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도행전 마지막 시간입니다. 22장부터 28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22장부터 28장은 죄수의 신분으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4차 전도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22장에 보시면 바울의 회심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행전에 바울의 회심에 대한 3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9장에 나오고 22장에 나오고 26장에 나옵니다. 9장은 바울의 회심에 대한 제 3자적 기술이고 22장과 26장은 자전적인 기술입니다. 22장은 유대 동족들에게 자신이 왜 회심을 하게 되었는지 그 회심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본문이고 26장은 정치 권력자들에게 바울이 자기의 회심 사건에 대해서 1인칭으로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사도행전 안에 9장, 22장, 26장 3번에 걸쳐서 바울의 회심 이야기가 나옵니다. 22장에서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바울이 자기의 회심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3절에 보시면 바울이 자기 삶의 내력에 대해서 쭉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 자라” 라고 하면서 자신의 삶의 내력에 대해 쭉 설명하고 있는데 지난번에 복음서 때 공부했던 것처럼 AD 1세기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네 그룹의 종교 정파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열심당입니다. 이 4개의 종교 정파가 있었는데 이 종교 정파 가운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았던 종교 그룹이 바로 바리새파입니다. 바리새파는 크게 힐렐파와 샴마이파로 나누어지는데 이 힐렐파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가말리엘입니다. 이 가말리엘은 힐렐이라는 사람의 손자입니다. 힐렐파의 계승자라 할 수 있는데 샴마이파와 힐렐파를 비교하실 때 샴마이파가 좀 더 근본주의적이다, 강경한 보수그룹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고 힐렐파는 좀 더 자유주의적인 입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예를 들자면 바리새파 모두가 하나님에 대한 율법에 철저한 순종을 강조했는데 좀 더 강경 보수적인 샴마이파는 하나님의 율법 가운데 하나를 위반해도 율법 전체를 위반한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합니다. 얼마나 엄격합니까. 반대로 힐렐파는 나중에 우리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때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께 순종했던 것과 불순종 했던 것을 저울에 단다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인생에서 백번 정도의 중요한 사건을 경험했는데 그 가운데 51번은 순종하고 49번은 불순종했다고 하면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순종 51, 불순종 49니까 결과적으로 나는 순종의 삶을 살았다 이렇게 보는 것이 힐렐파입니다. 그런데 샴마이파는 100개 가운데 99개를 순종했다고 하더라도 1개의 불순종이 있다고 한다면 1개를 불순종 해도 율법 전체를 불순종 한 것과 같다는 겁니다. 굉장히 엄격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힐렐파 그 가운데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 교육을 받은 겁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했던 사도 바울,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10대 초반에 예루살렘에 와서 율법의 교육을 받았고 어디서 받았습니까? 바리새파입니다. 그 바리새파 가운데서도 힐렐파, 그 힐렐파 가운데에서도 가말리엘, 이 가말리엘의 교육을 받은 정통 바리새인이 사도 바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의 율법 교육 때문에 나무에 매어 달려 죽은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 받아 죽었다라는 신명기 21장 23절의 그 말씀에 근거해서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 받아 죽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추종하는 자들이 있는 것을 보면서 바울이 너무 답답한 겁니다. 그래서 원래 유대교를 믿다가 예수를 믿는 자들로 개종한 자들을 바울은 때로는 협박하기도 하고 때로는 잡아 가두기도 하고 때로는 스데반처럼 죽이기도 하는 등 그들을 돌이키기 위해 열심을 다했습니다. 왜 열심을 다했습니까? 너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볼 때는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유대교를 떠나서 초대 교회로 넘어간 사람들을 보면서 너무 안타까운 겁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이들을 다시 유대교의 품으로 되돌려야 겠다 이런 마음으로 사도 바울은 초대 교인들을 핍박했습니다. 자신의 그런 열심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저주 받아 지옥에 있을거라 생각한 예수가 바울에게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바울은 너무나 큰 충격과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면서 오랜 시간의 신학적인 숙고와 고민 속에서 자기가 핍박했던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바울은 깨닫게 되었고 이제는 초대 교회를 핍박하는 자가 아니라 초대 교회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서 자신의 인생을 전환하였습니다. 회심한 겁니다. 그 회심의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 어딥니까? 다메섹 도상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인생을 한 단어로 정리하자면 열정과 헌신입니다. 이 열정과 헌신으로 충만했던 사도 바울의 인생은 전반부가 있고 후반부가 있습니다. 그 전반부와 후반부를 가르는 터닝 포인트가 어디죠? 다메섹입니다. 그 다메섹 이전까지의 바울의 열정과 헌신은 분별없는 열정과 헌신, 다메섹 이후의 바울의 열정과 헌신은 분별 있는 열정과 헌신입니다. 그래서 이 다메섹 사건을 계기로 해서 바울의 인생은 완전히 전환되었다, 저는 우리의 인생에서도 이런 다메섹 사건들이 있다고 봅니다. 어떤 겁니까? 내 나름대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열정과 헌신을 다 쏟아내고 있는데 내가 행하는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때로는 내 인생에 다메섹 사건을 경험하면서 내 나름대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했던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었구나,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이거구나 라고 하는 깨달음, 깨우침, 자각 이런 것들을 갖게 되면서 신앙의 걸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낸다면 그것이 우리 인생에 허락된 다메섹 사건이라 봅니다. 이 사건을 경험하면서 바울이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었다 라고 하는 것을 유대 동족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23장부터 25장에 보면 바울의 재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재밌는 것이 뭐냐면 16장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 전도를 할 때 바울의 메시지 한 마디에 빌립보 간수는 주의 복음을 받아 들입니다. 23장부터 25장에 보면 굉장히 벨릭스라든가 베스도라든가 아그립바 왕이라든가 유대인들은 바울의 메시지를 오랜 시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거기서 우리가 뭘 알 수 있습니까? 복음을 받아들임에 있어 말씀을 접하는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진중한 마음으로, 존재를 다해서 그 말씀과 대면하느냐에 따라서 적은 시간 가운데 말씀과 대면한 사람도 존재의 획기적인 변화가 가능할 수 있고 오랜 시간 말씀을 접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존재의 변화가 더디게 일어나거나 아니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대면할 때 진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시간 내가 설교를 들었는가, 얼마나 오랜 세월 내가 QT를 했는가가 아닙니다. 말씀을 접하는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얼마나 존재를 다해 진심으로 대면했는가 라고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3장에 보면 산헤드린 공의회에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끌려왔을 때 바울이 가만 보니까 바울을 재판하는 사람들의 반은 사두개인이고 반은 바리새인인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어떤 전략을 쓰냐면 내가 왜 이런 고초를 경험하고 있냐, 내가 죽은 자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이런 고초를 경험하고 있다 이렇게 갑자기 얘기하니까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이 갑자기 들고 일어나면서 저 사람은 죄가 없다면서 바울을 두둔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바울을 중간에 세우고 갈등하는 이야기가 바로 23장에 나옵니다. 복음서 이야기 때도 말씀드린 것처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굉장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사회 경제적으로 중산층이 많고 바리새인들은 중하층들이 많습니다. 경제적으로 다릅니다. 두 번째 사두개인들은 주로 성전에서 사역하고 바리새인들은 지방의 회당에서 사역합니다. 사역을 행하는 곳이 다릅니다. 그다음에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바리새인들은 모세오경 뿐만 아니라 예언서와 성문서, 심지어 장로들의 유전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바리새인 같은 경우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뿐만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까지 플러스 알파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덧붙여서 무엇인가를 더 받아들이는 사람이라 볼 수 있고 사두개인 같은 경우는 모세오경 즉 토라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예언서나 성문서는 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감하여 취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 사두개인들은 부활이나 내세라든가 심판이나 영이나 이런 것들을 믿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차이가 뭐냐면 내세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바리새인이고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두개인입니다. 사두개인은 한 마디로 하자면 지금이 좋은 사람들인 겁니다. 현세가 좋은 사람들인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지금 내가 비록 이 땅에서 많은 것들을 누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세와 부활과 심판을 믿음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그다음 생에 우리에게 더 아름답고 멋진 삶을 허락해 주실 거야 이것을 믿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래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신앙이 달랐는데 바울은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자기를 재판하려고 하는 산헤드린 공의회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부활을 믿었던 바리새인들이 갑자기 바울을 옹호하면서 이 재판이 엉망진창이 되는 이야기가 23장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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