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강 공의를 행하고 긍휼을 베풀면(4:25-27)
4:25-27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였느니라
느부갓네살 임금이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과 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임금의 교만을 꺾으시기 위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을 벌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을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벌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 25절에 있습니다.
25절을 한번 보십니다. 첫째로,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왜 사람에게서 쫓겨났습니까? 본문 앞에 있는 16절 보시기 바랍니다.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마음이 짐승의 마음이 되어서 짐승처럼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하들이 왕에게 조반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짐승의 마음입니다. 자기를 소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처럼 울음 소리를 내고 밥상을 받아서 다 엎질러 버렸습니다. 그리고서 소처럼 아무데나 대소변을 싸고 네 발로 기어다니고, 밥을 갖다 주어도 풀이 어디 있냐고 하면서 밥을 먹지 않으니 어떻게 인간 세계에 살 수 있겠습니까?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서 쫓겨났습니다.
두번째,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자기를 짐승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고 들짐승과 함께 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기서 말하는 들짐승은 사자라든지, 호랑이, 늑대와 같은 사나운 짐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들에 있는 짐승, 예를 들어서 소라든지 말, 양과 같은 짐승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들짐승과 함께 거할 뿐만 아니고 마치 "소처럼 풀을 먹으며"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소라고 생각하고 소처럼 풀을 먹게 됩니다.
네번째로,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사람이라면 낮에는 들에 나가더라도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옵니다. 자기를 짐승처럼 생각을 하니까 돌아올 생각을 안합니다. 들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니까 하늘 이슬에 젖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정신병이 얼마나 계속된다고 했습니까?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7년 동안 계속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최근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자기를 고양이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3년 동안 자기가 고양이라고 생각하며서 지내다가 13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의학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치셔서 짐승처럼 낮아지는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7년 동안 정신병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비로소 "그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절대 주권은 깨닫고 난 뒤에, 나라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뉘우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게 될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26절에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그래도 아직도 한 가닥의 희망이 남아 있음을 알게 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희망인지 보십시다. "또 그들이." 여기서 그들은 누구입니까? 순찰자, 하나님의 명을 받고 하늘에서 내려온 자들입니다.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그랬습니다. 나무를 베되 완전히 베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루터기는 남겨 둔다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의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루터기에서는 얼마든지 싹이 날 수 있습니다. 다시 회복될 수 있는 희망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하나님의 주권을 왕이 알고 난 뒤에야,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을 알고 난 뒤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고 했습니다. 하나의 소망을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신병으로 죽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왕이 뉘우치고 난 뒤에, 깨달을 것을 깨닫고 난 뒤에 다시 회복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느부갓네살 임금이 7년 동안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동안 느부갓네살 임금의 아들이었던 아멜말둑이 7년 동안 느부갓네살 임금을 대신해서 바벨론을 통치했습니다.
27절에서 다니엘은 왕의 꿈을 다 해석하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왕이여, 내 말을 들으시옵소서.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왕에게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권면을 하는지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자기가 하는 말을 잘 귀담아 듣고 이대로 행하면 좋겠다는 간언을 하고 있습니다. 왕이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그 동안 하나님 앞에서 불의를 행했던 것을 다 회개하고 의롭고 바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마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의를 행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예를 세 가지를 들어주셨습니다.
첫째 의는 구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구제할 때 큰 거리 어귀에 가서 나팔 불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구제하라고 했습니다. 구제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입니다.
두번째 의는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큰소리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세번째 의는 금식하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슬픈 기색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보이도록 금식하라고 했습니다. 구제하는 것, 기도하는 것, 금식하는 것이 다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을 돕고 기도하면서 당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치시고, 또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넘어가서 30절을 보시겠습니다.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그 큰 바벨론 도성을 건설하는데 느부갓네살 임금이 불쌍하고 힘없는 평민들을 얼마나 동원했겠습니까? 말 안 들으면 몸을 쪼개고 집을 거름터로 삼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바벨론 도성을 건설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빼앗기기도 했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그런 흉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러지 말고 힘없고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김으로서 죄악을 사하라고 충고하였습니다. 두 가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공의를 행해야 하는 것과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왕에게 정신병으로 내리셨던 하나님의 심판이 취소되고 왕의 평안함, 건전한 정신이 혹시 장구할지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왜 "혹시"라고 말을 썼겠습니까? 왕을 심판하고 용서하는 것은 자기 권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의 권한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27절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기도의 제목을 찾아야 할 줄 압니다. 교만하지 마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겸손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낮아지신 것처럼 우리들도 낮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잊지 말고,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고 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이 일을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물어보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불의를 행하지 말고 의롭고 정직하고 바르게 사시는 이 하루가 되시기를 바라고 아울러 하나님께서 나같이 못난 것도 사랑해 주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가 대할 모든 사람들을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불쌍히 여기면서 살아가는 이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다 탕감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내게 일백 달란트를 빚진 이웃들에 대해 넘어가기도 하고 용서해 주기도 하고 탕감해 주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함이 우리 마음속에 계속해서 지속되는 복되고 즐거운 하루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였느니라
느부갓네살 임금이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과 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임금의 교만을 꺾으시기 위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을 벌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을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벌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 25절에 있습니다.
25절을 한번 보십니다. 첫째로,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왜 사람에게서 쫓겨났습니까? 본문 앞에 있는 16절 보시기 바랍니다.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마음이 짐승의 마음이 되어서 짐승처럼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하들이 왕에게 조반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짐승의 마음입니다. 자기를 소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처럼 울음 소리를 내고 밥상을 받아서 다 엎질러 버렸습니다. 그리고서 소처럼 아무데나 대소변을 싸고 네 발로 기어다니고, 밥을 갖다 주어도 풀이 어디 있냐고 하면서 밥을 먹지 않으니 어떻게 인간 세계에 살 수 있겠습니까?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서 쫓겨났습니다.
두번째,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자기를 짐승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고 들짐승과 함께 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기서 말하는 들짐승은 사자라든지, 호랑이, 늑대와 같은 사나운 짐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들에 있는 짐승, 예를 들어서 소라든지 말, 양과 같은 짐승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들짐승과 함께 거할 뿐만 아니고 마치 "소처럼 풀을 먹으며"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소라고 생각하고 소처럼 풀을 먹게 됩니다.
네번째로,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사람이라면 낮에는 들에 나가더라도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옵니다. 자기를 짐승처럼 생각을 하니까 돌아올 생각을 안합니다. 들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니까 하늘 이슬에 젖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정신병이 얼마나 계속된다고 했습니까?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7년 동안 계속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최근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자기를 고양이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3년 동안 자기가 고양이라고 생각하며서 지내다가 13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의학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치셔서 짐승처럼 낮아지는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7년 동안 정신병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비로소 "그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절대 주권은 깨닫고 난 뒤에, 나라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뉘우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게 될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26절에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그래도 아직도 한 가닥의 희망이 남아 있음을 알게 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희망인지 보십시다. "또 그들이." 여기서 그들은 누구입니까? 순찰자, 하나님의 명을 받고 하늘에서 내려온 자들입니다.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그랬습니다. 나무를 베되 완전히 베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루터기는 남겨 둔다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의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루터기에서는 얼마든지 싹이 날 수 있습니다. 다시 회복될 수 있는 희망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하나님의 주권을 왕이 알고 난 뒤에야,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을 알고 난 뒤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고 했습니다. 하나의 소망을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신병으로 죽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왕이 뉘우치고 난 뒤에, 깨달을 것을 깨닫고 난 뒤에 다시 회복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느부갓네살 임금이 7년 동안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동안 느부갓네살 임금의 아들이었던 아멜말둑이 7년 동안 느부갓네살 임금을 대신해서 바벨론을 통치했습니다.
27절에서 다니엘은 왕의 꿈을 다 해석하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왕이여, 내 말을 들으시옵소서.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왕에게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권면을 하는지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자기가 하는 말을 잘 귀담아 듣고 이대로 행하면 좋겠다는 간언을 하고 있습니다. 왕이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그 동안 하나님 앞에서 불의를 행했던 것을 다 회개하고 의롭고 바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마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의를 행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예를 세 가지를 들어주셨습니다.
첫째 의는 구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구제할 때 큰 거리 어귀에 가서 나팔 불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구제하라고 했습니다. 구제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입니다.
두번째 의는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큰소리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세번째 의는 금식하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슬픈 기색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보이도록 금식하라고 했습니다. 구제하는 것, 기도하는 것, 금식하는 것이 다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을 돕고 기도하면서 당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치시고, 또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넘어가서 30절을 보시겠습니다.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그 큰 바벨론 도성을 건설하는데 느부갓네살 임금이 불쌍하고 힘없는 평민들을 얼마나 동원했겠습니까? 말 안 들으면 몸을 쪼개고 집을 거름터로 삼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바벨론 도성을 건설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빼앗기기도 했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그런 흉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러지 말고 힘없고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김으로서 죄악을 사하라고 충고하였습니다. 두 가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공의를 행해야 하는 것과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왕에게 정신병으로 내리셨던 하나님의 심판이 취소되고 왕의 평안함, 건전한 정신이 혹시 장구할지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왜 "혹시"라고 말을 썼겠습니까? 왕을 심판하고 용서하는 것은 자기 권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의 권한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27절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기도의 제목을 찾아야 할 줄 압니다. 교만하지 마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겸손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낮아지신 것처럼 우리들도 낮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잊지 말고,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고 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이 일을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물어보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불의를 행하지 말고 의롭고 정직하고 바르게 사시는 이 하루가 되시기를 바라고 아울러 하나님께서 나같이 못난 것도 사랑해 주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가 대할 모든 사람들을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불쌍히 여기면서 살아가는 이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다 탕감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내게 일백 달란트를 빚진 이웃들에 대해 넘어가기도 하고 용서해 주기도 하고 탕감해 주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함이 우리 마음속에 계속해서 지속되는 복되고 즐거운 하루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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