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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바울서신 녹취 7

by 【고동엽】 2022. 6. 6.
오늘은 고린도후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항변하는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사도직을 항변한다 라고 하는 것은 고린도교인들이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자, 사도라고 하는 존재는요, ‘보냄 받았다’ 이런 말인데, 누구로부터 보냄 받은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 받은 거예요. 요한복음 17장 18절, 20장 21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세상으로 보냄 받은 자들을 우리는 사도라고 하는데 주님이 어떤 사람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까?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했던 사람들, 예수 부활의 목격자들,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이 세상에 보내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사도라고 하는 것을 좁혀 말하게 되면 12사도를 말하는 것이고요, 좀 넓게 말하게 되면 예수 공생애를 함께 했던 예수 부활의 목격자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사도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런 기준에 충족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자기도 예수님 만났다, 자기도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보냄 받았다 라고 주장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너가 어디서 예수를 만났어?” 이렇게 질문하게 되면 “다메섹” 이렇게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요, 목격자들이 없어요. 여러분 사도행전에도 보게 되면 “목소리만 들었다. 그리고 바울 옆에 있던 사람들이 빛만 봤다” 뭐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정말 예수와 사도 바울이 온전한 만남을 가졌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도 바울이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쓰임 받는다’라고 하는 그것을 명확하게 목격한 사람들이 없거든요. 그래서 바울은 오랜 시간 동안 사도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특히 고린도후서 같은 경우에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서 끊임없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던 고린도 교인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진정한 사도이다”라고 하는 것을 항변하는 서신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번 성경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보낼 때요, 그 편지의 제일 앞부분인 1장 1절을 보시게 되면 편지를 보냈던 바울하고 편지를 받는 이 교회가 어떤 관계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편지를 받는 이 교회가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서 인정을 했던 교회였는지 아니면 사도성을 의심했던 교회였는지 이것을 알 수가 있어요. 자, 로마서 1장 1절 보겠습니다. 로마서 1장 1절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런 말이 나와요. 자, 여기 여러분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이 나오죠? 그다음에 고린도전서 1장 1절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여기도 사로로 부르심을 받았다 라는 표현이 나오죠? 자, 그다음에 고린도후서 1장 1절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자, 여러분 계속 ‘사도’라는 말이 나오죠? 이것을 여러분 잘 보셔야 됩니다. 바울이 편지를 쓸 때 편지 앞부분에 자기를 ‘사도’라고 기술하고 있는 그 편지는요, 편지를 받는 수신 교회가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는 교회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 하자면, 제 강의를 들으시는 여러분이 저를 목사라고 인정해 주시면 제가 굳이 여러분 만날 때마다 제가 목사라고 하는 것, 제가 몇 년에 안수 받았는지, 어느 신학교에서 공부했는지 이것을 제가 말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만약 강의를 들으시는 여러분이 “저 강의하고 있는 양진일목사가 진짜 목사 맞나? 신학을 공부한 것 맞나?” 이런 의심이 든다면 제가 여러분 강의할 때마다 제가 어디 신학교를 나왔고, 어디서 공부를 했고, 몇 년에 안수를 받았고, 제가 지금 어디서 목회를 하고 있고…… 이런 것들을 계속 여러분에게 강조할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바울의 편지를 받는 교회가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았을 때, 약간 의심하고, 좀 회의적인 입장을 드러낼 때 바울은 그 수신 교회를 향해서 자신이 ‘사도’로 부름받았다고 하는 것을 강조해요. 로마서라든가, 고린도전후서를 보게 되면 앞부분에 자기가 ‘사도’로 부름받았다 라고 하는 것을 기술하고 있어요. 자, 계속 한 번 볼까요. 그다음에 갈라디아서 1장 1절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절.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여기도 ‘사도’라는 말 나오죠? 자, 그다음 에베소서를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입니다. 1장 1절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여기도 ‘사도’란 말 나오죠? 자, 그다음 보세요. 빌립보서 1장 1절입니다. 빌립보서 1장 1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러분, 빌립보서에는요 ‘사도’란 말이 안 나오죠? 어떤 표현만 나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란 표현만 나옵니다. 그러니까 바꿔 이야기하자면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에는요, 자기가 ‘사도’라는 것을 굳이 명시하지 않아요. 이유가 뭡니까?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했단 말이에요. 자, 그다음 골로새서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여긴 또 ‘사도’란 말 있죠? 자, 그다음에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회에는요, ‘사도’란 말도 없고 종이란 말도 안 나와요. 그냥 자기 이름만 쓰고 있습니다. 자, 후서도 볼까요? 데살로니가후서,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자, 여기서 이제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냐면, 바울이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요, 서두에 자기가 ‘사도’라고 하는 것을 명시한 교회가 있고, 그다음에 종이라고만 명시한 교회가 있고, 이름만 명시한 교회가 있는 거예요. 자, ‘사도’라고 명시한 편지를 받았던 교회는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은 교회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데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했던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에는요, 자기가 굳이 ‘사도’라고 하는 것을 기록하지 않아요. 두 교회가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두 교회가 바울의 선교사역을 물질로 후원했던 교회입니다. 우리가 보통 바울의 선교 사역을 이야기할 때 자비량 사역이라고 하는 것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여러분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바울은 후원을 받고 풀-타임으로 선교 사역에만 매진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낮에는 결국 텐트 만드는 일을 했고, 저녁에는 복음 전하는 일을 주로 했거든요. 왜 그랬냐 하면 후원이 많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후원했던 교회는 두 교회입니다.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 자,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떻게 바울을 후원할 수 있었습니까? 바울의 사도됨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이 교회에 편지 보낼 때에는요, 바울이 굳이 자기를 ‘사도’라고 명시하지 않아요. 그런데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교회에 편지 보낼 때는 바울이 편지 서두에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도로 부름 받았다 라고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특별히 편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사도직을 항변하고 있는 편지가 어디냐? 바로 고린도후서라는 것이죠.


자, 3장 17절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 보시면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여러분, 이런 말씀이 간혹 그 오용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 라고 하는 것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행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기 쉬워요. 원래 여러분 고린도후서의 맥락, 그다음에 요한복음 8장 32절에도 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말씀이 나오죠! 자, 여기 고린도후서 3장 17절 그다음에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말하는 ‘자유’라고 하는 것은요, 1차적으로 율법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세속의 가치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율법에 속박되어 있었어요. 이방인들은요, 그 이방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주류 가치, 세속의 문화 이런 것에 지배를 받고 있었단 말이에요. 자, 그런데 우리가 주의 영으로 충만하게 되면 그런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 해져요.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주류 가치와 주류 문화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해지는 거예요. 이것을 바울이 말하는 것이지 ‘네가 원하는 바대로 이제는 뭘 해도 상관없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 라고 했을 때 어디로부터의 자유이냐? 율법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제의법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세속 가치와 세속 문화로부터 자유, 주류 세계관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로부터의 자유에서 어디로 전환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통치로 전환이 되는 거죠.


자, 그다음에 고린도후서 6장 15절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5절을 보면, 보통 여러분 자녀들 가운데 결혼할 배우자를 딱 데리고 왔는데 예수를 안 믿어요. 교회를 안 다녀요. 자, 그랬을 때 불신자와의 결혼을 반대할 때 주로 인용되는 말씀이 바로 고린도후서 6장 15절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하리요


이 말씀이 나오죠? 그래서 여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14절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래서 이것을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여기 나와 있는 것처럼 믿는자=의=빛=그리스도, 이것이 하나이고요, 믿지 않는자=불법=어두움=벨리알을 하나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들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할 때 이 구절을 주로 많이 인용한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고린도전후서를 자세히 보시게 되면 여기 믿지 않는자=불법=어두움=벨리알 이라고 하는 것은요,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은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고린도후서 6장의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린도전서 5장 9절 이하를 잘 보셔야 됩니다. 고린도전서 5장 9절 이하입니다. 자, 여기 보시게 되면 바울의 편지를 고린도 교인들이 많이 오해한 거예요. 뭐라고 오해한 거냐 하면 바울이 음행한 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하니까 고린도 교인들 안에서요 이런 생각이 나온 거예요. 음행하지 않은 자들을 사귀지 않으려면 세상에 보면 너무나 많은 죄인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과 바울이 사귀지 말라고 했으니까 이런 사람들과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우리끼리 게토화 됨, 현실 도피적인 그런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라는 식의 명령으로 착각을 한 거죠. 그래서 바울이 “그렇지 않다!”라고 하면서 고린도전서 5장 9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9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그러니까 오늘 날로 말하자면 교회 공동체 안에 속해 있는 어떤 사람이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 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13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그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자, 그래서 여러분 고린도전서 5장 9절부터 13절의 말씀과 고린도후서 6장을 연결해서 읽으셔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믿는 자, 의, 빛, 그리스도 이것을 하나로 연결하고, 믿지 않는 자, 불법, 어둠, 벨리알 이것을 하나로 연결을 해서,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 이것은 예수 믿지 않는 불신자들 이런 식으로 구분을 많이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바울의 주된 관심은 어디 있는 거냐 하냐면 예수를 믿는 자와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겠다고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왔는데 하나님의 통치 안에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는, 입으로는 고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의 통치 안에 순종하지 않는 실천적인 무신론자들을 책망하는 말씀이라는 말이에요. 이것을 우리가 제대로 보는 것이 필요해요.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 고린도교회는 한국 교회의 거울이라고 그랬잖아요. 가장 많은 선물을 받았고, 가장 은사가 풍성했지만 가장 많은 문제가 있었어요. 우리 한국 교회가 오늘 그러하단 말이에요. 2000년 교회 역사 가운데 이렇게 단기간에 놀라운 성장을 이룬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 전체 인구 중 개신교와 가톨릭을 합쳐 30% 이상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이런 나라가 어디 있냐는 말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한국 교회만큼 이렇게 많은 문제가 드러나는 교회도 없죠! 목사건, 장로건, 중직자건, 아니면 이제 갓 신앙을 가진 사람이건 간에 예수를 믿겠다고 머리와 입술은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기를 거부하고 죄 된 세상의 가치를 좇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단 말이에요. 그런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을 책망하는 말씀,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와 후서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돼요. 그러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 있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 있다고 해서 다 빛의 자녀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있지만, 예배는 참여하고 찬양은 열심히 부르지만 일상의 삶 속에서는요,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아니하고, 벨리알에게 속한, 빛에 거하지 아니하고 어둠에 거한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잘 분별해 내라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후서의 일관된 메시지라고 하는 것!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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