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간도 건강하셨습니까. 오늘은 사도행전 18장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의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바울은 대도시 중심의 전도를 행했다는 겁니다. 왜 바울이 대도시 전도를 행했냐면 바울이 갖고 있었던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사고 가운데 하나가 임박한 종말 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만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대다수 초대 교인들도 임박한 종말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곧 재림하신다고 했을 때 주님이 곧 재림하시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의 순결함을 강조했고 그다음에 주님이 곧 재림하시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영접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그리고 영향력이 보다 큰 대도시 중심으로 복음을 전한 겁니다. 그 가운데 한 곳이 데살로니가였고 그다음에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고린도, 19장에 보면 에베소 이것이 그 당시 가장 중요한 도시들입니다. 에베소 같은 경우에는 소아시아의 수도였고 고린도 같은 경우에는 그리스를 남부 그리스와 북부 그리스로 나눕니다. 남쪽 그리스를 보통 아가야 지방이라 하는데 이 아가야 지방의 수도가 고린도입니다. 그다음에 북부 그리스의 수도가 바로 데살로니가입니다. 이 남부 그리스를 아가야, 여기의 수도가 고린도, 북부 그리스를 마케도니아, 여기의 수도가 바로 데살로니가입니다. 바울이 주로 전도하였던 고린도라든가 데살로니가라든가 에베소라든가 이것이 다 대도시였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왜 바울은 대도시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는가. 바울이 갖고 있었고 대부분의 초대 교인들이 갖고 있었던 중요한 신학적 사고가 있었다, 그것이 임박한 재림 신앙이었다, 주님이 곧 이 땅에 오실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믿고 있었고 그래서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가 순결한 자세와 태도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해야 된다, 그리고 주님이 곧 재림하시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라도 더 열심히 주의 복음을 선포해야 된다, 그래서 보다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대도시, 보다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했던 것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17장에서는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와 아덴 전도를 보았고 18장에서는 고린도 전도를 합니다. 19장에서는 에베소 전도를 합니다. 특히 19장에 9~10절을 보시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를 할 때 2년 동안 두란노라는 서원을 만들어서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18장의 고린도,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 전도를 생각하실 때,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이방 지역 순회 전도자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지역에 들어간 다음에 주의 복음을 전하고 그 주의 복음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을 모아서 교회를 세우고 그리고 이 교회를 목회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그 교회를 맡긴 다음에 바울은 이방 지역을 순회하면서 주의 복음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이방 지역 순회 전도자였던 바울이 오랜 시간 동안 목회를 했던 두 교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18장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와 19장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입니다. 이방 지역 순회 전도자였던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목회했던 곳이 고린도, 그다음에 3년 동안 목회한 곳이 에베소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오랜 기간 동안 바울을 만났던 고린도 교회나 에베소 교회는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선교 사역을 후원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후에 우리가 바울 서신을 공부하면서 더 자세히 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전도 여행을 얘기할 때 바울의 중요한 선교 원칙이 뭐냐, 자비랑 사역이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후원을 받지 않고 자기가 직접 노동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조상 때부터 했던 노동이 뭐였죠? 천막을 만드는 겁니다. 텐트 메이커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낮에는 열심히 천막을 제조하는 일을 하고 그리고 저녁에는 주의 복음을 전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비랑 사역을 했다, 그리고 자비랑 사역이 바울 선교 원칙의 굉장히 중요한 지조인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선교 후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선교 후원을 받고 풀타임으로 주의 복음만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선교 후원을 했던 교회가 두 교회 밖에 없었습니다. 그 두 교회가 어딥니까?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합니다. 바울에게 선교 후원을 보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고 바울에게 선교 후원을 보냈던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과 짧게 만난 교회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방 지역 순회 전도자였던 바울이 오랜 기간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장기간 그들에게 말씀도 가르치고 목회했던 교회가 두 교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 18장의 고린도 교회와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 교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울과 오래 만난 고린도 교회와 에베소 교회는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선교 후원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입니다. 왜 그랬다고 했습니까? 바울은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신부된 교회를 곧 찾아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신랑을 맞이하기 위한 신부의 가장 중요한 자세가 순결함을 지켜내는 거라고 했습니다. 이 순결함이 어떻게 드러나는 겁니까? 일상의 삶에서는 신앙인다운 주의 제자로서의 삶으로, 그다음에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진실함과 거룩함과 순결한 삶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하지 않는 자들, 소위 이야기 하자면 사탄이 심어 놓은 가라지들, 이것들을 철저하게 뽑을 것을 명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교회 공동체 바깥으로 내어 쫓으라고 명합니다. 바울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징계를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출교당한 겁니다. 이렇게 징계와 출교를 받은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바울에 대해 악담을 하고 뒷담화를 했겠죠. 그래서 이 바울에 대한 굉장히 부정적인 여론들이 형성된 겁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바울이 목회했던 교회는 도리어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고 바울의 선교 사역을 후원하지 않는 역설적인 일이 벌어지게 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 18장의 고린도 교회와 19장의 에베소 교회입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에서 바울은 3년 동안 목회하면서 2년은 두란노라는 서원을 만들어서 주의 제자들에게 말씀을 철저하게 가르쳤습니다. 마치 뭐와 같은거죠?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무리들이 함께 있을 때는 비유로만 말씀하시다가 무리들이 빠지고 제자들만 있을 때는 그 비유에 대해 풀이를 해주면서 말씀하신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우기 원하는 자들에게 말씀으로 그들에게 무장시킨 겁니다. 이것이 나중에 20장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장 23절 이하를 보면 이 에베소에서 아데미 신상을 제작하던 은 세공업자들이 힘을 모아서 대규모 저항 운동을 펼칩니다. 지난 시간에 얘기한 것처럼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도래하게 될 때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될 때 기존의 체제와 기존의 질서를 고수하고자 하는 자들에 의해서 대규모 저항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 땅 가운데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건설되어 질 때는 기존의 체제와 기존의 문화와 기존의 질서를 지켜내고자 하는 자들의 무수한 저항, 반대, 핍박과 공격 이것들과의 끊임없는 충돌을 거친 이후에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가 이 땅 가운데 건설된다, 이것을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 땅 가운데 선포될 때 환영자도 있지만 무수하게 많은 반대자가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 로마 사회는 노예제 사회였습니다. 끊임없이 노예를 부려먹기 위해서 노예를 뭐라고 규정했냐면 노예는 인간의 말을 하는 짐승이다, 이렇게 노예를 규정해야 노예를 마음껏 부려먹어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노예에 대해 뭐라고 했습니까? 노예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다, 우리가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노예를 형제처럼 맞이해야 된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부장제가 지배하던 땅에서는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인 겁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됩니다. 순종해야 됩니다. 이것이 가부장제가 지배하고 있던 사회의 질서였고 문화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뭘 얘기하고 있습니까? 남자나 여자나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이고 남자와 여자는 상호 평등한 관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 되었다 이것을 교회가 선포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노예제 사회를 지켜내려고 하는 사람들, 가부장 질서를 고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만히 내어버려 두겠냐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될 때마다 기존의 질서나 체제나 문화를 사수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한 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기존 질서의 기득권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저항합니다. 그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 19장의 아데미 여신상을 제작했던 은장색들에 의한 에베소에서의 소동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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