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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성탄절 설교

희망의 성탄 (요 12:44-47)

by 【고동엽】 2022. 4. 7.

희망의 성탄 (요 12:44-47)

 


   성탄시즌이 되면, 교회에, 거리에, 상가에, 그리고 집안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곤 합니다. 도대체 성탄 트리는 언제부터 장식하게 됐을까요? 그리고 어떤 의미로 장식하는 것일까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크리스마스이브 밤중에 숲속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어둡던 숲이 등불을 켜놓은 듯이 환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영롱한 달빛이 소복하게 눈이 쌓인 전나무 위에 비쳐서, 주변을 환하게 비취서 빛의 향연을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그 순간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저 전나무와도 같다. 한 개인은 어둠 속의 초라한 나무와도 같지만 예수님의 빛을 받으면 주변에 아름다운 빛을 비추일 수 있는 존재이다.”

 


   루터는 이 깨달음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전나무 하나를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전나무에 눈 모양의 솜과 빛을 발하는 리본과 촛불을 장식했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트리의 유래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트리는 예수님의 빛을 이 어두운 세상에 비추이는 상징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둠 속에 빛이 비추이게 된 것을 나타내는 상징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어둠 가운데 빛이 비추인 사건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루터가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상징적으로 담아내고자 하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면 비유로 빛이 어둠 가운데 비추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 심령 안에 가득한 어둠 속에 빛이 비추인 것을 뜻합니다.

 


   사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몸이 쇠약해지고 늙어감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다 결국 어느 날 종착점에 도착하게 되고,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인생은 성경말씀 그대로 수고와 슬픔뿐이고,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벗어날 수 없는 무거운 절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무거운 절망이 짙은 어둠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에 찾아오시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우리가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비록 이 육신은 날로 쇠약해지고 결국 죽어가겠지만, 우리의 심령은 날로 새로워지고 결국 영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수고와 슬픔 대신 보람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심령 가운데 무겁게 자리하고 있는 절망이라는 어둠 속에 빛처럼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주십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이 절망이라는 어둠이 가득한 이 세상에 새로운 희망이라는 빛을 비추인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이 희망의 성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탄이 우리에게 희망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사랑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신 이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보내신 이유는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바울은 갈 2:20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바로 바울 자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눅 19장에 나오는 삭개오입니다.

 


   눅 19장을 보면 삭개오에 대한 인물 소개가 나옵니다. 우선 그는 세리장이고 부자입니다. 당시는 유대인들이 로마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때입니다. 세리장은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게 바치는 일을 하는 책임자입니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여 통치자에게 바치니 백성들에게 좋은 평을 받을 리 만무합니다. 로마의 앞잡이요, 심할 경우 매국노처럼 비난을 받기가 일쑤입니다. 게다가 로마가 요구한 세금보다 더 거둬들여서 자기가 착복하여 부자가 됐으니 백성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됐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한 마디로 육체적인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데 고대시대에는 키가 작은 사람들은 무시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심할 경우 놀림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삭개오는 마음속에 심각한 콤플렉스를 담아두고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말로 왕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그 누구도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는 신세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삭개오에게는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시다가 유독 삭개오를 주목하셨습니다. 먼발치 군중들 틈 너머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삭개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아셨는지 그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삭개오야!”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그의 이름을 부르실 뿐 아니라, 오늘 그의 집에서 머무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눅 19:6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가 그 말씀을 듣고 급하게 나무에서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기쁘게 예수님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삭개오는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됐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됐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됐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셔서 여리고에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은 우리에게 희망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 인생에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2. 함께 하심 때문입니다.

 


   마태는 예수 탄생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요셉이 꿈속에 주의 사자를 만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 1:23을 보면,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리아를 통해 태어날 아기 예수의 별명이 “임마누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성탄사건은 인류의 종교사에 하나의 혁명적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과 함께 하시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는 신과 인간은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 신전을 찾거나 신을 부릅니다. 그러나 성탄 사건 이후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어디에서도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어디에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기도하지 않을 지라도 다급한 상황이면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이 임마누엘 사건은 우리에게 더할 수 없는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을 주님과 함께 걸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라도 주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런 임마누엘의 은혜를 받고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입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로 끌려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항해 도중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 배에 탄 276명 모두 두려워 떨었습니다. 절망하며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달랐습니다. 담대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절망 중에서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27:23절 이하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 하시고, 사자를 통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임마누엘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남극탐험대장 베어드는 대원들을 이끌고 남극탐험에 나섰습니다. 캠프를 치고 혼자서 무전기를 들고 남극 꼭지점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갑자기 휘몰아치는 한파가 그를 덮쳤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낮아진 기압 때문에 손에 쥐고 있던 무전기의 건전지가 폭파되어 연락이 두절되고 방향마저 잃어버렸습니다. 추위로 몸은 얼어붙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절망이 어둠처럼 밀려들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단어 하나가 머리 속에  번득이며 떠올랐습니다. “임마누엘” 그러면서 손을 불끈 쥐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렇지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지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지” 그 순간 절망이 사라지며 새 희망이 솟구쳤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걸어온 방향을 향해 뒤돌아 한 걸음씩 나아갔습니다. 결국 자기가 출발했던 캠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은 우리에게 희망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3. 구원하심 때문입니다.

 


   누가는 예수 탄생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눅 1:30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리아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 부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요셉도 꿈에 주의 사자로부터 들었습니다. 마 1:20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리아가 낳을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부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름을 불러야 할 이유가 구원할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셔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평화를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잘 살게 해 주기 위함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함도 아닙니다. 바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파악한 사람들은 모두가 절망합니다. 스스로 구원할 힘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구원의 길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은 롬 7:18 이하에서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한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곳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는 우리 심령 저 깊은 곳에 죄가 도사리고서 우리의 삶을 조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악한 일들을 저지르게 만듭니다. 남을 미워하게 만들고, 거짓을 말하게 만들고, 음난한 일을 저지르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들고... 결국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일들만 저지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절망하게 됩니다. 나름대로 종교를 만들어 구원의 길을 찾아보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서 더 크게 절망하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바로 이런 인간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어느 날 루터는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마귀가 찾아와서 그의 죄목을 보이면서 "네게 이러이러한 죄가 있으니 나와 함께 지옥으로 가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루터가 "그밖에는 없소?" 하고 묻자 마귀는 또 어느 곳을 다녀오더니 몇 가지를 더 추가해서 기록하는 것입니다.

 


  루터가 마귀가 기록한 죄목 위에 "예수의 보혈이 나의 모든 죄를 씻어 준다."라고 써 놓았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놀라서 걸음아 날 살려라고 줄행랑쳤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한 사람들은 더 이상 죄가 그 사람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궁극적 문제를 해결받게 된 것입니다.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절망, 인간의 본질적인 절망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은 우리에게 희망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탄의 아침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심령과 인생 안에 주님께서 임마누엘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짓누르던 절망이 떠나가고 새 희망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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