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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의 삶, ‘동행’ 요14:15~21
외로움은 병이다.
흔히 인명은 재천(在天)이라고 한다. 죽고 사는 것이 하늘의 뜻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인간의 수명이 사뭇 달라지기도 한다.
로잔대학에서 150여 종의 곤충수명을 연구했다.
그 결과 흰개미가 말벌이나 바퀴벌레보다 100배 오래 산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 차이는 서로 어울려 사느냐 혼자 사느냐에 있었다.
흰개미처럼 서로 어울려 사는 곤충이 그렇지 않은 곤충보다 훨씬 오래 산다는 것이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건강한 관계가 인간의 수명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요즈음 아이들 입에서까지 자주 회자되는 말이 있다. ‘힘들어 죽겠다.’
그런데 사람은 힘들어서 무너지고, 힘들다고 죽지 않는다. 외로워서 무너지고, 외로워서 죽는다.
외로움은 무서운 마음의 병이다.
홀로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할머니가 있었다. 그런데 자살을 했다.
경찰이 자살원인을 찾았지만 원인이 될 만한 단서가 보이지 않았다.
집 안에는 온갖 고급스런 가구와 사치스런 장식품이 즐비했다.
그러니 생활이 어려워서 죽은 것은 아니었다. 주치의까지 두고 있어 건강상의 이유도 아니었다.
오히려 건강관리를 잘해서 나이에 비해 건강했다고 주치의가 말했다.
물론 유서도 없었다. 경찰은 할머니가 사용하던 책상 서랍에서 작은 수첩을 발견하곤
비로소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그 수첩에는 365일 똑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오늘도 아무도 나에게 오지 않았다.’
건강하고 부자인 할머니가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외로움이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이런 선택을 한 것이다.
외로움은 병이다. 현대인이 앓고 있는 대표적인 마음의 병이다.
방치하면 서서히 시들다 말라버리는 나무처럼 삶의 물기를 앗아가고 탄력을 잃게 한다.
외로움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스치는 바람에도 가슴이 베이고,
내리는 는개에도 가슴이 패는 여린 영혼의 소유자다.
외로움은 혼자서는 결코 치유할 수 없는 ‘함께’라는 치료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병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확신의 삶 네 번째 ‘동행의 확신’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아름다운 주님의 약속
‘고슴도치 딜레마’라는 말이 있다(Schopenhauer).
온몸에 있는 가시 때문에 가까이 가면 서로 찔리고, 멀어지면 온기를 나눌 수 없는
고슴도치의 상황을 뜻하는 용어다.
그래서 덴마크 철학자 키엘케고르(Kierkegaard)는
인간을 동토(凍土)에 버려진 가시 돋친 고슴도치와 같다고 했다.
다가가자니 상처를 받을까 두렵고, 혼자 있자니 외롭고, 현대인의 모습이 이와 같다.
그러니 군중 속에서도 고독을 느낀 것이다.
쉴 새 없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문자를 주고받지만 마음은 항상 춥고 외롭다.
마음이 삭막한 사막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사회적 문제가 될 만큼 반려동물을 기르는 사람이 많고, 관련 산업이 크게 성장하고 있다.
이 또한 현대인의 외로운 삶을 반영한다.
개나 고양이와 같은 동물은 배신하지도 않고, 예뻐해 준만큼 반응까지 보이니까
사람에게 받지 못한 위로를 동물에게서 받으며 외로움을 달랜 것이다.
현대인은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는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궁핍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대인이다.
이렇게 외로운 현대인에게 본문은 복음 중에 복음이다.
요한복음13장에서 ~17장은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던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다락방 강화’라고 부른다.
본문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두고 떠나지만 결코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겠다는
아름다운 약속의 말씀이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인류구원이라는 대업을 이루고 나면 주님은 제자들만 두고 떠나셔야 한다.
주님의 떠나심은 제자들에게 두려움이고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베드로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13:36) 라고 물었던 것이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신 위로의 말씀이 본문이다. 여기서 주님은 잠시 떠난 것이고,
결코 그들만 버려두지 않겠고 약속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6,17).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을 영원히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시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아울러 주님 역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8)고 하셨다.
이 약속이 주님이 계시지 않는 이후 제자의 삶을 가능하도록 했던 원동력이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의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힘 또한 이 약속의 말씀이다.
육신으로 주님을 뵐 수는 없지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동행)을 일깨워주시고, 다시 오시겠다는 말씀을 소망삼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동행을 확신하려면
성경은 역사는 하나님의 활동무대이고,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과 항상 함께 하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 흐르는 주요사상이다.
인간이 아담과 하와처럼 범죄하여 숨고, 요나처럼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쳐도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셨고,
풍랑까지 대동해서 추격하여 찾아내셨다.
특히 신약에서는 그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찾아오셨고,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시다가 마지막에는 생명까지 내어주셨다.
문제는 이렇게까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사는 것이 어렵고 힘들면 잠잠히 기다리며 도우심을 구하기보다
주님이 어디 계시냐고, 왜 나를 이렇게 홀로 두시냐고, 도대체 나에게 관심이나 있는 것이냐고
원망을 쏟아낸다.
말씀에 의하면 분명히 주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이런 절규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주님이 함께 하심(동행)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동행을 확신할 수 있을까?
나의 계명을 지키라!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15).
이 말씀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는 두 개의 문장이 결합된 것이다.
여기서 ‘나의 계명’이란 ‘새 계명’(요13:34,35)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계명을 지킨 것이고, 이로써 주님이 함께 하신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21).
서로 사랑하는 것이 ①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②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다.
특히 이런 사람에게 주님께서 ③자신을 나타내시겠다고 하셨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이미 주님(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것,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세상은 이미 천국이 되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모두 천사가 되어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로 변해가고, 우리 마음에는 여전히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증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결국 사랑이 의지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힘을 받아서 하고,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 할 수가 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야 지체를 사랑할 수가 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친밀한 관계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주님과의 관계도 친밀하다는 뜻이다.
때문에 주님께서 이런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다. 이렇게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갖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주님이 함께 하신(동행)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자신을 점검해 볼 수 있다. 까닭없이 지체들이 좋고, 지체들과의 만남이 좋고,
사랑스럽다. 무엇이든 나누고 싶다. 함께 섬기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지금 주님께서 내 안에서 내 마음을 움직이시고 계신 증거다.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보다 주님이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밤 같이 어둔 세상이다. 다윗은 이 세상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했고(시23:4),
베드로는 굶주린 사자가 먹잇감을 찾아 울부짖는 밀림처럼 사단이 삼킬 자를 찾는 곳(벧전5:8)이라고 했다.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없는 두려운 현실이라는 뜻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신다고 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서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뜻이다. 책임지시겠다는 뜻이다.
문제는 우리다. 이런 주님의 약속을 확신하지 못한 것이다.
주님께서 동행하고 계신 것을 확인하지 못하니까 확신이 없는 것이다.
마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주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으면서도
주님인 줄 알아차리지 못한 것과 같다.
본문은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렇다. 지체 간에 피차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주님이 동행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방법이다.
다같이 옆 사람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해보자. ‘사랑합니다.’ ‘사랑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결심하고 고백만 해도 주님이 훨씬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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