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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설교 유형과 경향

by 【고동엽】 2022. 4. 21.
 
 
한국 교회 설교 유형과 경향

충신교회/ 박종순 목사


저는 설교를 하는 사람이지 설교를 가르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종윤 목사님께서 저한테 설교 얘기를 좀 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제가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설교 얘기를 하기 전에 최근에 개인적인 느낌입니다마는 내가 두 가지 문제를 극복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신학의 사대주의입니다. 공부라고 하는 것은 우리보다 먼저 깨달은 사람들한테 가서 배우는 게 당연하고 또 신학문을 도입을 하고 그런 것 참 바람직한 일입니다 마는 어떻게 된 게 한국 교회의 경향을 보면 너무 저쪽 구라파 서구 쪽으로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어요.

예를 들면 뭐 빈야드 어쩌고 하니까 빈야드, 빈야드 거기에 가서 보고 또 흉내를 내고 척 스미스 어쩌고 그러니까 또 데려다가 얘기하고 거기 또 가서 뭘 보고 요즘은 새들 백 교회라고 그래서 지금 세미나하고 있습니다마는 아니, 솔직히 우리 한국에 10년, 15년, 20여 년만에 뭐 제임스 케네디나 새들 백이나 무슨 척 스미스보다 더 목회 잘 하고 일 잘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공부를 하고 새로운 학문을 접하는 의미에서는 바람직하지만 그렇게 너무 사대주의, 신학의 소위 사대주의인데 개인의 생각은 그래요. 그런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한국적인 것, 우리 한국 교회를 소개하고 한국 신학을 세계에 알리는 이런 작업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우리 장신대 교수들한테도 그런 이야기 많이 했습니다. 우리 한국 신학을 세계에다가 좀 알려라  교회 배경이 없냐, 큰 교회가 없냐, 한국 교회에 무슨 영적인 능력이 없냐? 한국 신학을 좀 세계화하는 작업을 좀 신학자들이 해 달라. 저는 그런 부탁을 했습니다마는 그건 좀 문제가 있어서 우리가 좀 생각해 볼 문제다. 생각을 하고 두 번째로 교회성장 콤플렉스라고 그럴까요? 여기 오신 분들의 교회 사이즈가 얼마인지 모릅니다마는 예를 들어서 뭐 2만 명 5만 명 모이는 교회는 축복 받은 교회고 150명 300명 교회는 저주받은 교회고 또 10만 명이나 5만 명 모이는 교회의 목사는 축복 받아서 목회를 잘하고 150명 목회 하는 교회 목사는 저주받고 실력이 없어서 그 모양, 그 꼴이고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아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목회 현장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하느냐, 얼마나 best를 다하느냐, 100명 양떼를 데리고 생명을 바치면 그 100명이 200 명 될 거예요. 그러나 나 교인 100명이다. 그래 가지고서 만날 차 사 가지고 놀러나 다니고 낚시 돌아다니고 가족 데리고 소풍이나 돌아다니면 교회 성장 못해요.

그건 목회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교회 사이즈가 크든 작든 그 허락하신 목회 현장에서 자기 피를 바치고 자기의 삶을 바치고 자기의 정열을 바치는 목회를 한다면 그건 성공적인 목회이고 그래도 안 되는 건 할 수 없잖아요.

어떻게 하겠어요. 그렇게 했는데도 안 되는 건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 아이들 셋 다 지금 결혼하고 하나 남았습니다마는 밖에 나가서 신학 공부를 하고 내 뒤를 잇겠다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걔들 키우면서 그래왔어요. "최선을 다하라 최선을 다했는데 안 되는 것은 니 책임 아니다." 대학 진학도 그랬어요. "니가 최선을 다했는데 못 들어가는 것은 그 대학이 시원치 않아서 그렇다. 그 대학이 몹쓸 대학이야 포기해라 그런 대학가서 뭐 하냐? 그러나 최선을 다 안 해서 떨어진 것은 니 책임이야" 우리가 양심적으로 목회도 그래요. 최선을 안 했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은 내 책임이에요. 최선을 다했는데 안 되는 것은 내 책임 아니에요. 그래서 그 두 가지 문제는 우리가 좀 고려를 하는 게 좋겠다. 생각을 하구요. 전 설교를 얘기할 때는 세 가지가 어렵다고 생각을 합니다. 설교는 처음이 하기가 어려워요. 설교학자들이 쓴 글을 읽어 봐도 그렇고 얘기하는 분 얘기를 들어 봐도 그렇고 설교를 한 마디로 이것이다 라고 정의하기가 어렵고요. 두 번째는 설교하기가 힘들어요. 제가 64년도에 신학교를 졸업을 했습니다마는 그러니까 저는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설교를 했어요. 시골에서 자랐거든요.

교회가 조그맣기 때문에 가끔 수요일 밤에 중학생이 설교를 했어요. 그 때 무슨 설교를 했느냐? 전혀 생각이 안 나요. 주님은 기억을 하실 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기도 처소에 가서 밤에 램프 불 켜놓고 한 100명 그 지역 주민들 모아 놓고 부흥회를 했습니다. 전도 부흥회를. 그러니까 꽤나 오래 전까지 설교를 해 왔고 지금도 설교를 하고 삽니다마는 할수록 힘들어요. 너무너무 힘들어요. 설교는 정의도 어렵고 하기도 어려워요. 제가 충신 교회 76년에 부임을 했으니까 23년 됐거든요. 그런데 한 교회에 오래있어 보니까 좋은 점이 참 많은데 나쁜 점 가운데 하나가 설교가 힘들어요.

지금 제가 부임했을 때부터 교회에 있는 터주대감들이 있거든요. 그 사람들은 23년이나 내 설교를 듣는 거예요. 23년을.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내가 본문을 어디를 주로 많이 선택을 하고 어떤 예화를 쓰는 걸, 딴 거는 몰라도 예화는 귀신같이 알아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주일날 앞에 앉습니다. 말똥말똥 바라보고 앉아 있고 잘 죽지도 않아 그 사람들은 천당도 잘 안 가요.

지긋지긋하게 앞에 앉아 있어요. 설교가 참 하기가 힘들고 세 번째는 듣기가 힘들어요. 제가 설교를 2시간 할 수는 있겠어요. 그런데 2시간 듣기는 힘들더라고. 여러분, 제발 설교 짧게 하십시오. 부흥회 다니는 양반들 있거든 너무 길게 하지 마세요. 설교는 들어주는 게 힘든 거예요. 생각해 보십시오.

새벽에 설교 듣지요, 밤에 설교 듣지요, 주일날 설교, 부흥회라고 설교 듣지요, 금요일날 설교 듣지요, 회갑 잔치도 와서 설교하지요, 생일잔치에 설교하지요, 결혼식 때 설교하지요, 한국 교회는 말씀풍년이라. 다 들어주어야 되잖아요.

그거 보면 교인들 참 고마워요. 왜? 들어주는 거 고맙다고. 듣기가 힘든 거예요. 그런 얘기들을 전제로 깔고 얘기들을 진행을 해 보십시다. 설교 아닌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신학강연은 설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설교는 이론의 전개가 아니라 삶입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 아시잖아요. 똑같은 설교인데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은혜를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도 있어요.

같은 설교인데. 아니, 그리고 훨씬 설교의 구성이나 설교의 짜임이나 설교의 어떤 전개나 전달 방법이 탁월한 데 그 설교에 은혜를 못 받고 다른 사람한테 은혜를 받는 경우가 있어요. 왜인 줄 아세요? 앞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는  사람의 인격과 삶 때문에. 지금은 그분이 은퇴를 하셨습니다마는 40일 산에 가서 금식기도를 하셨어요. 아주 옛날 예기입니다. 수염도 깎지 못하고 머리는 장발이 되고 수염이 길게 나고 40일 금식하고 내려 오셔서 그 다음 주일날 설교를 하시는데 본인이 성경봉독을 했대요. "사랑하는 자들아..." 설교본문을 하는데 본문 읽다가 교인들이 은혜를 받아 버렸어요. 그러니까 오리지널 텍스트를 읽는데 성경봉독 하다가 교인들이 은혜를 받고 통곡이 나와 버렸어요. 위대한 설교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설교자가 누구냐, 설교자가 어떻게 사느냐, 설교자가 무엇을 했느냐에 따라서 설교의 파장, 설교의 영향 이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삶입니다. 그 다음에 설교는 우변이나 연설이나 도덕적 권면이 아닙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개인적 감정의 출구가 아닙니다. 제가 몇 가지 말씀을 드릴께요. 첫째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네 번째 감정의 출구에 대해서. 철저하게 설교를 준비할 때나 설교를 전달할 때 감정의 이입을 막아야 되요. 감정이 개입되면 안 되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당회를 하다가 재직회를 하다가 그 다음에 누구를 만났는데 기분이 상하잖아요. 설교자가 그러면 그 상한 감정이 치유가 되지 않으면 그게 설교에 감정이입이 되요. 그런데 용케 알아요. 듣는 사람들은.

제 설교 테이프가 미국 뭐 전 세계에 나가고 워싱턴 방송, 뉴욕 방송, 시카고 그 다음에 뭐 달라스, 하와이, 센프란시스코, LA 방송에 나가거든요. 우리 애들이 미국에 있기 때문에 카세트 테이프가 가요. 그런데 우리 큰딸이 목사부인이 됐는데 한 번은 전화가 왔어요. "아빠, 교회에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왜? 무슨 말 들었니?" "아니, 그게 아니고 아빠 설교가 이상해서." 내가 가끔 한 번 씩 교인들을 야단을 치거든요. 그런데 그게 벌써 듣는 사람들은 아, 목사 골났다. 목사 화났다는 것을 용케 알아요. 그래서 이 설교자의 감정이 그 설교 내용 속에 이입이 되기 시작하면 그러면 설교에 독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바울은 뭐랬어요. '순한 젖으로' 딱딱한 것으로 먹이지 않고 순한 젖으로 먹인다고 했잖아요. 그 순하다고 하는 게 독이 없다는 얘기예요. 설교 속에 독이 들어가면 안 되요. 그러기 위해서 두 번째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원고를 꼭 쓰라는 거예요. 원고를 작성을 해야 되요. 우리 설교자들이 받는 유혹 가운데 하나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설교를 하고픈 유혹을 받습니다. 그럼 원고 안 써도 되거든요. 제가 준비를 해 보면 열흘 동안, 한 달 설교자료를 제가 스크랩을 하잖아요. 하는데 다 준비해 놓고 참고 도서 옆에 놓고 그러고 설교를 작성하는데 빨리 하면 4시간 27분 28분 짜리 설교를 탈고를 하는데 4시간, 뭐 좀 차 빼러 돌아다니고 앉아서 사색하고 명상하고 기도하다 보면 6시간 그렇게 걸린단 말이에요.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할렐루야! 아멘! 하고 하면 그냥 본문 제목 선택하고 그렇게 6시간, 5시간 씨름 안 해도 설교가 잘 되고 해 보면 그런데 그러다 보면 자기의 설교 세계를 정리를 할 수가 없고 그리고 설교자가 게을러져요. 아주 게을러져요.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설교원고가 정리가 되지 않고 내가 오늘이 메시지 틀을 벗어나지 않겠다고 하는 어떤 준비된 설교가 아니면 감정이 이입될 가능성이 십분 많아요. 그래서 힘들어도 우리 설교자들은 원고를 써야 되요. 꼭 쓰세요. 힘들더라도 그리고 목회자들이 글을 쓸 기회가 없어요. 흉인 것 같습니다마는 우리 교회 부목사님들을 보면 주보에 광고 문안 하나를 작성을 못해요. 왜? 글을 써보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무슨 잡지사나 신문사에서 뭐 하나 써 달라고 하면 밤새도록 글을 못쓰는 거예요. 문필력이 없으니까 목사는 글도 쓸 줄 알아야되는 거예요. 그래서 원고 쓰는 것을 연습하세요. 가끔 그런 얘기를 하지요.

원고 설교를 하게 되면 원고에 제한을 받는다. 천만 에요. 저희 교회에 연예인들이 많습니다. 탤런트들, 내 놓으라 하는 사람들 최민수, 최수종, 하희라, 교회는 잘 못나옵디다마는 또 이상아, 이홍렬 개그맨 또 그 다음에 박미선, 이성미, 김미화. 싸인 받아다 드려요? 뭐 원로 연극인 김동원 선생님, 이런 분들 다 많아요. 아주 많은데 한 시간 짜리 텔레비전 드라마 있잖아요.

작가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주연을 맡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대사 분량이 많아요. 말을 많이 시키는 작가가 있거든요. 그럴 경우에는 외워야 할 대사분량이 많은 거예요. 그런데 작가의 시간 형편에 따라서 내일 오후에 드라마 촬영을 하는데 오늘 저녁때 대본을 줘요. 그러니 오늘 가서 원고를 받아다가 오늘 저녁 외우고 내일 아침에 외우고 가서 이거 안 보고 연기를 해야 되요. 해 냅디까? 보고 읽습디까? 남이 써 준거라 그런데 얼마나 리얼하게 해요. 막 울면서 웃기면서 남이 써준 게 아니라 지가 생각해서 하는 것처럼 연기를 하잖아요. 그래서 탤런트거든요. 설교원고 남이 써 주었어요? 지가 쓴 거 아니야 써 놓고 10번만 읽어요. 그럼 달달 꿸거 아니에요. 그리고 내가 쓴 원고를 10번 읽어도 감감한 양반은 그만 두는 게 좋아. 안 그래요? 뭐 읽어서 나쁠 것은 없지만 그러나 전달이 소위 요즘 말로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잖아요.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거니까 현대에 설교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두 용어가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 교감. 그 다음에 아이컨텍, 눈과 눈이 마주쳐야 되요. 그래 벌써 설교하러 올라가서 어느 교회에가 보면 교인들의 시선이 집중이 되는 교회가 있어요. 소위 말해서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사람 사이에 소위 말하면 커뮤니케이션. 교감이 이루어지고 눈과 눈이 마주치면 스파크가 일어나야 되거든요. 아이 컨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자가 원고를 읽고 있으면 아이컨텍이 안 이루어지잖아요. 그래서 원고를 쓰도록 하십시오. 또 그래야 설교집도 쉽습니다. 그냥 원고 없이 한 설교를 다시 녹음 테이프를 풀고 또 다른 사람이 정리를 하고 내가 그걸 또 보아야 하고 얼마나 힘들어요. 저는'하였습니다.' 까지 해서 예화도 그대로 다 쓰거든요. 그냥 그대로 출판사에 넘어가요. 그게. 매월 설교 소책자로 나오고 있고 또 책으로 묶어져서 나오고 아주 편해요. 그러니까 할 때만 괴롭지 하고 나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그 다음에 또 한 가지는 감정이입을 막기 위해서 책망이나 공격보다는 칭찬을 하도록 힘쓰자 하는 얘기입니다. 부흥회를 가끔 나갑니다마는  설교 전에 첫 시간에 나가면 성가대가 찬양을 하지요. 솔직히 저걸 찬양이라고 했나 싶은 찬양을 많이 들어요. 저희 교회의 찬양을 많이 듣다보면 그러나 나가서 참 우리 성가대 노아 홍수 사건 이후에 제일 잘 했다고 박수 한 번 해 주자고 그러면 성가대는 기분이 더 말할 것도 없고 그 칭찬을 받은 교인들도 그 한 마디에 마음이 쫙 풀리는 거예요. 마음의 문이 열리는 거예요. 설교는 마음의 문이 열려야 되거든요. 부부 대화도 마음의 문이 열려야 되잖아요. 그래서 열린 문 속에다 메시지를 전하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마음이 열리느냐? 칭찬을 해야 되요. 그래서 우리 목회자들은 때로 교인을 야단 칠 필요가 있지만 칭찬을 아껴서는 안 된다는 것 칭찬을 많이 해주어야 되요. 마음이 열리기 때문에 그러면 진행을 하십시다. 설교가 뭐냐? 두 가지로 말씀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 보십시오. 내가 오면서 잠깐 잡지를 보니까 지금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하고 한나라 당 안상수 대변인인가 두 분이 정동영 씨는 TV 앵커출신이고 텔레비전 아나운서 출신이고 이 쪽 한나라 당 대변인은 신문 기자출신이래요. 그런데 텔레비전에서 대변인에게 자기 당의 의사를 대변하도록 주어지는 시간이 12초래요. 12분이 아니고 그러니까 정동영 씨는 소위 말하면 텔레비전의 기능, 성격을 아니까 그러니까 요약해 가지고 12분 할말을 다 해 버려 그런데 이쪽 신문 기자는 글을 많이 쓰잖아요. 그러니까 얘기가 긴 거야 그러니까 전부 가위질하고 편집을 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이에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그런 존엄성과 그런 자존심과 그런 엄숙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말씀을 받아 전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대변하고 있다고 하는 그런 마음가짐과 태도로 설교를 해야 되고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설교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는 인간의 언어예요.

그러나 설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언어예요. 차이점이 있어요.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설교는 사람에게 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 들으십시오. 할 필요도 없는 거고. 한 번 어느 교회에 갔더니 어느 장로님이 기도를 하시면서 턱 나오더니 책상을 탁 짚더라고요.

기도하러 나와서 그거 짚는 사람은 수상한 사람이야 보나마나 길겠구나 생각을 했지요. 아니나 다를까 뭐 그 때 우루과이라운드가 한참 우루과이라운드로 갔다가 걸프로 갔다가 창세기로 갔다가 한참 하더니 흥분해서 그 양반이 "여러분이여!" 하고 교인들을 부르더라고 기도시간에. 아니, 기도가 무슨 설교인가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는 인간의 언어 설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대상이 달라요. 그러기 때문에 이 설교는 항상 그 대상인 사람, 그 사람들의 삶의 정황 그런 텍스트를 이해를 못하면 안 되요.

사람을 이해를 못하고 사람의 삶의 현실을 이해 못하면 설교의 어떤 말하는 타겟이랄까 빅 포인트지요. 맞지를 않는 거예요. 저는 1년에 한 번 씩 설교집을 하고 싶어서 냅니다마는 거의 제 설교 제목은 사람들 시리즈 에요.

행복한 사람들, 빚진 사람들, 말 못하는 사람들, 예수를 만난 사람들, 성령 받은 사람들, 행복한 사람들. 왜? 사람들한테 전하거든요. 그 대상이 사람이에요. 그 회중의 삶의 정황, 컨텍스트를 이해를 해야 된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설교는 설교자를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수원지 물이 아무리 깨끗해도 수도관이 녹슬면 녹슨 물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하는 교량 다리가 되지요. 그렇게될 때 설교자가 고려되어야 할 것들이 뭐냐 하면 인격 그 다음에 삶 그 다음에 신앙, 이 세 가지가 고려가 되어야 되요. 그 설교자가 어떤 인격의 사람이냐? 어떤 인격을 가지고 있느냐? 어떻게 사느냐 그리고 그 설교자의 신앙이 어떤 신앙이냐 그 다음에 설교 유형의 일반적인 얘기입니다 마는 설교유형을 내용에 따라서 구분할 수가 있고 또 준비에 따라서 구분할 수가 있고 또 문체에 따라서 구분할 수가 있고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마는 쓸어모아서 말씀을 잠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에 따라서 구분하는 경우는 선포되는 설교가 있고 교훈적인 설교가 있고 치유적인 설교가 있고 예언적인 설교가 있는데 이 선포적인 설교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분의 생애, 그 분의 삶, 그 분의 고난, 부활 승리, 승천, 재림을 그대로 선포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지요. 그것을 선포하는 설교를 선포적인 설교라고 그러고 교훈적인 설교는 주로 윤리적인 설교를 중심으로 하는 예를 들면 바울 서신을 보더라도 특별히 윤리적인 문제를 가장 심도 있게 터치한 분이 바울 사도이거든요. 에베소서를 보더라도 주종관계, 부자관계,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 그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다루는데 그게 뭐냐? 윤리적인 교훈적인 선포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치유적인 설교는 상처 입는 개인과 민중과 집단입니다. 이사야서를 봐도 이사야서는 무서워요.

준엄하게 책망하고, 메시아의 예언이 도처에서 나옵니다마는 그런데 하반부로 들어가면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거예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저는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주일날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삶의 정황이 비참합니다. 내일 회사에 나가서 부도가 나느냐 안 나느냐 지금 허리띠 두르고 데모하고 있는 데 나가서 뭐라고 해야 될 사람, 아니면 집에서 쫓겨 나가 가지고 지금 갈 데가 없어 교회에 나와서 머리 숙이고 있는 남자,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메시지를 전하는 그 대상들의 삶의 정황이 목회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리고 세상 얘기, 정치얘기, 무슨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신문 텔레비전을 보면 더 정확해요. 뭐가 필요하느냐 내 백성을 위로하라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위로의 메시지 소위 말해서 힐링, 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상처받은 개인, 상처받은 집단, 상처받은 민중, 상처받은 민족을 치유할 책임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런 것을 다루는 게 치유적인 설교라고 볼 수가 있어요. 그 다음에 예언적인 설교인데 이건 구약을 보더라도 대사회, 권력집단, 권력화한 종교의 집단, 예수님도 그랬잖아요. '화 있을 진저 회칠한 무덤이여' 그 바리새 집단, 사두개 집단, 제사장 집단, 내지 주님의 경우를 보면 복음서를 보면 그 권력화된 집단을 예언자적인 시각에서 책망을 하셨는데 우리가 하나 조심할 게 있습니다.

목사는 목사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요. 이번에 그 만민 중앙 교회 이재록 목사 사건 있지 않았습니까? 물론 MBC에 다양한 제보가 들어오고 그 PD가 쓴 글을 읽어보았는데 법원에서 이러이러한 부분은 발표하지 말아라 그래서 발표를 못한 부분이 많대요. 그리고 이 부분, 이 부분은 해도 된다고 해서 발표를 했대요. 했는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고 해야 된다고 그랬습디다. 그랬는데 그 바람에 저나 여러분에게 도매급으로 넘어가고 있는 거야 그게 지금 마음 아파요. 당연히 그렇게 혼나야 되요.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똑같은 것들, 뭐 이 누구는 나쁘고 박 아무개는 좋고 이렇게 보지 않아요. 그게 지금 가슴이 아파요. 또 그것이 일반 언론에서 공적으로 다루어서 세상에 까발려 졌다는 거, 이단 문제는 교회 안에서 끝나야 되요. 교회 문제가 세상 법정으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그게 교회의 문제가 되었든지 목사문제가 법정으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그게 좀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후유증이 있을 텐데 그리고 언론이 한국 교회들을 만만하게 볼 거 아닙니까? 저것들 다루니까 되던데 이렇게 될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 부분이 조금 괴롭다. 생각을 해요.

어쨌든 간에 예언적인 설교는 대사회, 권력집단, 권력화한 종교집단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설교 정도에 따른 구분과 함께 제가 둘로 나누어서 말씀을 간단히 드리겠습니다. 이게 지금 본문 설교, 제목 설교, 강해설교, 주석설교로 해 놨는데 그건 옛날 구분 방법입니다 마는 근자에 이르러서 크게 둘로 나누어요. 컨택스트 중심과 텍스트 중심, 이 컨텍스트라는 것은 사람의 삶의 정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텍스트는 이 소위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 본문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문에서 이 텍스트에서 제목을 찾고 문제를 발견하고 거기서 해답을 찾고 거기서 결론을 찾고 이게 텍스트 중심의 설교방법이에요. 컨텍스트는 뭐냐? 삶의 어떤 정황, 역사적인 정황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그 문제 해답이 성경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성경을 찾는 이게 소위 말해 컨텍스트 중심 설교 방법이거든요. 이것을 요즘 말로 바꾸면 강해설교는 텍스트 중심의 설교고 제목 설교는 컨텍스트 중심의 설교이고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한국교회의 설교 유형 분석, 죄송스러운 것은 제가 조금 부지런했더라면 요 80년대, 90년대 20년 동안에 한국 교회의 모든 설교를 좀 모아 가지고 조사 연구 기관에 의뢰를 하든지 해서 제가 좀 분석을 하고 싶었어요. 제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못했어요.

그 작업을. 한국의 설교를 분석을 못했어요. 못하고 이것은 옛날의 자료입니다. 양해를 해 주시기를 바라고 그러나 비슷할 거예요. 현재 최근 요 90년대 80년대 분석한 자료가 아니라는 점을 양해해 주시면서 참고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본문 선택에 있어서 보면 예를 들어서 신약이 많아요.

저도 그래요. 저는 구약 한 번 신약 한 번 바꾸어 보려고 그럽니다마는 하다보면 신약이 많더라고. 일부러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데 신약 쪽이 많고 구약이 좀 적고 그리고 구약의 경우를 보면 모세 오경과 시가서가 아주 많고 그 다음에 역사서의 순이고 그리고 신약의 경우를 보면 복음서가 제일 많아요.

저도 그래요. 복음서를 제일 많이 텍스트로 선택을 했어요. 그 다음에 바울서신. 그리고 제 설교 본문 선택 가운데 제일 작은 부분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저도 대단히 흥미를 가지고 요한계시록을 연구를 하고 강해를 했습니다마는 그러나 요한계시록 얘기하기가 조심스러워요. 칼빈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인들에게 주님의 재림을 소흘히 얘기한다든지 재림의 중요성을 도외시한다든지 그건 안 됩니다. 재림의 임박성을 강조를 해야됩니다. 종말을 얘기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장림 사건 이후로 재림 설교가 줄었잖아요. 그리고 재림의 시효가 다 끝난 것으로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요즘에 마침 99년 2천년 더 심각하게 일 것입니다 마는 지금 다시 시한부 종말론이 계속 나오고 있잖아요. 저한테 4사람이 편지를 보내요.

벌써 왔어요. 보니까 그 사람들은. 재림 예수야, 신림동에 하나 있고 부산에 온 사람 하나 있고 또 여호와로 재림했고 편지를 보내는 사람, 4 사람이 계속 편지를 보내요. 그러니까 저는 요즘에 재림 예수한테 편지 받고 삽니다.

그리고 복음서 가운데는 보니까 마태복음의 경우가 제일 많더라구요. 참고로 보실 수 있기를 바라고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인 평가는 아니니까 제 경우하고는 비슷하게 맞았습니다. 그러면 마무리를 좀 하겠습니다. 바람직한 설교는 어떤 설교인가 그 이야기를 조금 하면서 마무리 쪽으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쉽게 해야 됩니다. 제가 어떤 잡지사에 3년 동안 설교를 평가라고 그럴까요? 분석이라고 그럴까요? 하는 글을 썼었거든요. 그 때 발견한 것입니다 마는 목표를 잘 하시는 분들이나 설교를 잘 한다고 평가를 받는 분들이나 큰 교회, 소위 대형 교회를 맡은 분들의 설교는 다 쉬워요.

아주 쉬워요. 어려우면 전달이 잘 안 되거든요. 전달되지 않는 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전달될 때 설교에 의미가 있습니다. 전달이 안 되면 안 되는 거예요. 그건 독백이지요. 독백. 모놀로그거든요. 그래서 설교자 자신이 혼자 그 설교에 도취되어 가지고 마치 유영을 하듯이 남은 알아듣거나 말거나.

설교자가 제일 맥 빠지고 고통스러울 때가 언제인가 하면 그런 계절이 다가옵니다 마는 그래서는 안 될 사람이 설교 시간에 앞에 앉아서 하품할 때.

맥 빠지지요. 그리고 졸 때. 졸고 앉아 있을 때. 저는 지금도 수수께끼 에요.

저 사람이 조는 게 그 사람 책임이냐, 내 책임이냐? 그거 누구 책임이에요? 우리 한 번 투표로 결정해 볼까요? 전달이 되어야 되요. 그런데 그 전달이 쉽지 않은 게 대상이 천차만별이잖아요. 미국에서 10년 20년 공부하고 온 친구들 앉아 있지요. 정치인 앉아 있지요. 대학 교수들 앉아 있지요. 의사들 앉아 있지요. 70, 80된 할머니 할아버지 앉아 있지요. 은어로만 대화를 주고받는 젊은애들 앉아 있지요. 젊은애들 말은 우리 알아듣지도 못해요.

요즘에 전 대학의 채플에 안 가요. 언어가 달라져 버려요. 언어가. 그들의 언어로 얘기를 해야 소위 말하면 전달이 되는데 언어를 모르겠어요. 아이들 세계의. 그렇잖아요. 그래 가지고 대학에 안 가요. 못 가, 안 가는 게 아니고 못 가요. 좋은 설교라야 되요. 설교 쉽게 하십시다. 그러나 이건 있어요.

목회자나 설교자가 그 교회에 휴전을 청해야 되요. 그래서 전 그래요. 솔직히 말하면 높은 건 끌어내립니다. 낮으면 끌어올립니다. 뭐 대학 교수고 총장이고 국회의원이고 장관이고 우리 교회에 오면 다 그냥 걸레질하고 똑같이 취급을 해 버리니까 높은 사람 끌어내리고 낮은 사람 끌어 올려서 중간 집단을 만들어요. 쉬운 집단, 편안한 집단, 행복한 집단을 만들어 주는 거예요. 두 번째는 성경적 설교, 성서적이라고 그랬습니다마는 제가 거기 썼습니다마는 루돌프 베레니히 쓴 책 가운데 서문 보니까 그랬습디다. "이 책을 쓰고 있는 동안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성서가 설교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서 본문에 대한 침묵과 그 메시지의 강조점으로부터의 이탈, 성서를 너무 성급하게 펴 보는 반면, 그 가운데 언짢은 것들을 덮어 버리고 번번이 문자에 너무 집착해서 그것을 늘려 뽑아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이런 설교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친본적인이 계속 되고 있다." 라고 했더라구요. 우리는 성경을 떠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텍스트 중심의 설교,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성경의 그 소위 말해 메인 메시지가 뭔가 오늘 내가 선택한 이 본문이 하고 싶은 얘기가 뭔가 그것을 깊이 명상하고 기도해서 그 본문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쉽게 풀어서 어려운 하나님의 메시지를 쉽게 풀어서 전달하는 게 설교이기 때문에 그걸 쉽게 풀어 전달하는 그 행위, 그게 설교라야 되거든요. 설교는 각설이 많으면 안 됩니다. 성경본문 한 절 펼쳐 놓고 지 간증으로 70분 80분 얘기하고 그거 안 되요. 여러분, 나는 간증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간증이라는 게 30년 전에 위암을 고쳤다는 이야기보다는 어젯밤에 지 남편하고 싸워서 그냥 한 바탕 했는데 잠들라고 생각하니까 주의 음성이 들리는데 니가 권사냐 하나님 음성이 자꾸 들려서 괴로워서 잠을 못 자고 그 밤에 남편 손을 잡으면서 "여보, 용서해 줘" 했더니 남편이 픽 웃으면서 "참말이냐?" 그래서 "여보, 용서해 줘" 어젯밤에 내가 화해하고 같이 잠을 잤습니다. 이 간증이 더 좋은 거예요. 그리고 이런 평신도를 와 가지고 간증을 하라고 그러면 이것도 수상해 이것도 이건 목사나 이렇게 하는 거지 와 가지고는 할렐루야! 다 같이 통성기도합시다. 아, 나 그런 사람 소름끼쳐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고 싶은 그 말씀이 뭔가? 이것이 성경적 설교거든요. 세 번째 신학적 설교입니다. 신학은 성경을 재해석해서 체계화한 학문입니다. 그러니까 신학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 하면 안 되요.

니체가 나오고 마르크스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신앙 없는 믿음 없는 사람들이 신학 공부해 가지고 오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가 나오는 것이고 무신론 신학이 나오는 거예요. 그건 안 되지요. 그리고 신학이라는 말 자체가 또 그래요. 신학. 하나님을 학문하고 하나님을 분석하고 하나님을 난도질하겠다는 얘기거든요. 지금은 연세대학 신과 대학 친구들이 뭐 그때는 다 음대는 음자 붙이고 그 방패 같은 안에다 신과 대학은 신자 붙이고 그랬거든요. 글자를 넣었거든요. 한 번은 김양석 교수가 신과 대학 학생이 식당에서 그랬나? 신과 대학 학생이 신과 대학 배지를 딱 붙이고 있으니까 "야, 니가 신이가?" 그런 농담을 한 적이 있었어요. 하나님을 학문이라는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하는 게 신학이에요. 그래서 신앙 없는 사람은 신학을 하면 안 되요. 우리 장로 신학 대학은 대학 졸업하고 신학교 들어가잖아요. 신학교에서 서류가 와요. 그 사람의 교회 생활 신앙 평가서를 극비 문서야 그거는 목사가 이렇게 전부 체크해 가지고 그 다음에 그것을 풀로 붙여서 도장 딱 찍어서 학교로 보내는 거예요. 그건 영구 극비 문서 에요.

그러니까 목사들은 정직하게 해야 되요. 교회 봉사 가나다라 그러니까 지가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목사의 평가서가 나쁘면 신학교 합격이 안 되요.

그렇게 되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세례 안 받은 사람 세례 증명서 해 주지 마시오. 어디 뭐 교수 취직을 하려고 어디 회사 취직을 하는데 세례 증명서를 가져오라고 그런다고 그럼 뭐 목사한테 와서 한 번만 해 주세요. 하면 사정에 끌려서 해 주고 그러거든요. 그러면 안 되요. 해 줄 게 따로 있지요.

어느 날 어떤 젊은이가 몇 년 됐어요. 연세 대학인가 교수 임명을 하는데 세례 증명서를 가져오라고 그런 대요.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아 가지고 온 친구더라고. "세례 받았느냐?" "아직 못 받았습니다." "그럼 해 줄 수가 없는데" "아이 뭐 다 그렇게 한다던 데요." "그래, 그럼 거기 가 봐." "아이 목사님, 길이 없습니까?" 내가 그래서 "도와주랴?" "목사님 도와주십시오." "그래 그러면 이렇게 해 주마. 성명 생년 월 일 주소 다음에 위의 사람은 본 교회 교인으로서 앞으로 세례를 받기로 약속을 하였기에 이를 증명함 이거 어떠냐 이거 해 가지고 갈래, 딴 데 가서 거짓말로 세례 증명서 해 가지고 갈래?" 나중에 들으니까 교수 안 되었더라고 그런데 신학이 약하면 교회가 흔들리고 신학이 약하면 목회자가 흔들려요. 지금 저 이모 목사 같은 양반도 왜 저러느냐 신학이 없으니까 없어서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건전한 신학에서 건전한 신학수업을 하고 건전한 신학 훈련을 받으면 딴 짓을 못해요. 양심이 괴로워서 그렇잖아요.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어요? 신학이 중요한 거예요.

신학 훈련을 잘 받아야 되요. 신학적 설교를 해야 되요. 네 번째는 복음적 설교를 하셔야 합니다. 항상 설교의 중심에는 예수가 있어야 되요. 그래서 포 사이즈 같은 사람은 설교는 복음의 연장이며 복음 자체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복음의 핵심을 벗어나면 안 되요. 예수거든요. 예수.

그러니까 항상 결론이 뭐냐? 예수로 끝나야 되요. 요즘 기독교 방송에서 84년부터니까 지금 15년 동안 상담을 하잖아요. 상담을 하는데 매주 월요일 1시에서 2시까지 1시간 동안 생방으로 편지로 상담을 하는데 제가 15년 동안에 얻은 결론이 있어요. 대답은 예수다. 뭐 상담 심리학 해보아야 대답은 예수야 그게 복음이에요. 예수가 해답이에요. 예수가 결론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들의 설교 속에서는 예수가 살아 움직여야 되요. 예수가 숨을 쉬어야되요. 예수가 움직여야 되요. 그게 복음이거든요. 그러니까 예수 없는 설교는 하지 말아야 되요. 다섯 번째 준비된 설교, 준비 잘해야 지요. 설교는 준비전달 반응. 3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준비는 얼마만큼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설교자가 무성의하거나 설교자가 게으르다구요? 안 됩니다. 부지런해야됩니다. 게발트가 얘기한 대로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뉴스 페이퍼, 신문.

그래서 텔레비전도 보세요. 뉴스 보세요. 세상 돌아가는 건 알아야 되니까 주간지도 보고 월간지도 보고 신문도 보세요. 부지런해야 되요. 설교자는 항상 자동차 안에도 그렇고 제 얘기해서 미안합니다. 주머니에 자동차에 그 다음에 화장실에 늘 메모할 수 있는 것하고 그 다음에 잡지라든지 그런 게 늘 있어요. 차안에도 있고 화장실에도 있고 늘 봐야지요. 지금은 제가 서점을 잘 못 들릅니다마는 이종성 목사님이나 문해석 교수 같은 분이 들어와 가지고 이종성 박사가 그러시더라고요. "내가 가 본 목회자들 서가 가운데 박목사 책이 제일 많은 거 같애."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저는 서점에 가서 지금은 그렇게 못해요. 자주 못 가는데 쭉 둘러봐요. 어느 서가 몇 째 줄에 무슨 책이 꽂혀 있다는 것을 확인해요. 또 책을 꺼내서 거기 목차를 살펴보고 서문을 읽어 봐요. 벌써 서문 읽어보고 목차 읽어보면 알거든요. 그리고 요거 318페이지 읽어 봐야지 탁 펴서 읽어보면 이거 설교에 써야 되겠는데 그러면 그 한 페이지 때문에 5천 8백원 만 2천원 짜리 책을 사요. 내 욕심은 그 부분만 찢어 가지고 오면 참 좋지요. 그건 뭐 도둑질이니까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 한 페이지 때문에 내가 발견한 그 한 페이지 때문에 책을 사는 거예요. 놀고먹고 즐기는 데다 쓰는 돈보다는 책을 사는데 힘썼어요.

목회자가 공부를 해야 되요. 그래서 타성에 빠지기 시작하고 탈진하기 시작하면 안 되요. 번 아웃 하기 시작하면 목회 못해요. 늘 자기를 재충전하고 도전을 받고 얼마나 좋아요. 도전을 받는 시간이 없거든요.

부지런히 정도를 해야 합니다. 여섯 번째 확신 있는 설교를 하셔야 합니다.

비트겐쉬타인이 한 말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잠잠하라" 책임 질 수 있을 때 말하라 그런 뜻이거든요. 목회자들 모임에서 제가 이 얘기를 몇 번 해 드렸는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저쪽 전라도 쪽인데 방송국으로 편지가 왔어요. 자기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무슨 교회의 사건이 생겨서 그만두고 부목사님이 강단을 지키고 임시 담임장은 따로 있고 그런데 어느 날 이 부목사님이 설교를 했어요. 하면서 주일을 성수 하시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됩니다. 주일날 장사하지 말고 문 닫으시오. 그런 내용의 설교를 했대요. 그런데 그 교회의 소위 수석 장로라는 양반이 병원 의사인데 주일날 병원 문을 여는 양반이었어요. 설교 끝난 다음에 부목사님을 부르더니 "김목사 그 오늘 설교는 나 들으라고 한 거야? 설교에 나를 까? 좋게 얘기를 하지 아니, 주일날 차 타고 어디 가는 거나 병원문 여는 거나 뭐가 나빠? 좋은 말로 할 때 다음 주일에 설교를 취소를 해" 그래 그 부목사가 다음 주일날 없었던 걸로 하자고 설교를 취소를 했대요. 이 교회에서는 문제가 생긴 거야 교회 안에 뭐 이러쿵저러쿵 그러면서 편지를 보낸 양반이 박목사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는 그런 질문이었어요. 그래, 방송에 대고 그랬지요. 이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고 없었던 사건일 것이다. 그러나 누가 픽션으로 꾸며서 보낸 얘기로 알고 내가 대답을 하겠다. 앞으로 혹시 한국 교회에 이런 사건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예기를 하겠다. 말도 안 된다. 부목사 관둬라. 지가 설교를 해서 주일 지키라고 했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가 선포한 말씀에 책임을 져야지 본인은 장로가 압력 넣는다고 그 다음 주일에 취소를 해? 그래가지고 목사 하겠느냐? 관 둬라. 장로 자격 없다. 성경에 주일날 문 열라는 말이 어디에 있느냐 죄송합니다. 그러고 문을 닫든지 아니면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야지 와 가지고서 나를 쳐? 나를 공격을 해? 보따리 안 쌀 거야? 취소해! 그건 장로 자격 없다. 그렇게 대답을 하고 끝났어요. 끝났는데 한 석달 쯤 지났는데 4명인가 저를 찾아 왔어요. 어디에서 왔느냐고 했더니 전라도에서 왔대요. 어떻게 오셨느냐고 그랬더니 방으로 들어가자고 그랬지요.

그랬더니 거기의 당회장 그 옆에 있는 누구 장로 이렇게 해서 4사람이 이렇게 교회에서 2사람이 오고 왔더라고 목사님, 몇 달 전에 방송국에서 이런 방송한 생각이 납니까? 아 나 기억이 잘 안 난다고 잘 생각을 해 보십시오. 보니까 그 얘기야 주일날 문 여는 얘기. 아 생각난다고 어떻게 오셨느냐고 그랬더니 목사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방송을 많은 사람이 듣는데 청취자가 많거든요. 부목사 친구들이 "야, 너 니 얘기하더라 그 박종순 목사가 그러는데 목사 관두라고 그러더라" 소문이 교회 안에서 퍼지기 시작하고 또 이제 장로님들이 들어 가지고 "어이 김 장로 김 장로 얘기 나오대, 장로 자격 없다고 그러던데?" 이래 가지고 교회에서 문제가 생겼대. 그러면서 날더러 하는 말이 방송으로 취소를 한 번 해 줄 수 없느냐  이거예요. 그래 제 얘기가 지금 나도 잊어 버렸다고 사람들은 남의 얘기는 일주일 더 이상 기억 안 한다고 나도 잊어 버렸는데 방송 특성상 취소나 사과를 하는 법이 없는 것이고 잘못한 일이 없는 한은 그럼 이렇게 하자고 대답해 보라고 해도 되겠는가 내가 그러면 다음 월요일날 석 달 전에 이러이러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교회에서 문제가 생겨 가지고 4사람이 찾아 와서 방송으로 취소를 해 달라고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합니다 라고 얘기하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안 되지요.

우리 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이 교회에 빨리 평안을 찾게 해 주옵시고 오신 분들 마음에 기쁨 주셔서 평안히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아멘.

갔어요. 그래서 설교자는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해야 되요. 그리고 책임질 수 없는 말은 안 하는 게 좋아요. 책임져야지요. 그 다음에 겸손한 설교 넘어갑니다. 긍정적인 설교, 왼쪽으로 가지 마세요. 하는 말과 오른쪽으로 갑시다.

같은 뉘앙스잖아요. 그러나 설득력은 어떤 쪽이 낫냐? 오른쪽으로 갑시다하는 게 설득력이 있어요. 설교자가 공격적이고 설교자가 부정적이고 목회자가 비관적이면 교회가 그렇게 되요. 참 조심해야 됩니다. 목회자가 늘 공격적인 사람이 있지요. 막 대형 교회 공격하고 목사들 막 욕하고 교회 건축을 비난하고. 그러면 그 사람 절대 앞으로 교회 못 지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리고 큰 교회 목회자를 비난하고 큰 교회를 싸잡아 욕하는 사람이 어느 세월에 대형 교회 목회를 하겠습니까? 난 우리 교인들한테 그래요. 잘 사는 사람을 부러워해라. 성공한 사람을 부러워해라. 목회도 마찬가지 에요. 세상에 저절로 되는 법은 없어요. 저는 대형도 아니고 소형도 아니고 중간이기 때문에 얘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저는 중간에 있기 때문에. 큰 교회가 저절로 되는 줄 압니까? 전혀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눈물과 땀과 기도와 피를 바쳤기 때문에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일고의 가치도 없이 취급하고 비난하고 욕하고 그러면 되겠어요? 목회자가 어떤 가치관을 갖느냐, 어떤 교회관을 갖느냐? 이게 참 중요한 거예요.

긍정적이라야 되요.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반드시 추상같은 공격이 오면 반드시 싸매는 힐링이 나와요. 치유를 해요. 여러분, 예언서의 사이클 아시잖아요. 범죄하고 심판 받고 회개하고 그러지요? 또 범죄하고 책망 받고 심판 받고 회개하고 계속 이게 반복되잖아요. 하나님도 참으시고 백성을 긍정적으로 싸매셨어요. 그 다음에 마지막 11번째 교회적인 설교, 목회적인 설교를 하셔야 합니다. 교회를 생각하고 신학을 해도 교회를 생각하고 설교를 해도 교회를 생각하고 이 꼴을 먹는 내 양떼들이 살이 쪄야지 이 설교를 듣고 오늘 저 양떼들이 힘을 얻고 돌아가야지 삶의 변화가 와야지 목회적인 관심을 가지고 교인들을 돌보아야 되는 거예요. 설교는 늘 어렵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정도도 어렵고 하기도 어렵고 은혜주기도 힘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나 여러분은 일평생 동안 강단에서 내려 갈 때까지 설교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과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주의 도우심이 함께 하셔서 좋은 설교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십시다.

기도 :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의 종들과 함께 하심을 감사합니다. 여기에 계셔서 영광을 받으시고 이 모임 가운데 주님이 주재자가 되셔서 시간 시간 은혜가 되고 덕이 되고 유익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종들이 섬기는 교회가 은혜가운데 성장하게 하옵시고 은혜로 발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https://cafe.daum.net/kmc4755/AT6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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