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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새 아침 창 32:24-31(유영모)
I. 큰 씨름 큰 인물
학교 종례시간 담임선생님이 몹시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기영이네 반이 평균 점수 전교 꼴찌라는 겁니다.
“50점 넘는 사람 교실에 남고
50점 못 되는 사람 복도에 나가 손 들고 서 있어!”
마침 기영이는 꼭 50점이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50점인데 어떻게 해요?”
선생님 왈 - “너는 문틈에 끼어 있어.”
오늘 본문에 문틈에 낀 사나이 하나가 나옵니다.
뒤에서 추격해 오는 외삼촌 라반, 앞에서 그를 죽이겠다고 달려오는 형에서 사이에 끼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야곱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두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많은 재물을 얻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외삼촌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 야곱은 라반이 출타해 집에 없는 날을 택해 모든 가솔과 소유를 이끌고 야반 도주를 합니다. 사흘쯤 지났을 때 라반이 이 사실을 알고 친족을 이끌고 야곱 가족을 추격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야곱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 야곱에게 장자권과 모든 축복을 빼앗기고 서러운 세월을 보내던 형 에서가 400인 가군을 이끌고 옵니다. 뒤에서는 라반이 앞에서는 에서가 그를 치러 오는 이 상황이 야곱에겐 얼마나 부담스럽고 두려웠을까요?
한 해의 첫 날 첫 주일을 맞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행여 사면초가 같은 야곱의 심정은 아닙니까?
여러분에게 새해는 애인처럼 다가오십니까? 아니면 버거운 적군처럼 느껴지십니까? 지난 해의 쌓인 숙제더미 같은 문제들이 채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새해의 또 다른 문제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어 마치 야곱같은 심정으로 이 자리에 계시지는 않습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본문의 결말은 해피엔딩입니다.
라반과도 에서와도 감격적인 화해를 하고 야곱은 새 길을 가게 됩니다.
언제나 해결해야 할 문제는 있고 감당해야 할 인생의 과제는 있습니다.
천하장사 씨름 대회에서 결승전을 해설하던 해설가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런 큰 대회에서 큰 선수들을 이기고 우승을 하고 나면
자신감과 실력이 물씬 크게 된다고요.
저는 우리 한소망교회 성도들이 이 만큼 큰 대성전 공사를 마친 후
신앙이 물씬 커진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경기를 치루고 나면 실력이 물씬 자라납니다. 큰 씨름을 하고 나면 그 다음 씨름에서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큰 시험을 이기고 나면 작은 시험정도는 가지고 놀 수 있습니다.
헌신도 충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큼직한 헌신을 한번하고 나면 사람의 그릇이 달라집니다. 큰 씨름을 이겨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늘 쫀쫀한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도 성품도 축복도 여러분 모두 정상급 선수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대단한 씨름을 하는 한 장면이 나옵니다. 본문에 나오는 야곱이라는 사나이는 하나님과 씨름을 해서 이깁니다. 이제 누구하고도, 무엇과도 씨름을 해서 이길 수 있는 실력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씨름을 해도 이런 씨름을 한번 해 보고 싶지 않습니까?
아직도 전혀 믿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믿거나 말거나 저는 학창시절 그리고 군대시절 씨름 선수 생활을 해 보았습니다. 저처럼 몸집이 작은 사람은 큰 선수를 만나 이길 때 오는 쾌감이 있습니다. 큰 씨름 만나신 분들이 있습니까? 멋지게 승리하고 일어서십시요. 쾌감도 축복도 그만큼 클 것입니다.
II. 거꾸로 살아온 인생
일찍이 야곱은 형을 꾀어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눈먼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 챕니다. 그리고는 하란 땅 외삼촌의 집에서 20년 망명생활을 보냅니다. 거기서 한 여인을 얻기 위해 14년, 재물을 얻기 위해 또 6년을 머슴살이로 보내지요. 이제는 그렇게 꿈꾸던 가문의 족장이 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다 생각하니 형 에서의 복수가 두렵기 시작했습니다. 꾀를 부립니다. 형 에서에게 먼저 선물을 보냅니다.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지요. 그 내용물이 본문 13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철저히 암놈이 많습니다. 좋은 선물이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고도 불안해서 가족과 재산을 삼분대로 나눕니다. 1소대 하인의 자식들과 그 재산을, 2소대 레아의 자식과 그 재산을, 3소대 사랑하는 여인 라헬의 자식과 재산을 그리고 자기는 맨 꽁지에 섭니다. 여차하면 모든 가족과 재산을 버리고 도망이라도 갈 수 있을 만큼 멀리 떨어져 따라옵니다. 언젠가 제가 이 작전을 도마뱀 꼬리짜르기 작전이라고 명명했지요?
이것 보십시오. 20년 고생을 하고서도 졸장부 기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 모습을! 그가 진정 변화된 사람이었다면 평안할 땐 뒤에 가고 어려울 땐 앞에 서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런 남편, 이런 아빠를 믿고 따라야 하는 건지 아마 상처가 컸을 겁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당당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야곱. 그래서 늘 불안하고 쫓기듯 인생을 달려와야 했던 못난 사람을 보십시오. 늘 앞세워야 할 것들을 앞세우지 못하고 뒤에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온 인생. 그것이 야곱의 인생이었습니다.
행여 우리 가운데 계속되는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사시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사는 것이 마냥 힘이 들고 골치 아픈 문제만 생기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평안이 없고 늘 쫓기듯 불안하신 분들이 있습니까? 인생을 거꾸로 살아서 그렇습니다.
한국교회 초창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목사님이 마차를 타고가 시골교회에서 저녁예배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잠을 자기위해 마을 끝에 있는 어느 집사님 댁으로 가는데 그 길이 얼마나 가파른 언덕인지 금방이라도 뒤로 굴러 떨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아침에 잠에서 일어나 그 가파른 언덕을 찾는데 언덕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두리번 거리는 목사님에게, 목사님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찾으십니까? 간밤에 내가 하도 가파른 언덕을 올라와서 얼마나 가파른 언덕이길래 그러나 했더니 언덕이 온데간데 없어졌습니다. 아니 목사님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집까지 오는 길은 평지입니다.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짓궂은 마을 청년들이 마차의 앞 뒤 바퀴를 바꿔 달아 놓았던 것입니다. 작은 앞 바퀴는 뒤에 달고 큰 뒷바퀴는 앞에 달아 놓았기 때문에 가파른 언덕을 올라온 것처럼 끄는 말도 목사님도 힘든 길을 와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왜 목사님이 그렇게 힘든 고갯길을 가야 했습니까? 앞에 있어야 할 것이 뒤로 가고 뒤에 있어야 할 것이 앞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앞에 서고 나는 뒤에 서고, 믿음은 앞세우고 욕심은 뒤에 묻어두고, 말씀은 앞세우고 자아는 뒤로 가고! 거기에 평안이 있고 형통이 있습니다. 우선 순위가 바뀌면 인생이 고달파 지는 것입니다.
III. 하나님이 걸어온 씨름
다시 야곱을 보십시다.
가족과 우양떼가 다 강을 건넌 다음에도 야곱은 두려움에 강을 건너지 못하고 그 밤 얍복 나루터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밤은 더욱 어둡게만 느껴졌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불안과 근심 걱정도 깊어져만 갑니다. 그런데 깊은 밤 전전긍긍하고 있던 야곱의 옆구리를 누가 걷어찼습니다.
그래서 소위 야곱의 새벽 씨름이 시작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싸움은 야곱이 하나님께 매달린 씨름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여기, 씨름의 주격이 “어떤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씨름의 판정이 어떻게 나는가 보십시다.
25절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도 분명 주격은 싸움을 걸어온 “그 사람”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지금 야곱이 하나님을 붙들고 철야기도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 쪽에서 야곱에게 뭔가 요구할 것이 있어서 찾아오신 사건이란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씨름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켜 쓰시기 위해 걸어온 씨름이라는 겁니다.
창세기 28장 벧엘에서 야곱이 사다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닥다리는 야곱이 하나님께 올라가기 위해 만든 사다리가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려오시기 위해 설치하신 사다리였습니다. 하나님이 찾아 오시는 사건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인생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오늘도 내 인생속에 간섭하시고 내가 만든 모든 사건 속에 개입하고 계십니다.
∙ 북한은 불안하고 동북아 갈등의 골은 깊어가고
-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한 둘이 아닙니다.
∙ 청년 실업, 경제 경기 불안, 정치 불신
- 국가적으로 문제가 한 둘이 아닙니다.
∙ 다음세대 교육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 옵니다.
자녀들의 성교육이 심각하다 싶어 한 아버지가 중학생 아들을 불러 놓고
“아들아 우리 이제 성에 대해 얘기할 때가 되지 않았니?”
아들 녀석이 그러더랍니다.
“아버지, 뭐에 대해 알고 싶으세요. 제가 아는 대로 좀 가르쳐 드릴께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고 많지만 가장 긴급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많은 세월을 지켜보았지만 하나님의 커다란 기대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변하지 않는 사람. 타성적인 교회생활, 형식적인 신앙생활, 하나님을 자신의 욕심을 채워주시는 분 정도로 믿는 현세적인 종교인, 뚜렷한 변화의 조짐조차 없는 야곱 같은 사람, 마침내 하나님께서 간섭하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옆구리를 걷어차고 씨름을 걸어오십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걷어차며 내 잠을 깨우십니다.
IV. 홀로 남았더니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이 상황을 본문 24절은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내가 홀로 남은 시간, 고독을 느끼는 그 시간은 하나님이 찾아 오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간섭하시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속에 파묻혀 살아갈 때, 내가 부족함을 모르고 살아갈 그때에, 진정한 내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세상이 내게 박수와 갈채를 보내고 있을 때에 우리는 가면을 뒤집어 쓰고 살아갑니다. 폼을 잡고 허세를 부립니다.
자신을 과장합니다. 그 모습은 참된 나의 모습이 아니라 위장된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정직한 나의 모습이 아니라 거짓된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을 만나시기 전에 야곱을 홀로 남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직분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동료들에게 둘러 쌓여 있을 때 자신의 실체를 보지 못합니다.
신앙 연조가 가면이 되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던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그 가면 때문에 그 체면을 벗어 던지지 못하여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얼마동안을 기다리시던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나를 버려둘 수 없어서 나를 홀로 있게 만듭니다. 박수 소리를 떠나게 합니다. 사람들이 내 곁에서 떠나갑니다. 많은 일거리들이 사라집니다. 병실에 홀로 누워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자기의 실체를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할 시간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를 보십시오. 돈이 많고 친구들이 많을 때는 자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를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15장 14절 “다 없앤 후” 친구들이 떠나간 다음에 재물이 다 없어진 다음에, 1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He came to himself.”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자기를 보았습니다.
홀로 버려진 그 순간 아버지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벌거벗은 이 자리를 얍복강 나루터라고 말합니다.
얍복이란 ‘비운다, 몽땅 털어버린다. 쏟아 버린다’는 뜻입니다.
얍복 나루터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기인생을 철저히 비우는 장소입니다.
벗어야 입을 수 있고, 비워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얍복 나루터입니다. 이곳까지 와서도 자신을 비우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서서도, 교회에 와서도 가면을 벗지 못하면, 은혜의 자리에 와서도 헛된 욕망을 쏟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그 순간은 정직해야 할 시간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 영혼의 그릇, 축복의 그릇을 비우고 깨끗이 청소하고 준비된 마음으로 새해를 맞고 하나님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V. 엉덩이 뼈가 부러진 새벽
하나님께서는 홀로 남아 있는 야곱에게 싸움을 걸어 오셨습니다. 그 싸움은 밤새도록 계속 되었습니다. 새벽녘 하나님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십니다.
허벅지 관절을 개역번역에서는 환도뼈, 공동번역에서는 엉덩이 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허벅지 관절은 사람의 상체와 하체를 연결하는 뼈를 말합니다. 소위 히프 죠인트입니다. 인체중에서 가장 강한 뼈라고 합니다. 사람이 힘을 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도 합니다. 영적으로 이 환도뼈가 어떤 이에게는 직업 직장, 또 어떤 이에게는 자녀, 건강, 권력, 집안 배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허벅지 관절을 내려 치시자 야곱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왜 야곱이 힘을 쓸 수 있는 이 마지막 자리를 치셨을까요?
지금까지 야곱의 철학은“나는 내 힘으로 내 재주, 내 꾀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태어나 장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맨손으로 미인 아내를 얻었고 재산과 명예를 얻었습니다. “내가 마음먹으면 안되는 일이 없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목적을 이루고야 만다.”
이 얼마나 방자한 인생이었습니까?
이러한 야곱을 하나님은 때려눕히십니다. 허벅지 관절이 부러지는 이 순간 야곱의 인생은 K.O.되고 만 것입니다. 이제 내 인생은 깨끗이 끝났구나!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을 붙들게 됩니다.
내 건강에 자신 만만하여 방탕하던 한 인생이 병석에 누울 때가 있습니다.
내 주머니에 돈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던 사람이 실패를 경험합니다. 능력이 많다는 것 때문에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바로 허벅지 관절이 부러지는 순간입니다. 야곱은 허벅지 관절이 부러지는 그 순간, 이제 내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하나님을 붙들게 됩니다. 이제 내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구나! 하나님, 나는 당신없이 못살아요. 주 없이 살 수 없어요. 당신의 축복이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고백합니다.
본문 26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때의 상황을 호세아 선지자는 호세아 12장 4절에서 이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자신의 재주가 아니라 이제 하나님 그분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간사한 자기 꾀가 아니라 내 수단, 내 요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더라”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는데 왜 웁니까? 기뻐 뛰어야지 왜 웁니까? 이 눈물은 가슴 깊이 숨겨두었던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눈물이었습니다. 꼭꼭 잠궈 두었던 가식를 털어내는 눈물이었습니다. 억척스럽게 사는 것 같지만 그럴수록 더 외롭고 힘들었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진실한 고백의 눈물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억척스러워 보였고 강해 보였지만 속에는 깊은 불안과 한없이 약한 모습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숨길 수 없는 부끄러움을 토하는 눈물이었습니다. 가장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야곱은 허벅지 관절이 부러진 다음에야 진실한 기도, 제대로 된 씨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씨름은 야곱의 인생을 바꾼 새벽의 씨름이었습니다.
여기가 장소적으로 얍복 나루터였다면 시간적으로 새벽녘이었습니다.
내 인생을 버티어 주던 허벅지 관절이 부러지는 얍복 나루터!
어둠이 물러가고 동이 터오는 이른 새벽!
거기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오늘 2012년 새해 첫 날이요 한해 첫 주일입니다. 오랜 시간 가면을 쓰고 세상의 갈채를 받고 살아오신 분들 이제 진지하게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내 힘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고 사셨던 분들 하나님께서 내 허벅지 관절을 치시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바쁘게 뛰며 살다보니 하나님보다 앞장서서 달려오신 분들 인생의 앞뒤가 바뀌신 분들 이제 결단하십시오. 야곱의 인생을 바꾸어준 이 새벽의 씨름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VI. 이름(인생)이 바뀌었다.
보십시요. 큰 씨름에서 이긴 야곱의 인생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매달려 애원하고 기도하는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니이다.”(27절) 야곱이란 말은 그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 먼저 나오는 형을 시기하여 발 뒷꿈치을 붙들고 나왔다는 데서 생긴 이름입니다. ‘약탈자, 사기꾼, 강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매달리는 야곱에게 왜 이름을 묻습니까? 이 약탈자야, 강도야, 지금까지 네가 살아온 것처럼 빼앗으면 될 일이지 왜 복을 달라고 매달려? 그 얘기입니다. “강도가 만원만 주세요.” 매달리는거 보셨습니까? 강도가 왜 달라고 애원해? 너는 기도하던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 네 재주로 살던 자가 아니냐?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약탈자 야곱입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지 말라. 네 재주로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지 마라. 네 꾀로 네 요령만 가지고 험악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지 말아라. 남의 복을 빼앗아 살려고 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내가 모자람이 없도록 마음껏 복을 부어 줄 것이다! 할렐루야!
이제부터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책임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 28절에서도, 이 부분을 주석한 호세아 선지자도 꼭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이겼다는게 무엇입니까? 크리스챤의 승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기고 사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 이것이 승리요 크리스챤의 영광입니다. 네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너는 이제 승리자이다. 네가 이겼다. 복을 얻어내는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못난 욕망, 자아, 가면으로부터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승리자입니까?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누가 이스라엘입니까? 하나님께 무릎꿇어 매달릴 수 있는 사람, 두손 들고 항복하는 자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복을 얻어 내는 씨름에서 이긴 자가 승리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아직도 내 목이 뻣뻣하여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 본 경험이 없는 사람, 나는 내가 원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자신을 믿고 살아온 사람, 바로 그가 야곱이요, 실패자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축복받지 않고는 살아 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두 손들고 하나님 앞에 나온 경험이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이스라엘이요 승리자입니다. 이스라엘 ! 그는 새벽 씨름에서 이긴 자입니다.
지난날 여러분의 이름이 무엇이었습니까?
- 낙심쟁이, 우울, 절망, 실패, 불평 원망쟁이 였습니까?
- 하나님께서 당신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이스라엘로 바뀌는 새해 첫 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 그때 용기, 기쁨, 희망, 감사 찬양쟁이로 바뀌어 지게 됩니다.
할렐루야.
VII. 희망의 새아침
긴긴 밤의 싸움이 끝나는 오늘 말씀의 결론 그 마지막절 31절을 보십시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깨지고 시원해 하는 야곱을 보십시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찬양합니다. 나를 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 못난 자아를 깨뜨리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치시지 않았더라면 평생 나 자신만을 붙들고 살았을 거예요. “하나님, 잘 치셨어요. 잘 깨부셨어요. 이제 당신 맘대로 빚어 쓰세요.”
절며절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이제까지 태양은 나를 감시하고 나를 책망하는 두려움의 얼굴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깨지고 하나님 만나고 은혜를 체험하고 나니 어제 떠올랐던 그 태양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사랑의 얼굴이었습니다. “하나님, 내 허벅지 뼈 잘 치셨어요.” 야곱은 일평생 절뚝거릴 때마다 얍복강가에서 만났던 그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언제나 새해가 되면 오히려 초조하고 불안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 자신의 존재가 달라지고 나면
새해가 희망의 날 - 브니엘의 아침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없이 아침을 맞을때 떠 오르던 태양(해)은 “불행해” 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만나고 희망과 믿음으로 맞는 아침의 해는
“행복해” “만족해”가 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위풍 당당하게 불의의 길은 걸어가는 것보다 절뚝거리며 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축복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홀로 남도록 강권하시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허벅지 뼈를 치시기 전에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전에 절지 않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한번도 인생을 바꾼 영적 씨름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이 계십니까?
당신이 신령한 씨름에서 승리하고 일어설 때 브니엘의 아침 햇살이 비쳐올 것입니다. 분명 태양은 태양인데 어제의 그 태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 - 브니엘의 태양이 될 것입니다.
희망의 새 아침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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