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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전도회 헌신 예배 /지극히 높은 이름 /빌립보서 2:5-11

by 【고동엽】 2022.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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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전도회 헌신 예배
지극히 높은 이름
빌립보서 2:5-11


어떤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즈음 성도들은 하나님을 위해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지 분별이 안된다”라고----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신자가 별반 없더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채우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이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는 항간에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일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가롯 유다가 그런 사람이요 5병 2어의 기적의 떡을 먹은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런 사람이었으며 10명의 문둥이 가운데 9명의 문둥이가 그런 사람이 였습니다.


주님은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을 제자들과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그곳은 중동 지역을 총괄하는 로마 군대의 본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수십만 명이나 되는 로마 군인들이 위풍 당당하게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로서는 그들이 부럽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보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리고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는 이 말에 선득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은 그를 칭찬하시기를 “대답을 잘 했다마는 그것을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니라”하십니다.


이 대화가 있고 나서 즉시 주님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과 3일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말씀을 잘 알아듣지를 못하고 무조건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만류를 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보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라고 심하게 책망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그 자신의 인격에서 나온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하여 말한 고백일 뿐입니다. 즉 하나님이 시키시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 말한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존재와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은 꼭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존재, 주님의 되심, 알고 있는 예수, 고백하는 예수님이 반드시 같은 예수님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어디까지나 변함이 없이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눈을 형형 색색이어서 파란 마음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파랗게 보이고 빨간 마음을 가진 사람 눈에는 빨갛게 보여서 주님의 존재와 주님을 아는 인식에 큰 차이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문에서 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스컴의 보도를 그대로 믿는 습성이 있습니다. 어떤 때 신문에서는 ‘이것은 그것이라고 한다’라고 보도가 되었는데 그 말을 한 당사자는 ‘그것이 아니고 나는 이렇게 말한 것을 신문이 오보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것이 진실한 것인지를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별반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도 그런 식으로 잘못 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에는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 고백과 그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 고백은 과히 신적이지만 그의 만류는 순전히 인간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마음에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두고 병든 사람은 의사로, 나라를 잃은 사람들은 정치적 메시아로, 억눌린 사람들은 혁명가로, 가난한 사람들은 기적의 사람으로 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피부 색깔도 자기들의 피부 색깔과 같이 봅니다. 예수님은 원래 피부가 우리와 같은 황색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은 예수님을 완전히 백인으로, 흑인들은 예수님을 아에 흑인으로, 우리 나라 김기욱 화백은 예수님을 큰 갓을 쓴 양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정확히 보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들의 편견, 사람들의 편견, 신학자들의 편견으로 예수님의 원래 모습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엄마가 자식을 키웠습니다. 15살이 되는 생일에 그 엄마는 방성 대곡을 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 엄마의 대답은 비참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를 15년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알다시피 이 아이는 백치요 저능아입니다. 15년을 키웠는데 지금도 나를 자기 엄마 인줄 모르고 엄마라고 부를 줄을 모릅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15년을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볼 줄을 모릅니다. 3, 4년을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읽을 줄 모릅니다.


외정 치하에서 신앙 생활을 하던 분이 평생에 예수님을 우리 나라를 해방시켜 주실 분으로 믿다가 죽을 때에서야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죽으시고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평생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유관순 누나 정도로 생각을 하다가 죽을 때에야 겨우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원한이 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원수 갚아 주는 싸움 잘하시는 중국 배우 ‘이 소령’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답답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당신을 늘 “인자가---- 인자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라든지, 선생이라든지, 랍비라고 부르면서도 한 번도 “인자”라고 부르지를 않습니다. 여기 인자라는 말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다니엘서에서는 심판자라는 말로 쓰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자라고 불러도 실례가 되는 것은 아닌데 인자라고 예수님을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 스데반이 이 말을 합니다. 그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도다”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산 사람입니다. 그는 거의 100세가 되도록 살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순교를 하고 난 한참 후에 요한복음을 씁니다. 그는 요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 신앙의 고백은 참으로 예수님을 바로 보고 말씀하신 고백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라는 신앙 고백이 뼈 속에서, 그 인격에서, 그 살 속에서, 그 영혼에서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난과 가르침과 사랑과 헌신과 믿음의 증거들과 세월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는 바울의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의 ‘기독론’이라고도 합니다. 즉 바울은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참 모습을 모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예수님을 알아야 참 모습의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 나신 이름, 모든 피조물로 그 앞에 무릅을 끓게 하시는 이름,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이 주라 시인해야 하는 그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보다 잘 났다고 자기 이름을 들어내는 사람, 예수님 앞에 무릅을 끓지 아니하는 교만한 사람,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지 않는 사람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되어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사람이 되셨으되 종으로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여기 본체라는 말과 형체라는 말은 모두 ‘모르테’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 본체가 따로 있고 예수님은 형체로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시고 형체십니다.
정리를 하자면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달리 생각을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본체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예수님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한 신부가 신랑에게 선물을 받았는데 그 선물이 남편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은혜는 은혜일 뿐이지 하나님 자신이 아닙니다.


2)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아시는 것도 모르시는 것처럼, 할 수 있어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능력이 있으셔도 없으신 것처럼, 의인이시면 서도 죄인인 것처럼, 하나님이 신데 사람으로 우리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도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왕자와 거지라는 이야기에 거지가 된 왕자는 거지 모양을 해 가지고서도 왕 노릇을 하려 합니다. 그래서는 거지의 생활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죄인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면서도 죄인이 되려 하신 것이 아니고, 죄인처럼 죄어 버렸습니다. 그것을 기꺼이 그렇게 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해도 왕 노릇을 하려 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 하고 찬송을 해도 어린 나귀를 타시고 길을 가십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왕을 찬양하세”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수님을 부르던 사람들은 어느 한 순간에 모두 주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입으로 “왕”이라 부른 것이지 마음으로 믿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 입에 있고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에 있고 우리들의 영혼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우리들의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을 할 때 주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분에게 가르침을 받아 온전케 될 수 있고, 죄 용서를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 지나가신 분이 아니라 역사 속에 현실로 살아 계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믿고 진실한 신앙 고백을 할 때 그곳에 기적이 나타나고 이적이 나타납니다.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은 자가 살아나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허상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신기루를 보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6.25 때 전장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죽어 가는 미군들은 대게 ‘신선한 우유 한컵’을 달라 하고 죽어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군인들은 죽어 가면서 ‘어머니’를 부르고 죽었습니다. 미국 아이들은 우유를 먹고 자라서 그렇고 우리 아이들은 어머니의 젓을 먹고 자라서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날 마지막으로 부를 이름이 누구의 이름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스데반을 보십시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외치고 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이제까지 함께 사시고 그 영혼을 받아 주시고 때가 되면 우리 몸을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부를 마지막 이름은 예수님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이 이름을 높이고, 이 이름을 의지하고, 그 능력에 의지하여 승리의 생활을 합시다.




출처 : 주님의 시선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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