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목차 돌아가기 |
그가 다시 살아 나셨느니라! (막 16:1-6)
2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에 독일에는 수많은 전쟁포로들이 끌려와 포로수용소에 갇혀있었습니다. 저들은 굶주림과 극심한 노역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저들을 힘들게 한 것은 절망이었습니다. 언제까지 이 암흑 같은 세월이 지속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자기들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포로 중에 통신 전문가가 있었습니다. 저가 몰래 라디오를 조립했습니다. 다행히 전파가 잡혀서 영국의 BBC 방송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송을 통해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했다는 소식’입니다. 이제 연합군이 승기를 잡고 독일로 진군해 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 사람이 참을 수 없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포로들이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물론 아직 독일군은 이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이전과 같은 포로생활을 더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포로생활을 하지만 달랐습니다. 힘겹던 노역이 힘들지 않습니다. 하루가 고달팠지만 넉넉히 견딜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희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이 마치 이와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때가 안식일이 되기 직전이라 황급하게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새벽에 세여인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예수님 시신에 바를 향품을 준비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는 저들의 발걸음은 한 없이 무거웠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너무도 억울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믿고 의지하던 예수님께서 너무도 갑작스럽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이 세여인은 정말 깊은 슬픔에 잠겨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 여인은 추스를 수 없는 깊은 절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주님 없이 살아갈 길이 막막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당장 눈앞의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막상 주님의 무덤에 가도 무거운 돌로 무덤이 닫혀있어서 주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무덤으로 향하면서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덤이 열려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이 비어있었습니다. 거기 빈 무덤에 웬 흰 옷 입은 청년이 있었고, 그 청년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마태복음을 보면 이 흰 옷 입은 청년이 천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빈 무덤에서 이 세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서 주님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 여인이 최초로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고,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서 들었고, 또한 눈으로 확인한 것입니다.
이 소식이 이 여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무덤을 향하던 발걸음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주님의 부활 소식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이 여인들에게 어떻게 느껴졌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부활 소식을 듣는 우리는 또 이 소식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놀랐습니다.
8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이 여자들의 첫 반응은 놀라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 소식은 정말 놀라운 소식입니다. 사흘 전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안치한 무덤이 비어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것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그 무덤이 텅 비게 되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여러 차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깜짝 이벤트를 체험해 본 사람들입니다.
창 22장을 보면 여호와이레 사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주셔서 100세에 나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 하셔서 지금 제단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칼로 그 아들을 잡으려는 순간입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다급하게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칼로 이삭을 잡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러자 눈에 숫양 한 마리가 보입니다. 뿔이 수풀에 걸려 어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위해 저 숫양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여호와이레 사건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깜짝이벤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너무 놀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감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온 인류를 향해 하나님께서 펼치신 깜짝 이벤트였습니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던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 깜짝 이벤트로 우리의 인생이 변했습니다. 세상이 변했습니다. 역사가 변했습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깜짝 이벤트로 답답한 우리의 상황을 바꿔주십니다.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 주십니다.
사실 교회 건축 중 여러 가지 난관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건축심의를 통과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교회는 부지가 좁아서 설계 자체가 힘이 듭니다. 특히 주차장 문제가 가장 큰 관건입니다.
설계하는 분이 아이디어를 내서 메인 주차장을 지하 5층으로 하고, 지상 1층에 보조 주차장으로 2원화해서 설계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법적 주차 한도를 채웠습니다. 그렇지만 지하 5층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려면 할 수 없이 기계식 주차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설계는 법적으로는 타당성이 있어도 건축심의는 통과가 어렵다는데 있습니다. 건축심의에는 지역 주민대표들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이 교회가 기계식 주차를 한다면 동의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건축심의를 통과한 교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설계한 정 박사님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르게 설계를 하면 본당 좌석 수가 지금처럼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이분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습니다. 놀라고 흥분해서 전화를 했습니다. 법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건축심의에 15인이 들어오던 것이 5인으로 줄었답니다. 그리고 그 5인은 전문가들로만 구성되어 법적 하자가 있는 지와 건축 구조와 안전상 하자가 있는지 여부만 심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바뀐 법으로 심의하는 첫 케이스가 바로 우리교회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전화를 받고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기도에 응답하실 줄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건축 과정에 펼치신 깜짝 이벤트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답답한 상황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주님 때문에 놀랄 일들이 더욱 많게 되시기 바랍니다.
2. 기뻤습니다.
10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막달라 마리아가 슬퍼하고 있던 주님의 제자들에게로 달려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는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마 28:8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 할새” 이 세여인이 너무 기뻐서 제자들에게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쁜 소식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 땅에서 맛볼 수 없는 큰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부활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정말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삶 속에 찾아오셔서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십니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큰 슬픔을 다 털어내게 하시고 정말 큰 기쁨이 되게 해 주십니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여사가 쓴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와 언니 벳시(Betsy)가 라벤스부르크(Ravensbruck)라는 나치의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그들이 거쳐 간 수용소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수용하였는가 하면 사방에 이가 득실거렸습니다.
그곳에 들어간 첫날, 그들은 늘 그랬듯이, 몰래 숨겨 간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날 읽은 말씀이 살전 5:16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언니 벳시는 그 말씀대로 새로운 환경의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코리는 한 마디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이들이 득실거리는 환경에 대해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언니의 고집에 못 이겨 마침내는 그것에 대해서도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들이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는데 간수들이 들여다보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 없이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하도 환경이 열악하고 이가 득실거리니까 간수들이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열악한 환경이 오히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영적 환경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저들이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기쁨을 누리며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슬픔의 장소 그 깊은 곳에서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숨겨진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주님 주시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3. 새 희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오늘 본문의 세여인은 주님의 무덤을 찾을 때 깊은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막달라 마리아는 더욱 깊은 절망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서쪽 막달라 사람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일곱 귀신에 시달리다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망가진 인생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셔서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고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가장 갚진 향유 옥합을 깨고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나 따랐습니다. 심지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현장까지 따랐습니다. 게다가 향품을 가지고 주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주님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주님이 졸지에 자기 곁을 떠나신 것입니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으니 다시는 그 주님을 뵈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 누구를 의지하고 살며, 무엇을 위해 살지 알 수 없게 됐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이 막달라 마리아를 엄습해 왔습니다.
그러던 그녀에게 천사가 소리쳤습니다. “그가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이 소리는 그녀에게 정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라진 희망이 다시 온몸에 전율을 일으키며 온 몸을 감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다 끝났다고 절망할 때 찾아오셔서 희망의 밧줄을 던져주십니다. 아직 끝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길이 있고 어쩌면 이제 시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있더라도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소식을 듣고 희망을 찾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소식을 전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전했던 것입니다.
저는 지난 일본의 쓰나미 피해 때 있었던 뒷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피난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중년 신사가 집도 잃고 삶의 터전도 다 잃어버려서 긴 한숨을 쉬며 “이제는 어쩐다!”하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곁에 있던 고등학생 쯤 된 학생이 이 신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우리들이 어른이 되면 다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께요!” 그러면서 이 신사의 손을 잡더랍니다. 세상물정 모를 것 같고 자기 것만 챙길 것 같은 한 청소년이 아직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었고, 또 그 희망을 나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에 절망의 한숨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살기가 너무 힘이 든다고 한숨입니다.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한숨입니다. 온통 절망적인 이야기들뿐입니다.
너무 속이 상한 것은 총선에 출마했다는 사람들의 행태입니다.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더 절망을 느끼게 만듭니다. 당리당략과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갈등과 분열을 조장합니다. 서로 다투고 헐뜯고 싸우는 모습에 짜증이 납니다. 도저히 국회의원감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출마하여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이런 상황 속에도 여전히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 안에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희망을 나누어야 합니다.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부활 소식을 전하며 희망을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가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천사가 말한 대로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소식은 정말 놀라운 소식입니다. 우리가 감격하며 부활하신 주님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은 정말 기쁨의 소식입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변하게 해 주는 소식입니다. 나아가 이 소식은 새 희망을 주는 소식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얻게 해 주는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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