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절기 설교[1,404편]〓/부활 주일 설교

예수의 부활 / 눅 24:1-6

by 【고동엽】 2022. 4. 7.
 
부활 목차 돌아가기
 

예수의 부활

 

 

                                      눅 24:1-6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2천 년 전 오늘 이른 새벽에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아직 세상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어두움이 채 가시지도 않은 그 시간에 군인들이 지키고 있던 무덤에서 예수님은 소리 없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날 예수님은 온 세상에 희망을 주셨습니다. 기쁨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새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이 세상에 아주 신선한 충격을 준 사건입니다. 우선 어제 고난주간과 비교해 보면 오늘은 너무나 다른 느낌과 생각과 마음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맞는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신선하고 밝고 상쾌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마음과 생각이 다를 만큼 이 땅에 상큼한 새 길을 주셨고 새 삶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장면 중에서 가장 찬란한 장면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부활하는 장면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시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하늘 문이 열기고 천군천사의 찬양이 울려 퍼지는데 땅과 하늘의 지축이 흔들릴 것입니다. 그 장면은 영광이고 또 영광입니다. 그 장면이 바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장면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비한 모습을 영적인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아야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생각 없이 “나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부활을 모독하는 말이고 아주 망령된 말입니다. 그것은 불신의 말이고 수치스러운 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인간의 값을 새롭게 매겨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가장 큰 근본적인 문제가 죽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이 죽음의 문제가 일거에 바뀌어 버렸습니다. 죽음관이 바뀌고 내세관이 바뀌고 삶의 질서가 바뀌고 생사관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 부활이 “복음의 본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에밀 브르너라는 신학자는 “기독교는 부활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부활이라는 말이 40여회나 등장하고 고리도전서 15장에서 “만일 부활이 없다면”이라는 말씀을 하면서 8번이나 부활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부활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날이 밝자마자 무덤으로 몰약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달려갑니다. 부활에 대한 상식이 없는 제자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무덤을 찾아가 두리번거리며 예수님의 시체를 찾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천사가 “왜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 부활하셨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께서 말씀하시던 부활에 대한 실체를 확인하고 체험하고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이 부활은 한마디로 인간의 삶과 의식과 질서에 대 변혁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활이 몇 가지 엄청난 변화를 주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을 바꿈”

 

 

 

죽음은 유쾌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침울하고 음침하고 무겁고 비탄을 안겨줍니다. 그래서 죽음이 있는 곳에 탄식이 있고 눈물이 있고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장례식장에 가 보십시오. 얼마나 음침합니까. 그래서 그곳에 무서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그곳에 촛불을 켜 놓고 꽃으로 장식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곳은 혼자 있기에는 너무 음침합니다. 무서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초상집에 모여 함께 이야기하고 밤샘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정상적인 죽음이 있는 곳이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만일 동네에 살던 처녀가 죽었습니다. 그 죽음도 그냥 죽음이 아니고 물에 빠져서 자살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참 난리입니다. 그때는 특히 동네 총각들은 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 시골에서는 그런 경우 모두 외출을 삼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삿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원혼을 달래느라 위로하는 굿을 하고 묘를 쓰되 남자들이 나무해서 돌아오는 길목 쉬는 자리를 골라 그곳에 묘를 썼습니다. 그곳에 누워 지나가는 남자들의 땀 냄새라도 맡고 위로 받고 나오지 말고 그 안에서 조용히 있으라는 뜻입니다.

 

 죽음의 사신이 다녀간 자리는 혼자 있기가 무섭습니다. 사신의 얼굴은 참 무서울 것입니다. 그 손발은 냉혹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그 사신의 속성은 비정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죽음의 사신은 무자비하게 가족들과 격리시킵니다. 부모 앞에서 자식을 데려갑니다. 아내와 남편을 부모를 사정없이 분리시켜 데려갑니다. 사탄의 얼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탄의 얼굴이 상냥하고 정다울 리가 없습니다. 가끔씩 TV에 나오는 사탄의 창백한 모습 그대로 일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소름이 끼칩니까.

 

 어느 젊은이가 산에 가서 혼자 앉아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람소리가 사탄의 발걸음 소리처럼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살며시 눈을 떠 보니까 사탄이 앞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때 순간 찬송을 부르면 사탄이 물러간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찬송을 부르려고 생각하니까 아무 것도 생각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한 가지 찬송이 떠올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죽음, 사탄, 사신은 만나고 싶지 않은 대상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이후 이 죽음의 개념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죽음이 있는 곳에서 찬송을 부릅니다.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감사의 기도가 있습니다. 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모두 예수님의 부활이후 찬송이 주어지고 감사가 주어지고 소망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또 죽음뿐이 아니고 죽어가는 사람도 당당하게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축복도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임박한 임종자도 그 순간 감사하고 찬송을 부르며 초연하게 그 임종을 맞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것도 예수께서 길을 터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내 장례식에서 “장송곡을 부르지 말고 행진곡을 불러 달라”고 유언한 분도 있습니다. 그분이 진정 부활신앙을 가진 분입니다. 부활은 이 세상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무덤 인식의 변화”

 

 

 

우리나라는 무덤에 대한 숭배사상이 아주 깊습니다. 모두 좋은 곳에 무덤을 쓰려고 명당을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무덤을 아주 호화롭게 맨션으로 가꿉니다. 옛 군왕들의 묘를 보십시오. 얼마나 웅장합니까. 그곳에 생활도구와 장신구들을 넣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저승에서도 먹고 살라고 그 속에 각종 그릇 종류를 넣어 두었는데 오늘 고분을 발굴하면 보물이 나오는 것이 그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옛날 부여국서는 순장제도가 있어서 평소에 부리던 종들은 100명까지 함께 묻어버리는 순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에서는 임금의 무덤인 피라미드 특히 4왕조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보면 높이가 140m이고 밑변이 140m나 됩니다. 거기에 소요된 돌은 “2톤 반”이나 되는데 이 돌 230만개를 아라비아 산중 채석장에서 깎아 운하를 통해 운반하여 10만 명의 노동자들이 30년간 쌓은 것입니다. 왜 그런 무지함이 있는가 하면 거기에 부활 사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덤을 크고 화려하게 꾸미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 근방에 가 보면 석관으로 된 무덤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장차 주님의 재림이 그 성전주변이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곳에 묻혀 있다가 재림 때 부활하겠다는 믿음 때문에 그곳에 자리하고 묻혀있는 것입니다. 이 부활사상이 있고 없는 것이 이렇게 삶의 의식에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을 준비를 철저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주실 교훈도 남기셨고 말씀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산에 올라가 철야기도를 통해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준비를 철저하게 하신 후에 마침내 하산하여 죽음의 길을 차질 없이 걸어가셨습니다. 그렇게 죽을 준비를 철두철미하게 잘 하신 주님은 무덤 준비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할 사람에게는 무덤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 세상에 무덤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에 대한 믿음 부여”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축복은 천국이 주어진 것입니다. 스데반이 죽어가면서도 아주 초연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것은 그에게 이 천국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죽어가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주님이 서서 내려다보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이 무엇이 두려웠겠습니까. 이 땅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모두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의연하게 죽어간 것도 천국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예수 부활은 우리에게 이 천국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활도 천국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선물이고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백혈병에 걸려 날마다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이 엄마는 아이에게 곧 다가올 죽음에 대해서 준비를 시켜주는 것이 좋겠다 싶어 아이에게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너 죽음 뭔지 아니 ?”, “네 벌써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알았니.” “엄마 얼굴에서 죽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보았어요.” 어린 아이는 엄마의 근심스런 얼굴을 보면서 이미 자신의 죽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때 이 어머니가 아이에게 부드럽게 이 죽음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가야, 죽음은 하나의 과정이야, 죽음은 조금 후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가는 거야,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거든 꼭 포옹해 드리거라.”

 

 여러분, 죽음을 이렇게 재미있게 말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 어디에 죽음이 무섭고 무지막지합니까. 여기 이 아이가 왜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 죽음 바로 옆에 천국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불행한 사람은 기다림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녁이 되어도 찾아올 가족이 없는 사람은 쓸쓸한 인생입니다. 밤이 되었는데도 들어올 가족이 없습니다. 얼마나 쓸쓸하겠습니까. 기다림이 있음이 행복입니다.

 

 이 보다 더 큰 축복은 죽은 후에 갈 곳이 있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을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기다림이 있고 바라보는 것이 있고 기대하는 것이 있는 인생은 행복한 인생입니다. 미생물 중에는 천년을 사는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500년을 사는 거북이도 있습니다. 땅속에서 사는 굼벵이도 때가 되면 변신해서 나방이가 되고 잠자리가 되고 매미가 되어 하늘을 날고 이슬을 머금고 노래를 부르며 시원한 창공을 나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간이 고작해서 80년 90년을 살고 그것으로 끝이라면 그 인생이 뭐가 그리고 자랑스러움이 있습니까. 그것도 평생 잘 살다가 죽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평생을 고난스런 삶을 살다가 비참하게 종말을 맞이했다면 그 인생에게 무슨 영광이 있겠습니까.

 

 요즘 여의도에 벚꽃 축제가 열리고 있는데 벚꽃을 보아 좋기는 한데 어느 몸통만 있는 불구자를 누가 데려다 놓고 엎드려 구걸을 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아주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을 이용해서 돈벌이를 시켜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 불구자는 그런 일을 안 할 수도 없고 살아가자니 얼마나 구차한 인생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도 그에게 무슨 사명이 있는지 그냥 놔두시니까 지금 살아있겠지만 그렇게 90을 살고 백 살을 산다고 한들 무슨 영광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에게 또 다른 값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이 부활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래서 소중하고 또 다른 길을 열어주신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보여주심”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여 땅속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입구를 돌로 막고 황제의 인으로 봉인하였습니다. 그 무덤은 누구도 열고 닫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을 풀어 지키게 했습니다. 그때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비로소 그 밤을 평안히 잠을 이룰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최대의 정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날 죽임을 당한 예수는 그것으로 끝나 버렸다면 그가 무슨 예수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 예수를 다음날 새벽 일찍이 하나님이 무덤에서 살려내십니다. 그래서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권능이고 선물이고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이고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막고 거부하려 해도 하나님이 살려 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능력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권능을 입으면 내 안에 이 힘이 주어지고 용기가 주어지고 능력이 주어지고 부활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야 합니다. 이 능력을 힘입지 않으면 여전히 무지 속에서 실패 속에서 살아가야 하고 졸음 속에서 무능력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제자들이 그래서 매일같이 실패만 하였고 예수님이 피땀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 그 극한 상황에서도 무력하게 졸기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여전히 무지하고 무력하고 용기도 없고 예배 때에 졸기만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남편 없는 여인하고 은혜 없는 목사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영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영감 즉 하나님의 능력이 없으면 설교를 해도 신자들로 하여금 졸게 만듭니다. 그 이유가 영감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예배시간에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는데 앞에 있는 어느 청년이 졸고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옆에 앉아있는 할머니에게 그 청년 좀 깨우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재우기는 자기가 재워놓고 왜 날보고 야단이여”하고 역정을 내더라는 것입니다. 그럴 만도 하지 않습니까. 재워놓기는 자기가 재워놓고 엉뚱한 사람에게 소리를 치니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덤 속에 있던 예수를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죽었던 사람을 살아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처음 열매로 하나님은 예수를 살려내셨습니다. 이다음 차례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무덤을 찾아가 예수님의 없어진 시신을 찾고 있는 제자들에게 천사가 말했습니다. “왜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너희가 찾는 예수는 생전에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너희는 생전에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을 기억하라“. 이 부활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힘 입혀지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