 목적인가요? 아니죠. 기름을 주유한 다음에 도로에 가서 열심히 주행을 하는 것이 기름을 주유하는 목적 아닙니까?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개인적인 경건 생활에 열심을 다하는 그 모든 것은 죄악으로 충만한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내기 위해서 그 모든 것들을 행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기름만 맨날 주유하고 주행은 하지 않는다, 예배만 맨날 드리고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분투가 없다, 순종이 없다 라고 한다면 그 과도한 예배와 찬양과 기도라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냐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언서의 메시지이고 사도 바울이 그것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 바울이 갈등을 할 때 바울이 절대 율법 전체를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바울은 제의법이 아니라 도덕법을 더 중시한 겁니다. 그 제의법을 지켜야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예루살렘 교회 주장을 반대한 겁니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바울은 유대인은 유대인의 문화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신앙의 꽃을 피워야 되고 이방인은 이방인의 문화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꽃을 피워야 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들이 오랜 세월 동안 지켜왔던 그 신앙의 문화를 이방 기독교인들도 그대로 따라야 된다, 그래야만 너희들은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다 라는 이런 주장에 대해서 바울이 반대했다는 것 이것을 여러분이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에 보면 바울이 회심한 이후에 어떤 여정을 걸었는지가 나옵니다. 다메섹 도상 사건 이후에 아라비아에 갔다가 다시 다메섹에 돌아왔다가 3년 후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게바와 야고보를 만나고 그다음에 14년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 예루살렘 사도로부터 교제의 악수, 여기 교제의 악수라고 하는 말은 사도로 인정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9절입니다.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다.” 여기 재밌는 것이 야고보, 게바, 요한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게바가 누구죠? 베드로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사도들의 권위의 순서입니다. 야고보, 베드로, 요한입니다. 이 순서 그대로 공동 서신이 배치되어있는 겁니다. 야고보서가 제일 먼저 나오고 그 다음 베드로전후서가 나오죠. 그 다음 요한 1~3서가 나옵니다. 이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사도들이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다는 말은 뭐냐면 자신이 이제 예루살렘으로부터 인정받은 사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연도를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이때 갈라디아서 2장 9절에 친교의 악수를 나누었을 때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종교 회의 때라고 봅니다. 이때가 AD 49년입니다. 그러면 역으로 바울이 언제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 사건을 경험했는지 추론할 수 있습니다. 보시면 다메섹, 아라비아, 다메섹 온 다음에 3년 후에 예루살렘으로 갔죠. 그리고 14년 후니까 다메섹 회심 사건으로부터 17년 만에 바울은 사도로 인정받은 겁니다. 그러면 49년 예루살렘 종교 회의에서 사도로 인정받았다 라고 한다면 회심은 32년경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중요한 것이 2장 16절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여기서 그 유명한 종교개혁의 이신칭의가 나온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 그런데 헬라어 원어로 보면 이것은 두 가지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여기 나와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누가요? 내가, 우리가, 내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고 또 하나는 목적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내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믿음이라는 말은 뭐냐면 헬라어로 믿음이라는 것이 피스티스라는 단어인데 이 피스티스라는 단어는 믿음이라는 뜻도 있고 신실함이라는 뜻도 있고 갈라디아서 5장에 성령의 9가지 열매에는 충성이라고도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는 겁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다 있습니다. 로마서 5장 6, 8, 10절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여전히 연약했죠.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었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 관계였죠.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선제적인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고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번역이 다 가능하다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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