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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왜소화시키지 말라 (미가 5장 1-2절)

by 【고동엽】 2022. 5. 23.

 자기를 왜소화시키지 말라 (미가 5장 1-2절)        

 

 사람은 대적 때문에 실패하기보다 자기 때문에 실패할 때가 많다. 포도원은 허는 작은 여우 한 마리는 자기 밖에 있지 않고 자기 안에 있다. 환경적인 고난을 극복하는 것보다 부정적인 자기를 극복하는 것이 더 어렵다. 꿈과 비전을 이루려면 자기를 잘 극복하라.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기억해주지 않아도 너무 상처 받거나 실망하지 말라. 혼자 있을 때 하나님이 더 함께 해주신다. 묵은 상처의 기억을 자꾸 끄집어내어 상실감에 빠지지 말고 자기 단점을 너무 클로즈업해서 보지 말고 자기를 왜소화시켜 피해의식에 젖지도 말라.

 

 변화가 더딘 것도 너무 자책하지 말라. 자책이 심하면 사탄이 속삭인다. “너는 안 돼! 네가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해? 네 인생은 끝났어.” 그런 속삭임에 넘어가면 찬란한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없을 것 같고 기적적인 축복 얘기는 남 얘기만 같게 된다. 게다가 죄책감에 사로잡히면 인생의 패잔병처럼 느끼게 된다. 그런 패배감에 젖으면 복된 인생이 될 수 없다. 어떻게 패배감을 이겨내는가? 성도의 최종 승리를 확신해야 한다.

 

 내 죄와 허물을 생각하면 복과 은혜를 구하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가끔 나를 깊이 성찰해보면 장점과 성숙함보다 단점과 미숙함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단점과 미숙함은 베드로나 사도 바울에게도 있었고 그 외에 수많은 인물과 성자들에게도 있었다. 그처럼 부족한 점이 많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주목하시고 기대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하나님은 수시로 말씀한다. “아무개야! 네게 죄와 허물과 단점이 있어도 나를 사랑하는 네 중심을 알고 있다.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너에 대해 기대하고 있다. 다시 새롭게 일어서라.” 늘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불행의 예고편이고 하나님을 다시 찾는 것은 행복의 예고편이다. 현재의 삶이 어떻든지 예수님을 새롭게 붙잡으면 그때부터 반전의 역사가 얼마든지 가능함을 베들레헴에서의 메시야 탄생 스토리는 잘 말해준다.

 

< 메시야의 정체성 >

 

 미가는 예루살렘 군대가 이방인의 군대에 의해 에워싸이고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막대기로 뺨을 맞는 수치를 묘사한 후 바로 이어서 반전의 역사를 이룰 메시야의 등장을 예언했다. 본문 2절을 보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메시야에 대한 3가지 정보를 준다.

 

 첫째,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 에브라다는 ‘떡집’의 뜻을 가진 베들레헴의 옛 지명이다. 옛 지명을 첨가한 것은 스불론의 베들레헴(수 19:15)과 다른 장소임을 나타내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메시야는 유다 지파의 작은 족속 거주지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 메시야는 예루살렘의 화려한 왕궁이 아닌 베들레헴의 초라한 구유에서 태어나셨다. 예수님의 초라한 탄생은 희망의 원천이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을 통해 비범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에 대해 너무 쉽게 기대를 포기하지 말라.

 

 둘째,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된다. 영적인 의미로는 최종 승리자가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탄생에는 베들레헴 경내 안에 있는 2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이 모두 죽는 비극적인 역사도 동반했다. 그런 비극이 밑거름이 되어 위대한 구원의 역사가 이뤄졌다. 승리의 역사나 인물의 역사는 그 시작이 초라하거나 안 좋은 경우도 많다. 그래도 믿음을 잃지 않으면 결국 승리한다. 메시야의 시작은 초라했지만 마지막은 창대했다. 성도도 시작은 초라하지만 마지막은 창대해진다. 믿음은 얼마든지 흙수저를 금수저로 만들 수 있다.

 

 셋째, 메시야는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메시야의 근본이 상고 및 영원에 있다는 말씀은 메시야가 영원한 하나님이란 말씀이다. 그것이 구원과 능력의 최대 근거다. 마리아는 메시야 잉태 소식을 듣고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했기에 위대한 여인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인간적으로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이다. 마리아처럼 위험과 시험 중에도 믿음을 잃지 말고 말씀대로 순종하면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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