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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와 확신

by 【고동엽】 2022. 4. 20.
 
 

설교자와 확신
설교자는 믿음이 있어야한다
목회자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물어본다. 목회가 재미있고 보상이 많다고 생각하는 이가 얼마나 되는가이다.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분들이 1할이 안 된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목회가 신나고 설교하는 일이 즐거워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주의 종"은 고통스럽기만 한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공급하시는 왕이며 아버지라면 신자의 삶이 기뻐야 한다. 특별히 전문가인 목회자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고 하지 않았던가. 설교자에게 이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면 누가 신앙을 얻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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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설교자와 확신

믿음이 없이 설교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효과는 아주 적어진다. 내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사람들이 짐작하겠는가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에서는 힘이 분출되고 있다. 믿음을 가지고 말하면 주위의 상황을 강하게 움직인다. 물론 듣는 청중의 마음도 함께 따라서 반응하기 마련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2:23) 이는 믿음이 모든 상황을 실제로 움직인다는 말씀이다. 믿음은 절대로 심리학적인 차원으로 끝나는게 아니다. 메가톤급의 폭탄보다 강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설교자에게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무슨 설교를 할 것인가? 그것이 무엇이건 절대로 성경적인 믿음은 심어줄 수 없다. 믿음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것도 믿음이다. 자기의 약함을 믿고 열등한 것을 믿고 실력이 없고 병든 것을 믿을 수 있다. 이 믿음은 자기를 파괴해 갈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신 일에 대한 지식에 근거한다.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신 일이 무엇인지, 그래서 내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믿는다면 거기 해당되는 능력이 나온다.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이 이러한 복음적인 지식보다는 자기의 감각을 통해서 오는 경험의 지식을 더 믿는다. 그 믿음은 약하게 만든다.

모세는 40년을 실패자로 지냈다. 그는 자기의 경험을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새롭게 정의해 주셨다. "내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내가 정녕 너와 함께 하리라"는 대답을 하신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가 모세의 정체였다. 모세는 말씀에서 온 이 믿음을 경험에서 나온 옛 믿음과 대치했다.

칼빈은 믿음이 곧 확실성에 있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도 거의 아무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는 듯하면서도 그것을 너무 좁은 범위 내에 국한시킨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실까 의심하며 비참한 불안에 눌려지낸다."

그 결과로 그 믿음은 능력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정신에 힘과 확고한 평안을 주지 못하고 불안한 의심으로 괴롭힌다." 여기에 사로잡히면 목회자도 없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러한 상태로 지난다면 목회의 능력은 고갈되어 버리고 만다. 당연히 설교도 아무런 권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와 다른 완전한 확신을 느낄 수 있는데 성경은 이런 확신이 항상 신앙에서 기인된다고 한다. 우리를 위해 명백히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여지가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믿음이다. . . . 그래서 사도는 믿음에서 확신이 나온다고 하며 확신에서 담력이 생긴다고 한다." 신앙은 확신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이러한 확신의 신앙은 좀처럼 없다. 설교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확신을 갖기에는 오감을 통해 오는 경험이 너무 거리가 멀다. 늘 보고 듣고 느껴서 마음 속 깊이 쌓인 것은 실패요 좌절이요 약함이요 불신앙이다. 설교자는 설교하기 전에 먼저 복음을 자신에게 확신시켜야 한다.

설교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2.잠재의식에 눌린 믿음

어느 교회에서 집사 하나가 감사헌금을 내면서 몇 자 적었다. "하나님 우리 목사님의 설교가 좀 더 복음적으로 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읽으며 목사는 감사를 표현했다. 그리고 열심히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다음 주에 또 같은 내용이 적힌 봉투가 올라왔다. 이번에는 목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겼다.

그러나 그 다음 주에 같은 내용은 또 올라왔다. 매 주 그 내용이 올라오는 것이다. 그렇게 집사가 감사하면서 기도를 하면 점점 더 목사의 설교가 확신이 생겨야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다. 목사는 설교를 하면서 자신이 없어하는 태도였다. 몇 달이 지나자 목사의 설교는 아주 엉성한 것이 되고 말았다.

왜 그런가? 그 봉투만 생각하면 목사는 신경이 아주 예민해 졌다. 설교를 준비하자면 그 집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힘이 빠지면서 설교에 대한 모든 자신이 사라지고 만다. 가능하면 설교를 안하려고 한다. 이미 그 집사의 글이 잠재의식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만 것이다.

고통스러운 경험은 잊혀지지 않고 깊이 기억된다. 의식에 떠올라있지 않아도 무의식 속에 상처가 깊이 남아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치료되지 않고 깊이 새겨져 있다면 무의식은 계속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내어 보내기 마련이다. 근원을 알 수 없이 올라오는 불안이 그것이다.

외로운 사람은 세상을 외롭게 본다. 피해를 당한 사람은 세상에 악한 사람으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한다. 몸이 약한 사람은 그것을 늘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의 의식구조는 완전히 가난에 절어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여도 역시 자기 의식 구조에 맞추어서 이해한다. 복음은 주된 사고를 형성하지 못한다.

사기 당하는 사람은 다시 사기를 당한다. 그렇게 조심하고 모든 방법을 강구하지만 또 당한다. 사업에 실패하는 사람은 조심하지만 또 실패를 경험한다. 나쁜 습관의 사람들은 그 습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처럼 아픔의 사고는 사람을 지배한다. 그래서 늘 무의식 가운데 그 사고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이것이 영상화이다.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자기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는 경향이 본성 깊은 곳에 있다. 우리 의식 속에 어떤 영상이 그려져 남아있게 되면 정신작용을 통해 무의식에 스며든다. 일단 거기 저장이 되면 그것이 사람을 지배하게 되고 그리고 나아간다는 원리이다. 좋건 나쁘건 영상화의 결과이다.

성경에서 계속해서 말씀하는 것이 "두려워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계속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던가. 두려움과 걱정과 불안은 모두가 불신앙의 요소이다. 이것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거기 사로잡히는 것은 신자의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일단 여기 잡히면 신앙은 그림자도 없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욥 3:26)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요 그 생각이 그 사람의 삶을 만들어낸다. 누구든 현실이 불만스럽다면 그것은 자기 생각의 결과다.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렘 6:19) 사실상 생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경험을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픈 경험이 더 강하다면 신자라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오랜동안 부정적인 경험이 목회자에게 쌓여왔다면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앞으로는 더 부정적인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부정적인 경험에 지배되어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네 재앙이 바로 다른데 있는게 아니다. 네 불신앙적인 생각 때문이다."
설교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3. 복음으로 생각을 바꾸라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헬라어 "메타노이아"란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다. 뉘우치는 것만으로는 회개가 되지 않는다. 자기의 잘못을 뼈아프게 자꾸만 생각한다면 다시 그 잘못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새롭게 생각을 해야 한다. 그 생각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믿음이 보인다.

아무리 성경구절을 많이 알고 신학을 많이 배웠더라도 별 수 없다. 그 모든 지식이 부정적으로 조합된다면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다. 늘 냉소적이고 늘 비판적이지만 아무 것도 신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하늘의 복은 오직 정신적인 것으로 만족해야 할뿐이다. 그리고 죽은 뒤에야 경험되는 일들이다.

구원받아 다시 태어난 새사람은 새로운 경험을 한다. 새사람은 새로운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어도 새사람의 경험을 하려면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를 수십 년 믿었지만 성경에 나타난 엄청난 일들은 아무 것도 경험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약의 기적들이나 놀라운 일들은 그 당시에나 해당되고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애써 자위해 본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했지만 자신과는 거의 상관없는 일이다.

스스로 판단해 보라.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무엇을 생각하는가? 최악의 경우를 먼저 생각하고 준비해 놓는가? 그러면 반드시 그것이 온다. 그러면 뭐라고 말하는가? "거봐라. 내가 뭐랬는가. 최악의 경우를 준비하라고 했지. 자 이제 그것이 왔지 않은가. 준비를 했으니 얼마나 잘 되었는가!" 과연 그럴까?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이요 한 마디로 불신앙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동행하신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최악을 생각하는가? 동행하시는 성령을 이렇게 모욕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임하지 않고 무엇이 오겠는가!

신자는 교회 열심히 나가는 사람이 아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믿어 생각이 바뀐 사람이다. 생각을 바꾸는 최고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고를 하는 것이다. 나사로의 무덤에서 하시는 말씀 "아버지여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합니다"의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를 흉내내기만 해도 된다.

믿음은 말씀에서 온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사람들은 의사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는다. "암입니다. 삼 개월 남았습니다." 그러면 그 즉시로 암환자가 되고 그의 생명은 삼 개월 뒤에 꺼진다. 의사의 말씀을 들음으로 거기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복음적인 믿음은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는 좋은 소식에서 온다. 이 소식은 성경 내용의 핵심이요 하나님이 자신의 명예를 걸고 하신 말씀들이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대로이다. 설교자는 이렇게 좋은 말씀을 그대로 아무 것도 첨가하지 않고 전해주어야 한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하신 그대로이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복음의 내용이 너무도 엄청나더라도 그대로 전하라. 자신도 믿고 남도 믿게 해 생각을 바꾸게 하라.

율법은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것은 끝없는 행위의 길이요 잘못하면 저주를 받는 무서운 하나님의 말씀이다. 반면에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을 다 완성해 주셨다는 소식이다. 그러니 그 사실을 믿기만 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율법을 완성한 사람이 받는 축복을 누린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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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울리는 설교자가 되라



1.반응을 보이지 않는 청중들

▶각박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엄청난 사건들이 연일 벌어지는 세상이라서 그럴까?
요즈음 웬만한 사건이나 소식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이다.

그래서 이러한 현대인들 앞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는 점점 힘들어진다.
말라버린 가슴을 소유한 청중 앞에서 설교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설교하다보면 오히려 그 분위기에 눌려 기운을 잃거나 분위기를 깨뜨리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할 때가 있다.
그럴수록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간격은 멀어지고 만다.

2.문제의 핵심을 찾아라

이런 현상의 원인은 무엇일까?
삭막한 세상살이 때문에 가슴이 말라버린 청중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 "칭찬합시다"나 "사랑의 리퀘스트" 같은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우리의 청중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흐뭇한 웃음을 웃기도 한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 보면 문제의 해결책은 메시지를 준비하고 설교하는 설교자 쪽에서 찾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해결책1. 따뜻한 시선과 깊은 마음으로 관찰하라

2000년 여름, 무명 작가의 책 한 권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연탄길"(이철환, 삼진기획)이 바로 그것이다.
달동네 근처의 학원 선생님으로 일했던 평범한 저자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알게 된 이야기를 엮은 책이었다.
책을 읽은 독자들이 감동을 받은 것은 누구보다도 따뜻한 시선과 깊은 마음으로 우리 이웃들을 관찰하고 있는 저자의 시선이었다.
열정적인 메시지나 논리 정연한 주장과는 거리가 멀지만 책에 실린 작은 이야기들은 진한 감동과 함께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나아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태우고 그것도 모자라 사람들이 눈길에 미끄럽지 않게 내려가도록 길이 되어주는 연탄처럼 조금이라도 타인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각오를 갖게 했다.

▶해결책2. 플롯을 이해하라

인생을 살다보면 타이밍을 놓쳐 버리고 후회할 때가 많다.
누구나 한번쯤은 그때 그 장소에 '내가 있었더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느껴본 적이 있다. 인생에서 타이밍이 갖는 역할을 이야기에서는 플롯이 담당한다.

같은 내용이라도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배치하고 있는지, 즉 타이밍을 잘 맞추고 있는지의 여부가 그 작품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가지 플롯"(로널드 B. 토비아스 저, 김석만 역, 풀빛)을 통해 플롯의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플롯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도록 `좋은 플롯이란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줄뿐 아니라 기존의 플롯에 대한 오해를 다양한 보기를 들어가며 확실하게 바로 잡아 준다.
또한 좋은 소재 자체만으로는 좋은 작품을 창작할 수 없는 이유와 그 실례를 분석하고 있다.

▶가슴을 울리는 설교자가 되라

설교에 대한 반응이 싸늘할 때, '이런 좋은 내용의 메시지를 듣고도 어떻게 이런 반응을 보이지?'라고 의아해할 때가 있다.
결과의 책임을 청중에서 찾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청중들은 내용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도덕적이고 영적인 교훈을 주는 교사가 되기 이전에 따뜻한 시선과 깊은 마음으로 청중의 삶을 살피는 관찰자가 되자.
또한 청중들의 귀에 들릴 수 있는 메시지를 준비하자.
그리하여 청중의 가슴을 울리는 설교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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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재미있는 설교 방법'

"저한테 설교하지 마세요."

상대가 듣기 싫은 이야기를 자꾸 늘어놓을 때,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대꾸한다. 이처럼 설교란 말은 어느덧 많은 이들에게 '지루하고 딱딱한 잔소리'의 동의어쯤으로 전락하고 만 듯 하다.

그러나 "남의 눈의 먼지를 보지 않고 네 눈의 대들보를 먼저 보라" 고 말씀하시며 외식하는 자들을 위트 있게 꼬집으신 예수님의 설교에 그 당시 제자들은 깔깔 웃음보를 터트리며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국제제자훈련원이 지난 27, 28 양일간 서초동 사랑의교회에서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라는 주제로 진행한 '새들백 설교 세미나'는 예수님처럼 영향력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도록 목회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다양한 조언을 베푸는 자리가 됐다.

설교를 통해 청중들의 영혼을 깨우기 원하는 수백명의 목회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치러진 이번 행사에는 미 새들백교회의 탐 할러데이 목사와 우들랜드 펠로쉽교회의 켈리 슈크 목사가 강사로 나서 'Craft식 설교작성법', '설교를 위한 연구용 프로그램', 삶의 변화를 위해 커뮤니케이션하라' 등의 주제들을 심층적으로 다뤘다.

그중 '삶의 변화를 위해 커뮤니케이션하라'는 주제의 강의는 청중에게 효과적이고 영향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 설교 전달법을 다뤄 많은 참석자들의 주목을 끈 바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강사들은 '내가 설교할 때 던지는 8가지 질문' 에 대해 다뤘다.


첫번째 질문은 '누구를 대상으로 설교할 것인가'다.

불신자들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교가 지루하고 내 삶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답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슈크 목사는 "예수님은 설교를 할 때 청중을, 바울은 편지를 쓸 때 독자들을 고려했었다."며, "설교자들은 청중의 필요를 인식하며 설교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청중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그들의 필요, 상처, 흥미에 관계된 이야기라며, "우리의 설교는 청중의 상처 이야기에서 시작돼 그들의 상처 이야기로 끝나야 한다."고 주장하며, 원론적인 이야기만 길게 다루는 설교를 비판했다.


두번째 질문은 '성경은 청중의 필요에 대해 무엇이라고 답하는가'다.

강사는 "성경의 목적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한 무디의 말, "중요한 것은 설교가 오늘을 살고 있는 청중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한 피니의 말을 인용하며, "설교자가 던지는 메세지는 반드시 청중의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가장 실제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다.

이에 대해 할러데이 목사는 산상수훈 등 예수님의 설교들은 항상 실질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설교들이었다며, 설교자들은 청중들에게 '어떻게 하면 설교를 실질적으로 삶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 '하라는 강압만 하고, '어떻게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 설교는 청중들에게 죄책감만 가중시킨다."고 덧붙여 말하기도 했다.

실질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설교를 위해 설교자들은 항상 구체적인 행동을 설교의 목표로 삼고 청중의 '왜'라는 질문에 답을 해주며 또한 실천 방법을 알려줘야 한다.


넷째, '가장 긍정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다.

할러데이 목사는 "부정적인 내용으로만 설교를 채우는 것은 부정적인 분위기로 교회를 채우게 된다."고 말하면서,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통해 성도들을 비판하고 억누르며 낙심시키고 있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서는 교인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고 했다.

실제 한 연구 조사에 따르면, 높은 성장을 보인 교회 목회자들의 97%가 긍정적인 설교패턴을, 중간 정도의 성장을 보인 교회 목회자들의 81%가 부정적인 설교패턴을, 낮은 성장을 보인 교회 목회자들의 75%가 부정적인 설교패턴을 유지하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할러데이 목사는 "예수님은 화를 내고 청중을 정죄, 저주하면서 그들의 회심을 강요하지 않으셨다."면서, "설교자들의 메세지는 말 그대도, '복음', 즉 '기쁜 소식'(Good News)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설교에서 죄의 문제를 다룰 때는, 의로운 행동을 격려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겸손하고 사랑이 넘치는 태도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가장 격려가 되도록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다.

슈크 목사는 설교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못된 사람들인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불신자들도 자신이 죄인임을 이미 알기에) 오히려 그들이 바른 사람들이 되도록 격려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목회자들도 격려를 필요로 하는데, 성도들은 얼마나 더 격려를 필요로 하겠느냐?"고 말하며, "사람들이 기분 좋게 느끼도록 도와주는 것이 죄는 아니다."고 단언했다.

그는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고 격려하며 위로합니다.(고전 14:3-현대인의 성경)', '그들은(바리새인들은 무거운 짐을 남의 어깨에 지우고...(마 23:4 상-현대인의 성경)'라는 성경 구절들을 인용하며, 무조건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이 영적인 은사, 즉, 예언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예를 들어, 그 사람이 얼마나 나쁜 아버지인가를 드러내기보다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가 얼마나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는가를 독려하는 식으로 설교자들은 설교해야 한다.


여섯째, '가장 쉽게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다.

강사는 "쉽다는 것이 피상적이거나 깊이가 없거나 너무나도 단순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며, "'보통'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막 12:37)'는 성경 구절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사람은 들은 것의 95%를 72시간 안에 잊어버린다"며, "진리를 쉽고 간단하게 설명해 교인들이 이를 잘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설교에서 종교적인 언어의 사용을 피하고, 설교개요를 단순하게 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일곱째, '가장 개인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다.

강사는 "가장 개인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가장 능력있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플레빌 이클리 박사의 논문에 따르면, 설교자에는 첫째, '사람들을 조작하는 독백형-외판원형 설교자', 둘째, '정보 전달형-교사형 설교자', 셋째, '조직하지 않는 대화형-친구/관계형 설교자'의 3가지 유형이 있는데, 복음 전도에 높은 성장률을 보인 교회의 모든 목회자들은 3번째 유형의 설교자, 중간 정도의 성장률을 보인 교회 중 94% 교회의 목회자들은 1번 유형의 설교자, 낮은 성장률을 보인 교회의 80% 목회자들은 2번 유형의 설교자였다고 한다.

강사는 "영향력 있는 설교를 위해 목회자는 자신이 삶에서 겪는 몸부림, 진보, 배움을 나누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여덟번째는 '가장 재미있게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다.

강사는 '...말은 언제나 기쁘고 즐겁게 하십시오(골 4:5-6)', '...사람들에게 가르칠 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방식으로 가르쳤다(전 12:10)' 등의 성경 구절들을 언급하며, 재미있는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성경으로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드는 것은 죄라며, "오늘날의 문화에서 재미없는 설교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것과 같은 다양한 전달방법, 그림 언어, 다채로운 이야기, 유머 등을 재미있는 설교를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했다.


예수님의 설교를 좋은 설교의 모델로 거듭 제시하며 강연을 진행했던 슈크 목사와 할러데이 목사는 이번 세미나를 마무리하며,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는 설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친근감'을 꼽았다.

"탁월한 설교자가 되는 방법을 배우는데 남은 생애를 헌신하라"는 강사들의 독려에 참석자들이 세미나장에서 무릎을 끊고 이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가운데, 이번 세미나는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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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통한 말씀의 교역

1. 설교란 무엇인가?
목회 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라는 복음의 선포를 의미한다..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설교된 말씀의 상호의존관계
④ 설교의 복음전도 차원: 좋은 소식 선포하여 그리스도께로 초청
⑤ 설교의 목회적 차원: 위로, 격려, 경건과 충성과 그리스도를 향한 제자됨을 고무하고자 함
⑥ 설교의 교리적 차원: 기독교 가르침을 전달
⑦ 설교의 도덕적 차원: 도덕성과 지각을 수립하여 행위의 변화를 유도
2. 설교의 대상은 누구인가?
전체 공동체, 공동체와 속한 개인 한사람 한사람의 심령
3. 인격이냐, 직책이냐? 직책
이를 조화시키는 것은 설교자의 통찰력과 능력을 평가하는 시금석이다.
4. 설교는 불변인가? 항상 변하는가?
불변: 말씀,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다.
변: 청중의 특수한 문화적 상황
5. 은사와 과제로서의 설교
설교는 은사일뿐아니라 또한 연구되고 발전되어야 하는 과제이다.
(성령의 조명과 인간 노력의 혐동적 관계)
설교의 형태와 내용: 지혜롭게 설교한다는 것은 성경의 지혜로부터
지금 여기서의 환경에 가장 분명하게 적용되는 통찰력을 끌어내는 것이다.(고전2:6)
6. 설교의 통일성
예수 그리스도란 렌즈를 통하여 조명, 성령을 통하여 아들 안에서 나타난 성부 하나님의 계시에 초점
7. 설교의 권위
설교자와 계시된 말씀과 얼마나 깊이있게 일치하느냐에 달렸다.
8. 예언적 설교
개인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뿌리 깊은 사회적 불의의 관점에서 인간의 필요를 말함(암5:7)
9. 기름부음(Unction)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과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말씀하신다는 설교 주제의 신앙적인 효과를 가장 함당하고 정확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용어이다.

 

출처 :송수천목사까페 https://cafe.daum.net/kmc4755/AT6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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