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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추수 감사설교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감사 /왕상3:1~15

by 【고동엽】 2022. 4. 9.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감사왕상3:1~15 최일환 목사

1 솔로몬이 애굽 왕 바로로 더불어 인연을 맺어 그 딸을 취하고 데려다가 다윗성에 두고 자기의 궁과 여호와의 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이 필역되기를 기다리니라2 그 때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아직 건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며3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6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줄을 알지 못하고8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11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13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1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15 솔로몬이 깨어보니 꿈이더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수은제를 드리고 모든 신복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
설교: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한 해 동안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건강의 은혜, 가정의 은혜, 직장의 은혜 각종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감사하는 여러분의 여배가 하나님께 열납되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때로는 잘못된 지식이나 오해에서 나온 것이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도 그런 오해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동방박사가 3명이라든가 요나를 삼킨 물고기가 고래라든가 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예물이 세 가지이기에 세 명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고 사람을 삼킬 수 있기에 가장 큰 물고기로 고래가 아니겠는가 하는 추정입니다. 
그중 하나가 일천번제입니다.많은 사람들이 일천번제를 일천 번의 제사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한 번의 제사에 1천 마리의 양을 계속해서 번제물을 드린 제사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후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그런데 그 당시에는 성전이 아직 건축되지 않았기에 솔로몬이 기브온으로 갔습니다. 왜냐하면 그 제단이 당대에 가장 큰 제단이었기 때문입니다.거기서 일천 마리의 양으로 일천 번제를 드리자 그날 밤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네게 무엇을 줄꼬! 하고 물어 보셨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1천 번의 제사를 드린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일천번제는 천 번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 아니라 1천 마리의 생축을 불태워 계속해서 제사 드렸다는 뜻입니다.한자로 보면 一千番 祭가 아니라 一千 燔祭인 것입니다. ‘번’자가 뜻이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일천 번의 예배가 아니라 일천 마리의 양을 계속해서 번제로 드린 것입니다.
물론 일천 번의 예배를 드리며 예물을 정성으로 드리겠다고 작정하는 것 자체는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솔로몬이 일천번제에서 복을 받았으니 나도 그렇게 하자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성경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솔로몬이 제사장도 아니고 매일 매일 번제를 드려 3년 동안 번제 드리는 일에만 골몰했다면 어떻게 왕국을 다스렸겠습니까? 그것이 아니고 한 번의 번제에 1천 마리의 제물을 드렸다는 뜻입니다.하나님은 솔로몬의 그 헌신을 받으시고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달라고 구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오셔서 내게 네게 무엇을 줄꼬 물어보시고 그의 구한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솔로몬은 예배의 성공자다’. 그렇다면 우리도 솔로몬처럼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실만한 감사를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우리도 솔로몬처럼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감사예배를 드리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1. 감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시편 50:23을 보세요.“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감사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솔로몬은 감사로 예배를 드렸기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성공자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했습니다. 자기를 왕으로 세워주신 것도 감사하고 다윗의 많은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어린 자기를 왕으로 세워주신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일천번제를 드린 것입니다.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는 감사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여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감사의 고백이라 할 정도로 감사라는 단어가 많습니다. 성경전체 176번이나 감사라는 단어가 쓰였고 그중 시편은 전부 150편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감사’라는 단어가 74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감사하라"는 명령구절이 35번이나 반복되고 있음을 통해 하나님이 감사고백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특히 우리 성도는 범사에 감사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범사란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며 성공했을 때에나 실패했을 때에나 어떤 일에든지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언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받으시는 최고의 감사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일부 잘못된 성도는 예배나 헌금을 투자형식으로 드립니다. 내가 일천 번의 정성을 바치면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시겠지 하고 드린다면 그것은 일종의 투자입니다.
사실 솔로몬의 일천 번제는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로 양이나 소를 잡아 각을 떠서 불이 태워 드리는 제사인데 그 제물의 수가 일천 마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여러분! 이 제사가 쉬운 제사입니까? 아닙니다. 굉장히 어려운 것인데 받은 은혜가 크기에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감등을 받으시고 그의 꿈속에 나타나셔서 복을 약속한 것일까요? 그것은 그의 제사가 거대하거나 대단한 양 때문일 수도 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감사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추수 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예배만이 감사예배가 아닙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가 감사예배요. 마음과 몸을 드리는 헌신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받으십니다.그런 예를 성경에 여러 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건 몇 가지를 살펴보면 첫째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창세기 4장에서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 제사는 받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제물 차이가 아닙니다. 농사꾼에게서 농사 물로 예배하는 것 당연하고 양치기에게서 양을 제물로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드리는 자의 마음입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치 않았다,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다고 한 것을 보면 드린 자의 그 마음자세가 중요한 것임을 보게 됩니다.그리고 하나님이 가인을 책망하실 때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창4장6~7절을 보세요."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이것을 보면 그의 마음 상태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았던 것입니다. 분명 이렇게 된 것은 가인의 제사는 감사의 마음이 아닌 형식적 제사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 옥합향유 사건이 벌어집니다. 많은 사람이 그 사건을 바라보고 매우 아까와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주님은 그것을 좋은 일이라고 칭찬하시고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그 여자가 행한 일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그 여인은 왜 칭찬을 받았을까요? 그 향유가 가치 있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은 그 여인의 감사하는 마음을 아셨습니다.그가 왜 그런 엄청난 가치의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는지, 그 마음을 아셨습니다.그 여인은 주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그렇게 귀한 것을 조금도 아깝지 않게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여러분은 오늘 추수 감사 예물을 드릴 때 어떤 마음으로 드렸습니까?하나님이 지난 일 년 동안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신 것이 감사하고 또 각종의 추수를 허락하신 것이 감사하여 드렸습니까?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목사님! 우리가 무슨 농사를 짓나요? 무슨 추수 감사입니까?” 하실 분이 계십니까? 현대사회는 일이 세분화되고 변화되어 일터가 농토가 아닐 뿐이지 실상은 직장도 농사요 자식 교육도 농사요. 가정 살림도 농사요. 그러기에 모든 수입은 추수인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그러기에 한 해 동안 추수케 하신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 그 마음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감동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정성이 담긴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솔로몬의 예배는 하나님이 열납하셨습니다.왜일까요? 그 첫째는 그의 감사하는 마음 때문이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가 드린 예물의 정성입니다.
솔로몬은 왕입니다. 그러기에 그까짓 천 마리의 양 얼마든지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할지 모르나 그 천 마리는 그의 정성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가로 치면 양한마리에 얼마인지 정확하게는 모르나 소한마리가 450만원  가량이랍니다. 그러면 양한마리는 적어도 10만원이라 치고 천 마리기에 1억 원 가량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왕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으나 일천이라는 그 속에 솔로몬의 정성이 담긴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일천번제를 드리시는 분이 계십니다. 저는 그 예물 속에 그 성도님의 정성이 담겨 있기에 그대로 축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헌금에는 우리의 믿음이 담기게 되고 우리의 신앙고백이 담기게 됩니다.고린도 전서 9장 6~7절을 보면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한마디로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절기만 되면 시험듭니다. 재정 집사님들이 재정을 정리해서 보고서를 제게 보여주는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 이런 때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추수감사헌금이 너무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대충하는 경우가 있고 절기기에 그냥 생색 내기위해 드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남의 초상집 조의금만도 못하고 결혼식 축의금만도 못하게 드리면서 감사헌금이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는 하나님께 감동을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성전에서 헌금함에 헌금하던 여인을 보고 칭찬을 하십니다. 왜요? 그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기에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고 하십니다.주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십니다. 이것이 무서운 이야깁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갈7:6절을 보세요.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셨습니다.내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게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아시기에 속일 수 없습니다. 가족들과 외식하고 놀러갈 때는 몇 십만 원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헌금은 아깝습니다. 왜요? 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라기1장7절 이하를 보세요."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하나님은 대충 드리는 것 싫다고 하시도 눈먼 것, 병든 것, 저는 것, 드리는데 그것을 총독에게 드려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러고도 복을 받으려 하느냐는 것입니다.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언급하십니다.말라기1:11절을 보세요."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이스라엘이 정성 없는 예물로 하나님을 더럽히기에 하나님은 제단을 이방인으로 옮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민족 중에서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정성어린 온전한 예물을 드리지 못하면 하나님은 다른 곳에서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헌신은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문제는 사랑과 존경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드리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존경하면 아깝지 않게 됩니다.그러기에 주님을 사랑하시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시고 정성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3.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구약의 모든 제사는 오늘의 예배입니다.구약에서는 5대제사가 있습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가 있는데 이런 모든 제사는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그러기에 오늘날 다시 짐승을 잡는 제사를 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의미와 정신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요한복음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러기에 우리의 예배 속에 구약에서 드렸던 예배 정신과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배는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식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예식입니다.그러기에 예배를 드릴 때 예배자의 마음도 중요하고 정성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예배의 형식과 경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의 가장 심각한 모습은 예배 자세입니다.예배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입니다.그러기에 예배는 온전히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성공한 예배입니다.그런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만족하는 예배를 드리려고 애를 씁니다.물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예배는 사람이 만족하는 예배도 되겠으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기뻐하는 예배, 사람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예배를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하나 문제는 예배 경시 풍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드리는 예식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드리는 것입니다.그런데 사람들이 이 예배를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것입니다.어떤 이는 예배를 취미로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오는 것 자체를 일종의 취미생활로 여깁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가 연극 관람하는 것 같이 여깁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되면 예배드리고 안 되면 못 드리는 것입니다.또 어떤 이는 예배의 가치를 경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예배의 가치가 다른 일에 밀려납니다. 예를 들면 집에 손님이 오면 예배 못 드립니다. 일이 바쁘면 예배 못 드립니다. 남편이 집에 있으면 못 드립니다.왜요? 예배의 중요성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몽골의 이용규 선교사님이 쓴 ‘내려놓음’이라는 책에 “소 대신 예배를 택하는 마음”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몽골 이레교회에서 개척한 베르흐 지역의 예배처소를 방문해 예배를 드리던 중, ‘벌러르’라는 자매가 예배시간에 땀으로 뒤범벅이 돼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 자매는 몇 달 전에 기도를 통해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린 자매였습니다.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서 소를 찾으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를 버려두고 말씀을 들으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왔다는 것입니다.그때 선교사님은 소가 아닌 예배를 선택한 이 자매의 믿음의 결단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자마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닌 예배 처소를 찾아온 것입니다. 소가 아닌 예배를 선택한 이 소녀는 예배와 소, 두 가지를 함께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가 우선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배가 회복될 때 하나님은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키십니다.성도 여러분!여러분의 삶속에 예배가 가치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경시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시겠습니까?아브라함을 시험하셨던 하나님, 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보길 원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가치관입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 귀한 존재로 여기고 그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그러니 하나님이 그 아브라함의 번제에 감동을 받으시고 그에게 메시야의 약속을 하지 않습니까?
제가 정말 가슴 아프게 여기는 것은 예배에 지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여러분 계시는데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왜 예배를 처음부터 온전히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매주 그 시간이 되어 나오는 것입니까? 습관이라고요? 아닙니다. 예배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경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시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손상시키는 일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기는커녕 하나님을 근심케 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온전한 예배, 경건한 예배, 흠 없는 예배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과 예배를 통해 감동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감동하기만 하면 우리 문제는 해결됩니다.그분은 우리에게 복을 주실 준비가 되신 분입니다. 솔로몬에게 찾아오셔서 물어보시며 복을 주셨던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도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감동하는 감사를 통해 넘치는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출처 :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글쓴이 : 최일환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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