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웰빙의 삶
행 10:1-8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하여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기
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여러분은 “웰빙”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요즘 부쩍 웰빙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well being 이라는 말은 “잘 사는 것”, “잘 사는 삶”, “뜻있고 행복을 이루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쩍 삶의 질을 높이자, 삶을 누리자, 삶을 즐기자 라는 풍조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민족의 삶의 형태는 일하고 돈을 모으는데 주력해 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일 잘하기로 알아주는 민족입니다. 유대인들이 지독하다고 말했는데 한국인은 더 지독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미국에 이민간 분들이 직장에서 일하고 퇴근할 때는 일거리를 한 아름 가지고 집에 와서 밤새 일하고 아침에 출근하는 민족이 우리민족입니다. 우리민족은 이렇게 지독한 면이 있는 민족입니다. 그렇게 일하고 수고해서 오늘 이 나라가 이정도 살게 되었고 국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동안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기는 했는데 막상 돈을 모으고 보니까 그 돈을 사용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죽도록 일만 했지 삶을 누리고 향유하는 방법은 몰랐습니다. 그저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으면 되는 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다가 이제 와서 사람들이 사람이 사는 것이 그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만하고 돈만 벌로 모으다 보니까 미처 모르던 삶의 뜻을 알게 되었고 이렇게 사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오늘에 와서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좋은 깨달음입니다.
사람은 삶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삶을 향유하고 고상하게 즐기고 누리고 즐겁게 꾸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원하신 것은 그렇게 일만하고 모으고 움켜쥐고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행복하고 뜻을 찾아가며 살아가는 삶을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웰빙”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새삼스럽게 사람들이 웰빙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웰빙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오늘 웰빙을 발견한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인데 요즘 사람들이 웰빙의 삶의 내용을 생각해 낸 것을 보면 참 한심합니다. 요즘 주 5일 근무제가 실시되면서 시간이 생기고 여유가 주어지니까 사람들이 고안해 낸 사람이 잘 사는 방법을 보면 이런 것입니다. 산속에 집을 짓고, 별장을 짓고, 주말에는 그곳으로 놀러가고, 먹을거리를 고를 때는 농약치지 않은 유기농작물을 골라 먹고, 수입 물품은 먹지 말고 순 우리 것을 골라 먹고, 여유와 휴식을 누리는 삶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사람들이 찾아낸 웰빙의 내용입니다.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고작 발견해 낸 웰빙의 삶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여가를 즐기고 삶을 향유하고 누리는 가장 좋은 모범을 이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합니다. 보여주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고작 생각해 낸 것이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어야 할 진정한 웰빙의 삶의 행복함, 즐김, 향유, 누리는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공해 야채나 사다 먹고 산속에 집을 지어놓고 주말에 놀러나 가고 불가마에 가서 늘어지게 잠이나 자는 것이 아니고 진정 우리 그리스도인은 또 다른 차원의 삶에서 얻어지는 이 웰빙의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 보면 이 웰빙의 삶을 아주 잘 이루며 살았던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고넬료입니다. 그는 로마 군인이고 주둔군 장교이고 관리자 입니다. 지배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짤막하게 그의 삶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정말 웰빙의 내용을 다 포함하고 있는 진실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또 3절을 보면 “하루는 제 구시쯤에 기도하는데 환상 중에 천사가 나타나 고넬료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고넬료가 두려워하여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으니 천사가 대답하기를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정도면 진정 웰빙의 삶입니다. 이것이 웰빙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웰빙의 삶을 살려면 몇 가지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삶의 의미를 내 집에서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고넬료는 “온 집으로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온집”이라는 말은 내 가족, 종, 노예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넬료에게는 가족 말고도 노예도, 종도, 부하들도 있었습니다. 그 모두가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 정도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있습니까.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야 할 웰빙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넬료는 이방사람인데도 벌써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이 세상의 가장 좋은 웰빙은 내 집에서 찾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점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행복함, 즐거움, 재미하면 자꾸만 어디를 가야만 얻어지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내 집이 삭막해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혼하면 수십 가지 불편한 점이 따릅니다. 그런데 왜 결혼을 하느냐 하면 결혼을 안 하면 결혼해서 얻는 기쁨조차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가정이 없는 사람은 가정에서 주어지는 가정의 소중함이나 즐거움 그리고 행복함을 모릅니다. 결혼 안한 사람은 결혼해서 주어지는 행복함이나 즐거움을 모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으면 기쁨 보다는 수고가 더 많습니다. 아이를 낳아 걸을 때까지 수고가 얼마입니까. 아이가 걷기 시작하면 늘 보초를 서야 합니다. 아이가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또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서 고등학교를 졸업 때까지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래야 아이가 학교에서 일등을 하고 대학에 갈 수 있습니다. 또 대학교 보내면 끝납니까. 결혼할 때까지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 때가 되면 엄마를 무시합니다. 말을 듣지 않습니다. 결혼할 때 엉뚱한 아이를 데리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우깁니다. 한바탕 전쟁을 치루고 겨우 결혼을 시켜놓으니까 그 다음에는 사네 안사네 하고 싸웁니다. 싸우면서도 애는 낳아 놓습니다. 그러면 그 손자를 키워주어야 합니다. 얼핏 보면 그런 불행을 왜 자초하느냐 하고 말하는데 그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정신이 병들은 정신입니다.
그 삶에서 삶의 뜻이나 의미나 깊음이 다 들어있다는 점을 모르면 인생에서 얻어지는 진정한 기쁨이나 행복이나 즐거움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삶은 인간이 수십 세기 동안 이어온 사명의 삶입니다. 그 삶에서 진정한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비로소 웰빙의 삶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웰빙은 가정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고넬료는 가정부터 웰빙의 천국으로 가꾸고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 하나는 “자족하는 웰빙”이어야 합니다.
이 자족함의 삶이 참 좋은 삶의 요소입니다. 고넬료는 성경을 보면 “그는 경건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경건“이라는 말은 헬라말로 ”유세베스“라는 말인데 그 뜻은 당시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했을 때 사람들이 지니는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금욕주의에 버금가는 무욕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고넬료는 로마군인인데도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이나 즐거움이나 누림은 자족하는 마음에서 얻어집니다. 어느 것에서도 자족하게 되면 행복해지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자족은 80평 아파트에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큰 아파트를 가지면 더 큰 아파트를 소유하고 싶은 맘몬 우상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20평 아파트에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 최고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거기에서 삶의 질이 나오고 행복의 강도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웰빙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불행하게도 자족의 지혜가 없는 시대입니다. 탄산음료를 마시면 갈증이 더 심해지듯이 사람들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마음의 갈증은 강해집니다. 가지면 더 갖고 싶고 누리면 더 누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의 바다는 끝이 없습니다.
지금 새 아파트가 나오면서 삶의 방식이 편리해지도록 자꾸만 노력하는데 이러다 마침내는 모든 전자기기들을 다 떼어내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삶의 방식을 더 편리하도록 자꾸만 연구합니다. 그래서 밖에서 핸드폰 하나 가지고 불도 때고 끄고 문도 잠그고 열고 커튼도 열고 닫고 가스 불도 켰다 껐다 그렇습니다. 삶의 방식이 이렇게 자꾸만 편리해 지다보면 사람들은 더 움직이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모든 질병들 때문에 시달린 나머지 큰 재앙이 이 땅에 발생할 것입니다. 자동은 때로 큰 재앙을 불러옵니다. 자동화가 멈추어지는 순간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 엄청난 재앙에 직면하게 되는 날이 오고 말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큰 것이나 깨달은 것처럼 이제는 움직이고 살자 하고 모든 자동화를 수동으로 바꾸자 하고 요란 떨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웰빙은 그런 삶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웰빙은 자족하는 마음에서 얻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점을 세상에 알려주어야 합니다. 생각 없이 덩달아 뛰지 말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웰빙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만들고 수고하고 이루고 살아가는 삶에서 얻어집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지정하신 삶의 원리입니다. 고넬료는 경건했다고 했습니다. 근면하고 부지런하고 섬세하고 삶에 뜻이 들어있는 사람을 살았습니다.
세 번째는 “나눔으로 풍성한 삶을 누리는 삶에서” 웰빙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고넬료는 “구제하며 늘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구제가 하늘에 상달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구제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하늘에서 보셨습니다. 그것도 세상에서 나누고 베풀고 기도하는 내 모습이 하늘에서 보시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장 강하고 선하고 효과 있는 웰빙의 삶이 아닙니까.
나눔의 삶은 성경이 태초부터 명령하신 가장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삶의 형태가 나누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하고 내 후손들에게, 학생에게, 젊은이에게, 자녀들에게 이 나눔의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나눔의 삶으로 우리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진 사람의 책임감“이라는 말이고 ”특권층의 솔선수범“이라는 말입니다. 가진 사람은 나눌 때 가장 행복함이 주어지고 즐거움과 기쁨과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배운 사람은 솔선수범하는 삶을 살아갈 때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헌금하고 선교비 내고 봉헌하고 나누고 베풀 때가 가장 성숙한 면모가 나타날 때입니다. 나누는 삶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웰빙을 아는 사람이 나누고 봉헌하고 헌금하고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기업인은 절대로 큰 회사를 만들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회사는 정도껏 키워서 나머지 힘을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회사가 커지고 공적인 단계에 접어들게 되면 사장이 마음대로 번 돈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도껏 키워서 번 돈으로 선교헌금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왜 회사를 하고 돈을 버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선교헌금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일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즐거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웰빙의 삶입니다.
네 번째는 “삶의 정체성을 이룸으로” 웰빙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 고넬료는 신앙생활 하기 참 어려운 여건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선 그는 로마인이고 로마 군인이고 이방인입니다. 조건으로 보아 독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가 참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삶의 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삶의 중심을 이루어 살았습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행복하게 해 주는 삶의 요소였습니다. 그의 삶에는 중심이 있고 철학이 있고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삶이 웰빙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함과 즐거움은 헌신의 삶을 살아갈 때 주어집니다. 내가 사는 이유가 분명해야 행복이 주어집니다.
노아 부부는 타락한 그 시대와 비 타협했습니다. 외롭지만 그것을 감수하면서 고고히 자신의 신앙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는 그 삶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둘이 같은 뜻으로 신앙인생을 이루며 살아갔습니다. 그 삶에서 희생도 주어지고 불안정이라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 부부는 그 삶에서 자신들이 살아야 할 삶의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를 낳아 양육함으로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고뇌가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특수한 삶의 내용임을 그대로 받아들여 충실하게 감당해 냈습니다. 고넬료는 군인이었지만 진정한 신앙을 구현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행한 그의 신앙이 하늘에서도 알아줄 만큼 신앙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모두 힘든 일이지만 그것이 내가 할 일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 일을 마다하지 않고 아주 만족한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삶에 웰빙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웰빙의 삶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참 위대한 발견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이 생각해 낸 웰빙의 내용은 고작해서 주말여행이나 다니고 산속에 집을 지어놓고 주말에 놀러나 가고 농약치지 않은 채소나 골라 먹고 불가마 찜질방이나 가서 늘어지게 잠이나 자는 것을 웰빙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야말로 참 유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한 웰빙은 정신적이고 사회적이고 영적이어야 합니다. 그 내용이 충족되어야 진정한 웰빙이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룬 사람이 유대인도 아니고 사도도 아닌 이방인이요 군인이요 로마인인 고넬료였습니다. 이 고넬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웰빙의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웰빙의 삶은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에서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오늘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생각 없이 살면 철없는 신앙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진정한 웰빙의 삶을 살아갈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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