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가기 |
하나님의 기대
마25:21~30
옥수수의 대가 김순권(金順權) 박사는 가난한 농촌에서 자랐습니다. 너무도 가난하여 미래가 암담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교회에 나가 예수를 믿은 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옥수수 씨앗만으로도 가난한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그는 믿고 옥수수와 함께 잠자고, 날 옥수수로 허기를 때우고, 꿈속에서도 옥수수를 만나는 옥수수에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좋은 옥수수 품종 개발에 성공하자,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옥수수를 잡아먹는 악마의 풀을 이겨내는 신품종을 개발하여 그 곳 국민들에게 '위대한 뜻을 이룬 사람' 이라는 마이에군과 자군몰루라는 명예 추장에 추대되었습니다. 지금 김 박사의 마음은 북한동포에게 가 있습니다. 북한에서 가장 많이 심는 농작물이 옥수수인데, 슈퍼 옥수수가 탄생하여 북한 동포들이 배불리 먹을 때 남북이 하나 되리라 믿으며 북한식량을 위해 옥수수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를 가집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친구에게, 형제에게 기대를 가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를 가지고 계심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각자에게 달란트를 주시고 그 가능성에 맞추어 기대하십니다.
한 해동안 얼마나 성공하였습니까? 얼마나 벌었습니까? 얼마나 출세했습니까? 얼마나 배웠습니까? 이러한 것들이 성공입니까? 아닙니다. 성공의 판단 기준은 목적입니다. 얼마나 목적을 향하여 살았는지, 목적에 합당한 일을 했는지,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났는지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즉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얼마나 기쁨을 얻었는지? 나로 인해서 내 가정이 얼마나 행복해졌는지? 나라는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유익한 존재로, 덕을 끼치는 존재로 성숙했는가 물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남편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나로 인해 아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나로 인해 자녀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나로 인해 교회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나로 인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했으며 그들이 복되다 말하게 되었는지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최선이라는 허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했다(I did my best)'는 말을 양심 앞에서, 또 하나님 앞에서 물어야 합니다. 최선인 줄 알았지만 되돌려 생각해보니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진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기대를 가지고 한 해의 달란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한해동안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오셨습니까? 하나님의 기대에 맞는 일을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는 무엇입니까? 본문에 그 하나님의 기대가 나타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는,
첫째로 게으른 종이 아니라 부지런한 종
피어슨(Arthur T. Pierson)박사가 즐겨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분이 은퇴하여 농촌에 들어가 처음으로 젖소를 사서 기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를 산지 얼마 안되어 소의 젖이 마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웃 농부에게 어쩐 일인지 물어 보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농부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당신의 젖소가 젖이 마른 것은 젖을 다 짜주지 않았기 때문이요." 젖소는 젖을 최대한도로 짜내야 계속 더 많은 신선한 젖을 생산하는 법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자기가 필요 한만큼만 젖을 짰습니다. 한 병이 필요하면 한 병만큼만, 우유생각이 나지 않는 날은 아예 젖을 짜지 않았습니다. 짤 수 있는데 짜지 않은 것이 젖을 마르게 하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다 짜야 합니다. 충성 할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충성해야 합니다. 쓸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사용해야 합니다. 건강과 물질, 능력은 쓰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안 쓰면 나중까지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본문 26절입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기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충성의 반대는 반역이 아니라 게으름입니다. 여기에 주님의 관점이 있습니다. 종말시대에 삼가야 할 태도는 게으름입니다. 김남준 목사는 '거룩한 삶의 은밀한 대적 게으름' 이란 저서에서 "비전의 사람, 사명의 사람들에게 이 땅의 삶이 유한하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짧다. 시간을 선용하는 것이 충성이다. 그러므로 게으름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성향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불충성이요, 맞서 싸워야 할 내 속의 악이다. 게으름은 충성하기 위해 제거되어야 할 대표적 악" 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맞서 싸워야 할 대적 중 하나가 바로 게으름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을 비판하기에 바빴습니다. 감사엔 게으르고 불평하기에 바빴습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에 바빴습니다. 열등감을 드러내기에 바빴습니다. 엉뚱한 일에 바쁜 것이 게으름입니다. 자기 일에 바빠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이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을 포기하지 아니하면 영적 거인이 될 수 없습니다. 16절에 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달란트를 받고 바로 가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17절에도 두 달란트 받은 종 역시 그같이 했다고 증거합니다. 즉 불충성한 종은 게을렀고 충성한 종들은 부지런했습니다. 묻어두고 있다면 이미 게으른 종입니다. 사용하였다면 부지런한 종입니다. 하나님은 게으른 종이 아닌 부지런한 종으로의 기대를 우리에게 가지고 계십니다.
둘째로 악한 종이 아니라 착한 종
컴퓨터 황제 빌 게이츠(Bill Gates)나 CNN방송 설립자 테드 터너(Ted Turner)는 갑부입니다. 빌 게이츠는 소아마비 퇴치기금으로 6백억원을 세계보건기구에 쾌척했으며, 테드 터너는 유엔에 매년 1조2천억원씩 기부금을 내고 있습니다. 본래 자선에 관심이 없던 빌 게이츠에게 구제의 기쁨을 가르쳐준 사람이 터너였다고 합니다. 3년전 터너는 사업에만 몰입하던 게이츠를 향해 충고를 던졌습니다. "많은 돈을 은행에 예금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다. 그 돈으로 남을 돕는다면 인생이 훨씬 풍요로워 질텐데." 빌 게이츠는 이 말에 감동을 받아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돈도 중요하고 명예도 중요하고 지식도 건강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를 위해 쓰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좋은 머리로 무기를 만들어 인류를 죽인다면 그 재능은 필요 없는 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여기의 '착하고' 는 '선하다, 유능하다' 는 뜻입니다. 잘했다는 칭찬은 이익을 남겼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이 주신 능력인 달란트를 가지고 순종하는 자세가 좋았다는 의미입니다. 주인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일한 것이 잘했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을 향하여 '착한 종' 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자는 '악한 종' 이라 했습니다. 주인의 의도를 알고 주인이 원하는 대로하면 선한 것이고 주인의 의도대로 하지 않으면 선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는 명예, 돈, 기능, 맡은 직분들입니다. 달란트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사용했을 때 선한 일에 쓰임 받는 착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착한 종은 내 뜻과 의도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맡겨주신 주인의 뜻대로 일하는 종입니다. 악한 일은 주인의 뜻을 무시하고 내 뜻대로 행하였던 모든 일을 뜻합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한 악한 종은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셋째로 불충한 종이 아니라 충성된 종
주인이 두 하인을 불러놓고 말합니다. "오늘이 섣달 그믐날이네. 약속한 대로 자네들은 내일부터 자유의 몸일세.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네. 오늘밤 이 짚으로 새끼를 좀 꼬아 주게. 될 수 있으면 가늘면서 길고 질기게 말일세. 아마 이 일이 우리 집에서 마지막 일이 될 걸세." 주인이 들어가자 한 하인은 섣달 그믐날 마지막까지 일을 시킨다며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자 다른 하인이 부지런히 새끼를 꼬며 그를 나무랐습니다. "여보게, 불평을 하지 말게. 세상에 우리 주인 같은 분이 또 어디에 있나. 게다가 내일부터 자유의 몸이 되도록 해주셨으니, 주인이 마지막으로 시키는 일을 잘 해 드림세." 그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가늘고 질긴 기다란 새끼를 꼬았습니다. 그러나 불평이 많은 하인은 대충 굵고 짧게 새끼를 꼬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주인은 두 하인을 불러 놓고 작별 인사를 나누며 말했습니다. "여러 해동안 내 집에서 고생들 많았네. 자네들이 열심히 일해 준 덕에 우리 집 살림살이가 많이 늘었네. 자네들을 그냥 보내기 섭섭하여 선물을 주려고 하네. 어젯밤에 꼰 새끼를 가져오게나. 그리고 광 문을 열고 엽전을 새끼에 꿸 수 있는 대로 잔뜩 꿰어 가져가게. 그 돈으로 잘 살기 바라네." 불평 많은 하인의 새끼는 너무 굵어 엽전이 꿰어지지 않았으며, 너무 짧아 많이 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늘고 길게 새끼를 꼰 종은 충성스럽게 한만큼 많은 엽전을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본문 23절입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한자어 충(忠)은 가운데 중(中)에 마음 심(心)입니다. 즉 중심을 바로 잡는 다는 뜻입니다. 주인이 없을 때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은 주인이 없을 때 성실하지 못하며 맡겨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은 사람이 충성된 사람입니다. 처음이나 나중이나 변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잘 될 때나 못될 때나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주인에게 기쁨을 주는 충성된 종입니다. 그러므로 '충성되다' 는 말은 신실성을 나타냅니다. 맡은 바 사명에 충실한 종에 대한 극찬이 바로 충성된 종입니다. 주인은 떠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할 때 충성된 종이 되는 것입니다.
한 해동안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 즉 건강, 지혜, 물질, 재능을 사용치 아니하고 그대로 묻어 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내 뜻대로 내 중심으로 일을 해온 것이 아닙니까? 이제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종의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대를 깨닫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주어지는 새해 달란트 앞에 결단해야 합니다. 게으른 종이 아니라 부지런한 종이 되겠다고. 악한 종이 아니라 착한 종이 되겠다고. 불충한 종이 아니라 충성된 종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새해에는 하나님의 기대를 이루어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9-12-26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적의 주인공으로 삽시다! (눅 5:1-11) (0) | 2022.04.03 |
---|---|
버리고 갈 것과 새롭게 취할 것이 있습니다! (엡 4:22-32) (0) | 2022.04.03 |
마지막까지 /마20:6-10 (0) | 2022.04.03 |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 /마12:46-50 (0) | 2022.04.03 |
네 연세가 얼마뇨? (0) | 2022.04.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