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장래와 소망있는 아이! (잠 23:13-18
몇 년 전에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실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이 있어났습니다. 십대 소년 두어 명이 자기네들이 다니던 학교에 들어가서 총기를 난사하여 이십 수 명을 죽고 다치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불과 일이년 후에 이와 비슷한 사건이 아칸사스주에서 또 벌어졌습니다. 그때에는 더 어린 나이의 소년 둘이서 자기 학교의 비상벨을 눌러 학생들을 운동장으로 나오게 해 놓은 후에, 학교 주변에 있던 수풀에 숨어서 정확한 조준 사격으로 또 십 여 명인가를 죽고 다치게 만들었었습니다. 온 미국을 전율하게 했던 끔찍한 사건이 세간의 기억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꼭 같이 또 한번 반복된 것입니다.
언젠가 ‘월간 조선’에서 어느 미국 대학교에 있는 한국인 교수가 쓴 글을 읽었는데, 거기서 그 분은 자기가 미국에서 일선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미국 공립학교는 마치 전쟁터와 같고 학생들은 무장 공비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모든 미국 공립학교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이런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는 것을 보면 그 분의 표현도 그리 과장은 아니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들에 대한 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총 쏘는 법과 동물 죽이는 재미를 가르쳐 주는 부모, 청소년들을 인격적으로 교육하는 것을 포기하고 제멋대로 자라나도록 방치해 두는 교사 - 이런 이들이 결국 십대 소년들로 하여금 총을 들고 사람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건 직후에 온 미국은 ‘너무 늦기 전에(Before It Is Too Late)’ 운운 하면서, 이런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고 온갖 설왕설래가 오갔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 이것은 정말이지 오늘날의 모든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할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말입니다. ‘너무 늦은 때’란 것은 생각보다 순식간에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태어난 그 기쁨에만 젖어 있고 쑥쑥 자라는 모습에 대견해 하기만 하다 보면, 어느 새 벌써 그 ‘너무 늦은 때’가 훌쩍 닥쳐와 버린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기 십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직은 늦지 않은 때에, 아직은 기회가 있을 때에 우리가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너무 늦기 전에’ 우리 자녀들을 진정 ‘장래와 소망이 있는 아이’로 키워 나가는 교육 방법을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자녀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엄히 훈계할 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잠언 23장 13절과 14절에 말씀하기를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훈계’라는 말은 영어로 ‘디스플린(discipline)’에 해당되는 말로서 ‘엄한 교육, 훈련’ 등의 뜻입니다. ‘채찍으로 때린다’는 말은 물론 문자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엄격하게 교육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아이를 훈계하라’고 하지 않고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고 말씀한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전자의 표현이 훨씬 더 간결하고 명백한데, 왜 ‘하지 아니하지 말라’고 훨씬 더 복잡한 ‘부정의 부정’의 표현을 썼겠습니까? 왜냐하면 마땅히 훈계해야 할 것이 있는데도 자기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는’ 부모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정 안되면 매를 들어서라도 꼭 엄하게 가르쳐야 할 것이 있는 것을 전혀 모르는 부모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런 부모가 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엄한 교육’과 반대되는 것을 ‘자율 학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아무 것도 간섭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는 교육 방식입니다. 스포크 박사라는 사람이 주창했고 현재 미국의 대부분의 공립학교에서 따르고 있는 교육 철학이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열린 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점차 확산되고 있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그 이론인즉, ‘아이들은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면 저절로 자기가 가장 잘 하는 것을 찾아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하지 않고, 아무 정신적 부담도 주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자율 교육 방식은 ‘인성 교육’에는 치명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사실상 ‘지식 교육’에도 아주 비효과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과목 ‘수’를 받지 못했다고 야단을 치고 매를 드는 전통적인 우리나라 교육 방식에도 문제가 많지만, 자식이 빵점을 받아와도 “네가 최고야.(You are the number one.)”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미국식 교육은 오히려 더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 ‘열린 교육’이란 것이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적용될 때에는 정말 큰일 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잠언 23장 14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했습니다. 즉 엄한 교육이란 자녀의 성적표를 가지고 난리를 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자녀의 신앙 교육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부모의 엄한 훈계가 없으면 그 영혼은 자동적으로 음부로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가만히 내버려 두면 지옥 쪽으로만 치닫게 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교육은 근본적으로 ‘성선설’이 아니라 ‘성악설’에 기초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난다’는 것이, 에덴동산에서의 인간 타락 이후 모든 사람에게 예외가 없이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지금 갓 태어난 어린 아이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신앙에 대하여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고 가만히 ‘자율 학습’하도록 내버려 두면, 그 아이는 나중에 백이면 백 다 불신자가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훈계 즉 엄격한 신앙 교육을 받지 아니한 영혼은 절대로 천당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음부’로 향하는 직행 코스로 달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온갖 잔소리, 온갖 야단 다 하면서도, 그 자녀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만큼은 완전히 자유롭게 내버려 두는 부모들이 적지 않습니다. 학교 숙제, 귀가 시간, 사귀는 이성 친구 -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온 신경의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정작 그 자녀의 예배 생활, 주일 학교 공부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완전히 무관심한 부모들이, 그것도 자기는 신앙생활한다 하면서도 자식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유방임시키는 부모들이 참 많이 있는 것입니다. 제 스스로 알아서 하게 하면 절로 예수님 잘 믿게 되고, 자유롭게 해 주면 절로 신앙고백하게 되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저절로 천당 구원 얻게 될 것이라고 아주 자신만만(?)해서 그렇게 합니까?
우리는 결코 그런 무책임한, 자식에게 정말 못할 짓을 하는 부모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훈계하지 않으면, 이제는 훈계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때가 곧 오게 됩니다. 아니 훈계 받고 자란 자녀들은 자라서도 부모의 훈계를 들을 줄 알지만, 훈계를 전혀 받지 않고 자란 자녀들일수록 부모에게 오히려 대어드는 나이가 훨씬 더 일찍 찾아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을 때, 아직 부모의 권위 아래 복종할 줄 알 때, 다른 그 무엇보다도 자녀의 신앙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매까지 들 각오로 엄하게 바로 가르침으로써 자녀의 영혼을 반드시 음부에서 구원해 내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녀의 영적 성장을 기뻐할 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잠언 23장 15절과 16절 말씀에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고 했습니다. 지식과 지혜는 비슷한 것 같지만 아주 다릅니다. 지식은 단순한 ‘양적인 정보’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교과서를 통해서 혹은 요즘에는 컴퓨터로 웹 사이트를 두들기기만 하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지혜는 ‘지식을 스스로 얻는 능력’, 혹은 ‘보다 근본적인 지적 활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런 지혜는 스승과 부모의 가르침이나 자기 경험 등을 통해서도 쌓아 갈 수 있는 것이지만, 가장 중요하고 풍부한 지혜는 역시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니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라고 했습니다. 흔히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만큼 부모의 눈에 즐거운 것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진짜 신앙의 부모는 그 자녀의 마음에 이처럼 성경의 지혜가 하나씩 둘씩 차 들어가게 되는 것을 보고 정말 즐거워 할 줄 아는 것입니다. 또한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정직’이란 ‘옳은 것’이란 뜻입니다. 물론 이것도 성경 말씀을 통해 얻은 지혜의 결과로 생기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홍수와 같은 많은 양의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과연 ‘무엇이 옳은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정확한 지식을 가르쳐 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성경 말씀으로 교육시킨 부모는 그 자녀로 하여금 스스로 ‘옳은 것’을 판단할 줄 아는 지혜를 자녀의 마음에 채워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자기 자녀가 독립적으로도 영적인 문제들을 옳게 판단하고 그것을 자기 입으로 말할 줄 아는 것을 보게 될 때, 실로 유쾌하기 짝이 없는 큰 즐거움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다 그 자식이 자라는 과정 하나하나가 정말 대견스러울 것입니다. 육아 일기를 적고, 기둥에 키를 재어 금을 긋고, 사진첩을 만들고 하는 것들이 다 그런 즐거움입니다. 첫 웃음 짓는 것, 첫 걸음마 걷는 것, 그리고 첫 마디 말을 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될 때마다, 부모는 절로 입이 벌어지는 웃음을 막을 길이 없게 됩니다. 더 자라서 학교에 입학하여 좋은 성적을 받아 오고 때때로 상도 타오고, 혹은 운동부에 들어가서 안타를 치고 골을 넣고, 그 애가 만든 작품이 학교에 전시되거나 혹은 학교 합창단에 출연하게 되거나 할 때마다, 그 부모들은 실로 형용할 수 없는 유쾌한 즐거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부모들은 그런 일보다 더욱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아이의 영혼 속에 성경의 지혜가 쌓여 가고, 그 아이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채워져 가는 것을 보게 될 때입니다. 우리는 자녀가 성경을 스스로 읽는 것을 보고, 자기 입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줄 알게 되는 것을 보게 됨으로써, 이제 그 아이의 마음에 참된 생명의 지혜가 들어가게 된 것을 두고 정말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가 “아빠, 나 오늘 좀 아파도 교회 갈래요.”라고 말하게 되는 것을 들을 때 , “엄마, 오늘 교회 가는데 헌금 주셔요.”라고 자기편에서 먼저 말할 줄 알게 되는 것을 볼 때, 아직 어린 것들이 그처럼 자기 입으로 ‘옳은 것’을 말할 줄 알게 되는 것을 볼 때 더 없이 유쾌한 기분을 느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교육시킬 수 있는 기회 역시 무한정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애가 대학교 들어갈 때까지만’하고 미루고 있다가는, 그 대학이란 데를 들어간 후에는 이미 ‘너무 늦은 때’가 되고 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처럼 아이들이 조숙하는 시대에, 이미 중학교 지나면 알 것 다 알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면 벌써 어른 뺨칠 정도로 정신 연령이 다 자라 버리는 시대에, 이 ‘오래 전 옛날 말씀’을 그 굳을 대로 굳어버린 머리 속에 그제 가서 도대체 어떻게 집어넣겠다는 말입니까? 영어는 물론이고 다른 온갖 특별 활동들까지도 조기 교육이니 전인 교육이니 하고 난리를 치는 시대인데, 왜 성경 말씀 교육만큼은 늦추어도 괜찮은 것이라고, 아니 반드시 제일 나중으로 미루어 놓아야 할 하찮은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자식을 성경 말씀으로 교육하는 것을 이처럼 늦추고 있는 부모는 그야말로 자식을 일부러 영적 부진아로, 영적 저능아로 만들고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자녀들에게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침으로써, 그들 머리 속에 세상 지식이 늘어가는 것보다 그들의 영혼이 지혜롭고 정직하게 성숙해 가는 것을 두고 정말 기뻐할 줄 아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자녀가 신전 인격자가 되는 것에, 그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둘 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잠언 23장 17절과 18절에 기록하기를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녀로 하여금 어릴 때부터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도록 교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신전 인격자’로 키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인격자’ 즉 항상 하나님의 눈을 의식할 줄 아는 인격의 소유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부모들에게 있어서는 소위 자식들의 ‘기를 살리는’ 교육이란 것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자식이 남에게 잘못하고 들어오면 그 부모가 자식을 다그쳐서 기어이 가서 용서를 빌고 오도록 다시 내보냈습니다. 하지만 요즘 부모들은 자식이 이웃 어른에게는 물론이고 학교 선생님에게도 야단맞는 것을 도무지 못 보아 준다고 합니다. 자기 애를 ‘기 죽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기’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고 왜 그리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요즘 부모들은 목숨 걸듯이 자기 자식들에게 기를 살려 주려고 야단들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꼭 알아야 하는 것은 그처럼 자식의 기를 살려 주려 하다가 자식으로 하여금 하나님 두려운 것도 모르게 만들기 십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를 살린다는 것은 결국 자기에 대하여 자신을 가지게 만들고 아무도 자기를 강요하거나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는 말과 같은 뜻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대인 관계에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태도가 하나님 앞에까지 이어지게 되면 그 자녀의 교육은 이미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자식의 기만 잘 살려 주고 하나님 경외하는 법은 전혀 가르쳐 주지 못한 부모 밑에 자란 아이들이 어떤 성인으로 자라가게 되는지 보셨습니까? 저는 가끔 그렇게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혹은 이미 그렇게 자라 버린 청년들을 보았습니다. 전혀 제대로 웃을 줄도 모르고 그 눈에서는 차가운 빛이 돌고 곁에만 있어도 그 냉기에 으스스한 기분이 절로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왜 자식을 그처럼 하나님 앞에서 ‘막 놓아 키우는’ 부모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잠언 23장 17절 상반절을 다시 보면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했습니다. 자녀들로 하여금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쳐야 할 부모 자신이 스스로 ‘불신자의 형통을 부러워하는’ 인생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모의 사고방식이 벌써부터 이 세상에서 예수님 믿지 않고 그저 육신적으로만 잘되는 인생을 지극히 ‘부러워’하고 있으니, 그 자식에게 무슨 신전 인격적 교육이란 것을 하게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일수록 자기 인생을 통해서 자기가 이루지 못한 어떤 부러운 것들에 대하여 한이 맺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성취하지 못한 소원들을 어찌하든지 자기 자식에게서 이루어 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여호와 경외’하는 교육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공부 많이 해라, 일류 대학에 가야 한다, 월급 많은 직장 잡아라, 그러면 좋은 여자들은 절로 줄줄이 따라온다, 그래야 죽도록 고생해서 너를 키운 덕을 내가 좀 볼 것 아니냐 - 이것이 소위 부모 교육이란 것의 전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가르치면 정말 자식이 잘 될 줄 아십니까? 정말 그런 자식에게 ‘장래가 있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까? 그야말로 큰 코 다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자기 잘난 줄만 알고 하나님 두려워할 줄 모르고 자란 청년들, 그러나 그 부모가 생각하기에는 꽤나 잘 키운 것처럼 자랑하는 자녀들을 제가 미국에서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일류 대학 나오고 ‘여섯 자리 숫자’(억대) 연봉 받는 직장에 다니고 하지만, 오직 자기만 알고 하나님 경외는 커녕 교회 출석도 하지 않고 부모 공경 같은 것은 전혀 모르는, 소위 ‘미국 사회에서 성공한 Ⅱ세’들이었습니다. 교회 다닌다는 부모들이 자식을 그렇게 키워 놓고도 남들 앞에서는 꽤나 잘 해낸 것처럼 어깨에 힘주는 모습을 볼 때, 저에게는 그 부모나 자식이나 같이 불쌍한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부모가 피땀 흘리며 이민 생활을 하면서 자식 뒷바라지해 보아야 결국 그 자식으로 하여금 제 혼자 인생만 마음껏 즐기면서 살도록 해 주는 것으로 끝날 뿐입니다. 자식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인격자로 키우지 못하면, 평생 키웠다는 자식이 그런 ‘여피족’이 되어 버리고, 어렵게 키워 놓은 자식에게서 효도를 받기는커녕 손자 하나 얻지 못 하는 할아버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정말 불행한 일이지만 비일비재한 일이며, 그 부모가 자업자득인 줄로 알고 통탄하게 될 때란 이미 ‘너무 늦어도 한참 늦은 때’인 것입니다.
이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자녀를 정말이지 ‘신전 인격자’로 키워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자기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인식할 줄 아는 아이로 키워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하는 것을 위에서 지금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라는 생각은, 결코 ‘기가 죽어 있는’ 아이의 상상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 계시는 것을 어릴 때부터 제대로 배우고 익히고 자라난 자녀만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보배로운 인격입니다.
그처럼 하나님 경외 의식을 배우고 자라는 아이에게는 「정녕히 장래가 있겠고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성령께서 보증하시고 확증하셨습니다. 그런 아이가 어떻게 장래에 잘못될 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아야지.’라고 생각할 줄 아는 법을 배우고 자란 아이가 청년이 되든지, 어른이 되든지, 어떻게 잘못될 길이 있겠습니까?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아직 늦지 않을 때, 우리 자녀들을 이처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항상 자각할 줄 아는 인격으로 키워 나가는 부모가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자녀들이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는 정말 하루가 다르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처럼 살같이 빨리 흐르는 세월 가운데, 자녀들과 아직 한 지붕 밑에서 살고 있는 이 짧은 순간만이 우리더러 제대로 부모의 의무를 다하라고 주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입니다.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한 생명을 바로 자라나도록, 구원받는 생명 되도록, 하나님 영광 위하여 사는 인생 되도록 똑바로 교육시키라고 하나님께서 우리 부모들에게 주신 너무나도 소중한 기회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정말 부모다운 부모 노릇을 할 기회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너무 늦은 때’라는 것은 우리 생각보다는 아주 빨리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모르고 머리 속이 세상 지식과 논리로만 꽉 차 버리면 이미 늦은 때입니다. 부모 공경도 하나님 경외도 모르고 그 인격이 차가워져 버리면 이미 제대로 가르치기에는 한참 늦은 때가 되고 맙니다. 그 영혼이 교만으로 굳어 버리고 지옥을 향하여 치닫게 될 때에는 이미 돌이킬 방도가 없는 완전히 늦은 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렇게 늦은 때는 아닙니다. 아직은 우리 자녀에게 ‘장래와 소망’이 있는 때입니다. 우리가 저녁마다 자녀와 한 상에 앉을 수 있고, 주일마다 자녀를 데리고 교회에 나올 수 있는 이 때까지는 아직은 기회가 남아 있는 때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다운 부모 노릇을 할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 이 마지막 때를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늦은 때가 오기 전에, 자녀의 영혼을 위하여 엄히 가르치며 자녀의 영혼이 말씀 가운데 성숙하게 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며 자녀의 영혼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도록 가르침으로써, 정녕 그 영혼을 구원하며 그 금세의 인생과 영원한 장래에까지 소망을 주는 부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고전 15:12-19) (0) | 2022.04.07 |
---|---|
아이가 노인에게 교만할 것이며! (사 3:1-5) (0) | 2022.04.07 |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누가복음 2:1-14) (0) | 2022.04.07 |
대림절 신앙의 키워드 (벧후 3:8-13) (0) | 2022.04.07 |
바람직한 효도 (창 22:6-14) (0) | 2022.04.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