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목차 돌아가기 |
만일 부활이 없다면 고전15:12-20
I. 죽음
내가 죽은 다음에 자녀들이 돌아가신 부모님 곁에 둘러서서 울다가 주고 받는 이야기들, 그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까?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죽음을 아쉬워하는 이야기, 존경을 표시하는 많은 이야기들,
그 가운데 단연 1위는 “앗! 우리 부모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이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듯이 여러분 반드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 얻은 것이 분명하듯이 영원히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더불어 살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여든이 다 된 나이에 아내를 잃었습니다. 인생 살만큼 살다가 아내를 잃었건만 눈을 뜨나 감으나 아내 생각뿐입니다. 고독감에 매일같이 눈시울을 적시다 일기장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오늘 아침도 6시가 되었다. 행여 그이가 새벽기도 갔다가 돌아오지나 않나 대문 있는데를 기웃거려 본다.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면 하루종일 심방하고 지금쯤 돌아오지나 않나 하고 내마음은 동리 골목을 헤매게 된다. 손주를 부르는 내 목소리에는 그이의 목소리가 섞여 있고 그이가 읽던 붉은 줄친 성경을 보면 안경낀 흰머리 그 모습이 떠오른다. 아낙네들이 우중우중 서 있으면 행여 그 속에 서 있지나 않나 다시 한번 두리번거리게 된다. “오 주여! 제가 죽는날 꼭 하늘나라에 가서 그이를 만나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밑에 추사 「김정희」가 아내를 잃고 쓴 한시를 한줄 쓰고 이렇게 토를 달아 놓았더랍니다. “저 세상에 가서는 당신과 나의 처지가 서로 뒤 바뀌어져서 나는 먼저 죽고 당신은 천리밖에 혼자 외로이 살아 이내가슴 아픈 마음을 당신으로 하여금 맛보게 해 보고 싶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얼마나 아프게 느껴지고 죽음의 이별이 얼마나 서글프고 그리웠으면 이런 글을 썼을까요.
이 땅의 수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종교는 없습니다.
‘사망아 너를 이기는 것이 무엇이냐?’ 사망을 이긴 인간은 없었습니다. 이 땅의 종교 창시자들이 많은 업적을 남기고 죽었습니다만 결국 그들도 사망을 이기지 못하고 무덤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유교의 교주 공자는 73세에 죽어 중국 청평양에 무덤을 남겼습니다.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는 80세에 죽어 인도 참수서당에 무덤을 남겼습니다.
이슬람교의 마호멧은 63세에 죽어 아라비아 메카에 웅대한 무덤을 남겼습니다.
죽음은 인생의 모든 것을 앗아갑니다. 수많은 피조물 가운데 자신의 죽음을 알고 살아가는 피조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만약 인간이 죽음의 존재 자체만을 알고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는지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 죽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한 마리 벌레, 다른 피조물과 다른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모르는 것만 나을게 없습니다.
옛날에 임금 앞에 와서 재미있는 몸짓으로 임금을 웃겨주는 우스꽝스러운 광대에게 지팡이 하나를 선물했습니다. “이 세상에 살다 너보다 바보를 만나면 이 지팡이를 선물하려무나.” 세월이 흘러 임금이 임종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임금을 찾아갔습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언제나 먼 나라를 여행하실 때에는 다른 신하들을 보내서 그 길을 준비토록 하셨는데 이번 여행은 꽤나 먼 길 같은데 신하들을 먼저 보내셨습니까?” “이번 여행에는 아무도 보낼 수가 없었노라”고. “임금님께서는 언제나 어디로 여행하시는지 알고 계셨고, 어느때쯤 돌아오는지 말씀하셨는데 이번 길고 긴 이 여행, 어디로 가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어느때 쯤이나 돌아올 수 있을까요?” “내가 전혀 알길이 없노라”고. 오래전에 임금님으로부터 받았던 지팡이를 임금님께 되돌려 주면서 “폐하야 말로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바보스러운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인생은 하숙생, 나그네입니다. 한번 이 땅에 태어나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낯설은 세상을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그 종착점은 묘지요 죽음입니다.
인류의 삶은 결국 묘지를 향해가는 길고 긴 행렬입니다. 제 아무리 크고 화려한 집에 살아도 한번 숨 거두고 나면 그 집에 5일 이상 머물 수가 없습니다. 3일장 아니면 5일장입니다. 요즘은 죽기도 전에 병원 영안실로 떠납니다. 꿩이나 호랑이는 박제를 해서 집안에 두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사람을 박제해서 안방에 두는 가정은 일찍이 본 일이 없습니다. 왜요? 인간은 이 땅이 고향이 아니요 이 땅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혼 떠난 육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끔찍한 흉물일 뿐입니다. 해는 서산에 지고 깜깜한 저녁이 되었는데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 가련한 인생입니다.
여러분, 인생 종착점에서 돌아갈 고향이 있습니까?
물은 바다로부터 왔기에 바다로 흐르고 불은 태양으로부터 왔기에 하늘로 올라가고 인생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으면, 그분 세상 떠났다고 합니다. 갈 곳이 있으니 떠났겠지요. 그분 돌아 가셨다고 합니다. 인간은 온 곳이 있더라는 거지요. 알지 못하지만 그곳이 있다는 사실을 모든 인간은 자연스럽게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나그네가 지나가는 길에 너무 큰 미련을 둔다면 그는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다리! 지혜로운 자는 다리를 건너갈 따름이지 그 위에 집을 짓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서 얻은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것들 또한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세도 명예도 지식도 돈도 지나갑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일전 중국 베이찡 천안문 광장에 갔다가 모택동의 무덤을 보았습니다.
썩지않게 방부제로 처리하고 항상 무덤안을 섭씨 16도로 유지하여 지금도 죽을때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기 위해서,
혹은 우리처럼 구경하기 위해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썩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저들은 영혼의 세계를 모르니까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걸 알지 못하니까,
육체, 흙이 고기덩어리가 전부이니까 그것밖에 해 줄게 없었던 것이지요.
모스코바에 가면 레닌의 모습이 그렇게 되어 있고 북한의 금수산 기념궁전에 가면 김일성, 김정일의 무덤이 그렇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흔히 무덤의 크기로 생전의 권세와 위용을 자랑하곤 합니다. 피라미드가 그렇습니다. 중국 진시황릉이 그렇습니다. 여산릉이라 불리는 진시황릉은 작은 산만하다고 합니다. 무덤 봉분 아래에서 꼭대기까지 계단을 오르는데만 15분이 걸린다고 합니다. 중국에 어떤 지하 무덤을 구경하는데 두 시간을 돌아보고도 다 보지 못하고 다리가 아파서 그냥 나온 적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죽은 이후에 명당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명당에 묻히면 좋은데 간다고 하고, 자손들이 번창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께 명당 차지하는 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세상 살다가 명당을 발견하거든 얼른 땅 파고 들어가 누워버리세요.
그래야 그 명당 내 자리가 되는 겁니다.
II. 부활
기독교는 무덤의 종교가 아닙니다. 빈무덤의 종교입니다. 부활의 종교입니다.
누군가 기독교를 무너뜨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소리를 지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내면 됩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하루 아침에 문을 닫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아무도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찾아도 그 무덤은 빈무덤일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승천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다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고 우리 모두를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 부활에 관하여 사백 번 이상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디에서도 논쟁의 주제로 삼은 적이 없습니다. 학문적인 토론의 대상으로 설명한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실 것입니다” 구약은 예언했고,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복음서는 사도행전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이다. 이것은 약속이요 믿음이요 사실이요 선언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종교도 흉내낼 수 없는 사실이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 성도의 부활이란 사실입니다.
부활절은 춘분이 지난뒤 음력 보름 후 첫 번째 주일을 부활절로 지킵니다.
그래서 해마다 부활절 날자가 조금씩 다릅니다.
3월 22일에서 4월 21일 어간 중에 부활절이 있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분의 다시 살아나심, 이것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4복음서가 89장 정도 되는데 그 가운데 3/1에 해당되는 29장이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사건, 그리고 그분의 다시 살아나신 사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왜요? 이 땅에 모든 인간들은 십자가를 믿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고 부활을 믿어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부활절과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선교사 가족이 복음을 안고 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음으로서 이 땅에 교회가 들어왔습니다.
부활절은 한국교회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언더우드 목사님은 장로교 선교사님이십니다. 아펜젤러 목사님은 감리교 선교사님이십니다. 공교롭게도 두 분이 같은 배를 타고 한날 한시에 내렸습니다.
장로교 목사님들은 언더우드 목사님께서 나이가 많으니까 먼저 내려왔을 것이다. 그래서 장로교가 형님이라고 말합니다. 감리교 목사님들은 언더우드 목사님은 총각으로 왔기 때문에 레이디퍼스트, 감리교가 형님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해마다 새움이 돋는 봄날 이때가 되면 우리는 부활절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하나님이 부활의 소식을 나뭇잎새에도, 꽃봉오리에도 새겨 놓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절이야말로 우리 기독교만이 가질 수 있는 축제요, 기독교만이 가질 수 있는 사실입니다. 천지창조가 없는 종교가 영생을 말할 수 없습니다. 부활이 없는 종교가 구원을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흙을 뒤집어 쓰고 누워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얘기는 거짓말이요 부도수표일 수밖에 없습니다.
III. 만일 부활이 없다면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장. 58절까지는 비교적 긴장입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고전 15:1-1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몇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초대교회 저자들과 성도들이 직접 체험했고 부활의 경험은 그들의 생애를 바꾸어 놓았다. 때문에 제자들이 생명을 걸고 부활을 증거하지 않았느냐.
고전 15:12-34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성도의 부활이 없다면,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거늘 우리가 믿는 신앙도, 섬기는 교회도,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순교도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땅에서 예수 믿고 살아가는 우리야 말로 가장 불쌍한 자로다.
고전 15:35-58
부활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비유를 들면서 부활장은 마무리됩니다.
오늘 오후 시간에는 부활장. 고린도전서 15장을 펼쳐놓고 한번 정독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능력이, 부활의 기쁨이, 부활의 기쁜소식이 여러분의 심령을 가득채워 줄 것입니다.
이번 주간 목장모임을 할 때 온목장 식구들이 부활장 고린도전서15장을 한번 읽고 토의를 한다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목장모임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평생 대학생 선교를 위해 헌신해 온 「로슈 멕도르」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인류역사상 최고의 사기극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부활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최대의 비극이 될 것이다.��
일본의 우쭈무라 간조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고 애를 써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그순간 나는 부활을 믿게 되었고 부활의 능력과 부활의 축복이 나의 것이 되었다. 나는 그때부터 이미 부활한 삶을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성도들의 부활, 믿어지면 믿고 안 믿어지면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신앙이요 나의 영생과 연결되는 실제 살아있는 사건입니다. 부활은 관념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진리요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인생은 먹고 마시다 죽으면 그만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화가 나면 나 죽으면 그만이지? 라고 말합니다.
누가 당신 죽으면 그만이라고 얘기했습니까?
당신이 죽은 다음에 영원한 멸망과 영원한 세계에, 영생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것을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이 문장이 오늘 부활장 고린도전서 15장 8번씩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이라는 문장을 주경가들은 위대한 강조어라고 얘기합니다. 반드시 있다. 틀림없이 있다. 확실하게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일 부활이 없다면” 이 문장을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1.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한 종교의 교주는 될 수 있으나 그분은 진리가 되고 천국 가는 길이 되고 영원한 생명 영생이 될 수 없습니다.
무덤을 가진자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는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2.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14절 - 복음전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헛된 것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15절 - 우리 그리스도인이 거짓 증인이요 역사상 가장 못된 사기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것은 거짓말입니다. 금년은 2012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지 2012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역사. His - story. 인류역사는 사기극이 되는 것입니다. 인류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은 역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18절 - 예수 믿고 죽은 성도들, 인생 최대의 실패자가 될 것이다. 망한 인생. 순교자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19절 - 이 세상이 전부라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우리의 헌신, 봉사, 충성, 인내도 모두 공허한 것입니다.
사는 것 자체가 허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오직 부활만이 기독교 진리를 사실화하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우리도 부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수고와 섬김은 결코 헛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의미있는 목적을 향한 우리의 삶은 결코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반드시 천국에서 우리에게 면류관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IV. 부활 신앙
어떤 목사님의 주일 아침 설교 제목을 “예수 오시면” 그렇게 잡았습니다. 인쇄소에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여보세요? 목사님 설교제목이 이상해서요.”
“왜요?” “예수 오시면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와야 될 것 같아서요.”
“아니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전화를 끊었습니다.
목사님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집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여러 가지 일로 힘들었거든요.
외로웠거든요. 절망스러웠거든요.
교인들이 이러저러한 일로 힘들어 하는데 도와줄 수 없었거든요.
복음을 전하는데 목사님 스스로 무너져 있었거든요.
‘그래, 예수 오시면 그걸로 충분한데. 예수 한분 그것으로 충분한데.
주님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다. 그것으로 충분한데 내가 왜 절망했을까?
내가 왜 낙심했을까? 내가 왜 무능하다고 자학했을까?’
예수 오시면 주님 부활하시면 그분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여러분이 방황하고 있는 온갖 문제들, 주님 살아계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온갖 유혹, 마귀의 권세 - 예수 오시면, 주님 살아계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문제는 해결되어 질 것입니다. 온갖 갈등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면, 그분 오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사실을 케리그마라 합니다. 복음의 알맹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다가 사도들은 선진들은 죽어갔습니다.
묻습니다.
부활신앙이 정말 당신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까?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모든 것이 바뀌어졌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십시다.
주님의 부활, 이 사실이 나의 무엇을 바꾸어 놓았는가?
주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내가 생각하고 일주일을 살아가는 것인가?
초대교회 편지 가운데 이런 편지가 전해져 옵니다.
아마 교회 밖에 있는 어떤 분이 남긴 편지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정말 이상하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수를 전하다 죽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장례식을 치르며 감사하다고 한다. 장례식을 치르고 찬송한다. 묘지로 행렬할 때 마치 소풍을 가듯이 노래하며 간다.”
사도 바울과 초대교회 제자들. 부활을 전하다 매를 맞고 돌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기절합니다. 그러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툴툴 먼지를 털고 다시 선교지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다 죽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살고 네가 살고 인간이 살고 역사가 사는 지름길,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 어촌마을에서 늙으신 아버지가 배를 몰고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장례를 마친 아들이 그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갑니다. 마을 사람들이 만류를 합니다. “자네 부친의 목숨을 앗아간 그 바다로 다시 나가려는가?” 이때 젊은 아들이 하는 말이 퍽 인상적입니다. “당신네 부친은 어디서 별세하셨습니까?” “침실에서 돌아가셨지.” “그렇다면 당신들은 침실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우리 어머니 안방에서 돌아가셨지.” “안방에 안 들어가시겠네요.”
거친 세파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승리하며 살 수 있을까요?
우리 가정안에 여전히 문제가 있고, 이 세상에는 여전히 어려움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부활의 소식, 부활의 복음, 부활의 능력을 안고 오늘도 담대히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입니까? 부활의 소식, 부활의 진리, 부활의 능력을 안고 때로는 실패가 있고 때로는 고난이 있는 저 세상으로 오늘도 당당히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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