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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3차례 전도여행과 땔레야 땔 수 없는 곳이 바로 '수리아의 안디옥'이다.
수리아 안디옥은 지금의 '시리아의 안타키아(Antakya)'로, 시리아와 국경을 이룬, 터키 영토의 가장 남쪽지역이다.
지역 위치상 당연히 시리아로 속해야 할 지역이었지만 지역 주민들의 투표로 터키 영토가 되었다고 한다.
수리아의 안디옥과 사도바울 전도여행 당시의 지중해 주변 주요 지명들
셀레우코스 1세 [Seleukos I, BC 358 ?~BC 280] : 마케도니아의 귀족 안티오코스의 아들로 알렉산드로스대왕의 동방 정벌에 참가하였으며, 대왕이 죽은 뒤 바빌로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BC 321). 에우메네스와 싸워 한때 이집트로 피신하기도 하였다(BC 316). 그 후 옛 영토를 수복하고 이어 이란 ·박트리아 ·인도 북서부까지 원정하였으며, 찬드라굽타와도 교섭을 가졌다. 시리아 셀레우코스왕조의 시조가 되었고. BC 312년경부터 왕의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아르메니아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시리아왕국의 주인이 되었다. 마케도니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누스에게 암살당했다.
지금의 안타키아는 터키 남쪽 지방의 변두리 소도시에 불과하지만,
초대교회 시절엔 베드로와 바울 사도 등의 전도로 최초의 크리스천 공동체가 세워진 곳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나오게 된 도시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기독교가 전 세계에 전파되는 창구 역할을 하였다.
사도바울의 세계선교 전진기지 역할이 된 곳이다.
안디옥 출신으로 초대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사람은 제롬, 네스토리우스, 이그나티오스 등이 있다.
제롬(Jerome, 345?~419?)이란 이름은 영어식 표현이다. 라틴식 이름은 ‘히에로니무스(Eusebius Hieronymus)라고 부른다. 암브로시우스⋅그레고리우스⋅어거스틴과 함께 라틴시대의 4대 교부로 일컬어진다. 특히 헬라어 역본인 70인역 성경을 토대로 《시편》 등의 라틴어 역본(불가타성서)을 처음 개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네스토리우스 (Nestorius, ?~451 ?) :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마리아는 단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여인일 뿐, 마리아를 신격화 하는 것은 위험하다.’라는 비성모설(非聖母說)을 주장한 사람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키릴로스로부터 공격을 받았던 인물이다. 당시는 아직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던, 프로테스탄트가 일어나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키릴로스의 제소로 <에베소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정되었고, 해임과 추방이 결정된 비운의 사람이다. AD 451년경 그는 리비아의 사막에서 죽었다고 하나, 그의 가르침은 힘이 있어서 점점 늘어난 추종자들에 의해 소위 ‘네스토리우스파(派)’로서 이어졌다. 이 가르침은 후일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마리아의 비성모’를 따르게 된다.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 (Ignatius de Loyola, 1491~1556.7.31) : 에스파냐의 수도사로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를 창립하였다. 처음에는 군인으로서 세속적인 생활을 하였는데, 팜플로나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다. 병상에서 《그리스도전(傳)》과 《성인전》을 읽고서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만레사의 동굴에서 기도와 고행에 몰두하면서 내적 싸움과 신비적 조명을 경험하고 《심령수업 Exercitia spiritualia》을 썼으며, 후에는 예루살렘을 순례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려면 학문이 필요함을 깨닫고 32세 때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훗날 그가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하였을 때 F.사비에르, P.파베르 등 6명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이 후에 ‘예수회'라는 수도회로 발전하였다. 1540년 그는 예수회의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일대일제자훈련 방식으로 성도들을 양육하였고, 모임의 규칙, 즉 ‘회헌(會憲)’을 만듦으로써 예수회 그 기반을 다졌다. 그는 종교개혁으로 동요하고 있던 가톨릭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으려고 무진 노력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찬란했던 초대기독교회의 생명력은, AD 634년 아랍 이슬람이 안디옥을 정복하게 된 이후 오늘날까지
이슬람의 코란과 칼에 의해 숨통이 멎은 상태이고,
이곳 <안타키아>뿐만 아니라 터키, 시리아 등지에는 ‘살아있는 기독교’, ‘생명력 있는 기독교 문화’란 별로 남아 있는 게 없다.
동네마다 이슬람 모스크들은 엄청나게 많지만...........
도시에 쭉쭉 올라가 있는 이슬람의 모스크 탑들을 보라!
어쩌다가............
내가 남은 것을 본 것도, 초대교회의 믿음의 선조들이 남기고 간 유적(遺跡)들 밖에 없었다.
유적들 중의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베드로 암굴교회’였다.
가파른 산허리 커다란 바위들을 파서 자리 잡은 이 유적만이 유일한 기독교회의 흔적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부르던 ‘안디옥교회’는 없었다. ‘베드로 암굴교회’뿐이었다.
베드로 암굴교회 유적지 입구에서 인증샷!^^
베드로 암굴교회에서 위를 바라보자 산등성이에 바위를 파서 주거하며 신앙생활을 했던 동굴 집터들이 보였다.
사도행전 11:19~26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베드로 암굴교회를 향해 오르는 경사로에서 올리브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올리브 나무가 구부정하게 고개를 숙여 채 순례의 길을 오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인사하며 반겨주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베드로 암굴교회는 격동의 옛 시절을 그대로 간직한 채 순례객들을 영접한다. 산허리 자연동굴 외벽에 성곽처럼 쌓아올린 담장이 인상 깊고, 성문 같은 통로를 지나 단아한 석회암을 다듬어 쌓아놓은 교회당의 벽면은 3개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소박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어두컴컴한 교회당 안에 들어서며 한 발을 내 디디자 차츰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며 보이는 내부는 20여 평 남짓 했다. 이 ‘베드로 암굴교회’는 기독교가 박해를 받던 초대교회 시절에 지어졌고, 외경(베드로행전)에 의하면 베드로가 7년간 안디옥교회를 다스렸다고 한다.
베드로 암굴교회의 정면
베드로 암굴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엄숙해 질 수 밖에 없었다.
모여서 선교사님의 설명을 듣는다.
로마시대의 사자발톱과 화염처형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던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AD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끝내고,
사실상 정식 종교로 공인할 때까지만 해도 수리아의 안디옥은 기독교의 요람 역할을 했었다.
그러다가 이슬람을 앞세운 오스만 튀르크의 점령시대로 접어들면서
수리아 안디옥뿐만 아니라 터키 땅에서의 기독교는 돌덩이들만 남긴 채 잊히고 말았다.
암굴교회 내부에는 12~13세기 경, 십자군에 의해서 만들어진 고딕 양식의 교회 터와 기둥, 베드로와 바나바와 실라가 설교할 때 사용했을 법한 석좌(石座)와 돌 강대상, 그리고 돌 강대상 위로 바위벽을 움푹 파들어 가게 만든 곳에 작은 베드로 석상이 우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벽면에는 일부 모자이크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강대상 뒤에는 베드로 혹은 바울 사도 등, 교회지도자들께서 앉았을 돌로 만든 석좌다.
고대 유적이지만 기념촬영이 감히(?) 허락된다고 하여 나도 앉아 보았다.
강대상 위로는 훗날 베드로 사도를 기념하면서 세워진 동상이 하나 있다.
특별히, 전면 강대 왼쪽으로 하늘을 향하여 비스듬히 땅굴(비밀통로)이 뚫려있었는데, 그곳으로 들어서면 여러 갈래의 동굴이 나오고 어딘가의 지상으로 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핍박자나 이슬람 군사들이 들이닥치면 이 비밀통로로 연결된 근처 바위산 정상으로 피신하였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믿음의 성도들이 핍박을 피하여 도망하던 통로로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가이드 선교사님의 말을 들으며 초대교회의 영적인 시련을 느낄 수 있었다. 님들이 복음을 외치시며 지나가신 자리는 폐허라도 아름다웠지만, 신앙(믿음, 기도, 말씀, 전도)이라는 것이 결코 낭만, 혹은 감상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최소한 이분들에게 있어서의 신앙은 죽음을 무릅쓰는, 목숨을 거는 처절한 영육간의 투쟁이었던 것이다.
강대상 옆으로는 동굴의 여러 곳으로 통할 수 있는 비상구(?) 가 있었다
느닷없는 핍박을 피해 도망치는 통로로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기도 후, 사도 베드로께서 앉았을 것 같은 석좌에 나도 앉아보았다. 사진 몇 장 기념으로 찍고 암굴교회를 나오자 산 아래로 펼쳐진 안타키아의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높은 건물은 보이지 않았고 이슬람 모스크 첨탑들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모습이, 지금 이곳이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는 나라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터키는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하여 헌법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건 거짓 술책이다. 아직 이슬람과 칼리프제도의 영향력은 피부로 느껴질 만큼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과 터키인들의 의식 속에 아주 강하고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➀아직도 기독교 선교는 곳곳에서 엄한 제제를 받아야 하고, ➁선교사님들은 테러전담반에서 관리하고 있고, ➂실내외를 막론하고, 이슬람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찬송가도 제대로 부를 수 없으며, ➃기독교는 짓밟아야 하는 종교라는 인식이 팽배하며 ➄과거의 기독교회 건물은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방치되어 점점 훼손되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분명한 현실이다.
나는 목사다. 목사로서 이번 순례여행 내내, 아니 어떻게 그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기독교국가)의 배경을 바탕으로 1,000년의 생명력을 지속 했던 크리스천 공동체가 결국에는 무너지고, 멸망의 가증한 이슬람으로 싹 바뀌었는가? 그 원인이 도대체 무엇일까? 성지순례 내내 깊이 큐티 해야 했다.
레위기 26:13~18
13.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 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
14.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15. 내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내 법도를 싫어하여 내 모든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배반할진대,
17.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의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18. 또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호세아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그러나 어쨌든지, 초대교회 당시 수리아 안디옥교회는 성령님의 감동에 따라 금식하며 기도한 후에,
바나바와 사울(바울)에게 안수하고 이방 선교사로 파송한다. 저 위대한 전도여행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사도행전 13:1~3,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함..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 바울의 1차 전도여행 요약 (사도행전 13~14장)
▸ 함께 동행 했던 전도자 : 바나바. 마가요한
▸ 기간 : AD 46~48년 (약 3년 여간)
▸ 바울은 여기 수리아의 안디옥을 거점으로 1~2~3차 선교를 펼치다가 결국 마케도니아(서유럽)로 갔다. (서진서쪽으로 진행)
▸ 요한, 빌립, 도마, 바돌로매 등은 동쪽으로 가고(동진). 한국은 서진한 복음을 받아들인 기독교다.
▸ 그래서 한국선교도 가만히 보면, 중국→ 러시아→ 카자흐스탄→ 아르메니아→ 동유럽으로 계속 서진하고 있다.
‘땅 끝 전도’라는 말이 있다. 서진해서 예루살렘으로! 동진해서 예루살렘으로!
그러나 서진이든지 동진이든지 모두가 예루살렘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있다. 땅 끝이 예루살렘이다.
나는 신비감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경험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출처 : https://cafe.daum.net/ccm/6Km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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