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의 기본적 원리와 실제
본 글은 「하든 로빈슨」교수의 〈강해 설교의 원리와 실제〉에서 발췌한 글이다.
최근의 한국교회에 계속적으로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일 가운데 하나는 강해 설교의 소개라고 본다. 그동안 이 분야의 성공적인 설교가들을 해외로부터 불러와 그들의 성공사례를 듣고 웍샵도 가진바 있다. 그러나 학문적인 차원에서 깊이있게 강해설교를 다루는 책이 우리의 손에는 별로 없었다. 여기에 역자는 설교학 교수로서의 책임을 느끼면서 우수한 양서를 찾던 중 달라스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인 하든 로빈슨(Haddon W.Robinson)박사의 〈강해설교의 원리와 실제〉라는 책을 번역 출판한 바 있다. 여기에 실린 글은 독자들의 설교 사역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이 책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로빈슨 교수는 평소 말씀의 선포에 지극히 복음적인 견해를 가지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사실
그대로 전달할 것인지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학자이기도 하다.
●강해설교의 정의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정의를 통해서 때로는 그 사물의 진의(眞意)를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어떤 소년 하나가 개구리를 한 마리 잡아서 무엇이 개구리로 하여금 뛰게 만드는지를 알아보려고 토막토막 잘라보았다. 그러나 몸의 각 부분에 대해서는 무엇인가 배운 것이 있었으나 개구리의 생명은 죽이고 말았다. 설교는 하나님과 설교자와 회중이 다 함께 관련되는 하나의 살아있는 과정(aliving process)이다. 따라서 어떤 정의도 그 역동성(逆動性)을 그대로 나타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로서는 마땅히 정의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강해설교는 어떤 본문의 문맥에 맞는 역사적, 문법적, 문학적 연구를 통하여 얻어지고 전달되는 성서적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다. 성령은 그것을 먼저 설교자의 인격적 경험에 적용시키고 그 다음에 그를 통하여 그의 청중에게 적용시킨다.〉
위와 같은, 빈틈없으나 약간은 무미건조한 듯한 정의의 어느 부분을 강조해야 하는 것일까? 첫째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 기자의 생각 바로 그것이 강해설교의 기본내용(substance)을 결정짓는다는 점이다. 만은 설교의 경우 회중에서 읽어주는 성경 본문은 축구 경기를 시작할 때 연주되는 국가(國歌)와 비슷하다. 다시 말하면 시작할 때 잠시 들리고는 오후 내내 다시는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몽고메리(R.H.Montgomery)가 묘사한 대로 강해설교에서 「설교자는 다른 사람이 최근의 베스트 셀러를 읽을 때 도취되는 것처럼 특정한 (성경) 본문에 도취된다. 그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어떤 특정한 본문이 주는 메시지를 회중에게 전하는 것이다.」
강해설교는 방법보다는 원리를 더 강조한다. 어떤 사람이 강해설교를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그의 목적이 무엇인가 또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그의 정직한 대답은 어떤 것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즉 「당신은 설교자로서 당신의 생각을 성경말씀에 복종시키려고 하는가? 아니면 당신의 생각을 주장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사용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에 솔직히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이 질문은 「당신이 하는 설교는 정통적인가 복음적인가?」하는 질문과 동일한 질문이 아니다. 또 「당신은 성서가 가르치는 고상한 진리를 견지하고 있는가? 라거나 당신은 하나님의 무오성(無誤性)을 믿는가?"라는 질문과도 전혀 다르다. 이러한 질문들이 다른 곳에서는 매우 중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조직신학 점수를 잘 받아냈다고 해서 성서 강해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는 없다. 신학은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인 해석에 빠지는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여 성서 말씀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성경말씀을 해석하려는 사람은 본문 말씀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성경말씀을 해석하려는 사람은 본문 말씀을 본문 말씀을 대할 때에 기꺼이 자신의 신학적 신념을 재검토하여 자기의 가장 존경하는 스승의 판단까지도 거부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전의 성서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성서기자의 개념과 상충된다고 한다면 언제라도 180도 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서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단순성과 고도의 지성(sophistication)을 요구한다. 한편으로 성서 강해자는 성서를 대할 때 본문의 이야기를 다시 들으려는 어린애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때 그는 증명
을 하거나 요점을 찾거나 설교를 얻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읽어서 이해하고 이해한 것을 생활로 옮기면 된다. 그러나 동시에 강해자는 자신이 어린애가 아니라 선입견과 이해를 어렵게 하는 세계관에 사로잡혀 사는 어른임을 알아야 한다. 성서는 아이들의 이야기 책이 아니라 깊은 사고를 거친 응답을 요구하는 위대한 문헌이다. 성서의 모든 보화는 꽃을 꺾듯이 쉽게 꺼내어 가라고 표면에 노출되어 있지를 않다. 성서의 풍요함은 고도의 지적 작업과 영적준비를 통해서만 개발되는 것이다.
위에서 내린 정의는 강해자가 하나의 개념을 전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일부 보수적인 설교가들은 그들의 성서 영감론 때문에 길을 잘못 들어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해 왔다. 정통 신학자들은 성령께서 원전의 한 말씀 한 말씀을 보호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맡은 관념이 만들어내는 자료라고 한다. 그러므로 쓰인 단어 하나 하나가 영감으로 되어 있지 않는 한 거기에서 만들어진 관념도 오류를 피할 수 없다고 한다. 성서의 권위는 복음적 강령에서 결코 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이것이 강해설교를 방해한다. 물론 설교자는 본문에 나오는 단어들을 연구하고 때로는 특정한 단어들을 설교에서 다루기도 한다. 그러나 단어나 구절이 본질적으
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단어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다른 단어들과 연관을 맺지 않는 한 맹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대할 때 우리는 먼저 개개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그 본문을 기록한 성서 기자가 그 단어를 통하여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본문의 단어들을 분석해 냈다고 해서 본문이 전하는 개념들을 올바로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단어 하나 하나를 문법적으로만 분석해 낸다면 그것은 사전을 읽는 것만큼이나 요점도 없고 지루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강해자가 성서를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면 그는 마땅히 착상의 수준(the level of ideas)에서 그렇게 하여야 한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는 그의 책 〈참된 여성〉(True Spirituality)한 큰 전투가 사상의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착상은 사상 세계의 바탕이다. 관념으로부터 모든 세계의 바탕이다. 관념으로부터 모든 현상계(現象界)의 사물이 생성된다. 미술·음악·건축이나 현실적인 사람들의 사랑과 미움은 물론 현상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반역의 결과까지도 관념으로부터 형성된다. 어떤 사람이 영원을 어디에서 보낼 것이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복음의 내용을 기초로 삼아 하나님을 믿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사기군이라고 부르거나 간에……복음이 전하는 관념 곧 복음의 전제적(前提的) 진리와 복음이 전하는 사실들을 읽거나 듣는데 달려 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관념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 관념은 하나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그대로 사람에게도 전달되는 인화성(引火性)있는 관념들이다. 변화를 일으키는 관념은 내적으로 받아들여지기만 하는 공허한 경험이 아니라 내적으로 역사하는 의미있는 관념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교리를 논할 때 그것은 관념들로 구성되어야지 단순히 어법
(語法)에만 맞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교리를 마치 난문제를 해결하는 기계의 부품처럼 사용할 수는 없다. 참된 교리는 하나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계시해 주신 하나의 관념이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대로의
현상 세계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대로의 사람에게 꼭 알맞으며, 사람의 육체를 통하여 그의 사상세계에 전달되어 거기에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관념인 것이다. 인간을 위한 전투는 사상세계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강해설교의 본질적인 찰상을 강조한다고 해서 본문에 나오는 어휘나 문법의 중요성을 결코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내린 정의는 강해설교에서의 관념은 「어떤 본문의 문맥에 맞는 역사적 문법적 문학적 연구를 통하여 얻어지고 전달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먼저 어떻게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가를 다루어야 한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문법과 역사와 문학적 양식(form)에 대한 연구를 요한다. 본문을 연구할 때 강해자는 먼저 본문의 언어와 배경과 상황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그 본문의 객관적 의미를 탐구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는 설교단에 올라가서 충분한 연구 결과로 얻어진 메시지를 회중에게 선포함으로써 듣는 사람 하나 하나가 스스로 그 해석을 확인하라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설교의 배후에 있는 권위는 설교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강해자는 주로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을 다룸으로써 듣는 사람들의 주의를 성경에 집중시키게 된다. 어떤 강해자는 그의 주석적 능력과 충실한 준비로 인하여 존경을 받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자질이 그를 변모시켜 절대권위(絶對權威, ex cathedra)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개신교 교황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헨리 데이비드 드로우(Henry David Thoreau)의 말처럼 「진리를 전하는 데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말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듣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진리라고 하더라도 이 두 가지가 없이는 전해질 수가 없다. 따라서 회중이 많아지더라도 회중 한 사람 한 사람
이 그 진리를 들어야 그 진리는 바로 전해질 수 있다. 「훌륭한 시인들이 있으려면 훌륭한 청중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윌트 휘트먼(Walt Whitman)은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효율적인 강해설교는 들
을 귀를 가진 청중을 필요로 한다. 듣는 사람들의 영혼이 그 설교에 달려 있으므로 설교자는 신자들이 듣고 있는 그것이 바로 성서가 실지로 말씀하고 있는 그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회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설교자를 이해하려고 힘써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설교자 자신은 성서 기자들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의미들의 만남'을 뜻한다.
시공간적(時空間的) 거리를 넘어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려면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져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언어, 문화, 같은 세계관,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려면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져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언어, 문화 같은 세계관, 커뮤니케니션의 형태 등이 그것이다. 강해자는 성서 기자들이 앉아 있던 그곳으로 자기 의자를 끌어올려야 한다. 그는 성경 본문이 기록되던 그 세계 속으로 되돌아가서 그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강해자 자신이 모든 언어, 역사, 성서기자들의 문학양식 등을 완전 습득할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이루어놓은 연구 결과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자기에게 이용 가능한 성
서해석을 위한 광범위한 자료를 서재에 갖추고 있어야 한다. 가능한 한 강해자는 성서 기자들과 당시에 그들이 가졌던 착상들(ideas)에 대한 직접적인 조예가 있어야 한다.
앞에서 내린 강해설교의 정의는 계속해서 얻어진 진리가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설교라는 과정의 중심에 두고 계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그 메시지와 분리될 수가 없다. 어느 경건한 성도가 설교에 앞서 드리는 〈우리 목사를 십자가 뒤에 감추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를 보지 말게 하시고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듣지 못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우리는 그러한 기도 정신을 칭송한다. 모든 성도는 설교자를 지나서(pass) 주님(the Savior)께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아니면 아마 주님께서 설교자를 지나서 사람들에게 오지 않으면 안 되리라!). 그러나 문제는 설교자가 숨을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커다란 설교단마저도 그를 볼 수 없도록 감추어 주지는 못한다.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가 설교를 「인격을 통해 부어지는 진리」라고 묘사했을 때 그는 훌륭한 점을 지적하였다. 설교자의 사람됨이 그의 메시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는 성서적 진리를 외치면서도 녹음장치로부터 흘러나오는 전화 목소리 만큼이나 비인격적일 수도 있고, 라디오 상업광고만큼이나 피상적일 수도 있으며 사기군만큼이나 능란한 말
재주를 피울 수도 있다. 그러나 청중은 설교를 듣지 않고 그의 사람됨을 듣는 법이다.
윌리엄 콰일(William A.Quayle) 주교는 설교학에 대한 표준적 정의를 거부할 때 이 점을 마음에 두고 있다. 「설교는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고 그것을 전하는 기술인가?」라고 그는 물었다. 그리고는 「아니다.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설교는 한 사람의 설교자를 만들고 그를 전하는 기술이다!」라고 했다.
강해설교는 한 사람의 원숙한 크리스찬으로 발전시켜 준다. 다시 말해서 강해자가 성서를 연구할 때 성령께서는 그를 탐구하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강해설교를 준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준비시켜 주시는 것이다. 폴사이드(P.T.Forsyth)의 말처럼 「성서는 설교자를 향한 최상의 설교자」인 것이다.
'한 편의 설교를 얻기 위해 성서를 연구하는 것과 자신의 영혼의 양식으로서 성서를 연구하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점이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요 오도(誤導)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학자가 성서를 히브리 시로 또는 오래 전에 죽은 왕들의 탄생과 통치에 대한 기록으로 연구하면서 아직도 그것이 전하는 진리에는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펼쳐드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러한 분리는 있을 수 없다. 성서의 메시지를 다른 사람에게 선포하기 전에 그 자신이 그 메시지를 가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자로서 실패하기 이전에 크리스찬으로서 실패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성서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당히 많은 목회자들이 - 그
들 중의 상당수는 성경 본문을 매우 중시한다고 고백하는데 - 전혀 성경을 염두에 두지도 않고 설교를 준비한다. 성서 본문은 설교를 위한 전채(前采:식욕을 돋구기 위해 식사 전에 먹는 음식-역자 주)나 그 메시지를 장식하는 장식품 정도의 역할을 하는 반면 그 설교의 주류는 설교자 자신의 생각이나 그런 경우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어떤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강해설교자는 표지가 붙은 설교에서 조차도 본문은 설교자 자신의 견해를 펴기 위한 발사대(發射臺) 정도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설교학이라 불리우는 요리 책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조리법은 이렇게 씌어 있다. 「몇 개의 신학적 또는 도덕적 상투어를 택하여 '헌신'이나 '전도' 또는 '청지기적'이라는 말과 적당히 섞어라. 그리고는 '천국'이나 '성경에 말씀하기를'이라는 말을 몇 번 사용해라. 그것을 선택된 예화에 집어넣어 적당히 휘저은 다음 기호에 따라 '구원'이라는 말을 덧붙여라. 그리고 성경 본문의 접시에 담아 따뜻할 때 내놓아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설교는 신도들을 영양부족 상태에 빠뜨릴 뿐 아니라 더욱 나쁜 것은 설교자 자신을 굶주리게 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아무 것도 먹여주실 것이 없기 때문에 설교자 자신이 자라지를 못한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목회자의 생활에서 영적 영양실조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였다. 「사람이 자기 정신을 이완시켜 태만에 빠지게 하고 맥이 빠지게 하면 할수록 성령께서 그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줄어든다. 참된 설교는 사랑으로 가득 찬 가슴과 훈련된 정신이 성령의 뜻대로 쓰일 수 있도록 되었을 때 나오는 법이다.」2) 궁극적으로 하나
님께서는 메시지보다는 그 메시지를 전하는 사자(使者)들을 계발하는데 더 관심을 가지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주로 성서를 통하여 사람들과 만나시기 때문에 설교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말씀을 전하기 이전에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의 진리를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시킬 뿐 아니라 우리의 정의에 따르면 성령께서는 그 다음으로 그 진리를 그를 통하여 그의 청중에게 적용시킨다. 강해자는 세 자기 면에서 생각을 하게 된다.
첫째로, '주석가'(exegete)로서 그는 성서기자들이 가졌던 의미들을 찾고자 노력한다. 다음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격적으로 어떻게 변화시키고자 하시는지 하는 문제로 고심한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로서의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회중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적용을 통하여 강해설교의 목적이 분명해진다. 한 사람의 목자로서 강해자는 자기 양 떼의 아픔과 울음과 공포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므로 그는 성서를 연구하되 슬픔과 죄책감과 의심에 빠져 있고 죽음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연구한다. 바울은 디모에에게 성경말씀이 적용을 위하여 주어졌음을 상기시켜 준다. 바울에 따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믿음을 가르치고 과오를 바로 잡으며 삶의 방향으로 다시 잡아주고 선한 삶을 살도록 훈련하는 데 유익하다. 그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보여주며 그로 하여금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충분히 적합하도록 해준다」- 필립스 열) (딤후 3:16∼17).
선명치 못한 강해설교는 보통 창조적인 적용이 모자란다. 지루한 설교는 두 가지 중요한 불평을 야기한다.
둘째로 회중들은 「언제나 꼭 같은 옛날 그대로야!」하면서 투덜거린다. 설교자가 어떤 본문이든 간에 꼭 같은 거나 더 좋지 못한 적용을 하든지 말이다. 자기의 설교가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어림짐작조차 못하는 사람이 주문(呪文)처럼 「성령께서 이 진리를 우리들의 삶 속에 적용시켜 주옵소서」하고 중얼거린다.
세 번째 부정적 반응은 설교가 현실 생활에 적용될 수 있을 만큼 직접적으로 이 세상살이와 관련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 말은 옳은 말이야. 그렇지만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반응이다. 결국 어떤 사람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기로 결심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교회당 밖에서의 별 다름 없이 정상적인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교회 밖에서는 사람들이 실직을 하고 자녀에 대해 염려하며 잔디밭에 파고들어 오는 바랭이 풀을 발견한다. 정상적인 사람이 여부스 족속이나 가나안 족속이나 브리스 족속 때문에 잠을 설치는 일은 별로 없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바울이 한 말이나 일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들은 오히려 잡다한 세상 일로 걱정하며 잠을 못 이룬다. 구멍가게의 물가, 농작물의 실패, 여자 친구와의 말다툼, 악성 질환이라는 진단, 성생활에서 오
는 좌절, 끝도 없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생활 등이 잠을 설치게 만든다. 만일 설교가 이러한 세상살이에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냐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옛날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강해설교를 하는 사람은 성서로부터 역사나 고고학에 관한 강의를 하는 대신 성서로부터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관해서 배우도록 해야 한다. 회중은 유다나 베드로나 솔로몬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심판하기 위하여 모인 배심우언 들이어야 한다. 강해자는 자기의 메시지만큼이나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본문을 주석할 뿐 아니라 회중을 연구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들의 현재의 모습 그대로 그리고 현재 있는 그곳에서 말씀하신다.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가 전해지는 동안 잘못되어 빌립보에 사는 크리스찬
들에게 전해졌다고 상상해 보라.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이 언급할 특별한 문제들로 인하여 당혹에 빠질 것이다. 그들은 고린도에 사는 형제들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살았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의 서신들은 구약성서의 예언서들과 마찬가지로, 특수한 문제들로 고민하던 특수 집단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오늘날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역시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그들에게 독특한 정신자세가 있음을 설교자가 모른다고 한다면 강해설교라고 하더라도 효과는 없을 것이다.
효과적인 적용을 위해서 강해자는 신학과 윤리학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석작업에서 적용의 단계로 넘어갈 때 그는 실제 생활과 관련되어 있고 때로는 난처하게 하는 문제들을 다루어야 한다. 문법적 연구는 물론 인격적이고 심리적인 면에서의 연구도 하여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은 서로서로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그 기사에 관련되어 있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스쳐갔던가? 이러한 질문들은 하나님께서 마치 '옛날 어느 한 때'에 살던 사람들만을 섭리하신 것처럼 '거기에 그때'에만 관련되어서는 안 된다. 꼭 같은 질문이 '여기에 지금'에도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상호간에 어떤 관계를 맺고 살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이와 꼭 같은 문제들을 가지고 우리들을 어떻게 대하시는가? 현대 세계는 성서시대의 세계와 어떤 점에서 비교되며 또 대비를 이루는가? 성경 본문에서 다루어진 문제들은 사람들이 오늘도 묻고 있는 질문인가? 그런 질문들은 그때와 같은 방법으로 제출되는가 아니면 다른 형태로 주어지는가? 이러한 탐구는 윤리학과 신학의 현장적 원료(raw material)가 된다. 강해설교를 좀더 의미있게 해보려고 억지로 적용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문제들을 회피하는 것이며 우리 프로테스탄트 선조들의 다음과 같은 금언을 무시하는 것이다. '교리는 반드시 실천할 수 있도록 설교되어야 하고 기독교인의 본문은 반드시 교리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부적당한 적용은 맞지 않는 주석만큼이나 파괴적일 수 있다.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할 때 성경 말씀을 잘못 악용함으로써 승리를 거두고자 하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시험하는 자는 놀랄 만큼 정확하게 시편 91편의 말씀을 귓가에 속삭였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 91:11∼12). 그 다음에 사탕은 추리를 계속하였다. "너는 이 위대한 약속을 받았으니 성전 꼭대기에 뛰어내려 단 한 번에 네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실증해 보여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러한 마귀를 물리치실 때 예수는 히브리 본문의 문법으로 싸우지 아니하셨다. 대신에 그는 시편 91편의 말씀을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일에 적용하는 것을 공격하셨다. 다른 성경구절이 그 상황에 더 적절한 것이었다. "너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우리는 소설가와 칼럼니스트와 극작가의 말을 들으며 살고 있는 세상을 향하여 설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그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한다면 우리들의 설교를 듣고 있는 그들은 머리 속에서 정통이나 행동으로는 이단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세속세계를 향한 설교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거기에서 세속적인 말을 전해서는 안 된다. 성서적 관념은 인간의 경험으로 이해되게끔 만들어져야 하고 사람은 그 성서적 진리를 따르도록 가르쳐야 한다. '의미 있는 설교'(relevant sermons)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늘의 상황을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에 관련지어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설교단에서나 필요한 유희에 불과할 것이다.
메이어(F.B.Meyer)는 성서에 입각한 설교자가 자기 시대의 문제를 언급할 때 가지는 외경감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는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 그리고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은 청교도 조상들의 목사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성서 강해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사로운 해석이나 불확실한 설명일 수 있는 자기 자신의 특별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바탕을 두고 '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는 말로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면서 그들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본 글은 「하든 로빈슨」교수의 〈강해 설교의 원리와 실제〉에서 발췌한 글이다.
최근의 한국교회에 계속적으로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일 가운데 하나는 강해 설교의 소개라고 본다. 그동안 이 분야의 성공적인 설교가들을 해외로부터 불러와 그들의 성공사례를 듣고 웍샵도 가진바 있다. 그러나 학문적인 차원에서 깊이있게 강해설교를 다루는 책이 우리의 손에는 별로 없었다. 여기에 역자는 설교학 교수로서의 책임을 느끼면서 우수한 양서를 찾던 중 달라스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인 하든 로빈슨(Haddon W.Robinson)박사의 〈강해설교의 원리와 실제〉라는 책을 번역 출판한 바 있다. 여기에 실린 글은 독자들의 설교 사역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이 책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로빈슨 교수는 평소 말씀의 선포에 지극히 복음적인 견해를 가지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사실
그대로 전달할 것인지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학자이기도 하다.
●강해설교의 정의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정의를 통해서 때로는 그 사물의 진의(眞意)를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어떤 소년 하나가 개구리를 한 마리 잡아서 무엇이 개구리로 하여금 뛰게 만드는지를 알아보려고 토막토막 잘라보았다. 그러나 몸의 각 부분에 대해서는 무엇인가 배운 것이 있었으나 개구리의 생명은 죽이고 말았다. 설교는 하나님과 설교자와 회중이 다 함께 관련되는 하나의 살아있는 과정(aliving process)이다. 따라서 어떤 정의도 그 역동성(逆動性)을 그대로 나타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로서는 마땅히 정의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강해설교는 어떤 본문의 문맥에 맞는 역사적, 문법적, 문학적 연구를 통하여 얻어지고 전달되는 성서적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다. 성령은 그것을 먼저 설교자의 인격적 경험에 적용시키고 그 다음에 그를 통하여 그의 청중에게 적용시킨다.〉
위와 같은, 빈틈없으나 약간은 무미건조한 듯한 정의의 어느 부분을 강조해야 하는 것일까? 첫째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 기자의 생각 바로 그것이 강해설교의 기본내용(substance)을 결정짓는다는 점이다. 만은 설교의 경우 회중에서 읽어주는 성경 본문은 축구 경기를 시작할 때 연주되는 국가(國歌)와 비슷하다. 다시 말하면 시작할 때 잠시 들리고는 오후 내내 다시는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몽고메리(R.H.Montgomery)가 묘사한 대로 강해설교에서 「설교자는 다른 사람이 최근의 베스트 셀러를 읽을 때 도취되는 것처럼 특정한 (성경) 본문에 도취된다. 그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어떤 특정한 본문이 주는 메시지를 회중에게 전하는 것이다.」
강해설교는 방법보다는 원리를 더 강조한다. 어떤 사람이 강해설교를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그의 목적이 무엇인가 또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그의 정직한 대답은 어떤 것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즉 「당신은 설교자로서 당신의 생각을 성경말씀에 복종시키려고 하는가? 아니면 당신의 생각을 주장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사용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에 솔직히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이 질문은 「당신이 하는 설교는 정통적인가 복음적인가?」하는 질문과 동일한 질문이 아니다. 또 「당신은 성서가 가르치는 고상한 진리를 견지하고 있는가? 라거나 당신은 하나님의 무오성(無誤性)을 믿는가?"라는 질문과도 전혀 다르다. 이러한 질문들이 다른 곳에서는 매우 중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조직신학 점수를 잘 받아냈다고 해서 성서 강해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는 없다. 신학은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인 해석에 빠지는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여 성서 말씀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성경말씀을 해석하려는 사람은 본문 말씀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성경말씀을 해석하려는 사람은 본문 말씀을 본문 말씀을 대할 때에 기꺼이 자신의 신학적 신념을 재검토하여 자기의 가장 존경하는 스승의 판단까지도 거부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전의 성서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성서기자의 개념과 상충된다고 한다면 언제라도 180도 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서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단순성과 고도의 지성(sophistication)을 요구한다. 한편으로 성서 강해자는 성서를 대할 때 본문의 이야기를 다시 들으려는 어린애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때 그는 증명
을 하거나 요점을 찾거나 설교를 얻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읽어서 이해하고 이해한 것을 생활로 옮기면 된다. 그러나 동시에 강해자는 자신이 어린애가 아니라 선입견과 이해를 어렵게 하는 세계관에 사로잡혀 사는 어른임을 알아야 한다. 성서는 아이들의 이야기 책이 아니라 깊은 사고를 거친 응답을 요구하는 위대한 문헌이다. 성서의 모든 보화는 꽃을 꺾듯이 쉽게 꺼내어 가라고 표면에 노출되어 있지를 않다. 성서의 풍요함은 고도의 지적 작업과 영적준비를 통해서만 개발되는 것이다.
위에서 내린 정의는 강해자가 하나의 개념을 전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일부 보수적인 설교가들은 그들의 성서 영감론 때문에 길을 잘못 들어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해 왔다. 정통 신학자들은 성령께서 원전의 한 말씀 한 말씀을 보호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맡은 관념이 만들어내는 자료라고 한다. 그러므로 쓰인 단어 하나 하나가 영감으로 되어 있지 않는 한 거기에서 만들어진 관념도 오류를 피할 수 없다고 한다. 성서의 권위는 복음적 강령에서 결코 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이것이 강해설교를 방해한다. 물론 설교자는 본문에 나오는 단어들을 연구하고 때로는 특정한 단어들을 설교에서 다루기도 한다. 그러나 단어나 구절이 본질적으
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단어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다른 단어들과 연관을 맺지 않는 한 맹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대할 때 우리는 먼저 개개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그 본문을 기록한 성서 기자가 그 단어를 통하여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본문의 단어들을 분석해 냈다고 해서 본문이 전하는 개념들을 올바로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단어 하나 하나를 문법적으로만 분석해 낸다면 그것은 사전을 읽는 것만큼이나 요점도 없고 지루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강해자가 성서를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면 그는 마땅히 착상의 수준(the level of ideas)에서 그렇게 하여야 한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는 그의 책 〈참된 여성〉(True Spirituality)한 큰 전투가 사상의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착상은 사상 세계의 바탕이다. 관념으로부터 모든 세계의 바탕이다. 관념으로부터 모든 현상계(現象界)의 사물이 생성된다. 미술·음악·건축이나 현실적인 사람들의 사랑과 미움은 물론 현상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반역의 결과까지도 관념으로부터 형성된다. 어떤 사람이 영원을 어디에서 보낼 것이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복음의 내용을 기초로 삼아 하나님을 믿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사기군이라고 부르거나 간에……복음이 전하는 관념 곧 복음의 전제적(前提的) 진리와 복음이 전하는 사실들을 읽거나 듣는데 달려 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관념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 관념은 하나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그대로 사람에게도 전달되는 인화성(引火性)있는 관념들이다. 변화를 일으키는 관념은 내적으로 받아들여지기만 하는 공허한 경험이 아니라 내적으로 역사하는 의미있는 관념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교리를 논할 때 그것은 관념들로 구성되어야지 단순히 어법
(語法)에만 맞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교리를 마치 난문제를 해결하는 기계의 부품처럼 사용할 수는 없다. 참된 교리는 하나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계시해 주신 하나의 관념이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대로의
현상 세계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대로의 사람에게 꼭 알맞으며, 사람의 육체를 통하여 그의 사상세계에 전달되어 거기에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관념인 것이다. 인간을 위한 전투는 사상세계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강해설교의 본질적인 찰상을 강조한다고 해서 본문에 나오는 어휘나 문법의 중요성을 결코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내린 정의는 강해설교에서의 관념은 「어떤 본문의 문맥에 맞는 역사적 문법적 문학적 연구를 통하여 얻어지고 전달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먼저 어떻게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가를 다루어야 한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문법과 역사와 문학적 양식(form)에 대한 연구를 요한다. 본문을 연구할 때 강해자는 먼저 본문의 언어와 배경과 상황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그 본문의 객관적 의미를 탐구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는 설교단에 올라가서 충분한 연구 결과로 얻어진 메시지를 회중에게 선포함으로써 듣는 사람 하나 하나가 스스로 그 해석을 확인하라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설교의 배후에 있는 권위는 설교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강해자는 주로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을 다룸으로써 듣는 사람들의 주의를 성경에 집중시키게 된다. 어떤 강해자는 그의 주석적 능력과 충실한 준비로 인하여 존경을 받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자질이 그를 변모시켜 절대권위(絶對權威, ex cathedra)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개신교 교황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헨리 데이비드 드로우(Henry David Thoreau)의 말처럼 「진리를 전하는 데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말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듣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진리라고 하더라도 이 두 가지가 없이는 전해질 수가 없다. 따라서 회중이 많아지더라도 회중 한 사람 한 사람
이 그 진리를 들어야 그 진리는 바로 전해질 수 있다. 「훌륭한 시인들이 있으려면 훌륭한 청중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윌트 휘트먼(Walt Whitman)은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효율적인 강해설교는 들
을 귀를 가진 청중을 필요로 한다. 듣는 사람들의 영혼이 그 설교에 달려 있으므로 설교자는 신자들이 듣고 있는 그것이 바로 성서가 실지로 말씀하고 있는 그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회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설교자를 이해하려고 힘써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설교자 자신은 성서 기자들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의미들의 만남'을 뜻한다.
시공간적(時空間的) 거리를 넘어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려면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져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언어, 문화, 같은 세계관,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려면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져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언어, 문화 같은 세계관, 커뮤니케니션의 형태 등이 그것이다. 강해자는 성서 기자들이 앉아 있던 그곳으로 자기 의자를 끌어올려야 한다. 그는 성경 본문이 기록되던 그 세계 속으로 되돌아가서 그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강해자 자신이 모든 언어, 역사, 성서기자들의 문학양식 등을 완전 습득할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이루어놓은 연구 결과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자기에게 이용 가능한 성
서해석을 위한 광범위한 자료를 서재에 갖추고 있어야 한다. 가능한 한 강해자는 성서 기자들과 당시에 그들이 가졌던 착상들(ideas)에 대한 직접적인 조예가 있어야 한다.
앞에서 내린 강해설교의 정의는 계속해서 얻어진 진리가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설교라는 과정의 중심에 두고 계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그 메시지와 분리될 수가 없다. 어느 경건한 성도가 설교에 앞서 드리는 〈우리 목사를 십자가 뒤에 감추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를 보지 말게 하시고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듣지 못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우리는 그러한 기도 정신을 칭송한다. 모든 성도는 설교자를 지나서(pass) 주님(the Savior)께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아니면 아마 주님께서 설교자를 지나서 사람들에게 오지 않으면 안 되리라!). 그러나 문제는 설교자가 숨을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커다란 설교단마저도 그를 볼 수 없도록 감추어 주지는 못한다.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가 설교를 「인격을 통해 부어지는 진리」라고 묘사했을 때 그는 훌륭한 점을 지적하였다. 설교자의 사람됨이 그의 메시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는 성서적 진리를 외치면서도 녹음장치로부터 흘러나오는 전화 목소리 만큼이나 비인격적일 수도 있고, 라디오 상업광고만큼이나 피상적일 수도 있으며 사기군만큼이나 능란한 말
재주를 피울 수도 있다. 그러나 청중은 설교를 듣지 않고 그의 사람됨을 듣는 법이다.
윌리엄 콰일(William A.Quayle) 주교는 설교학에 대한 표준적 정의를 거부할 때 이 점을 마음에 두고 있다. 「설교는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고 그것을 전하는 기술인가?」라고 그는 물었다. 그리고는 「아니다.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설교는 한 사람의 설교자를 만들고 그를 전하는 기술이다!」라고 했다.
강해설교는 한 사람의 원숙한 크리스찬으로 발전시켜 준다. 다시 말해서 강해자가 성서를 연구할 때 성령께서는 그를 탐구하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강해설교를 준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준비시켜 주시는 것이다. 폴사이드(P.T.Forsyth)의 말처럼 「성서는 설교자를 향한 최상의 설교자」인 것이다.
'한 편의 설교를 얻기 위해 성서를 연구하는 것과 자신의 영혼의 양식으로서 성서를 연구하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점이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요 오도(誤導)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학자가 성서를 히브리 시로 또는 오래 전에 죽은 왕들의 탄생과 통치에 대한 기록으로 연구하면서 아직도 그것이 전하는 진리에는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펼쳐드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러한 분리는 있을 수 없다. 성서의 메시지를 다른 사람에게 선포하기 전에 그 자신이 그 메시지를 가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자로서 실패하기 이전에 크리스찬으로서 실패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성서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당히 많은 목회자들이 - 그
들 중의 상당수는 성경 본문을 매우 중시한다고 고백하는데 - 전혀 성경을 염두에 두지도 않고 설교를 준비한다. 성서 본문은 설교를 위한 전채(前采:식욕을 돋구기 위해 식사 전에 먹는 음식-역자 주)나 그 메시지를 장식하는 장식품 정도의 역할을 하는 반면 그 설교의 주류는 설교자 자신의 생각이나 그런 경우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어떤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강해설교자는 표지가 붙은 설교에서 조차도 본문은 설교자 자신의 견해를 펴기 위한 발사대(發射臺) 정도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설교학이라 불리우는 요리 책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조리법은 이렇게 씌어 있다. 「몇 개의 신학적 또는 도덕적 상투어를 택하여 '헌신'이나 '전도' 또는 '청지기적'이라는 말과 적당히 섞어라. 그리고는 '천국'이나 '성경에 말씀하기를'이라는 말을 몇 번 사용해라. 그것을 선택된 예화에 집어넣어 적당히 휘저은 다음 기호에 따라 '구원'이라는 말을 덧붙여라. 그리고 성경 본문의 접시에 담아 따뜻할 때 내놓아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설교는 신도들을 영양부족 상태에 빠뜨릴 뿐 아니라 더욱 나쁜 것은 설교자 자신을 굶주리게 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아무 것도 먹여주실 것이 없기 때문에 설교자 자신이 자라지를 못한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목회자의 생활에서 영적 영양실조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였다. 「사람이 자기 정신을 이완시켜 태만에 빠지게 하고 맥이 빠지게 하면 할수록 성령께서 그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줄어든다. 참된 설교는 사랑으로 가득 찬 가슴과 훈련된 정신이 성령의 뜻대로 쓰일 수 있도록 되었을 때 나오는 법이다.」2) 궁극적으로 하나
님께서는 메시지보다는 그 메시지를 전하는 사자(使者)들을 계발하는데 더 관심을 가지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주로 성서를 통하여 사람들과 만나시기 때문에 설교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말씀을 전하기 이전에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의 진리를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시킬 뿐 아니라 우리의 정의에 따르면 성령께서는 그 다음으로 그 진리를 그를 통하여 그의 청중에게 적용시킨다. 강해자는 세 자기 면에서 생각을 하게 된다.
첫째로, '주석가'(exegete)로서 그는 성서기자들이 가졌던 의미들을 찾고자 노력한다. 다음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격적으로 어떻게 변화시키고자 하시는지 하는 문제로 고심한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로서의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회중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적용을 통하여 강해설교의 목적이 분명해진다. 한 사람의 목자로서 강해자는 자기 양 떼의 아픔과 울음과 공포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므로 그는 성서를 연구하되 슬픔과 죄책감과 의심에 빠져 있고 죽음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연구한다. 바울은 디모에에게 성경말씀이 적용을 위하여 주어졌음을 상기시켜 준다. 바울에 따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믿음을 가르치고 과오를 바로 잡으며 삶의 방향으로 다시 잡아주고 선한 삶을 살도록 훈련하는 데 유익하다. 그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보여주며 그로 하여금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충분히 적합하도록 해준다」- 필립스 열) (딤후 3:16∼17).
선명치 못한 강해설교는 보통 창조적인 적용이 모자란다. 지루한 설교는 두 가지 중요한 불평을 야기한다.
둘째로 회중들은 「언제나 꼭 같은 옛날 그대로야!」하면서 투덜거린다. 설교자가 어떤 본문이든 간에 꼭 같은 거나 더 좋지 못한 적용을 하든지 말이다. 자기의 설교가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어림짐작조차 못하는 사람이 주문(呪文)처럼 「성령께서 이 진리를 우리들의 삶 속에 적용시켜 주옵소서」하고 중얼거린다.
세 번째 부정적 반응은 설교가 현실 생활에 적용될 수 있을 만큼 직접적으로 이 세상살이와 관련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 말은 옳은 말이야. 그렇지만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반응이다. 결국 어떤 사람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기로 결심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교회당 밖에서의 별 다름 없이 정상적인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교회 밖에서는 사람들이 실직을 하고 자녀에 대해 염려하며 잔디밭에 파고들어 오는 바랭이 풀을 발견한다. 정상적인 사람이 여부스 족속이나 가나안 족속이나 브리스 족속 때문에 잠을 설치는 일은 별로 없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바울이 한 말이나 일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들은 오히려 잡다한 세상 일로 걱정하며 잠을 못 이룬다. 구멍가게의 물가, 농작물의 실패, 여자 친구와의 말다툼, 악성 질환이라는 진단, 성생활에서 오
는 좌절, 끝도 없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생활 등이 잠을 설치게 만든다. 만일 설교가 이러한 세상살이에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냐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옛날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강해설교를 하는 사람은 성서로부터 역사나 고고학에 관한 강의를 하는 대신 성서로부터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관해서 배우도록 해야 한다. 회중은 유다나 베드로나 솔로몬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심판하기 위하여 모인 배심우언 들이어야 한다. 강해자는 자기의 메시지만큼이나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본문을 주석할 뿐 아니라 회중을 연구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들의 현재의 모습 그대로 그리고 현재 있는 그곳에서 말씀하신다.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가 전해지는 동안 잘못되어 빌립보에 사는 크리스찬
들에게 전해졌다고 상상해 보라.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이 언급할 특별한 문제들로 인하여 당혹에 빠질 것이다. 그들은 고린도에 사는 형제들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살았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의 서신들은 구약성서의 예언서들과 마찬가지로, 특수한 문제들로 고민하던 특수 집단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오늘날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역시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그들에게 독특한 정신자세가 있음을 설교자가 모른다고 한다면 강해설교라고 하더라도 효과는 없을 것이다.
효과적인 적용을 위해서 강해자는 신학과 윤리학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석작업에서 적용의 단계로 넘어갈 때 그는 실제 생활과 관련되어 있고 때로는 난처하게 하는 문제들을 다루어야 한다. 문법적 연구는 물론 인격적이고 심리적인 면에서의 연구도 하여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은 서로서로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그 기사에 관련되어 있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스쳐갔던가? 이러한 질문들은 하나님께서 마치 '옛날 어느 한 때'에 살던 사람들만을 섭리하신 것처럼 '거기에 그때'에만 관련되어서는 안 된다. 꼭 같은 질문이 '여기에 지금'에도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상호간에 어떤 관계를 맺고 살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이와 꼭 같은 문제들을 가지고 우리들을 어떻게 대하시는가? 현대 세계는 성서시대의 세계와 어떤 점에서 비교되며 또 대비를 이루는가? 성경 본문에서 다루어진 문제들은 사람들이 오늘도 묻고 있는 질문인가? 그런 질문들은 그때와 같은 방법으로 제출되는가 아니면 다른 형태로 주어지는가? 이러한 탐구는 윤리학과 신학의 현장적 원료(raw material)가 된다. 강해설교를 좀더 의미있게 해보려고 억지로 적용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문제들을 회피하는 것이며 우리 프로테스탄트 선조들의 다음과 같은 금언을 무시하는 것이다. '교리는 반드시 실천할 수 있도록 설교되어야 하고 기독교인의 본문은 반드시 교리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부적당한 적용은 맞지 않는 주석만큼이나 파괴적일 수 있다.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할 때 성경 말씀을 잘못 악용함으로써 승리를 거두고자 하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시험하는 자는 놀랄 만큼 정확하게 시편 91편의 말씀을 귓가에 속삭였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 91:11∼12). 그 다음에 사탕은 추리를 계속하였다. "너는 이 위대한 약속을 받았으니 성전 꼭대기에 뛰어내려 단 한 번에 네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실증해 보여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러한 마귀를 물리치실 때 예수는 히브리 본문의 문법으로 싸우지 아니하셨다. 대신에 그는 시편 91편의 말씀을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일에 적용하는 것을 공격하셨다. 다른 성경구절이 그 상황에 더 적절한 것이었다. "너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우리는 소설가와 칼럼니스트와 극작가의 말을 들으며 살고 있는 세상을 향하여 설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그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한다면 우리들의 설교를 듣고 있는 그들은 머리 속에서 정통이나 행동으로는 이단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세속세계를 향한 설교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거기에서 세속적인 말을 전해서는 안 된다. 성서적 관념은 인간의 경험으로 이해되게끔 만들어져야 하고 사람은 그 성서적 진리를 따르도록 가르쳐야 한다. '의미 있는 설교'(relevant sermons)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늘의 상황을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에 관련지어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설교단에서나 필요한 유희에 불과할 것이다.
메이어(F.B.Meyer)는 성서에 입각한 설교자가 자기 시대의 문제를 언급할 때 가지는 외경감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는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 그리고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은 청교도 조상들의 목사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성서 강해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사로운 해석이나 불확실한 설명일 수 있는 자기 자신의 특별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바탕을 두고 '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는 말로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면서 그들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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