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도회 헌신 예배
주님의 제자인 증거
요한복음 13:31-38
본문의 말씀은 어떻게 해야 모든 사람들에게 공인된 제자가 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알려질 수 있고 공인될 수 있는 주님의 제자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고 그렇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하는 것입니까? 자기를 위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연민의 일부일 뿐입니다. 이기적인 감정일 뿐입니다. 욕망과 욕정이 만나는 것은 동물적인 본능입니다. 적어도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니 나를 당신에게 드립니다 라는 것에서 참 사랑은 시작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처럼 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오염되고 변질되고 외식을 하고 가면을 뒤집어썼습니다. 사회의 제반 문제가 이 사랑의 문제입니다. 노사간의 갈등, 시부모와 며느리의 갈등, 민생 치안의 문제, 인간의 분쟁 분쟁들이 모두 잘못된 사랑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병이 많습니다. 병명이 있는 병, 병명이 없는 병들이 많습니다. 육체적인 병, 정신적인 병, 심리적인 병, 사회적인 병, 도덕적인 병--- 이 모든 것들이 사실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병리 현상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할 바로 그 전날 밤에 성만찬식을 거행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유언적인 교훈을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어떻게 사랑하라는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주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아카파테 알렐루스>라는 이 사랑은 사전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을 생활을 통해 보여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역사, 생애가 바로 이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아파페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알 수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되는 내적 사랑의 체험이 있어야 하고, 이 사랑을 실천하는 외적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총 안에 신비한 사랑의 감격 속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주님은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사이래 사랑이라는 말처럼 흔한 말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사랑의 목적, 사랑의 방법, 사랑의 목표, 사랑의 근본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론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철학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특별한 사랑입니다. 세상 어느 곳에나 누구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특별한 사랑입니다. 질이 문제입니다. 질적으로 인간이 느끼고 깨닫고 알고 실천하는 사랑과 다른 사랑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로 표현되고 눈물과 간구와 축복으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게 예수님에게 성령님에게 그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보상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조건도 없습니다. 순수하게 100% 우리들이 잘 되고 구원을 받기를 바라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 인격을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을 바울을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고전 13: )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철이 덜 난 사람입니다.
사랑은 받아야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으로 위장된 이기심을 상대방에게 심는 것입니다. 거짓된 사랑이 남을 고통스럽게 하고 진실하지 못한 사랑이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더욱 나쁜 현상은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도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받았으나 배풀지 아니하는 사랑은 세상을 온통 지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받았으나 베풀지 아니하는 사랑 중독자나, 거짓된 사랑을 일삼은 사랑의 외식자들 때문에 세상이 살기 힘들어지고 더욱 악해집니다.
미국의 정신 분석 학자인 에릭히 프롬 (Erich Fromm)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사랑을 다섯 가지 특징이 있는 것으로 분석을 했습니다. ①. 관심을 가지는 것, ②. 책임을 지는 것, ③. 존중하는 것, ④. 이해하는 것, ⑤.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산디에이고는 경관 좋고 기후가 좋아 주거지역으로 가장 좋은 곳입니다. 이곳 외곽에는 어마어마한 주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곳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어느 집에 전화가 왔습니다. 그 안 주인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전화는 한국 전쟁에 나간 아들에게 온 전화였습니다. 그 아들은 말하기를 "어머니 제가 제대를 하고 집에 돌아 갈 것입니다. "어머니는 너무 기뻐서 "애야 전화는 무슨 전화야 빨리 오너라.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어서 오너라" "그런데 어머니 집에 갈 때 한 친구를 데려 가겠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무 생각 없이 친구를 데려 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런데 그 친구는 한국 전쟁에서 부상을 하여 한 눈을 실명하고 팔과 다리 하나씩이 없는 불구자입니다. 오갈 때가 없어 제가 데리고 살까 합니다." "아무튼 데려 오너라. 고생들 했으니 집에와 한 일주일쯤 푹 쉬게 해 주어라" "어머니 일주일은 안됩니다." "한 달 정도면 되겠니?' "아니오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설득합니다. "애야, 네가 그 친구를 평생 데리고 산다는 것은 정말 기특한 생각이다마는 생각과 현실을 엄연히 다르단다. 그런 불구자와 평생을 같이 지낸다는 것은 얼마나 힘드는지 모른단다. 처음에는 불쌍한 생각이 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귀찮아 질 수도 있어서 처음에 가졌던 좋은 감정까지 망치는 경우가 흔하단다. 결국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 되고 만단다."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덜꺽 끈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경찰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어젯밤에 센디에이고 호텔 12층에서 투신 자살을 했으니 사체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부모는 너무 놀라서 부랴 경찰서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죽은 그 아들은 본 순간 그 부인은 땅을 치고 통곡을 하다 기절을 했습니다. 바로 한 눈이 없고 한 팔과 한 다리가 잘려 나간 가련한 그 친구는 자기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은 몸이 불구가 되어 집에 오면서 이런 아들을 받아 주고 평생 변함이 없이 사랑해 줄 부모를 찾았던 것인데 어머니는 그것을 거절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사랑은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랑은 내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솟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랑의 영을 주셔야 올바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생 동안 주님의 사랑을 공급받는 것이고 배우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 감동된 사람은 주님을 위해 헌신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순교도 합니다.
부부도 그렇습니다. 결혼을 하면 두 몸이 한 몸이 되니 헤어지면 안된다고 주례하는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근면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결혼하는 즉시 두 몸이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평생 두 몸이 한 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 말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에 미친 것이라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하신 사랑은 어떤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1. 사랑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 (요 13:1)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 간난이를 사랑하는 부모들의 사랑 같은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이해 받기를 기대하지 않고,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내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 주기를 바라는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상대방이 이해하든 안하든 사랑하는 사랑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3:1절을 보면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누가 높은 자리에 올라 갈 것인가를 가지고 싸움을 싸운 사람들이 아닙니까? 시기와 질투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쓸데없는 명예심으로 주님의 고초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면 기가 찰 노릇 아닙니까? ‘저런 것들도 인간이라고, 제자라고 데리고 다니다니 한심한 일이다.’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한심한 인간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대야에 물을 떠다 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교부 크리소스톰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전 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가롯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기셨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요13;7) 당황하고 멍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의 하는 일을 이제는 네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일게 될 것이다.(7절)라고 말씀하십니다.
2.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들은 이 사랑을 매일 받고 삽니다. 원수 사랑하는 것이 마치 사랑의 극치가 되어 예수님이나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에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사랑이 원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살 때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기에 달려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말썽을 피우는 자식을 보고 어머니가 아이고 내 원수야 할 때는 그 자식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진짜 원수로 생각을 한다면 죽던지 말던지 무관심입니다.
3. 의롭다 하시는 사랑입니다.
아낌없이 주시는 의의 사랑입니다. 더러운 자를 더럽다 하시지 않고 당신의 의를 전가시키시는 사랑입니다. 당신의 공로를 죄인에게 돌리시는 사랑입니다. 죄인을 이롭다고 생각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의로운 공로를 우리들에게 모조리 전가하여 우리들을 의인되게 하시는 사랑입니다.
4. 대속하신 사랑입니다.
대신 죽으시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아무도 할 수 없고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요셉푸스는 말하기를 "예수는 비겁했다. 그처럼 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서 그렇게 조용히 죽어 갔다는 말인가"라고 했다.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해도 이 점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33세 젊은 나이에, 그 큰 능력을 가지시고, 그 고은 마음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다니----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참 사랑은 자기 희생이 있습니다.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싸우면 자식이 이기고, 목사와 집사가 싸우면 집사가 이긴다. 이 말은 자식보다 부모가. 집사보다 목사가 사랑이 더 많다는 말입니다.
5. 마지막으로 영광된 사랑입니다.(요 13:21; 요 12:23-24)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요 13:3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언제 하셨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 자리를 뜬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 동안 주님은 가롯 유다가 그런 마음을 버리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셨습니다. 그는 그런 주님의 요구를 거절하고 예수님을 팔기 위해 벌떡 일어나 나갑니다. 얼마나 속이 상하고 낙심될 일이고 섭섭하고 두려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 시간에 주님은 “영광을 얻었다”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2:23-24에서도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3-24]”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영광된 사랑은 희생으로 얻어지는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칭찬이 아닙니다. 높은 대접이 아닙니다. 배신을 참고 사랑하고, 낙심된 속에서도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랑 가운데 영광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는 증거는 사랑의 질에 있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 인줄 알리라[요 13:35]”하신 말씀을 우리들의 생에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목사를 핍박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를 어지럽힙니다. 이런 사랑을 영어로 ‘크레이지 러브’ 즉 ‘미친 사랑’이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신비한 동화력을 가집니다. 우리는 값도 치룰 수 없고 그 값을 헤아릴 수도 없는 엄청난 사랑을 주님에게 받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사랑을 몰라 할 수 없다던 가,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할 수가 없다는 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그렇게 큰사랑을 받았음에도 더욱 더 큰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시기 질투하고 야망과 탐욕에 눈이 어두워지면 정말 쓸모 없는 하나님의 패륜아가 될 것입니다.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을 합시다.
우리들은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들답게 그리스도를 따라 행복하게 살고 드리며 살고 베풀며 삽시다.
출처 : 주님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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