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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지낼수 없는 이유

by 【고동엽】 2022.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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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사를 지낼수 없는 이유


설, 추석 명절이 되면 많은 한국 가정들이 제사를 지낸다. 이 제사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사실 믿음이 굳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에 크게 어려움을 겪지 않지만, 믿지 않는 가족들은 무지와 완고함으로 인해, 또는 제사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르지 못한 지식으로 인해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곤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제사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갖고 그에 따라 바르게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1. 산 사람이 중요하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제사는 산 자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기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산 자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죽은 자가 더 중요한가?
말할 것도 없이 산 자이다. 그러나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산 자를 중요하게 여기기보다는 죽은 자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제사 때가 되면 살아 생전 부모님께 해 드리지 않던 각종 음식들이 제사상에 오른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관점으로 제아무리 제사가 효도의 한 본이 된다고 해도 돌아가신 뒤에 제사 한 번 지내는 것보다는 제사상 차릴 돈으로 살아 계신 부모님께 보약 한 첩 지어 드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살아 계신 부모님은 나를 항상 걱정해 주시고 매일 생각해 주시며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 주시려 한다.


그러나 죽은 부모님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성경은 살아있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누누히 강조하고 있지만 죽은 부모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우리 나라의 전통은 고대 중국의 왕족 제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죽은 왕들에게만 제사를 지내고 기념했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유교의 영향으로 모든 인간은 조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조상숭배 사상이 보편화되었고, A.D. 1200년경 중국 송나라의 주자라는 사람이 제사의식을 체계화하였다. (이것을 체계화한 학문이 성리학이다.)


우리 나라는 성리학이 전래된 고려 말엽부터 함께 들어온 <주자가례, 朱子家禮>라는 책을 통해 조상 숭배 사상이 생겨났고, 이어서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성리학을 통치기반으로 삼음으로써 조상 제사는 보편화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종교는 불교였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우리 나라는 불교에서도 제사를 지내지만, 사실 정통적인 불교 국가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에 대한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효도라는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을 왜 지키지 않느냐고 비난받곤 하는데, 제사가 곧 효도라면 조선시대 이전에는 효자가 한 사람도 없었단 말인가?


2. 효도는 살아 계신 부모님께 하는 것
죽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절대로 효나 불효의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살아 있는 부모를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너는 네 아비와 네 어미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준 땅 위에서 네 날들이 길 것이라"(출 20:12). "살아 있는 모든 자에게 참여하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나니, 이는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라"(전 9:4)


3. 제사는 마귀들과 교제하게 하는 것
어떤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면 죽은 조상들이 와서 차려 놓은 음식을 먹고 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이 세상에 다시는 올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은 죽으면 즉시 하늘나라 아니면 지옥으로 간다(눅 16:19-31). 우리는 지옥에서의 절규때문에라도 제사를 지내면 안된다.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혼들에게 먹지도 못하는 음식으로 약올리는 것이 아닌가? 죽은 조상은 절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 대신 제사지낼 때 오는 것은 마귀들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은 마귀들에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아니하노라"(고전 10:20)


이 말씀에 따르면 제사를 지낼 때 조상들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죄짓게 만들고 병을 주며 살인하게 만들고 도둑질하게 만들고 음란하게 만드는 마귀가 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를 자주 지내는 사람들은 마귀와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남을 참소하게 되고(계 12:10), 대적하며(벧전 5:8), 약해지고(요일 2:13), 거짓말하게 되며(요 8:44), 병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제사를 지내면 안된다. 그것은 마귀와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추도예배로 대체하자?
어떤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지는 않으나 대신 "추도예배"라는 것을 드린다. 교계에서는 추도예배를 효과적으로 드리기 위해 "모범예식안" 같은 것도 만들어 지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절만 하지 않을 뿐 제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물론 절을 하느냐 마느냐는 경배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기에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조상숭배의 전통에서 비롯된 풍습을 형식만 조금 바꾸어서 굳이 행할 필요가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행사가 많은 부분에서 비기독교적이라고 해서 산타 클로스와 마리아는 배제시키고 아기 예수만 경배한다. 그렇다고 그가 성경적인 올바른 전통에 서 있는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부활절 달걀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색칠한 달걀을 주지 않는 대신 부활절 카드를 만들어 기념한다. 그렇다고 그가 바빌론 신비종교의 풍습에서 벗어난 것인가?


물론 가족들끼리 모여서 고인의 덕을 기리며 그를 추억하고 그가 못다한 일을 대신 이루자고 다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조상숭배의 관습을 따라 명절에 형식만 조금 바꾼 제사의 예를 치를 필요가 있겠는가?


성경대로 믿는 사람의 자세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행하고 따르는 자들이다. 우리는 비성경적인 전통을 지킬 필요가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명절이면 조상을 섬긴다는 미명하에 우상을 섬기기 위해 "민족 대이동"을 하고 있는가? 성경은 우리가 기념해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말씀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고전 11:26)
명절에 가족과 친지들이 모인다면 그들 중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부모를 참으로 공경하기 원한다면 그들의 혼이 지옥에 떨어지기 전에 구원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가장 훌륭한 효의 모습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이다.


성서적 비판
앞으로 말한 바와 같이 조상제사의 그 사상적 근거가 무속신앙에 있는 고로 다시 비판할 여지가 없다고 보여진다. 기독교의 효도는 십계명에 명시되어 있으며 그 뜻의 신학적 의미가 큰 것이다.


먼저는 죽은 조상의 혼이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 누구의 혼도 종교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확실한 신앙 위에서 효도를 이해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성서적 신앙이다. 어떤 성자나 위인도 물론 자신의 조상도 숭배의 대상이 되지못하며 하물며 죽은 자의 혼을 예배함은 용납될 수 없다. 효도와 예배는 다르며 추모와 제사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죽은 자의 혼백이 배회한다던가 다시 찾아와서 제사의 공양을 받는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무속신앙이며 또 무근한 미신이다. 영혼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죽는 순간 그 영은 그 시체에서 떠나며 자의로 다시 찾아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이같은 개념은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음이 혼백만 생각한 나머지 원시적 신앙 안에서 추리한 것이다. 원시신앙에서는 꿈과 현실을 혼돈한다. 꿈에 나타난 조상이 바로 그 조상의 혼이라고 착각한다. 이같이 원시신앙적 착각이 혼백숭배 제사에는 윤리적 도덕적 요소가 없다. 사랑과 용서, 의와 진리 그리고 사회적 요소를 찾지 못한다. 단번에 번영과 풍요를 보증해 주는 세속적 욕구와 사행심이 밑에 깔려 있고 다분히 기복적인 신앙에 매여 있는 것을 본다. 그 제사의 궁극목적이 자기자신의 부귀영화에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효의 본 뜻에서 멀어진 것이다. 효의 본뜻을 상실한 제례가 아무 뜻도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효도의 본 뜻으로 돌아가서 새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제사형식에 있어서 음식을 준비하고 수저를 꽂아 놓는다던가 술을 부어 드리는 일 등은 그 자체가 미신적 의식이라고 보여진다. 의식은 상징적인 것이다. 그 상징이 미신적인 상징언어에서 빌어 왔을 때 마침내 그 뜻까지도 미신화 되어 버릴 가능성이 있다. 조상에 대한 효도가 미신적으로 표현될 때 그 귀한 뜻까지 변질되어 버리며 끝내는 그 의식만 고집스럽게 되풀이되고 그 타성에 매여서 본 뜻에로 돌아갈 수 없는 허례허식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제례를 다시 비무속화(非巫俗化)해야 할 시점에 있다고 본다. 성서적 효의 개념으로 돌아가서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신앙적인 효도가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겸하여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제사의 뜻을 간단히 설명하여서 제례를 이해함에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성경에는 아벨의 제사를 시작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이 모두 하나님께 제사 드렸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께' 제사 드렸다는 점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제사 드렸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만남을 뜻하는 것이다.
여러가지 제사가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속죄제사였다. 그 제사들은 피를 흘려서 뿌리서 드렸고 제물을 온전히 불살라 드렸다. 이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뇌물이 아니었다. 이 제사로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이 제사를 드려서 큰 복을 받아 내자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마음과 정성을 다하지 못한 제사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다(이사야 1장). 하나님은 부정한 제물을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고 책망하셨다.
그런고로 성경의 제사는 마음과 뜻을 회개와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예식이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곧 제사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회개, 겸손, 의와 화해 그리고 거룩함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긍휼과 사랑이 우선되는 제사이어야 한다.


더욱 귀중한 신학적인 의미는 이 제사들은 계시적이요 예표적이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 인간들을 그의 자녀로 만나 주시며 영접해 주심에는 그 자신에 지불되는 엄청난 희생이 있다. 이 하나님 자신이 지불하시는 희생을 제물 위에서 계시하고 계신 것이다. 생명을 죽여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이 '죽음'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공의로운 사랑이 구체적으로 상징화되어 계시된 것이 제사이며 제물이다. 따라서 결정적인 제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이다. 십자가의 희생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며 그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다. 그 역사적인 예표가 곧 제사인 것이다. (히브리서 참조)


이제 우리는 효의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발견하고 밝고 새로운 생생한 방법으로 효의 방법을 찾아 나아가야 할 것이다. 모르고 어두워서 그리했던 제례를 통한 조상숭배의 예식에서 깨어나서 본 뜻에로 돌아가며 성서적 효도의 바른 지표를 찾아서 새로운 효도의 풍습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가장 높은 뜻의 효도를 강조하는 종교이다. 오히려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진정한 뜻에서 효자가 될 수 있음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새롭게 우리의 윤리강령이 되어 밝고 은혜로운 가정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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