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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눈물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눅 7:11~15)
Ⅰ. 본문해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기억이 일생동안 지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이런 불행한 일을 당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더욱이 그녀는 과부였고 그녀의 아들은 어린 아이가 아니라 어엿한 청년으로 다 자란 아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과부의 마음에 밀려오는 슬픔은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동정심을 가지고 뒤를 좇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Ⅱ. 어머니의 눈물
그런데 이 기사 속에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이 대사로 기록돼있지 않습니다. 단지 어머니의 눈물만이 적혀있을 뿐입니다. 이 기록을 통해 볼 때 우리는 이 여인의 마음을 두 가지로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A. 비참함
여인에게는 아들의 장례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고 무엇을 의지하고 지내야할지, 외로움 속에서 스스로의 인생을 지탱할 수 있을지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할 수 있는 일은 눈물과 통곡뿐이었습니다. 그 눈물과 통곡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자식을 보낸 어머니의 비참한 마음이 자식의 사랑에 대한 기억과 함께 눈물이 되어 어머니의 뺨에 흘러내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식을 주신 것은 번성과 생육 때문만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실로 원대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아이들이 주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참된 신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에 한 지체가 되고, 이를 통해 당신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 어머니에게 신앙이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머니의 마음속에 있는 자식을 향한 절절한 사랑이었습니다. 어머니의 통곡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혼을 해도 자기사랑을 끝까지 놓지 않고 서로 자식을 키우기를 미루는 요즘 세태와는 정반대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죽은 아들을 향한 어미의 사랑이 이 자식을 위해 애달프게 눈물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회심하지 못하고 죽어있는 우리의 자녀들은 단 한번이라도 부모의 눈물의 기도를 들어봤는지 묻고 싶습니다. 육신은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장사지낸바 된 죽어 있는 자식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떠올려보십시오. 경우에 따라서는 모두 장성해서 더 이상 돌볼 여지도 없는 자식도 있습니다.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함으로써 자식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자식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을 보이고 어떻게 하든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때로는 가혹하리만치 힘든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자식이 기억하는 많은 상처와 부모의 불신앙의 부패함이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을 힘들게 합니다. 하지만 자녀가 회심치 않는 것은 자녀들의 강퍅한 마음 때문이 아니라 부모에게 통곡과 눈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죽어도 이 세상에 남아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B. 절망
이 여인은 또한 아무런 기적이나 변화의 가능성도 생각할 수 없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저 자식을 먼저 보냈다는 사실에 통곡하며 장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남편을 여의고 외롭게 살면서도 자식은 이 여자에게 단 하나의 위로였습니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그녀의 소망이고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식에게도 아무런 소망이 없거니와 자신에게도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가슴에 있는 수많은 슬픔은 오직 눈물로 털어 놓을 뿐이었고 많은 이들의 위로도 진정한 위안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음을 깨닫게 만든 놀라운 구원의 경험을 주셨음에도 자식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이 굳어져 있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의 영혼을 위해 염려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다른 이들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식을 위한 눈물의 기도가 없다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떠난 것입니다.
또 어떤 부모들은 자녀가 회심하였으니 다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이 하늘나라에 가는 순례자의 여정이라면 자녀의 회심은 홍해를 건넌 광야 길의 시작입니다. 이제는 자식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지 진리 안에 자라나고 있는지 양육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자녀들이 성인이 될 때쯤이면 참된 복음의 신앙은 듣기 힘들고 세속주의나 차가운 이성에 호소하는 형식적인 신앙에 물결이 휩쓸 것입니다. 우리 자식들을 붙들어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복음과 성령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큰 사랑, 주권적인 능력만이 어두워진 영혼에 진리의 빛을 비추고, 잠들어 있는 영혼을 깨우며, 식어져 있는 가슴 속에 뜨거운 불을 지필 수 있습니다. 많은 영예를 누리고 재화를 얻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하나님 앞에서 좋은 신자가 되고 진실한 믿음으로 자식들을 키워내면 인간으로서 거의 모든 일은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에서 목회자의 마음으로 자식들을 키워야 합니다.
Ⅲ. 죽은 자를 살리심
우리는 말씀을 통해 여자가 슬피 울며 힘없이 장례를 따라가고 있었을 때 행렬을 멈추시고 아들을 살려주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A. 자비로써
그리고 이렇게 살려주시는 주님의 큰 역사는 자비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인이 자식을 살려달라고 간구하는 일도 나오지 않고 죽은 자식을 살릴만한 큰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눈물로 행렬을 따라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마도 여인에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을 향한 전심으로 의존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부터 통곡하는 여자의 불쌍한 처지를 보시고 자비로써 여자의 아들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 여인이 주님의 자비심을 움직였다면 주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신자가 주님께 절대적으로 의지하면서 눈물 흘리며 자녀를 위해 기도하면 어찌 기도를 거절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참된 회개를 하기 원하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교회에서 아이들을 잘못 가르치고 아이들의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에 자녀들이 회심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접고 자식을 위해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이 여인의 처절한 몸부림에 절반만이라도 했다면 아이들이 주님을 훨씬 더 빨리 만났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자식들을 위해 울었다면 교회는 놀랍도록 정결해질 것입니다.
B. 능력으로써
여인의 아들이 살아난 것은 사람의 재능이나 과학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함이었습니다. 성경은 한 쪽에는 죽음의 행렬이 한 쪽에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뒤 따르는 행렬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행렬 앞에서 더 이상 장례가 진행되지 않도록 멈추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여인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울지 말라고 하시면서 청년을 살려주셨습니다. 그 때 청년은 죽어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기도할 수 없었지만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스스로 기도할 수 없는 자식을 위해 부여받은 기도의 의무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이 온전한 신앙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도록 과부처럼 울어야 합니다.
C. 이제는 복음으로써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음성으로써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복음으로써 이 일들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선 우리 아이들이 참 된 진리가 선포되는 자리에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낙심하지 말고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은 자식들이 분가를 해서 회심여부에 대해 자유롭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가 회심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 앞에 씻을 수 없는 잘못입니다. 지금이라도 눈물로 기도해야합니다. 참으로 자신이 주님 만나게 해주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근심하며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자식을 낳고 바로 그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자녀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Ⅳ. 결론
결론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만약 우리에게 자녀를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며 흘릴 눈물이 없다면 그런 병든 우리의 영혼을 보며 더 많이 울어야 합니다.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 더 이상 때를 지체하지 마시고 자녀들이 참된 회심에 이르러 주님을 위해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전심으로 기도할 때 부모의 기도는 주님께 응답될 것이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눅 7:11~15)
Ⅰ. 본문해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기억이 일생동안 지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이런 불행한 일을 당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더욱이 그녀는 과부였고 그녀의 아들은 어린 아이가 아니라 어엿한 청년으로 다 자란 아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과부의 마음에 밀려오는 슬픔은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동정심을 가지고 뒤를 좇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Ⅱ. 어머니의 눈물
그런데 이 기사 속에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이 대사로 기록돼있지 않습니다. 단지 어머니의 눈물만이 적혀있을 뿐입니다. 이 기록을 통해 볼 때 우리는 이 여인의 마음을 두 가지로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A. 비참함
여인에게는 아들의 장례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고 무엇을 의지하고 지내야할지, 외로움 속에서 스스로의 인생을 지탱할 수 있을지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할 수 있는 일은 눈물과 통곡뿐이었습니다. 그 눈물과 통곡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자식을 보낸 어머니의 비참한 마음이 자식의 사랑에 대한 기억과 함께 눈물이 되어 어머니의 뺨에 흘러내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식을 주신 것은 번성과 생육 때문만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실로 원대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아이들이 주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참된 신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에 한 지체가 되고, 이를 통해 당신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 어머니에게 신앙이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머니의 마음속에 있는 자식을 향한 절절한 사랑이었습니다. 어머니의 통곡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혼을 해도 자기사랑을 끝까지 놓지 않고 서로 자식을 키우기를 미루는 요즘 세태와는 정반대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죽은 아들을 향한 어미의 사랑이 이 자식을 위해 애달프게 눈물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회심하지 못하고 죽어있는 우리의 자녀들은 단 한번이라도 부모의 눈물의 기도를 들어봤는지 묻고 싶습니다. 육신은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장사지낸바 된 죽어 있는 자식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떠올려보십시오. 경우에 따라서는 모두 장성해서 더 이상 돌볼 여지도 없는 자식도 있습니다.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함으로써 자식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자식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을 보이고 어떻게 하든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때로는 가혹하리만치 힘든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자식이 기억하는 많은 상처와 부모의 불신앙의 부패함이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을 힘들게 합니다. 하지만 자녀가 회심치 않는 것은 자녀들의 강퍅한 마음 때문이 아니라 부모에게 통곡과 눈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죽어도 이 세상에 남아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B. 절망
이 여인은 또한 아무런 기적이나 변화의 가능성도 생각할 수 없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저 자식을 먼저 보냈다는 사실에 통곡하며 장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남편을 여의고 외롭게 살면서도 자식은 이 여자에게 단 하나의 위로였습니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그녀의 소망이고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식에게도 아무런 소망이 없거니와 자신에게도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가슴에 있는 수많은 슬픔은 오직 눈물로 털어 놓을 뿐이었고 많은 이들의 위로도 진정한 위안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음을 깨닫게 만든 놀라운 구원의 경험을 주셨음에도 자식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이 굳어져 있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의 영혼을 위해 염려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다른 이들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식을 위한 눈물의 기도가 없다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떠난 것입니다.
또 어떤 부모들은 자녀가 회심하였으니 다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이 하늘나라에 가는 순례자의 여정이라면 자녀의 회심은 홍해를 건넌 광야 길의 시작입니다. 이제는 자식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지 진리 안에 자라나고 있는지 양육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자녀들이 성인이 될 때쯤이면 참된 복음의 신앙은 듣기 힘들고 세속주의나 차가운 이성에 호소하는 형식적인 신앙에 물결이 휩쓸 것입니다. 우리 자식들을 붙들어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복음과 성령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큰 사랑, 주권적인 능력만이 어두워진 영혼에 진리의 빛을 비추고, 잠들어 있는 영혼을 깨우며, 식어져 있는 가슴 속에 뜨거운 불을 지필 수 있습니다. 많은 영예를 누리고 재화를 얻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하나님 앞에서 좋은 신자가 되고 진실한 믿음으로 자식들을 키워내면 인간으로서 거의 모든 일은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에서 목회자의 마음으로 자식들을 키워야 합니다.
Ⅲ. 죽은 자를 살리심
우리는 말씀을 통해 여자가 슬피 울며 힘없이 장례를 따라가고 있었을 때 행렬을 멈추시고 아들을 살려주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A. 자비로써
그리고 이렇게 살려주시는 주님의 큰 역사는 자비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인이 자식을 살려달라고 간구하는 일도 나오지 않고 죽은 자식을 살릴만한 큰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눈물로 행렬을 따라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마도 여인에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을 향한 전심으로 의존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부터 통곡하는 여자의 불쌍한 처지를 보시고 자비로써 여자의 아들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 여인이 주님의 자비심을 움직였다면 주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신자가 주님께 절대적으로 의지하면서 눈물 흘리며 자녀를 위해 기도하면 어찌 기도를 거절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참된 회개를 하기 원하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교회에서 아이들을 잘못 가르치고 아이들의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에 자녀들이 회심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접고 자식을 위해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이 여인의 처절한 몸부림에 절반만이라도 했다면 아이들이 주님을 훨씬 더 빨리 만났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자식들을 위해 울었다면 교회는 놀랍도록 정결해질 것입니다.
B. 능력으로써
여인의 아들이 살아난 것은 사람의 재능이나 과학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함이었습니다. 성경은 한 쪽에는 죽음의 행렬이 한 쪽에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뒤 따르는 행렬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행렬 앞에서 더 이상 장례가 진행되지 않도록 멈추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여인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울지 말라고 하시면서 청년을 살려주셨습니다. 그 때 청년은 죽어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기도할 수 없었지만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스스로 기도할 수 없는 자식을 위해 부여받은 기도의 의무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이 온전한 신앙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도록 과부처럼 울어야 합니다.
C. 이제는 복음으로써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음성으로써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복음으로써 이 일들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선 우리 아이들이 참 된 진리가 선포되는 자리에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낙심하지 말고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은 자식들이 분가를 해서 회심여부에 대해 자유롭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가 회심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 앞에 씻을 수 없는 잘못입니다. 지금이라도 눈물로 기도해야합니다. 참으로 자신이 주님 만나게 해주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근심하며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자식을 낳고 바로 그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자녀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Ⅳ. 결론
결론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만약 우리에게 자녀를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며 흘릴 눈물이 없다면 그런 병든 우리의 영혼을 보며 더 많이 울어야 합니다.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 더 이상 때를 지체하지 마시고 자녀들이 참된 회심에 이르러 주님을 위해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전심으로 기도할 때 부모의 기도는 주님께 응답될 것이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출처 : 숲길을 따라 영성이 머무는 동산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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