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강 교만한 자를 낯추시는 하나님(4:36-37)
4:36-37
그 동시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조회하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입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느부갓네살 임금이 교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교만을 꺾으시기 위해서 벌을 주셨습니다. 7년 동안 짐승의 마음을 주어서 짐승처럼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다 지났을 때 드디어 느부갓네살 임금이 회개하고 겸손히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36절입니다. "그 동시에." 느부갓네살 임금이 온전한 회개를 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그 동안 느부갓네살 임금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짐승의 마음이 떠나가고 인간의 마음이 다시금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또 내 나라 영광에 대하여도." 바벨론 나라의 영광도 다시금 회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역사적으로 아주 보기 드문 강력한 권세를 가진 임금이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를 다 정복했습니다.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왔습니다. 다니엘도 그 포로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왕좌에서 쫓겨난 7년 동안 아무래도 바벨론의 국력이 많이 쇠하여졌을 것입니다. 나라의 영광이 많이 감하여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7년 뒤에 느부갓네살이 왕위를 회복하면서 과거에 느부갓네살 임금 때 누렸던 나라의 영광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나라의 영광만 돌아온 것이 아니라 느부갓네살 임금 개인의 위엄과 찬란한 광명도 다시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회복되고, 국가적으로도 회복되었습니다. 계속 보시겠습니다.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조회하니."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스렸던 모든 신하들이 다 느부갓네살 임금을 찾아와서 머리를 숙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누구의 영향이 컸을 것 같습니까? 박수장이었고, 행정의 수반이었던 다니엘의 역할이 컸을 것입니다. 비록 느부갓네살 임금이 7년 동안 미친 짓을 하고 정신병자로 살았지만 다니엘이 신하들에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임금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그의 건강은 틀림없이 곧 회복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 동안 각자에게 주어진 국사에 성실히 임하기를 바란다." 다니엘의 말을 듣고 신하들이 두말없이 주어진 일에 충성하지 않았겠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다니엘은 윗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런 경우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회복시켜 줄 것을 알지만 모른 체하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느냐, 저 사람을 쫓아내야 한다고 하면서 얼마든지 대신 왕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기의 위치를 잘 지켰습니다. 얼마나 귀한 모습입니까? 다니엘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도 윗사람을 잘 받들어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모시는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 되지 말고 다니엘처럼 자기 위치를 잘 지키고 윗사람을 잘 받들어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을 보세요.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입고." 느부갓네살 임금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신하들이 다 느부갓네살 임금을 다시 왕위에 세워주었습니다. 평화롭게 다시금 자기 위치를 회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보세요.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과거보다도 더 놀라운 위세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나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욥도 그러했습니다. 환난을 당한 이후에 오히려 환난을 당하기 이전보다 두 배의 복이 임하지 않았습니까? 처음보다 나중이 더 나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나갈 때 때로는 우리에게 징계를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임금처럼 우리가 온전히 회개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환난을 당했을지라도 환난 이후가 훨씬 더 낫게 역사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내일보다는 모레가 갈수록 더 나아지는 복된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36절을 다시 한번 보세요. 우리가 느부갓네살 임금의 위치에 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36절에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있습니까? 몇 번 나오고 있습니까? 없습니다. 제가 읽어봅니다. 거기에 일인칭 대명사 "나"라고 하는 말이 몇 번 나오고 있는지 손꼽아보세요. "그 동시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조회하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입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몇 번 나옵니까? 열 번 나옵니다. 전부 자기 입장에서 나! 나! 나! 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예전에 그랬듯이 "나"를 꼭 붙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할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말을 해야 할 텐데 과거에 바벨론 왕궁 위에서 바벨론 도성을 바라보면서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나의 권세와 능력으로 나의 도성을 삼고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고 했듯이 여전히 나! 나! 나!입니다. 잘못이지요. 버릇이라는 것은 참 고치기 어렵습니다. 습관이라는 것은 잘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운명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습관을 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라인홀트 니버라는 유명한 사람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그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해주시고, 고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납할 수 있는 넓은 마음과, 침착함과 냉정함을 주옵소서. 그리고 아울러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쳐야 합니다. 그런데 고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 없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고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받아들여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키가 크게 만든 사람도 있고, 키가 작게 만든 사람도 있습니다. 키가 크면 큰 대로 살아야지요. 제가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내가 키가 좀 크고 남편이 키가 좀 작습니다. 결혼식을 할 때 부인이 키가 크니까 남들 보기에 안 좋아 보일 것 같아 일부러 다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구부정하게 해서 한 시간 동안 서 있느라고 혼났다고 합니다. 키가 크면 큰 대로 서야지 구부정하게 서 있었으니 오히려 얼마나 멋이 없었겠습니까? 키 작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지 고칠 수 있겠습니까? 염려를 한다고 키가 한 자나 자라겠습니까? 고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키가 작다고 크게 보이려고 목을 자꾸 길게 잡아 빼면 얼마나 교만하게 보이겠습니까? 받아들이면서 살아야 합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일평생 살아온 습관을 어떻게 쉽게 고치겠습니까?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삶의 철학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안 고쳐집니다. 그 버릇이 어떻게 고쳐집니까? 젊은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이 어떻게 하시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젊은 사람들이, 아랫사람들이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야 합니다. 3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찬양한다, 칭송한다, 존경한다는 거의 비슷한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찬양한다, 칭송한다, 존경한다는 단어를 모두 분사형을 사용했습니다. 분사형이라는 것은 계속되는 것을 말할 때 쓴다고 했습니다. 찬양하고, 칭송하고, 존경하는 것을 한 번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 찬양하고, 하나님을 칭송하고,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일을 느부갓네살 임금이 그때부터 일평생 동안 계속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말입니다. 왜 느부갓네살 임금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칭송하고, 존경했습니까? 그 이유가 세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로,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둘째로, 하나님의 행하심이 의로우시고, 세번째로, 하나님은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능히 낮추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습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누가 교만하고, 누가 겸손한지 하나님은 다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교만한 자의 교만을 꺾으시고, 겸손한 자의 겸손한 자는 하나님이 높여주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실수가 없습니다. 진실하십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두번째로,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다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의 교만을 꺾기 위해서 짐승의 마음을 주어서 7년 동안 고통 당하게 하신 일도 불의한 것이 아닙니다. 옳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다 겸손하게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이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과거에 자기가 교만했던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교만했구나." 자기가 교만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이제 그가 겸손해진 것 아니겠습니까?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잠 16:18을 찾아서 같이 읽고 마치겠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교만이 있으면 꼭 뒤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패망입니다. 거만한 마음이 있을 꼭 뒤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넘어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불변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이심을 생각하시면서 오늘도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우러러보시고 하늘을 우러러보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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