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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1~10(성탄)

by 【고동엽】 2022.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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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디 있느냐

 

창 3:1~10

 

캘리포니아(California) 해안구조대에 긴급구조를 요청하는 SOS신호가 들어왔습니다. “긴급 구조를 요청함” 신호를 받은 구조대는 즉시 회신을 보냈습니다. “알았다. 곧 구하러 갈 테니 당신의 위치를 알려다오.” 그러자 대답이 왔습니다. “나는 한국의 은행장이다.” “당신의 위치를 알려 달라고.” “글쎄, 나는 은행장이라니까.” 이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위치가 어디입니까?-What’s your position?” 그는 이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입니다. 여기의 위치(Position)는 사회적 신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위치가 은행장인데 이것은 소용없는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이런 식으로 대답해서는 안됩니다. 사느냐 죽느냐 문제로 헤매는 상황에서 사회적 위치나 재산 상태를 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질문하십니다. “What’s your position?-지금 어디에 있느냐?” 즉 인생의 현 주소를 묻고 있습니다. 영혼이 어떤 상태냐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대답을 해야 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 해가 지나고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나름대로 더 나은 삶을 위해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항해하는 선박들이 항해 도중 위치 확인을 소홀히 한 까닭에 암초에 부딪혀 파선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항공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치 확인을 잘못한 까닭에 소련 영공에 침범하여 공격을 받아 폭파되어 수많은 생명을 잃은 참변이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일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심한 마음으로 영혼의 위치를 점검하는 노력이 꼭 필요합니다.
본문 9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물음입니다. 에덴에서 살던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이 금지하는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로인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나무숲 속에 숨었다 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눈길은 어디에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찾지 못하여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겠습니까? 숨어있는 위치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위치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있어야할 위치는 하나님 앞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에 숲에 숨었던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물음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질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위치에 있는지 필히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종말론적 지혜가 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시는 음성의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관계를 회복하라는 음성입니다
음악가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이 오래된 예배당을 방문하였습니다. 예배당에는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있었고, 젊은 연주가가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멘델스존은 오르간을 연주하고 싶었습니다. 젊은 연주가에게 한번 쳐보면 안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못 마땅히 여기며 거절하였습니다. 감히 누구길래 파이프 오르간을 만지느냐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멘델스존이 진지하게 간청하자 젊은 연주가는 마지못해 쳐보라 했습니다. 멘델스존이 오르간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손과 발이 오르간에 닿자 자연의 아름다움을 압도하는 선율이 예배당을 채워 감격이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되었습니다. 오르간을 연주하던 멘델스존의 손이 잠시후 멈추자 음악에 취하여 있던 연주가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누구십니까?” “저는 멘델스존입니다.” 깜짝 놀란 젊은 연주가는 말하였습니다. “하마터면 제가 큰 실수를 저지를 뻔 했군요. 당신 같은 위대한 음악가에게 이 오르간을 만지지도 못하게 할 뻔 했습니다”.
어리석은 인생은 스스로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며 마음대로 연주하고 결정을 내리며 살아갑니다. 인생의 연주 대가인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등지고 피하는 자리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즉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심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부르시는 음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심은 관계를 회복하고 교제를 원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 앞에 핑계 되지 않기 바랍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운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에서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를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업에 너무 바쁘고 직장생활이 바쁘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었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죄인인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 회복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회개에 이르라는 음성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문 밖에서만 맴돌던 인도의 한 청년이 눈병으로 심히 고통을 당하다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눈을 정밀히 진찰한 의사는 긴장된 표정으로 말합니다. 눈에 살인적 병균이 들어가 두 눈을 뽑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절망이었습니다. 청년이 아픔과 번민으로 몸부림치고 있는데 크리스천 친구가 찾아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보라고 권고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무슨 말인들 못 듣겠습니까? 그는 친구와 함께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하는데 참으로 염치가 없었습니다. 그토록 예수 믿으라고 할 때는 끄덕도 하지 않던 사람이 죽게 되자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가 완악했던 마음부터 회개하기 시작하자 기도의 문이 열려 모든 것을 철저히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눈이 퉁퉁 부을 정도였습니다. 다음 날 홀가분한 마음으로 청년은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다시 진찰을 하던 의사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토록 심하게 번졌던 독균이 깨끗이 사라진 것입니다. 뜨거운 회개의 눈물이 영육의 생명을 고침 받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회개에 이르러야 합니다. 회개가 생명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지 못하여 아담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한 물음이었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즉 회개하고 돌아오기 원하는 질문입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질문이었지만 아담은 선악과를 먹게 된 동기를 말합니다.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고 다만 하나님이 함께 하게 하신 여자가 주므로 먹었다고 핑계를 댑니다. 즉 책임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 있으며, 동시에 그 여자를 주어 함께 하게하신 하나님께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질문하신 의도는 “잘못했습니다” 라고 회개를 촉구하는 질문이었지만 아담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질문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며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겨주실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가 널리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하나님의 질문에 회개함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셋째로 사명을 찾으라는 음성입니다
알프레드 노벨(Alfred B. Nobel)은 1833년 스웨덴에서 태어나 화학자와 발명자가 되었는데 1866년에는 다이너마이트 폭약을 발명했습니다. 노벨이 나이가 많이 든 시절 어느 날입니다. 신문을 펼치던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문 일면에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했다” 라는 제목이 나왔고 기사를 읽어보니 자기를 표현해서 ‘다이너마이트의 왕이 죽다’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 라고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신문 보도는 동명이인의 다른 사람이 죽은 것을 잘못 보도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노벨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나면 사람들이 자기의 발명에 대하여 어떻게 결론지을 것인가를 미리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 로서 일생을 끝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전 재산을 바쳐 평화와 번영을 목적으로 하는 노벨상 제도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전 세계의 평화와 인류복지에 공헌한 사람들을 뽑아서 시상하는 노벨상이 탄생된 것입니다. 죽음을 가까이서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 깨어난다면 삶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명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아담을 새롭게 출발시키기 위한 음성이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으나 그 결과로 새로운 사명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물어 가는 한 해의 길목에서 석양을 생각해 봅니다. 석양을 사랑하는 이유는 지는 해 때문이 아니라 석양 속에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석양 속에 담긴 강렬한 새벽 태양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소유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지는 해를 붙잡을 수 없듯이 흐르는 세월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흐르는 세월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을 찾는 일이 됨을 아시기 바랍니다.
독일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황제의 비서실장을 맡아 일하던 공작이 있었는데 황제가 그 능력을 높이 사서 총리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그를 싫어했습니다. 어느 날 사냥을 갔다가 작은 교회를 발견한 그는 들어가 기도를 하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 순간 십자가에 빛과 함께 3이란 숫자가 나타났다 사라졌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남겨진 날이 3일 밖에 없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남겨진 3일 동안 천사처럼 살았습니다. 총리로서 황제와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3일이 지났으나 죽음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3일이 아니라 3개월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개월을 천사처럼 살았습니다. 그러자 주변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천국처럼 변했습니다. 3개월이 지났습니다. 아직 죽음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3년이라고 생각하고 3년을 천사처럼 살았습니다. 3년이 지나는 동안 황제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신하들과 국민들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마침 황제가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황제는 이 총리를 다음 황제로 세우라고 유언을 하게 됩니다. 그때 신하들과 국민들이 기뻐하며 황제의 유언을 받들었습니다. 3년이 되는 날 그는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1314년 프랑크푸르트의 다섯 제후들에 의해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로 추대된 루드비히(Ludwig) 황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날을 바로 알고 살면 신앙의 결산에서 흑자를 낼 수 있습니다. 흘러가는 세월의 흐름을 보면서 남겨진 날이 얼마 없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주일에 “네가 어디 있느냐” 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모름지기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금 사명을 찾으라는 음성으로 받아들여 새해를 준비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글쓴이 : 엘리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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