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미군 한 명이 본국으로 엽서 한 장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 엽서는 먼저 일본군이 내용을 철저히 검열하고 나서 보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미군 포로는 그 엽서를 통하여 자기 안부를 전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어떤 군사적 정보를 본국에 보내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검열하는 일본군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그 엽서 내용을 교묘하게 꾸몄습니다. 우선 수신 주소를 ‘미국 어느 시 어느 길 어느 빌딩 사무실 몇 호’라는 식으로 썼는데, 그것은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주소였습니다. 그 대신 그 주소 가운데 ‘CIA’라는 약자가 마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괄호 안에 들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미 중앙정보부’를 뜻하는 약자였습니다.
그 엽서를 받은 미국 우체국 직원은 그런 유령 주소로 엽서를 발송한 미군 포로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미 중앙정보부로 보냈습니다. C.I.A. 정보부원들이 그 엽서를 보니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이곳에 우리 미군들이 포로로 잡히게 되었지만, 별 일 없이 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운운.’이라는 식의 서너 문장의 글로서, 일본군들이 오히려 좋아할만한 말들이었습니다. 물론 미군 포로가 본국 정보부에 그런 의례적인 인사말을 전하려고 그렇게 어렵게 엽서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했던 정보부원들은 여러 모로 그 편지 내용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엽서에 씌어진 문구 중에서 행이 바뀔 때마다 제일 첫 머리에 나오는 단어만 다시 모아 보았더니 아주 완전한 새 문장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곳에 지금 포로로 잡혀 있는 우리 미군의 숫자는 몇 명이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미군의 작전 우선순위나 혹은 포로 교환시에 아주 요긴하게 쓰이는 정보가 되었음은 물론이었습니다.
만약 그런 내용이 그 엽서에 있다는 것을 일본군이 눈치챘더라면 절대로 우송해 주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검열하는 일본군이나 미군 정보부가 꼭 같은 한 엽서를 읽었지만, 미군 쪽에서만 그 편지 내용의 키포인트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역시 그러합니다. 꼭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요점을 정확히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듣기는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서도 역시, 불신자가 읽으면 별 것 없어 보이는 내용 가운데서, 오직 성령의 감화 감동 받은 신자만이 확실히 찾고 깨달을 수 있는 요긴한 단어들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정말 중요한 키포인트를 깨닫게 해주는 암호와 같은 말, 오직 참된 기독 신자의 눈에만 정확하게 풀리게 되어 있는 두 단어들을 오늘 성탄절에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Ⅰ. ‘베들레헴’은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의 주권적 구속 역사’임을 증거하는 표적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2장 1-7절까지의 말씀에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 탄생의 역사적 배경은 아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이름부터가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저 유명한 줄리어스 시저의 조카 옥타비아누스입니다. 그는 시저가 죽은 후에 정권을 잡고 황제가 된 후 스스로를 ‘가이사 아구스도’라고, 영어식으로 발음하자면 ‘시저 오거스트’라 칭했습니다. 그의 치하에서 몇 십 년 동안 로마는 최대의 전성기를 누리면서 소위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 시대를 구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그런 아구스도가 ‘천하에 영을 내렸다’라고 했습니다.
이 한 마디에서도 당시 마치 하늘을 찌를 듯했던 그의 당당한 권세가 드러납니다.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가 천하를 향하여 무슨 말 한 마디만 하면, 온 천하 사람들이 당장 하나 같이 절대 복종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예수님의 탄생이란 것은 세속 역사적으로 볼 때에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요셉이라는 한 시골 평민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유대 사회 안에서만 따져도 정말 별 볼 일 없는 존재였지만, 특히 가이사 아구스도와 비교할 때에는 이것은 뭐 티끌 하나만큼도 되지 않을 집안이었습니다.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가게 된 것도 순전히 그 아구스도의 명령, 즉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한 그 말 한 마디에 꼼짝하지 못하고, 그 권위에 묶여 갈 수밖에 없었던 길이었습니다. 성경의 요점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읽으면, 이런 예수님의 탄생이란 온 세상 전체의 역사, 이 지상의 군왕들이 제 마음대로 떡 주무르는 듯이 만들어 가는 역사에 비교해 볼 때, 정말 ‘새 발의 피’도 되지 않을 것으로만 보여질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는 이 말씀 가운데서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라는 말씀에 주의를 집중하게 됩니다. 이 역시 사회적 관점에서만 본다면, 당시의 로마나 예루살렘 같은 대도시에는 도무지 비교도 될 수 없는 작은 촌 동네입니다.
하지만 그 베들레헴은 장차 반드시 메시아가 탄생하실 곳으로 구약에서 예언된 장소입니다. 미가서 5장 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즉 어떤 왕이 베들레헴에서 출현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물론 다윗왕도 베들레헴 출신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있기 훨씬 이전에 이미 지나갔던 일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베들레헴 태생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이 미가서는 그 베들레헴 태생의 주권자가 그 ‘근본이 상고에, 태초에 있다’라고, 그 왕의 ‘본적, 원적을 따져 올라가면 그것은 베들레헴도 아닌 영원전이다’라고 밝힘으로써,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화육하신 메시아 되심을 더욱 분명히 예언해 두었습니다.
바로 그 예언된 베들레헴에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탄생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묘하게 주권적으로 역사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육신적 부모가 된 요셉과 마리아는 원래 베들레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서 꽤 멀리 떨어진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잉태한 후에 별 일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태어나실 뻔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하나님께서 그런 오차가 생기도록 내버려 두실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태어나시기 바로 직전에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추셔서 가이사 아구스도가 그런 영을 내리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물론 아구스도야 그런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 리가 없었지만,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보다 훨씬 높은 절대 주권자의 손에 잡혀 순전히 그분의 도구 노릇을 했던 것입니다. 자기야 제국 산하 식민지에서 세금을 더 많이 걷어 내려고 그런 칙령을 내렸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아구스도의 ‘영’을 사용하셔서, 요셉 부부가 갑자기 고향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당시 마리아는 해산 예정일을 코앞에 두고 있었는데 만약 무슨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면 출산 직전의 산모가 그런 힘든 여행길에 올랐겠습니까? 웬만한 일이 벌어졌다 해도 어찌하든지 고향 집에 머물러 몸조리만 잘하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아닌 천하의 황제가 명령을 내리니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고, 그 결과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 그대로 정확하게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진짜 주권자인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습니까? 예수님 탄생 당시 그 역사를 정말로 주도하고 있던 이는 결코 가이사 아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가 온 천하를 한 손에 휘어잡고 젖먹이 어린아이까지 그 이름을 들으면 벌벌 떨게 만들기는 했지만, 비록 그가 말 한 마디로 제국 산하의 모든 사람 하나하나의 머리에 세금을 매길 수 있는 권력을 휘두르기는 했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진짜 주권자, 온 우주와 온 인생에 대한 절대 권위자이신 성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 여호와 하나님의 순전한 의지와 완벽한 계획에 따라 일점일획의 착오도 없이 진행되었고, 당시 세상 권력의 제1인자라 하던 가이사 아구스도도 그런 하나님의 구속 역사 시행에 있어서 그저 당신께서 마음대로 쓰신 한 개의 막대기가 되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이 명령서에 사인(sign)만 한 번 하면 수십만 명의 군인들이 지구 어느 구석까지라도 동원되는 것을 봅니다. 아니 IMF 총재는 웬만한 국가의 최고 통치자보다도 훨씬 더 큰 실제적 권력을 해당 국가의 전 국민들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발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세상의 ‘열왕들과 군왕’들에 불과할 뿐 결코 ‘왕 중의 왕’은 아닙니다.
바로 ‘베들레헴’이라는 말이 그 중대한 정보를 오늘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이란 이 요긴한 암호, 예수님 탄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얼마나 강력하고도 오묘하게 역사하셨는지를 명확하게 증거해주는 이 표적을 보고 깨달을 줄 아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Ⅱ. ‘구유에 누인 아기’는 예수님의 탄생이 바로 ‘구세주의 화육강생’임을 증거하는 표적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2장 8-14절에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 탄생 직후 제일 먼저 그 소식을 듣고, 또 제일 먼저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들은 바로 그 지경에 있던 목자들이었습니다. 목자들은 당시 사회의 하류 중에도 최 하류로 취급받던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양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옛날에 땅 주인은 따로 있고 그 밑에서 소작해서 겨우 먹고 살던 소작농들처럼, 이들도 역시 양 주인은 따로 있고 그 밑에서 남의 가축 뒤치다꺼리나 해주면서 겨우 살던 비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무시를 당했는지, 당시 이런 목자들은 법정에서 증인으로 채택될 자격도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말하자면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이요 ‘사람으로 쳐 줄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목자들을 예수님 탄생에 있어서 유일한 현장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온 천하를 주름잡는다 하던 가이사 아구스도를 증인으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의 성전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제사장들, 구약 성경을 빠삭하게 통달하고 있던 율법학자들을 구태여 예수님 탄생에 증인으로 채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사실 동방박사들조차도 예수님 탄생의 첫 증인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세상 법정에서는 증인이 될 수 없었던 사람들, 그 천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세우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첫 목격자요 증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과연 어떤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까?
그 목자들이 어떻게 그날 밤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까? 물론 하늘의 밝은 빛의 영광, 천군 천사의 찬송 등 신비한 장면들이 동원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구주 탄생의 결정적인 증거의 초점은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구유’라고 하니까 그 어감이 어떻게 들으면 뭔가 목가적인 분위기가 있는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사실은 ‘여물통’입니다. 지금 막 태어난 내 갓난아이를 어디 눕혀 둘 유아용 침대나 요람이 없어서 짐승 여물통에다 뉘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비위생적인 것은 고사하고 그 부모 심정은 억장이 무너질, 눈물이 왈칵 쏟아질 비참한 장면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 ‘구유에 누인 아기’야말로, 장차 메시아께서 비천한 존재로 화육하실 것이라고 예언했던 성경 말씀에 어김없이 들어맞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은 메시아의 탄생이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것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바로 이 ‘구유에 누인 아기’란 말씀이 그 비천한 메시아 탄생과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현장은, 예쁜 아기침대 안에 부드러운 핑크빛 담요가 깔려 있고 자장가 멜로디가 오르골에서 은은하게 흐르는, 누가 보아도 그 안에 누워 있는 아가의 행복한 모습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장면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마른 땅에서 줄기 하나가 간신히 솟아나 있는 것처럼, 너무나도 외롭고 가엾고 비참한 장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구유에 누인 아기’야말로, 그 아기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구약성경에 명백하게 예언되어 있는 진짜 구세주, 비하된 모습으로 화육하신 진짜 그리스도이심을 여지없이 확증해 주는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바로 그 요지부동의 증거를 목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너희들이 지금 다윗의 동네, 곧 베들레헴에 가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볼 것인데, 그 아기가 바로 너희들이 기다리고 있던 구세주이시다.’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라는 증거가 없으면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정확히 찾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이 비록 작은 동네이기는 했지만 호적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고, 또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다른 신생아들 몇이 더 있을 가능성도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구유에 뉘인 아기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강보에 싸인 아기는 많았겠지만, 세상에 짐승 여물통에 누워 있는 아기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실로 목자들처럼 무식하고 비천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시행착오를 저지르지 않고 정확하게 메시아가 누구인지를 찾아 볼 수 있는 충분한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목자들은 베들레헴에 가서 갓 태어난 아기들마다 찾아가서 그 아기의 관상을 따져 보고 어쩌고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신학적인 무슨 깊은 지식도 필요 없었고, 메시아 족보에 대한 역사적 지식조차도 필요 없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구유에 누인 아기가 바로 너희에게 표적이 되리라’고 가르쳐 주신 그대로, 아무리 일자무식한 목자들조차 그저 척 보면 알 수 있는, 구세주 탄생의 명백한 사인(sign)이 되고도 남았던 것입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란 베들레헴의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보고도 그냥 무심히 지나쳤던 장면이었습니다. 그저 측은히 여기거나 혹은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고 바라보았을지도 모르는 그런 비천한 장면이었습니다. 성경 예언의 비밀을 모르는 자에게는 아무 눈여겨 볼만한 내용이 없는, 그야말로 흠모하고 바라볼 것이 없는 장면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오직 그 목자들에게만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정확한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 표적은 오늘날 역시, 오직 하나님 당신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택자들만 풀 수 있게 만들어 놓으신 신비한 암호인 것입니다. 성탄 카드에 그려져 있는 예수님의 말구유는 아름다운 색상으로, 때로는 화려한 금박으로 인쇄되어 있습니다. 그 구유 안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금관이 떠있고, 몸에서 나는 신비한 광채는 그 구유를 환히 채우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런 표적을 사용하셨더라면, 당시 베들레헴 온 동네에 당장 소문이 나고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가 아기 예수님이 바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난리를 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아무나 알아 볼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탄생을 계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불택자는 보기는 보아도 알 수 없도록, 오직 하나님의 택자만이 보고 깨달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표적을 사용하셨습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 구약에서 예언된 그대로 비천하게 탄생하신 메시아를 아무리 무식한 자라도 틀림없이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신 이 신령한 암호를, 바로 오늘 성탄절에 찾아내고 깨닫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같은 한 통의 엽서를 보아도 그 요점을 깨달을 줄 아는 사람이 있었고 모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영어를 잘 하는 일본군이라 해도 찾을 수 없었던 내용, 오직 같은 미국 사람이어야만 그 중에서 요긴한 단어들을 찾아낼 수 있었고 그 핵심 정보를 알아 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진정한 의미 역시 그러합니다. 그것은 그 사건 현장인 베들레헴에 있었다고 다 알아 챌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세계사 시간에 배우거나 무슨 성탄 영화를 본다고 해서 다 깨달을 수 있는 사실도 결코 아닙니다. 오직 같은 조국을 둔 사람들끼리만 통할 수 있는, 천국의 시민권을 공유하고 있는 자국민들끼리만 통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언어뿐 아니라 그 마음도 같아야만이, 성경을 읽을 줄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아야만이 성탄의 진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강대한 권력 세계나 거대한 세계사 속에서 지극히 미미하고도 평범하게만 보이는 사건 속에도, ‘베들레헴’이라는 이 단어 하나가 하나님의 주권적 구속 역사를 뚜렷이 보여 주었습니다. 그저 가난하고 초라하게만 보이는 한 아기의 탄생이었지만, ‘구유에 누인 아기’라는 이 한 구절이, 바로 그 성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세주의 화육이었다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없이 확증해 주었습니다.
로마제국 안에서도 지극히 작은 고을 ‘베들레헴’, 목자들처럼 비천한 사람들도 찾고 증거할 수 있었던 ‘구유에 누인 아기’ - 바로 이 두 가지가, 오늘을 성탄절이라고 즐기고 있는 하고많은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도, 오직 알아 볼 수 있는 사람만 알아 볼 수 있게 만들어진 하나님의 신비한 암호인 것입니다.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 오직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만 이처럼 똑똑하게 들려주시고 선명하게 보여주시는 이 표적을 깨닫고, 이 위대한 주권적 구속역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의 찬양을 돌리고, 이 구세주의 은혜로우신 강림을 인하여 세상 앞에서는 기쁨의 소식을 크게 외치는 경향교회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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