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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게시한 그림들 모두는 인터넷에서 퍼왔습니다)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예수 이름으로 제일 첫 번째로 들렀던 전도여행지는 구브로섬(행 13:4∼4)이다. 구브로섬은 오늘날 키프로스(Cyprus)를 말한다. 키프로스(Cyprus)는 지중해에서 시실리(Sicily)와 사르디니아(Sardinia)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섬이며, 말타(Malta)섬 다음으로 1960년 8월 16일 탄생한 새로운 지중해의 섬 국가이다. 따라서 형식상으로는 키프로스 공화국(Republic of Cyprus)으로서 독립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1878년부터 1960년까지는 영국에게 식민 통치 당했었으나 1960년도에 독립했다. 그러나 오늘날 키프로스는 남북으로 분리되어 남쪽은 그리스 계통으로 북쪽은 터키 계통으로 갈라져 있다. 그래서 이전에는 국경을 넘어갈 수 없었으나 요즘에는 북키프로스에서 남키프로스로 입국은 안 돼도, 남키프로스에서는 북키프로스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구브로는 형식상으로는 터키도 아니고 그리스도 아니다. 정치도 독립되어있고, 구브로 파운드라는 독자적인 화폐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 수도는 니코시아(Nicosia)이다.
키프로스 국기 키프로스 자위방위군
그리스어와 터키어를 공용으로 사용하는데 다만, 영국이 지배했던 탓으로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하며 자동차도 영국처럼 좌측통행을 하고 있다. 1960년 독립 후에도 분쟁은 계속되어, 1963년 12월 분쟁이후 영국이 자체의 힘으로 구브로의 평화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유엔의 중재를 요청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로 1964년 3월에 6000명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다. 유엔군을 파송한 나라들은 영국, 캐나다,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호주, 아일랜드 등이었다. 1974년 터키 본토 군인들의 개입으로 문제가 더 복잡하게 되자, 유엔 평화유지군은 더욱 활동을 강화하였다. 남키프로스와 북키프로스 사이에는 완충지대가 있으며, 완충지대에는 유엔군과 농부들만 출입할 수 있다. 성경시대에 이곳은 직물과 황양목(도장나무), 상아로 유명했다.
살라미의 지중해식 예쁜 주택들
▪ 남키프로스 라르나카 국제공항
남키프로스 라르나카(Larnaca)는 국제공항이다.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대표적인 여름 휴양지로서 다국적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라르나카는 시내 바로 옆에 바닷가가 있어서 시차적응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바다에 바로 뛰어들 수도 있다. 키프로스는 세계적인 관광지여서 예전에는 돈을 적게 소지하면 입국이 거절된 경우도 있었단다.
세계적인 휴양지 살라미
▪ 남키프로스 라르나카 ; 나사로교회
남키프로스 라르나카에는 나사로교회가 있다. 교회 강단 옆 지하로 내려가면 나사로 무덤이 있는 석관이 있다. 성경에는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가 어디서 다시 죽었는지 기록이 없으나, 전승(傳承)에 의하면 베다니에서 예수님에 의해 다시 살아난 나사로로 말미암아 주변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시기하는 바리새인들이 나사로를 없애기 위해서 물이 새는 배에 나사로를 강제로 태워서 지중해로 떠내려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사로를 태운 배는 구브로섬에 도착했으며 나사로는 키티온(Kition=Larnaca)에서 전도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행 11:19에 보면, 스데반의 순교와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에, 박해를 피해 믿는 자들이 흩어지는 사건이 있었다. 이 흩어진 자들은 베니게와 안디옥, 그리고 여기 키프로스 섬으로 와서 기독교복음을 계속 전했다. 바로 그 즈음에 이미 죽었었던 인생이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소생케 되어 살게 된 나사로도 흩어지는 무리들 틈에 끼어서 여기까지 왔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남은 인생을, 예수님이 메시아요, 그리스도이심을 만방에 증거하며 살았을 것이다. 과정을 어땠든지 나사로가 구브로의 라르나카와 관련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라르나카, 나사로 기념교회
“나사로야 나오라” (요11:43)
그런 후, 구브로섬에 전도하러 온 바울과 바나바는 나사로를 라르나카(키티온)의 첫 감독(교회지도자)으로 안수했으며, 나사로는 여기서 30년 동안 목회와 전도활동을 하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나사로의 무덤 위에는 9세기에 비잔틴 황제 레오 6세(Leo VI)가 그리스 정교회를 세웠으며 17세기에는 건물을 다시 복구했다. 이 교회는 지금도 주일에 많은 예배자들이 참석하여 자리가 모자랄 정도이며 예배가 끝난 뒤에는 교회당 안에서 나사로의 무덤으로 내려가는 지하 통로를 통해서 나사로 무덤의 석관에 입을 맞추고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사로의 무덤 때문에 라르나카는 ‘제 2의 베다니’로 불리며, 나사로는 베다니와 라르나카, 이렇게 무덤을 두 개나 가진 인물이 되었다.
▪ 북키프로스 살라미 ; 바나바교회
구브로의 살라미(Salami)는 오늘날 북키프로스의 파무구스타(Famugusta)만에 위치했었던 고대도시다. 배타고 실루기아를 떠난 바울과 바나바가 여기에 도착했다. 살라미는 바나바의 고향이며, 1차 전도여행의 제1 도착지이다.
구브로의 살라미는 바보 항구와 함께 일찍이 베니게(페니키아)에 의해 건설된 곳이다. 그러나 BC 480년에 일어난 살라미스 해전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살라미'와 '살라미스', 지명이 비슷하지만 이곳 구브로의 살라미에서 살라미스 해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살라미스 해전이 일어난 살라미스(Salamis)는 그리스 본토의 아테네와 고린도 사이에 있는 해양도시를 말한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글을 보니까 많이들 혼동하는 것 같다.)^^ 다른 곳이다.
구브로의 살라미는 BC 400년경 에바고라스(Evagoras? BC 410∼373년)가 구브로의 태반을 지배한 후, 이곳 살라미를 수도로 정했다. BC 58년 로마의 속령이 됐고 상업도시로 번영하였다. 신약시대에는 섬의 수도를 바보(Paphos)에 넘겨줬다. AD 116년 유대인의 폭동이 일어나자 트라야누스 황제가 이곳을 초토화시켰고, 지진으로 다 파괴되었다. AD 648년 오스만튀르크에 다시 파괴된 이래 지금까지 폐허가 되었다. 현재는 야외극장과 고대 아치, 상당수의 현무암 원주기둥 등이 유적지로 남아 있다. 지금은 터키계의 이슬람 종교권의 사람들이 지배하며 다스리고 있다.
살라미스 고대 아치(arche)
살라미스 고대 유적지
현무암으로 만들어져 있는 고대 로마의 건축물 원주기둥 유적
살라미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바나바의 무덤이라고 생각되는 지하묘지(catacomb) 위에 1950년에 세워진 카롭(Carob) 나무 그늘에 덮인 작은 채플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바나바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은 AD 5세기에 비잔틴 황제의 재정지원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시련 속에서 파괴되었다가 1950년에 세워졌다가, 1980년도부터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었으며 박물관 안에는 바나바의 성화 등 많은 아이콘들(Icons)만이 있다.
살라미, 바나바기념교회, 현재는 박물관 정도로만 사용되고 있단다.
바나바는 이곳 살라미 출신으로 바울과 함께 자기 고향인 이곳에 와서 전도했고, 바나바의 말년인 AD 116년 유대인의 폭동 때 돌에 맞아 순교(殉敎),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이것은 현장에서 얻을 수 있는 성경 외적인 귀중한 정보들이다.
바나바 무덤 유적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 무덤 내부
수도원 안은 나사로 무덤교회와 같이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성화로 채워져 있다. 지하묘지로 내려가는 입구는 컴컴하여 손전등을 가지지 않으면 대낮에라도 내려갈 수 없을 정도다. 이슬람교가 지배하고 있는 북키프로스 파무구스타의 바나바의 무덤은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는 남키프로스에 있는 나사로의 무덤과는 달리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
안타깝게도 현재 이슬람의 모스크로 전용된 파무구스타성당
파무구스타 시내에는 심하게 파손되어 유적으로만 남은 기독교 교회들이 여러 개 있으며, 오스만 투르크계 이슬람인들이 지배하고 있는 터에,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 파무구스타의 한 성당은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된다. 아무도 말하지는 않지만, 모스크로 전용된 성당 건물이 ‘이제 여기는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예수 이름으로 제일 첫 번째로 들렀던 전도여행지는 구브로섬(행 13:4∼4)이다. 구브로섬은 오늘날 키프로스(Cyprus)를 말한다. 키프로스(Cyprus)는 지중해에서 시실리(Sicily)와 사르디니아(Sardinia)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섬이며, 말타(Malta)섬 다음으로 1960년 8월 16일 탄생한 새로운 지중해의 섬 국가이다. 따라서 형식상으로는 키프로스 공화국(Republic of Cyprus)으로서 독립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1878년부터 1960년까지는 영국에게 식민 통치 당했었으나 1960년도에 독립했다. 그러나 오늘날 키프로스는 남북으로 분리되어 남쪽은 그리스 계통으로 북쪽은 터키 계통으로 갈라져 있다. 그래서 이전에는 국경을 넘어갈 수 없었으나 요즘에는 북키프로스에서 남키프로스로 입국은 안 돼도, 남키프로스에서는 북키프로스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구브로는 형식상으로는 터키도 아니고 그리스도 아니다. 정치도 독립되어있고, 구브로 파운드라는 독자적인 화폐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 수도는 니코시아(Nicosia)이다.
키프로스 국기 키프로스 자위방위군
그리스어와 터키어를 공용으로 사용하는데 다만, 영국이 지배했던 탓으로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하며 자동차도 영국처럼 좌측통행을 하고 있다. 1960년 독립 후에도 분쟁은 계속되어, 1963년 12월 분쟁이후 영국이 자체의 힘으로 구브로의 평화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유엔의 중재를 요청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로 1964년 3월에 6000명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다. 유엔군을 파송한 나라들은 영국, 캐나다,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호주, 아일랜드 등이었다. 1974년 터키 본토 군인들의 개입으로 문제가 더 복잡하게 되자, 유엔 평화유지군은 더욱 활동을 강화하였다. 남키프로스와 북키프로스 사이에는 완충지대가 있으며, 완충지대에는 유엔군과 농부들만 출입할 수 있다. 성경시대에 이곳은 직물과 황양목(도장나무), 상아로 유명했다.
살라미의 지중해식 예쁜 주택들
▪ 남키프로스 라르나카 국제공항
남키프로스 라르나카(Larnaca)는 국제공항이다.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대표적인 여름 휴양지로서 다국적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라르나카는 시내 바로 옆에 바닷가가 있어서 시차적응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바다에 바로 뛰어들 수도 있다. 키프로스는 세계적인 관광지여서 예전에는 돈을 적게 소지하면 입국이 거절된 경우도 있었단다.
세계적인 휴양지 살라미
▪ 남키프로스 라르나카 ; 나사로교회
남키프로스 라르나카에는 나사로교회가 있다. 교회 강단 옆 지하로 내려가면 나사로 무덤이 있는 석관이 있다. 성경에는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가 어디서 다시 죽었는지 기록이 없으나, 전승(傳承)에 의하면 베다니에서 예수님에 의해 다시 살아난 나사로로 말미암아 주변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시기하는 바리새인들이 나사로를 없애기 위해서 물이 새는 배에 나사로를 강제로 태워서 지중해로 떠내려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사로를 태운 배는 구브로섬에 도착했으며 나사로는 키티온(Kition=Larnaca)에서 전도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행 11:19에 보면, 스데반의 순교와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에, 박해를 피해 믿는 자들이 흩어지는 사건이 있었다. 이 흩어진 자들은 베니게와 안디옥, 그리고 여기 키프로스 섬으로 와서 기독교복음을 계속 전했다. 바로 그 즈음에 이미 죽었었던 인생이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소생케 되어 살게 된 나사로도 흩어지는 무리들 틈에 끼어서 여기까지 왔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남은 인생을, 예수님이 메시아요, 그리스도이심을 만방에 증거하며 살았을 것이다. 과정을 어땠든지 나사로가 구브로의 라르나카와 관련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라르나카, 나사로 기념교회
“나사로야 나오라” (요11:43)
그런 후, 구브로섬에 전도하러 온 바울과 바나바는 나사로를 라르나카(키티온)의 첫 감독(교회지도자)으로 안수했으며, 나사로는 여기서 30년 동안 목회와 전도활동을 하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나사로의 무덤 위에는 9세기에 비잔틴 황제 레오 6세(Leo VI)가 그리스 정교회를 세웠으며 17세기에는 건물을 다시 복구했다. 이 교회는 지금도 주일에 많은 예배자들이 참석하여 자리가 모자랄 정도이며 예배가 끝난 뒤에는 교회당 안에서 나사로의 무덤으로 내려가는 지하 통로를 통해서 나사로 무덤의 석관에 입을 맞추고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사로의 무덤 때문에 라르나카는 ‘제 2의 베다니’로 불리며, 나사로는 베다니와 라르나카, 이렇게 무덤을 두 개나 가진 인물이 되었다.
▪ 북키프로스 살라미 ; 바나바교회
구브로의 살라미(Salami)는 오늘날 북키프로스의 파무구스타(Famugusta)만에 위치했었던 고대도시다. 배타고 실루기아를 떠난 바울과 바나바가 여기에 도착했다. 살라미는 바나바의 고향이며, 1차 전도여행의 제1 도착지이다.
구브로의 살라미는 바보 항구와 함께 일찍이 베니게(페니키아)에 의해 건설된 곳이다. 그러나 BC 480년에 일어난 살라미스 해전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살라미'와 '살라미스', 지명이 비슷하지만 이곳 구브로의 살라미에서 살라미스 해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살라미스 해전이 일어난 살라미스(Salamis)는 그리스 본토의 아테네와 고린도 사이에 있는 해양도시를 말한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글을 보니까 많이들 혼동하는 것 같다.)^^ 다른 곳이다.
구브로의 살라미는 BC 400년경 에바고라스(Evagoras? BC 410∼373년)가 구브로의 태반을 지배한 후, 이곳 살라미를 수도로 정했다. BC 58년 로마의 속령이 됐고 상업도시로 번영하였다. 신약시대에는 섬의 수도를 바보(Paphos)에 넘겨줬다. AD 116년 유대인의 폭동이 일어나자 트라야누스 황제가 이곳을 초토화시켰고, 지진으로 다 파괴되었다. AD 648년 오스만튀르크에 다시 파괴된 이래 지금까지 폐허가 되었다. 현재는 야외극장과 고대 아치, 상당수의 현무암 원주기둥 등이 유적지로 남아 있다. 지금은 터키계의 이슬람 종교권의 사람들이 지배하며 다스리고 있다.
살라미스 고대 아치(arche)
살라미스 고대 유적지
현무암으로 만들어져 있는 고대 로마의 건축물 원주기둥 유적
살라미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바나바의 무덤이라고 생각되는 지하묘지(catacomb) 위에 1950년에 세워진 카롭(Carob) 나무 그늘에 덮인 작은 채플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바나바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은 AD 5세기에 비잔틴 황제의 재정지원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시련 속에서 파괴되었다가 1950년에 세워졌다가, 1980년도부터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었으며 박물관 안에는 바나바의 성화 등 많은 아이콘들(Icons)만이 있다.
살라미, 바나바기념교회, 현재는 박물관 정도로만 사용되고 있단다.
바나바는 이곳 살라미 출신으로 바울과 함께 자기 고향인 이곳에 와서 전도했고, 바나바의 말년인 AD 116년 유대인의 폭동 때 돌에 맞아 순교(殉敎),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이것은 현장에서 얻을 수 있는 성경 외적인 귀중한 정보들이다.
바나바 무덤 유적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 무덤 내부
수도원 안은 나사로 무덤교회와 같이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성화로 채워져 있다. 지하묘지로 내려가는 입구는 컴컴하여 손전등을 가지지 않으면 대낮에라도 내려갈 수 없을 정도다. 이슬람교가 지배하고 있는 북키프로스 파무구스타의 바나바의 무덤은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는 남키프로스에 있는 나사로의 무덤과는 달리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
안타깝게도 현재 이슬람의 모스크로 전용된 파무구스타성당
파무구스타 시내에는 심하게 파손되어 유적으로만 남은 기독교 교회들이 여러 개 있으며, 오스만 투르크계 이슬람인들이 지배하고 있는 터에,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 파무구스타의 한 성당은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된다. 아무도 말하지는 않지만, 모스크로 전용된 성당 건물이 ‘이제 여기는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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